• 【비표】 興德張氏孝烈碑(흥덕장씨효렬비)
    【비표】 耽津崔公致瑞紀蹟碑(탐진최공치서기적비)


    【위치】 성수면 도통리 631-1. 원도통마을 어귀 외자로변.
    【시기】 1973년
    【형태】 비 주변은 석제 담장으로 둘려 있고,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30cm, 너비 45cm, 두께 20cm.
    【개요】 이 비는 부강문(扶綱門) 내에 흥덕장씨와 아들 최치서 기적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흥덕장씨 효열비(興德張氏孝烈碑)
    【비문】 月浪之鄉 木洞之里 孝烈婦張氏 莊景公 思全後 景祚妻也 太師公吉後 穉和女也 生長深閏 以嬿婉聞及其鳩居 事親極孝 奉夫克敬 愛育前配稚子 而奄作朝露 淚目未乾 隣里稱其賢 年卄三 夫病 垂絶注以指血 啖以股肉 甦延三日 而卒即欲下從夫 昏迷몽語曰 吾死命也 婦人今有身生而保育奉先立後則孝烈得矣只以殉從爲心則不過徑情之行吾何瞑目於隂界乎婦人恪遵遺志飮泣抱痛葬祭踰禮固守召史之節每於夫日悲痛如初終生子致瑞不以恩掩義使之摳衣於勉菴崔先生門篤修學業先生舉義誓死同盟力說熊掌之辨嚮導衛正斥邪之義一生一心飮恨而終鳴呼母以孝烈子以忠義孫以闡先流休範於季世綱常大道華在一家冝乎儒林薦之載錄載誌而余以文拙不得發揚光輝何遂銘曰 法家閨養 天姿端淑 惟孝惟烈 本於天植 夫病贍護 漸至危劇 不心己心 夫戒懇篤 指血無靈 繼以股肉 大命有限 竟至晝哭 大賢門下 命子修業 先生舉義 俾參盟錄 義氣撑空 衛正斥邪 以之報師 以之報國 翼然豎碑 爲世柯則
    檀紀四千三百十六年癸亥應鍾月上日
    晋陽河千秀 謹撰 金海金鍾寬 謹書
    【풀이】 월랑땅 목동마을의 효열부 장씨는 장경공 사전의 후예인 경조의 아내인데 태사공 길의 후손인 치와의 따님이다. 원래 양반 가정의 규수로 마음씨 곱기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출가함에 어버이를 극진히 섬기고 부군을 공경스럽게 받들 뿐 아니라 전실 소생의 어린 자식까지도 사랑으로 정성껏 보살펴 이웃 사람들로부터 어질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나이 스물 셋에 부군께서 병을 앓아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바치고 허벅살을 베어 바치는 등 갖은 정성을 기울여 사흘 동안이나 꺼져가는 목숨을 연장시켰고 돌아가시자 곧바로 그 뒤를 따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군께서 혼미한 중에 부탁하기를 “나의 죽음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 부인은 지금 홀몸이 아니니 딴 뜻을 두지 말고 뱃속의 아이를 낳아 잘 길러 대를 이은 즉 효열을 얻을 것이라, 다만 나를 따라 목숨을 끊을 마음을 먹는다면 이는 곧 사사로운 정에 끌리는 행동일 것이오. 내 어찌 음부에서나마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으리오?” 하였다. 이에 부인은 부군의 유지를 받들어 비통한 마음을 달래며 예로써 장례를 치르고 홀어머니로서의 절개를 굳게 지키고 항상 비통한 마음을 한결같이 두었다. 이처럼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 치서를 엄히 가르치어 장성함에 면암선생의 문하로 보내어 학업에 열중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께서 의병을 일으킴에 공은 죽기를 맹세하고 뜻을 같이 하여 의리를 부르짖고 정의를 위해 앞장서서 싸우며 한 평생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다가 나라 잃은 한을 머금고 이생을 마치었다. 오호라! 어머니는 효열로 살고, 아들은 충의로 살고, 손자는 선영을 드러내는데 힘써 이 말세에 모범이 되고 강상대도가 온 집안에 빛나도다. 이에 유림은 이를 마땅히 여겨 각종 책에 기록한 바 있는데 나는 짧은 글로 이러한 사적을 다 들출 수 없어 몇자 새김을 붙여두노니, 銘曰, 법도있는 집안에서 곱게 자라나 / 품으신 마음 곱고 고왔네 / 이처럼 효열스런 그 마음도 / 타고난 천성일 터라 / 깊어지는 님의 병을 / 정성껏 돌보다가 / 하릴없이 되고보자 / 님의 뒤를 따르려고 마음 두었네 / 손 끊고 살 베어도 / 어찌할 수 없노니 / 인명은 재천인가. / 그만 홀로 되었네 / 크신 스승님께 / 귀한 자식 보냈거니 / 스승님 크신 뜻에 / 목숨 바쳐 뒤 따랐네 / 의로운 기운은 하늘을 뚫고 / 올바른 마음이 가슴 속에 가득하니 / 스승님께 보답하고 / 나라위한 일이었네 / 거룩한 부인의 뜻 길이길이 비에 새겨 / 어지러운 이 세상에 법도를 삼아보세.
    단기 4306(1973)년 계해 10월 상일
    진양 하천수 삼가 짓고, 김해 김종관 삼가 쓰다.

    탐진 최치서 기적비(耽津崔致瑞紀蹟碑)
    【비문】 勉庵崔先生 道學文章 忠孝節義 與日星並耀門多 耽津崔氏其縁由則習齊崔公濟學 勉庵舉義 爲招募迎入 此地 紏合同志 傾産籌備 故自然一門成蹊 耽津崔公 諱致瑞 字泰眞 亦其一也 及夫先生倡義 公與諸友歃血叅 同盟誓死 從先生於矢石 爲義㤀軀 先生被執繫 馬島抗賊 不食倭粟 而歿 公以精神 貫日華夷 見氣節凌霜 天地知之句 痛哭而加麻 一生一心仰慕 虎頭燕頷之風 常誦楚辭 與熊掌章讓彼附倭 知非遷善 臥薪嘗膽 竟至寃逝 崔氏以麗朝大賢 諡莊景 配仁宗廟廷 諱思全 爲始祖 贈戶曺叅判 諱萬成后 德多載 先代狀碣故 略之 公之事親 孝爲國忠 尊師義特出 於天賦之性 鄉省章甫議曰 挽回世途 五儒之責孤忠苦節之可以爲模範 於人者 是爲警俗之金柝 耽津崔公 嘉行徽蹟當闡 而揚之鐫而傳之 仍使其子 龍鉉 璟鉉 齎遺事與諸斯文來 余責其銘噫此豈如 余愚迷者所敢承當者乎 然余嘗欽慕公之歷履銘 諸肝肺且 不得辭諸賢之命 孝子之誠遂拜 銘曰 孝篤行潔 餘事文章 先生舉義 誓心従之 棟樑遽摧 一木難支 仁天下助 萬邦含悲 臥薪嘗膽 遹追先師 公議竣發 豎此穹碑
    歲昭陽大淵獻之上月下絃 慶州金正復謹撰 金海金鍾寬謹書
    【풀이】 면암 최익현선생의 도학문장과 충효절의는 해나 별과 더불어 빛날 것인데 그 문하에는 탐진최씨가 많다. 그 이유인즉 습재 최제학이 면암이 의병을 일으킬 때에 초모장이 되어 선생을 이 땅으로 모시고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가산을 기울여 의병활동을 준비했기 때문이라 자연히 한 집안이 뒤따라 모였던 것이다. 탐진최공 치서의 자는 태진이니 이도 또한 그러한 연유로 모인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면암께서 의병을 일으킴에 공을 비롯한 여러 동지들은 죽기를 맹세하고 뒤를 따라 의를 위해서 한 몸을 버리기로 작정한 바 있었고, 면암께서 대마도로 붙잡혀 가시어 끝내 왜놈의 곡식을 먹지 않으리라고 항거하시다가 돌아가심에 공은 ‘빼어난 애국정신은 해라도 뚫고, 높으신 절의는 서리보다 더 하다’는 추모시를 읊고, 제자의 예를 다하여 장례를 모셨다. 이 같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항상 면암선생의 풍모를 우러러 사모하며 언제나 굴원의 절개와 맹자의 의리를 읊으며 왜놈에 붙은 간사한 무리들이 돌아설 것과 국운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끝까지 지니었다가 마침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원통히 일생을 마쳤다. 최씨는 고려조의 대현 장경공으로 인종묘정에 배향되어 있는 사전을 시조로 하고, 증 호조참판 만성의 후예로 그 빛나는 행적이 선대의 금석에 적혀 내려오기 때문에 약(略)하거니와 공은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스승을 높히 받드는 윤리실천이 천성적으로 남달랐다. 그리하여 고을의 여러 선비들이 의론하기를 ‘세도를 만회하는 것이 우리 유림의 책무라 공의 높은 충절은 가히 타인의 모범되고 또 풍속을 일신하는 데에 좋은 귀감이 될 만하다. 그러하니 탐진최공의 행적을 마땅히 드러내고 금석에 새겨 전함이 옳다.’고 하였다. 이에 공의 아들되는 용현, 경현이 남겨진 사적을 들고 여러 사문들과 함께 나를 찾아와 글을 부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매한 내가 어찌 이같은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한편 내 일찍이 공의 지난 사적을 흠모하여 가슴에 새겨둔 바라 어찌 꼭 사양만 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져 다만 제현의 명과 효자의 성의에 따라 기꺼이 명(銘)하노니, 두터운 효심과 맑은 행실이 근본이요 / 글공부는 다음이라 / 선생의 거의에 / 마음 다해 따랐으나 / 대들보 무너짐에 / 한 나무로 버틸까? / 하늘도 무심하지 / 온누리 울었네 / 나라를 못잊고 / 선생을 못 잊었다니 / 높으신 공의 뜻을 / 이 돌에 새겨두오
    癸亥 시월 하순 경주 김정복 삼가 짓고, 김해 김종관 삼가 쓰다.
  • 【비표】 學生東萊鄭公相黙之配 / 孝烈婦全州李氏紀績碑(학생동래정공상묵지배효열부전주이씨기적비)

    【위치】 성수면 도통리 산127-1임. 지동마을 남쪽 진입로변.
    【시기】 1985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60cm, 너비 55cm, 두께 5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東萊氏鄭은 望重鰈域이라 吏判公後에 曰有耘谷이라 其諱允泳이 有子相黙이라 早襲庭訓에 而孝而學이라 其齋李氏는 全州是籍에 起沅閨養이요 孝寧後績이라 姿性方潔에 具備四德이라 及其笄歸에 行義加勗이라 冀妻敬極에 陳婦孝篤이라 夫順婦恭에 人稱雙璧이라 和氣蕩蕩에 可期景福터니 夫罹貞疾에 長時蟄伏이라 晝宵贍護에 問醫供藥이라 秦緩無靈에 祈斗誠極이라 若歇無常에 漸至危谹이라 垂之指血하고 亦割股肉이라 夫方殊殊에 曰有懇託이 鰥舅在上에 孝事勤慤이요 稚孤在下에 煦嫗殫力하라 孝慈無欠이면 我可瞑目이라 願言夫人은 鄙意莫逆하라 延至三日에 畢竟皐復이라 夫人芳年이 才二十六이라 矢死靡他을 飜意改革이라 忍痛飮泣에 遵夫約束이라 送終如禮에 泄哀盡哭이라 勞身百役에 耘耔紡織이라 入廚上堂에 洞洞屬屬이라 問何食飮하여 問其寒燠이라 志養體養에 竭誠盡職이라 然而無嗣하니 不孝罪積이라 勸置繼室에 舅氏牢却이라 輕重緩急을 裁判胸臆이라 自爲媒婆하야 周旋親戚이라 幸得淑女하야 俾薦枕席이라 同居未幾에 無望生育이라 曰違所志에 歸守全節이라 夫人挽止에 延拕幾日이라 進舅靈丹에 强輔氣血이라 弄璋有慶에 團圝家室이라 其子相埰가 文藝秀發이라 神明感應은 夫人孝烈이라 風雨滔滔에 世無其匹이라 頌聲載路에 薦狀成軸이라 時制異古에 恩典寂寞이라 何必闡揚이 烏頭赤脚이 公議峻發에 礱此貞石이라 吾友柳川에 抄狀正確이라 導遠泰成은 儒林宿德이요 梱泳相濂은 强近親族이라 遠訪不佞하야 銘詞委囑이라 鍾權成勳이 擔當物力하니 兩婿誠意로 亦可感服이라 辭以老恤이 於心孔赫이라 忘拙書此하야 使歸之刻이라 於休徽蹟은 昏衢孤燭이라
    大韓民國六十七年二月小晦 晉陽 河千秀 謹撰 慶州李容伯 謹書
    【풀이】 동래 정씨는 우리나라에서 명망이 중한 집안인데 이판공(吏判公)의 후손에 운곡(耘谷)이 있다. 휘(諱) 윤영(允泳)의 자식이 상묵(相默)이라 일찍부터 가훈을 익혀 효도하고 학문하였다. 처 이(李)씨는 전주인(全州人) 기원(起沅)의 규수요, 효령(孝寧)대군의 후손이라, 자태는 방정하고 성품은 결백하여 4덕(四德)을 갖췄다. 출가한 후 행의에 더욱 힘써 기처(冀妻)처럼 극진히 공경하고, 진부(陳婦)처럼 효성이 지극하므로 지아비는 순종하고 며느리는 공경함에 사람들이 쌍벽이라 칭했다. 화기가 탕탕함에 경복을 기대함직 하였는데, 지아비가 병이 들어 오랫동안 누으니, 밤낮으로 구환하고 의원에 물어 약을 드렸으나 효험이 없었다. 북두칠성에게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했으나, 무상하게도 점점 위독해지니 손가락 피를 먹이고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였다. 지아비가 죽음에 이르러 말하기를 “홀아비된 시아비가 위에 있으니 효도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하오. 어린 아들이 아래에 있으니 힘써 훈육하고 효도와 자애가 무결하면, 나는 편히 눈을 감겠소. 원컨대 부인은 이 뜻을 거스르지 마시오”라고 하며, 사흘이 지나자 결국 숨을 거두었다. 부인 나이 20의 꽃다운 나이로 지아비를 따라 죽기로 맹세했으나, 마음을 고쳐먹고 슬픔을 참고 울음을 삼키며 지아비와의 약속을 지키기로 하고, 장례를 마침에 예절과 슬픔을 다하였다. 온갖 일을 가리지 않고 김매고 베를 짰으며, 부엌에 들거나 시아비를 뵈면 조심하여 어떤 음식을 잡수실지를 묻고, 춥고 더운지를 묻으며 뜻을 거스르지 않고 공양함에 정성과 도리를 다하였다. 그러나 대 이을 자식이 없으니, 불효하고 죄 짓는 일이라 후실을 들이기를 권했는 바, 시아비는 물리쳤으나 경중완급을 스스로 판단하여 스스로 매파가 되어 친척들에게 주선한 바, 다행히 숙녀를 구하여 침소에 들도록 천거하였으나 동거한지 얼마가 지나도 생산을 바랄 수 없었다. 그 숙녀가 이르기를 뜻대로 안 되니 자기 집으로 돌아가련다 하매, 부인이 며칠만 기다리라 하고 시아비에게 영단(靈丹)을 드려 강장(强壯)하고 기혈을 돋우어, 아들을 낳는 경사에 단란한 집안이 되었다. 그 아들 상채(相埰)가 문예에 뛰어나니 신명이 감응함은 부인의 효열 덕분이다. 풍우가 도도함에도 세상에는 그와 견줄만한 짝이 없다. 칭송소리 길에 널렸고, 천장이 성축이라 시대가 예전과 달라 정려를 내리는 은전이 없어졌으나 어찌 정려를 세우는 것만이 천양한다 하리요. 비석을 세우자는 공론이 준발하고, 내 벗 유천(柳川, 송승환[宋升煥]의 호)이 행장을 간추린 것이 정확(正確)하니 안도원(安導遠)과 전태성(全泰成)은 유림(儒林)의 덕망가요, 정곤영(鄭梱泳)과 정상렴(鄭相濂)은 가까운 친족(親族)이라. 재주없는 사람에게 멀리서 찾아와 명문을 맡기고 종권(鍾權)과 성훈(成勳)이 물력(物力)을 담당하며 두 사위 성의가 또한 감복이라,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함도 마음에 불안하여 졸함도 잊고 이 글을 써 돌아가 각하게 하니, 아름다운 자취는 민몰하지 않아 어두운 거리에 등촉과 같으리. 대한민국(大韓民國) 67년 2월 소회(小晦) 진양(晉陽) 하천수(河千秀) 근찬(謹撰), 경주(慶州) 이용백(李容伯) 근서(謹書)
  • 【비표】 孝子兵曹參判天安全公永重之碑(효자병조참판천안전공영중지비)

    【위치】 성수면 도통리 71-4. 음수동마을 안 동쪽.
    【시기】 1926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24cm, 너비 50cm, 두께 12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子夏曰 事父母 能竭其力 雖曰未學 吾必謂之學 今於湖南全孝子 可謂竭力事親 孺慕不已者也 日 鎭安全友道錫 袖全孝子行狀而造余曰 彰善揚美 人之常情 而今湖南人士 將以全孝子事 不可使湮沒 欲勒石圖存 不可無弁文 要請執事 幸賜一則文以侈之 余旣欽其行 難孤此請 謹按來狀 公諱永重 字化順 號淸溪 官至兵曹參判 其先天安人 武節公諱仁亮 浪軒公諱克禮 工議諱繼宗 其十一代以上也 戶曹參判諱萬錫 其考也 以剛毅之性 兼純實之行 家素貧乏 勤儉治産 專事養親 甘旨溫凊 克供志體 以至睦族齊家 百善兼備 每於貧窮 必施救恤 如恐不及 咸稱萊東山中積善家 其父有患 湯藥煎粥 誠靡不到 其妻金寧金氏 承順夫志 事舅姑以誠 侍癠患 嘗糞禱天 遭艱 廬墓泣血 其子振權 擩襲庭訓 以孝友 見重於鄕里 此其全氏世行之萬一 至於奉祀接賓 各積其宜 爲一方之於式 爲傳播之美談 詩云 孝子不匱 永錫爾類 全門之昌大於來世 必拭目而待之 銘曰 純實其性 卓煢其行 積德行仁 名著一方 賢助肖嗣 振振家聲 丹雘載新 百世欽仰 丙寅仲秋
    崇祿大夫禮曹判書原任奎章閣提學 安東金宗漢撰
    【풀이】 자하(子夏, 공자의 제자)가 이르기를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한다면, 비록 배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배운 사람이라고 칭하겠다”라고 하였다. 지금 호남의 전효자(全孝子)는 가위 힘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고 유모(孺慕, 어린이가 부모를 따르듯 함)하여 마지않았다 하겠다. 어느 날 진안의 전우(全友) 도석(道錫)이 전효자의 행장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서 이르기를 “훌륭하고 착한 일을 포양(鷸揚)하는 것은 사람의 상정(常情)입니다. 지금 호남의 인사들은 전효자의 일을 그대로 묻히게 할 수는 없다하여 돌에 새기어 보존하려 하는데, 그러자면 기문(記文)이 없을 수 없으니 청컨대 집사(執事, 상대를 높혀서 호칭한 말)께서는 글 한 장을 주셔서 볼품 있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나는 본래 그 행실을 흠탄해 오던 사람이었기에 청을 저버리기 어려웠다. 삼가 행장을 상고하건대, 공의 휘는 영중(永重)이요, 자는 화순(和順)이며, 호는 청계(淸溪)인데 벼슬은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선대는 천안인(天安人)으로 무절공(武節公) 휘 인량(仁亮)과 낭헌공(浪軒公) 휘 극례(克禮)와 공조 참의 휘 계종(繼宗)은 11대 이상이고, 호조참판 휘 만석(萬錫)이 아버지이다. 공은 강인한 성질과 순실한 행위를 겸하였다. 집안이 본래 가난하였으나 부지런하고 검박하게 살림살이를 꾸려나가 형세를 이루었다. 부모를 섬기는 데에는 뜻을 오롯이 하여 맛있는 음식과 알맞은 거처로 지체(志體)를 잘 공양하였으며, 일가간에 화목하고 집안을 다스림에도 온갖 정성을 다 쏟았고, 곤란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구휼을 베풀되 못 도와서 한이 되는 듯이 하니, 모두가 내동산(萊東山)속의 적선가(積善家)라 칭하였다. 아버지가 병환이 나자 약을 다리고 죽을 끓이고 하여 정성을 빠짐없이 다하였는데, 그의 부인 금녕 김씨(金寧金氏)도 남편의 뜻을 잘 받들어 시부모를 정성스럽게 모셨다. 부모의 병환이 위독하자, 공은 대변의 맛을 보고 하늘에 비는 등 도리를 다하였고, 상을 당하자 여묘(廬墓)하면서 울음으로 3년을 넘겼다. 그의 아들 진권(振權)도 가정의 교훈을 잘 받들어 효우(孝友)로 고장에서 추앙을 받았는데, 이는 전씨 가문이 대대로 행해온 행실의 일면이다. 선영의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접대함에 있어서 두루 지극함을 보이니, 한 고장의 모범이 되어 많은 미담(美談)으로 전파되었다. 시(詩)에 이르기를 “효자는 다함이 없나니 대대로 효자를 점지한다”고 하였으니, 이 후로도 전씨 가문이 반드시 융성할 것이므로 나는 눈을 씻고 기다려 보겠다. 명(銘)하기를 “순실한 성품과 / 드높은 행사로 / 덕을 쌓고 인(仁)을 행하여 / 명성이 한 지방에 드러났다. / 어진 아내 훌륭한 아들에 / 집안의 성화는 자자하구나. / 이에 단청(丹靑)도 새로우니 / 백세토록 흠앙을 받으리로다.” 병인(丙寅, 1926) 중추(仲秋) 숭록대부예조판서원임규장각제학(崇祿大夫禮曹判書原任奎章閣提學) 안동(安東) 김종한(金宗漢)이 찬하다.
  • 【비표】 孝婦貞夫人金寧金氏之碑(효부정부인금녕김씨지비)

    【위치】 성수면 도통리 71-4. 음수동마을 안 동쪽.
    【시기】 1928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24cm, 너비 50cm, 두께 12cm.
    【개요】 위 효자 전영중(全永重)의 처로 비석이 좌우로 나란히 있다.

    【비문】 夫人家之興贊有係於婦人甚綦重聞諸古語而有疑旣而見鎭安郡全家事益信其無疑也 孝烈婦金寧金氏敬順王后敎官溶尙女 天安人孝子兵曹參判全永重妻也 銀紫光祿大夫吏部尙書諱仁亮 戶曹參判諱萬錫夫之世德也 甫齔能知孝順之道 奉幌惟敬惟 女紅婦道 無不設備 鄕里咸稱賢婦人而感而化之者多矣 舅患數年躬檢刀圭 與夫同心祈禱乞代 誠得差效甦延五日 奉夫益勤克進承順之道 晩年家稍饒敎子奉祀一遵古禮 且好施惠每見貧窮必救之恤之頌聲載路 累登儒薦 事載三綱錄及郡誌 噫氏之事蹟只孝烈之爲重備經艱苦 苦心奮勵能使全門昌大於今日由以知天道報施也 不是有 士林之囑叙其事 而爲銘曰 性本仁順 行篤孝烈 勤儉持家 潔貞完節 有子克肖 善繼家聲 煌煌丹雘 赫赫其名
    戊辰十月 上浣
    崇祿大夫禮曹判書原任奎章閣提學 安東金宗漢撰
    【풀이】 효열부(孝烈婦) 금녕 김씨(金寧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후손 교관(敎官) 용상(溶尙)의 여(女)이며, 천안인(天安人) 효자(孝子) 병조참판(兵曹參判) 전영중(全永重)의 처(妻)이다.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 휘(諱) 인량(仁亮), 호조참판(戶曹參判) 휘(諱) 만석(萬錫)은 지아비의 조상들이다. 어려서부터 효순(孝順)의 도리를 행하고, 아녀자의 솜씨를 익혀 향리에서 누구나 현부인감이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사부의 병환 수년 동안 약 수발을 힘써 행하고 지아비와 더불어 자신들의 몸으로 대신해 달라고 기도하니 효험이 있어 5일간을 연명하였다. 지아비를 받들어 열심히 노력하니 만년에는 집안이 넉넉하여지고 아들 교육과 제사를 받드는데 가례가 있었다. 또한 베푸는 것을 좋아하여, 남의 빈궁한 것을 보면 반드시 도와주니 칭송하는 소리가 길에 널렸더라. 여러 번 유림에서 추천이 있었고, 이 일이 삼강록 및 군지에 실려 있다. 희라! 김씨의 효열 사적은 간고한 가운데서 행해졌고, 고심(苦心) 분려(奮勵)하여 전씨 문중을 창성케 하였으니, 천도가 보응한 것이라 하겠다. 사림에서 그 일을 서(敍)해 달라 부탁하니 이에 명하기를 “성품이 본시 인순하여 효열의 행의가 독실하였네. / 근검히 집안을 꾸려오고 처신함이 깨끗하니 / 자식들도 뜻을 받들고 가성을 잘 이어오네. / 정려가 황황(煌煌)하고 그 이름 혁혁(赫赫)하도다.” 무진(戊辰) 10월 상순 숭록대부예조판서원임규장각제학(崇祿大夫禮曹判書原任奎章閣提學) 안동(安東) 김종한(金宗漢)이
  • 【비표】 縣監柳侯遠奎永世不忘碑(현감류후원규영세불망비)

    【위치】 성수면 구신리 산 291-3. 지방도 성백로로 시동마을에서 신기쪽으로 가는 모롱이 길가 산기슭.
    【시기】 1892년 8월
    【형태】 높이 107cm, 너비 43cm, 두께 12cm.
    【개요】 유원규(柳遠奎)는 진안현감으로 1892년 4월에 부임하여 1893년 11월에 보성군수로 전임하였다. 뒷면에는 民之望矣 淸白爲慶 捐滅之戶 蠲護之賦라 각자되어 있다. 풀이하면 ‘백성의 소망은 청백하면 경사로 여기는 일인데 호구세를 부담하는 호수를 줄여주고 조세를 줄여주었다’는 뜻이다.
  • 【위치】 성수면 좌산리 319-3. 중기마을 어귀 가외반로변.
    【시기】 1966년
    【형태】 비 주변은 벽돌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80cm, 너비 50cm, 두께 21cm.
    【개요】 연안송씨는 뒤 김석봉의 모친이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夫人姓宋氏 籍延安 我朝文科禮曹判書諱寶山號退休齋后 泰喆女 瑞興金氏參議諱中坤后 時權妻也 生有淑德 在家事父母孝 適人事舅姑 亦如之 養志無違 菽水盡誠 夫以擧業 早遊京師 因以不返 聲息頓絶 夫人以靑年時節 生離所天 非孀而孀 幼子錫鳳 乳哺無知 家如懸磬 飢寒難堪 而母子相依 固守蓬戶 以傭縫紡織僅僅保命 而舅姑喪 盡其哀 葬與祭 盡其禮 常願夫子之生還 禱山祈水 祝天拜星 爲一生事 其子稍長 亦感於是 事母至孝 順志不咈 光武六年壬寅 全州希堂道會時 全北各郡儒林代表 五十三人 及全州南原鎭安鄕校 儒生 齊聲發文 仰稟于所居地 鎭安郡守題曰 一家孝烈 有是母有是子 爲鄕隣矜式 令人欽歎 襃揚之節 益俟公議事 其後載三綱錄 其孫士文 將立石于村右路邊 以闡揚其祖妣之孝烈事 其族叔眞燮 齎四郡通文 來謀於余 余謹按其蹟而欽歎曰 噫夫人 不以夫不在而孝衰於舅姑 不以貧窮而有二心 抱徹天之恨 而隱忍自重 潔身俟命 傭縫雇績 養老育幼 全平生之大節 保一家之門戶 使幾絶之祀 措之於泰山之安 孝且烈 孰大於是 使婦女子聞之 頑可潔懦可立 大韓民國四十八年 丙午 冬至節 陜川 李英浩 撰
    【풀이】 부인(夫人)의 성은 송씨(宋氏)요 적(籍: 관<貫>)은 연안(延安)이니 아조(我朝)의 문과(文科) 예조판서 휘 보산(寶山) 호 퇴휴재(退休齋)의 후손인 태철(泰喆)의 따님이자 서흥김씨(瑞興金氏) 참의(參議), 휘 중곤(中坤)의 후예인 시권(時權)의 처이다. 낳으면서부터 숙덕(淑德)이 있어 친가(親家)에 있어서는 부모를 효성으로 섬겼고 출가해서는 시부모를 또 똑같이 섬겨 뜻을 받드는 데에 어김이 없었고 음식 공양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부군(夫君)이 과거 공부를 하려고 일찍 서울에 유학(遊學)하다가 그 길로 돌아오지 않고 소식마저 끊겨버렸다. 부인이 젊은 시절에 남편과 생이별을 하였으니 과부아닌 과부였고 어린 아들 석봉(錫鳳)은 젖먹이의 철부지였으며 집안은 가난하여 네 벽만이 서 있고 속은 텅 비어 기한(飢寒)을 견디기 어려웠으나 모자가 서로 의지하여 오막살이를 굳게 지키고 삯바느질과 길쌈으로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시부모의 상에는 슬픔을 다하였고 장사(葬事)와 제사에는 예(禮)를 다하였다. 항상 부군이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산에 빌고 물에 빌며 하늘에 빌고 별에 비는 것으로 일생동안 일을 삼았다. 그 아들도 조금 자라자 여기에 감동하여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뜻을 받들어 어기는 일이 없었다. 광무(光武) 6년 임인(壬寅: 광무 6, 1902)에 전주(全州) 희당(希當)의 도회(道會) 때에 전북 각 군의 유림대표 53인과 전주 남원(南原) 진안의 향교(鄕校) 유생(儒生)이 연명(聯名)으로 발문(發文)하여 소거지의 관장(官長)에게 앙품(仰稟)하니 진안군수가 제사(題辭)하기를 “한 집안이 효열(孝烈)하여 이러한 어머니와 이러한 아들이 있어 고을의 긍식(矜式)이 되었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흠탄(欽歎)하게 하나 포양(褒揚)하는 절차는 공의(公議)를 더 기다려 볼 일” 이라 하였는데 그 뒤에 삼강록(三綱錄)에 실리게 되었다. 그 손자 사문(士文)이 마을 오른쪽 길 가에 돌을 세워 그 할머니의 효열사적을 천양(闡揚)하려고 할 때에 그의 족숙 진섭(眞燮)이 4군(郡)의 통문(通文)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상의하여 나는 조심스레 그 사적을 훑어보고 마음으로 흠탄하였다. 아, 부인은 부군이 없다하여 시부모에게 효성이 덜하지 않았고 집이 가난하다고 하여 두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철천지한을 품고서도 은인 자중하여 자신을 지키면서 천명(天命)을 기다렸고 삯바느질과 길쌈으로 어른 봉양하고 어린이를 길렀다 평생의 대절(大節)을 온전히 하고 한 집안을 보전하여 거의 끊길 번한 종사(宗祀)를 태산(泰山)처럼 안전하게 하였으니 효성과 정열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부녀자들이 들으면 완악한 사람 정숙해지고 나약한 사람 굳세어질 것이다. 대한민국 48년(1966) 병오 동지절 합천 이영호(李英浩) 찬(撰)
  • 【비표】 孝子瑞興金公紀蹟碑(효자서흥김공기적비)

    【위치】 성수면 좌산리 319-3. 중기마을 어귀 가외반로변.
    【시기】 1966년
    【형태】 비 주변은 벽돌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35cm, 너비 46cm, 두께 18cm.
    【개요】 문중에서 연안부 송씨 열녀비와 나란히 건립하였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鎭安士人 瑞興金公諱錫鳳字洛弼 我朝文科參議諱中坤之后時權子 其母夫人 延安宋氏 禮判諱寶山號退休齋後泰喆女也 宋氏 事舅姑至孝 夫以擧業 早年遊京 經歲不返 永無消息 公其時尙乳 家無儲甖 情狀不忍言 而母夫人携幼守屋 以雇舂織紡 僅僅資生 而日望其夫子之生還 禱山祈水 祝天拜星 終身不變 公稍長 有感於是 事母至孝 養志洞屬 未嘗少咈 定省之節 供甘之誠 一是靡懈 母病數年 藥餌之物 躬資調進 行不以翔 笑不至矧 及至病革 嘗糞祈天 裂指垂血 回甦三日 竟遭大艱 哀毁之節 朔望哭墓 終身如一 祭亦齊戒 必致如在之誠 以家大人出外不還 爲平生大恨 每逢佳節 涕泣之痕 在於枕席之間 以母氏之心爲心 亦 祈於山水 祝天不懈 鄕里之人 皆曰孝子人也 光武六年壬寅 全州希堂道會時 全北各郡儒林代表 五十三人 及全州南原鎭安鄕校 儒生 齊聲發文 仰稟于所居地 鎭安郡守題曰 一家孝烈 有是母有是子 爲鄕隣矜式 令人欽歎 襃揚之節 益俟公議事其後載三綱錄及湖南縉紳錄 公之胤士文 與其族叔 眞燮議曰 吾家兩世 有如此之孝烈 而家勢寒微 不能闡揚于世 是可恨也 及吾未死之時 雖極少規模 刻記蹟于一片石 立于村右路邊 使行路之人 觀瞻而有可語之資 豈不可哉 乃使之齎文 而來謀於不侫 余曰 夫大孝 終身慕父母 終身慕者 余於此公見之矣 且祖先有美行之實則能闡揚於世者 是乃爲孝 若士文者 亦可謂孝矣 詩云孝子不匱 永錫爾類者 其此家之謂歟 大韓民國四十八年 丙午 冬至節 陜川 李英浩 撰 【풀이】 진안(鎭安)의 사인(士人) 서흥김공(瑞興金公) 휘 석봉(錫鳳) 자 낙필(洛弼)은 아조(我朝) 문과 참의 휘 중곤(中坤)의 후예인 시권(時權)의 아들이고 그 모부인(母夫人) 연안송씨(延安宋氏)는 예조판서 휘 보산(寶山) 호 퇴휴재(退休齋)의 후예인 태철(泰喆)의 따님이다. 송씨는 시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는데 부군(夫君)이 과거 공부를 하려고 일찍 서울로 유학하여 해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다가 그 길로 영영 소식이 없었다. 공은 그 때에 아직 젖먹이였는데 집에는 한 단지의 곡식도 남은 것이 없어 그 정상은 참아 말 할 수가 없었다. 모부인은 어린 아이를 안고 집을 지키면서 삯 절구질과 길쌈으로 겨우 겨우 살아가면서 날마다 부군이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산과 물, 하늘과 별에 빌기를 종신토록 그치지 않았다. 공은 조금 자라자 여기에 감명을 받아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늘 조심스런 마음으로 뜻을 받들어 조금도 어김이 없었으며 혼정(昏定) 신성(晨省)하는 예절과 맛있고 음식을 올리는 정성에 한결같이 해이함이 없었다. 모부인이 몇 해를 병으로 누었으니 병석을 몸소 보살피고 약을 손수 달여서 올렸으며 수심에 쌓여 걸어도 힘이 없었고 웃어도 입을 벌리고 웃지 않았다. 이윽고 병이 더치니 변(便)을 맛보아 병증을 징험하고 하늘에 쾌유를 빌었으며 손가락을 깨서 피를 입에 드리워 사흘을 소생하게까지 하였다. 마침내 상을 당하게 되니 애훼(哀毁)하는 일이나 삭망(朔望)으로 성묘하고 곡하는 일을 일생동안 한결같이 하고 제사에는 재계(齋戒)하여 반드시 어머니가 곁에 계시는 것처럼 정성을 다하였다. 가대인(家大人: 아버지의 경칭)이 밖에 나가 돌아오지 않은 것을 평생의 대한(大恨)으로 여겨 매번 가절(佳節)을 만나면 눈물자욱으로 베개와 이부자리가 얼룩졌다.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 공 역시 산과 물에 빌고 하늘에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효자라고 일컬었다. 공의 아들 사문(士文)이 그의 족숙 진섭(眞燮)과 상의하기를 “우리 집 양세(兩世)에 이러한 효(孝)와 열(烈)이 있었으나 집안이 한미(寒微)하여 세상에 천양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한스러운 일입니다. 비록 작은 규모일망정 제가 죽기전에 그 사적을 돌에 새겨 마을 오른편 길 가에 세워 지나다니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고서 말할 거리가 있게 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그분더러 글을 싸 가지고 나를 찾아가 도모해보라 하였다. 나는 이르노니 무릇 대효(大孝)는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이 분에게서 보게 되었다. 또 조상(祖上)에게 훌륭한 행실이 있었으면 세상에 천양하는 것이 바로 효가 되는 것인데 사문과 같은 사람은 가위 효라고 이를만하겠다. 시(詩: 시경<詩經>)을 말함)에 이르기를 “효자는 다함이 없나니 영원토록 그런 사람을 내려준다(孝子不匱, 水錫爾類)”고 하였는데 그 말은 이 집안을 두고 한 말인가보다. 대한민국 48년(1966) 병오 동지절 합천 이영호(李英浩) 찬(撰)
  • 【위치】 성수면 좌포리 산69-4. 고분제로변 좌측 산기슭.
    【시기】 1925년(공자탄생2476)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00cm, 너비 40cm.
    【개요】 비문은 마모된 부분이 많아 전체 해독은 어려우나 대략을 간추리면, 이씨는 본관이 진안으로 사인(舍人) 경환(璟煥)의 딸로 경주인(慶州人) 계림군의 후손 정송현(鄭松鉉)의 처이다. 어려서부터 효순(孝順)하여 출가해서도 시부모에게 효를 다하였다. 시모의 병환에 지극한 정성으로 구환하고 운명하자 슬퍼함이 법도를 넘어섰다. 지아비가 병으로 위독하자 하늘에 자기 몸을 대신해달라고 빌었으나 운명하자 통곡하며 장례절차를 예로써 지내고 탈상을 마친 뒤 목을 매어 지아비를 뒤따랐다.
  • 【비표】 縣監李侯益應永世不忘碑(현감이후익응영세불망비)

    【위치】 성수면 구신리 산 291-3. 지방도 성백로로 시동마을에서 신기쪽으로 가는 모롱이 길가 산기슭
    【시기】 1879년 8월
    【형태】 95cm, 두께 50cm, 두께 16cm.
    【개요】 이익응(李益應)은 진안현감으로 1876년 9월에 부임하여 1879년 4월에 재임 중 사망하였다.
  • 【비표】 孝子密陽孫公諱錫祐紀蹟碑(효자밀양손공휘석우기적비)

    【위치】 성수면 좌포리 1385-1. 양화마을 남서쪽 진입로변 양화비석군 내.
    【시기】 1962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00cm, 너비 40cm, 두께 13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余友孫判永甫 世居鎭安之佐浦 與余有舊 日訪余于完城寓舍 斂膝而言曰 吾從叔諱錫祐 三歲失怙 事母誠孝 先意承順 無違其志採山釣水 供之必甘 母氏疾病 裂脂注血 氣絶復甦者數日 及喪號擗不食 頓絶方蘇 葬則廬于墓下 泥首苫塊 而朝夕上塚跪拜 悲哀三年如一日 其臂膝處 宛然陷下 而草不生雪不封 人行過者必環視咨嗟 至終喪前夕 設奠靈幃 而燭倒火延 勢將盡爇 公呼天痛哭 反風滅火 鄕人感歎曰 誠孝格天 有此神異 遂相與狀聞于朝 而時則光武年間 以政變 未蒙褒旌之典 而閭里婦孺 說其事 至今慨惜焉 嗚呼 判永雖不敏 忍令吾從叔出天孝行之泯沒 而不之顧耶 將立石紀蹟 以圖久傳 子其爲文以惠我 余感孫公之仁孝格天 而悲其身後寂寞 且難孤判永甫爲先裕後之誠 撰次如右 孫氏系出密陽 文孝公諱順之後云. 壬寅十月 日 平澤 林熙昌 撰 竝書. 有司 秉烈 秉昌 秉先 秉鉉 秉鉉 秉寔 秉鮮 判燁 明燁 九燁 琪燁 正燁 光燁.
    【풀이】 나의 친구 손판영보(孫判永甫)는 대대로 진안(鎭安)의 좌포(佐浦)에 살아, 나와는 구의(舊誼)가 있다. 하루는 전주(全州)의 우사(寓舍: 부쳐 사는 집)로 나를 찾아와 자세를 바로하고 이르기를 “우리 종숙(從叔) 휘 석우(錫祐)는 세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효성으로 섬겨 그의 뜻을 앞서 짐작하고 받들어 어김이 없었고 산에서 나무하고 물에서 고기를 낚아 반드시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이 나자 손가락을 깨서 피를 드리워 숨이 끊겼다가 다시 살아나기 며칠을 하였는데 정작 상(喪)을 당하자 가슴을 치면서 울부짖고 먹지를 않아 숨이 끊겼다가 다시 살아났었고 장사를 지낸 뒤에는 묘소 아래에 여막(廬幕)을 치고 머리를 땅에 묻고 거적자리와 흙 베개로 지냈으며 아침저녁으로는 묘소에 올라 꿇어 앉아 절하고 슬퍼하기를 3년을 하루와 같이 하였는데 팔과 무릎이 닿은 곳은 완연히 오묵하게 파여져 풀도 나지 않고 눈(雪)도 쌓이지 않으니 지나가는 사람마다 반드시 둘러보고 자탄(咨歎)하였습니다. 또 종상(終喪)의 전날 밤 영연(靈筵)에 제(祭)를 올렸는데 촛불이 넘어져 불이 붙어 곧 전체를 태울 뻔했으나 공이 하늘을 부르면서 호곡(號哭)을 하니 바람이 반대로 불어 불이 저절로 꺼지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기를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이런 신이(神異)로운 일이 있었다 하고 서로 들고 일어나 조정에 글을 올렸는데 그때는 광무연간(光武年間: 대한제국<大韓帝國> 시절)이라 정치가 바뀌어 포정(褒旌)하는 은전(恩典)을 받지 못하였으나 마을의 부녀자와 어린이까지도 그 일을 말하고 지금까지 애석해 하고 있습니다. 내가 비록 미욱하지만 어찌 참아 우리 종숙의 출천(出天)한 효성이 묻혀버려도 모른 체 할 수 있겠습니까 장차 돌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여 영구히 전해지도록 하려하니 그대가 글을 지어 나를 도와주시오” 하였다. 나는 손공(孫公)의 출천한 인효(仁孝)에 감동하고 그의 신후(身後)가 적막한 것을 슬피 여겼으며 또 판영보의 조선(祖先)을 위하고 후손을 돌보는 정성을 저버리기 어려워 위와 같이 서차(序次)하는 바이다. 손씨는 밀양(密陽)에서 계출(系出)하였으니 문효공(文孝公) 휘 순(順)의 후예라 한다. 임인(壬寅, 1962) 10월 일 평택(平澤) 임희창(林熙昌) 짓고 쓰다.(이하 원문참조)
  • 【비표】 縣監李侯重翼永世不忘碑(현감이후중익영세불망비)

    【위치】 성수면 구신리 산 291-3. 지방도 성백로로 시동마을에서 신기쪽으로 가는 모롱이 길가 산기슭
    【시기】 1889년 1월
    【형태】 120cm, 두께 37cm, 두께 10cm.
    【개요】 이중익(李重翼)은 진안현감으로 1888년 4월에 부임하여 1889년 6월 화순현감으로 전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