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崇政大夫鳳隱李公孝行碑(숭정대부봉은이공효행비)

    【위치】 성수면 좌포리 515-2. 봉촌마을 어귀 공주이씨 비석군 내
    【시기】 1986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정(石亭)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48cm, 너비 55cm., 두께 24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孝子李公 諱載準 字華重 號鳳隱者 公州之華閥也 大司馬大將軍 諡文武 諱天一 始顯於新羅赫居世朝 至麗末 殿中御史 文成公 諱明成 有罔僕志 隱於杜門洞 太宗屢徵不起 享公州鳴灘院 鎭安忠節 楊州追遠 諸壇 工判光弼 六世孫 公遠 公建 公迪 三昆季 自古阜移任實 又轉居鎭安之佐浦 公迪子元奭 號寒圃 贈司僕寺正 受業宋文敬公性潭先生之門 文名大振 崔尙書勉翁 記其堂於公曾祖也 祖諱震恒 贈左承旨 考諱周瑀 贈戶參 皆以公貴 公以正廟丁巳四月五日 生于佐浦里第 賦性聰慧 文藝夙就 哲宗己未 登上庠 品行端肅 風儀偉然 雖出入卿宰之門 絶無私干焉 特於事親之節 志體俱養 愛敬備至 事無大小必禀 每於良辰佳節 聚群子弟以娛之 及遭二艱 顔色之戚 哭泣之哀 弔者大悅 至於先塋石儀之具 守護之節 無有不備 而於鄕里窮乏之人 歲時周恤 猶恐其有未洽 自是 慈惠之頌遠播 剡騰之薦累上 於高宗丁卯優老之典 有司擬公以百歲之秩 而直超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 此異數也 子曰 事親孝故 忠可移於君 事兄弟故 順可移於長 由是觀之 忠順必自忠悌中做出則人於父兄 不能孝悌而能忠順於君長者未之有也 況公子禹欽 官繕工監假監役 有孫三人 長浩季 成均進士 仲浩溶 文科及第 承政院注書 季浩殷 有文有守 令文不已 天之報施善人 於斯可驗矣 公之玄孫 現基氏 猶恐其先美湮沒 遠往半千里 求文於不佞 刻諸豊碑 以樹其里門焉 其意實有在耳 豈無一人有所觀感而興起於孝者乎哉
    檀君紀元四千三百十九年丙寅 大雪之節 羅州 羅鉀柱 撰 首陽 吳炳根 書
    【풀이】 효자 이공(李公)의 휘(諱)는 재준(載準), 자(字)는 화중(華重), 호(號)는 봉은(鳳隱)이다. 공의 집안 공주(公州)는 명문호족(名門豪族)으로 대사마(大司馬) 대장군(大將軍) 시호(諡號) 문무공(文武公) 천일(天一)은 신라 혁거세의 중신이었고, 고려말 궁중어사(宮中御使) 명성(明成)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숨어 태종(太宗)이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공주(公州) 명탄서원(鳴灘書院) 진안(鎭安) 충절사(忠節祠) 양주(楊州) 추원사(追遠祠)에 배향되어 있다. 공판(工判) 광필(光弼)의 6세손 공원(公遠), 공건(公建), 공적(公迪) 삼형제는 고부(古阜)에서 임실(任實)로 이거했다가 또 진안(鎭安) 좌포리로 이거하였다. 공적(公迪)의 자 원석(元奭)은 호(號)가 한포(寒圃)로 사복사정(司僕寺正)으로 증직(贈職)되었고 송성담선생(宋性潭先生) 문하에서 배워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선생이 그 일을 적었는데 (이 분은) 공의 증조부이다. (공의) 조부는 진항(震恒)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고, 부(父) 주우(周瑀)는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공(公)은 정조 정사(丁巳, 1797)년 4월 5일 좌포리(佐浦里) 집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문예(文藝)를 일찍 이루었다. 철종(哲宗) 기미년(1859 철종10)에 성균관에 들어갔고 품행이 단정하고 풍채가 아름다웠는데 비록 재상(宰相)의 집에 드나들었으나 개인적인 부탁은 절대 하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기는 일에 특별히 뜻을 두어 어버이의 뜻과 몸을 함께 봉양하였으며 사랑과 공경이 모두 지극하여 크고 작은 일을 반드시 여쭈었으며 매번 좋은 시절이 되면 여러 자제(子弟)를 모아 어버이를 즐겁게 해 드렸다. 어버이의 상을 당했을 때는 슬픈 안색을 하고 애처로운 곡을 하여 조문하러 온 자들이 크게 기뻐하였으며 선영의 석물(石物)을 갖추고 지키는 일을 완비하였다. 향리(鄕里)의 궁핍한 사람들에 대해서 세시(歲時)마다 구휼하면서도 오히려 흡족하게 해 주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이 때문에 자애롭고 은혜롭다는 칭송이 멀리 퍼지고 지방관의 천거가 여러 번 올라가서 고종 정묘년(1867 고종4)에 있던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에서 유사(有司)가 공을 100세의 등급에 의망하여 곧바로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에 오르게 되었으니 이것은 특별한 예우였다. 공자께서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섬기기 때문에 그 마음을 옮겨서 군주에게 충성할 수 있고, 형을 공손하게 섬기기 때문에 그 마음을 옮겨서 웃어른에게 순응(順應)할 수 있다.”라고 하셨다. 이것을 가지고 볼 때 충성과 순응은 반드시 효제(孝悌)에서 나오는 것이니 부형(父兄)에게 효제할 줄 모르고도 군장(君長)에게 충성하고 순응할 줄 아는 사람은 있지 않다. 공의 자(子) 우흠(禹欽)은 관직(官職)이 선공감(繕工監) 가감역(假監役)이고, 손자는 셋이 있어 맏이는 호계(浩季)로 성균진사(成均進士), 둘째는 호용(浩溶)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역임하고, 막내 호은(浩殷)은 문장(文章)과 지조(志操)를 지킴에 있어 좋은 소문이 널리 퍼졌으니 선(善)을 베푼 일에 보답함이 가히 이와 같이 영험스럽도다. 공(公)의 현손(玄孫) 현기(現基)는 그 선대의 아름다운 일이 민몰(泯沒)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멀리 5백리를 찾아와 나에게 글을 구하여 커다란 비를 각하여 그 동리앞에 세운다고 하니 그 뜻이 실다운데 어찌 한사람뿐인가. 이를 보고 효(孝)에 대하여 흥기(興起)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단기 4319(1986)년 대설지절 나주(羅州) 라갑주(羅鉀柱) 찬하고 수양(首陽) 오병근(吳炳根)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