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수면 구신리 시동마을에서 신기마을 쪽으로 가는 모롱이 도로변 산기슭에 있는 3기의 비석. 유원규 영세불망비, 이익응 영세불망비, 이중익 영세불망비 등이다.
  • 【위치】 성수면 도통리 352. 목동마을 남쪽.
    【시기】 1919년
    【형태】 높이 87cm, 너비 37cm, 두께 19cm.
    【개요】 습재 최재학(崔濟學)선생이 살며 삼우당(三友堂)을 지었던 곳이다.
    비의 전면에는 삼우동(三友洞), 비의 뒷면에는 우동팔경(友洞八景)이라 해서 ‘鳳浦流雲 麟峰積雪 木洞樵歌 柳川漁火 卵山落照 舟沼歸帆 芝谷暮烟 仙坮明月’이라 새겨져 있다. 풀이하면 ‘봉포유운(鳳浦流雲, 봉황산 위에 흘러가는 구름) / 난산 낙조(卵山落照, 알미산에 비취는 저녁놀) / 주소귀범(舟沼歸帆, 소에서 노닐다가 선창으로 돌아오는 배) / 유천어화(柳川魚火, 동네 앞 버드나무 냇가에서 밤고기 잡는 횃불) / 목동초가(木洞草歌, 목동마을의 초동들이 부르는 노래) / 지곡모연(芝谷暮煙, 지곡마을 저녁밥 짓는 연기) / 선대명월(仙坮明月, 달밝골에 떠오르는 보름달) / 인봉적설(麟峰積雪, 성수산의 하얀 설경)’의 뜻이다.
  • 【비표】 愛國志士習齋崔濟學先生紀念碑(애국지사습재최제학선생기념비)

    【위치】 성수면 도통리 352. 목동마을 남쪽.
    【시기】 1987년
    【형태】 높이 177cm, 너비 60cm, 두께 32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이곳 삼우당(三友堂)은 명문 탐진 최씨의 터로 효계의 가풍이 면면히 이어온 곳이며, 또 을사조약 직후에 의열에 불타던 최제학(崔濟學) 선생이 그 스승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을 받들고 호남 최초로 의병활동을 준비하던 곳이다. 선생의 자는 중열(仲悅)이요, 호는 습재(習齋)이다. 1882년 3월 아버지 성호(成鎬)와 어머니 흥덕 장씨의 차남으로 이곳 목동에서 태어나시었다. 일찍이 불류재(不流齋) 이기회(李起晦)의 문하에 들었고,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선생을 받들던 중 면암을 흠모하여 사제의 의리를 맺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통분한 선생은 곧 면암과 송사를 찾아 구국의 계책을 품의하고, 다음해 정월에 수남(秀男) 고석진(高石鎭)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방책을 마련한 뒤, 면암의 뜻을 받들어 돈헌(遯軒) 임병찬(林秉瓚)과 초기 의병활동 주도세력을 규합할 때, 돈헌은 태인(泰仁)의 종석(鍾石) 여막을 거점으로 하고, 습재는 면암을 이곳 임실태수 조규하(趙奎夏), 운봉주서 박봉양(朴鳳陽), 영남 면우(勉宇) 곽종석(郭鍾錫), 화개 강두령(姜頭領) 등과 연락하여 뜻을 모으며 형인 약천(若川) 제태(濟泰)와 함께 가산을 팔아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나이 25세에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순창으로 무기를 옮길 때 상여를 꾸며 일제의 눈을 피하였으니, 그 같은 지혜와 용기에 대하여 그 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면암이 없으면 습재도 없고, 습재가 없으면 면암도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녹슬은 창칼이 저들의 신예 무기를 대항할 수 있었으랴! 이때에 패진과 동시에 일광(一狂) 정시해(鄭時海)는 순국하고, 왜적에게 끌려가 면암은 3년, 돈현은 2년의 형을 비롯하여 선생과 수남도 4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출옥한 선생은 대마도로 면암을 찾아 극진히 간병하다가 면암이 순국하시니 장례를 극진히 모시었다. 고향에 돌아와 고산(高山) 윤자신(尹滋臣)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회를 노려 방랑하다가 단기 4284년 가을에 지리산 하동 청암에 들어가 은거하던 중, 단기 4292년 가을에 한 많은 일생을 마치시니 78세였다. 실로 선생은 대한제국 말기의 쓰라린 역사 속에, 그리고 나라를 잃은 통분 속에, 또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혼란 속에 충렬과 정의에 몸부림치다가 돌아가시었으니, 이 의롭고 빛나는 일생을 기리어 작은 이 돌에 선생의 행적 일부나마 새겨 이 나라 자손 만대에 길이길이 전하고자 한다. 단기 4321년 12월 20일 대한민국 순국선열 유족회장 최창규(崔昌圭) 지음. 광복회원 정상렬(鄭相烈) 씀
  • 【비표】 嘉善大夫戶曹參判松史崔先生神道碑(가선대부호조참판송사최선생신도비)【위치】 성수면 도통리 424. 조실길 북동쪽 변두리.

    【시기】 1980년 1월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2cm, 너비 54cm, 두께 23cm.
    【개요】 탐진최씨 재각인 지덕재(智德齋) 건너편에 최만성 비와 최치환 비가 좌우로 세워져 있다.

    【풀이】 최만성(崔萬成)의 자는 사추(士樞)요, 호는 송사(松史)로 탐진인(耽津人)이다. 장경공(莊景公) 사전(思全)의 후예로 증참의(贈參議) 세원(世遠)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영오(穎悟)하고 재기(才器)가 남달랐고, 효성이 지극하여 어려서부터 부모의 심기(心氣)가 불편한 듯하면 한 시라도 옆을 떠나지 않고 사당(祠堂)에 들어가 속히 쾌유(快癒)하기를 빌었다. 스승을 모시고 글을 배움에 한 번 들은 글귀는 잊지 아니하고 암송(暗誦)하였으며, 운(韻)을 부르면 곧바로 시문(詩文)을 지어내어 문재(文才)가 날로 훌륭해졌다. 그리하여 향시(鄕試)에 이르러 문명(文名)을 온 고을에 떨치게 되었다. 부친께서 병환이 위중하니 보름이 넘도록 약 수발을 정성껏 드리며 밤낮을 불구하고 쉴 줄 몰랐으며, 친상(親喪)을 당해서는 죽 마저도 입안에 넣지 않고 심히 애통히 하였다. 그리하여 주위에서 억지로 권하여 겨우 진정시켰다. 집안 형편이 빈한(貧寒)한데도 망극한 일을 당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홀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그대가 길지(吉地)를 구하고자 한다면 아무 산 아무 향의 자리보다 더한 곳이 없으니 그리 알라"고 하였다. 문득 깨어나 아침을 기다려 꿈대로 자리를 찾으니, 과연 전날 꿈에 계시 받은 자리가 있기에 온 재산을 기울여 선고(先考)를 모셨다. 그 소문을 들은 사람마다 공의 장한 효심에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공의 나이는 12살이었다. 그 후, 홀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 아니라 생전의 봉양은 물론 상제(喪祭)의 정성도 시종 여일(始終如一)하여 누구나 하늘이 낸 효자(孝子)라고 칭송하였다. 공은 평거(平居)에 간중 과묵(簡重寡黙)하여 바깥 사물에 중심을 잃지 않고 항상 정좌(靜坐)하였으며, 손에서 책을 떼지 않는 태도로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익혔다. 특히 퇴계(退溪)와 율곡(栗谷) 두 선생의 뜻을 두텁게 믿어 언제나 좌우에 그 글을 모시고 매일 읽고 힘써 행하며, 깊은 뜻을 뒷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任務)로 여겼다. 공은 지극한 효행과 깊은 학문으로 인하여 침랑(寢郞) 벼슬이 내려 졌으나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정조 갑진(甲辰, 1784)에 사림(士林)의 상언(上言)으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1980년 1월 진양 하천수 근찬
  • 비표 : 孝子慶州李振玉之閭(효자경주이공진옥지려)

    【위치】 성수면 신기리 48. 내곡 신기저수지 제방아래 산기슭.
    【시기】 1927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碑身) 높이 65cm, 너비 75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高宗戊辰 湖南儒生 進士朴膺宗等 上書于大宗伯曰 鎭安士人 李振玉 以益齋李文忠公之後孫 世趾其美 百行豁如 惟孝爲本 家貧 躬耕山而樵水而漁 爲其奉養也 聲不作其色不失 和爲其志養也 剖氷求魚 祝天身代 爲祈禱生也 母先遘疾 斷指以延三年之兪 父又病劇 亦如之然 感神之誠 終不能勝 在天之定命 連遭內外艱 六年居廬 哀毁逾禮 是豈■加入 一等之孝乎 該曹聞而駕尙 特下獎諭之訓 然未能入啓 天聰而旌表其閭 子姓又益零替 朝野拱申之狀藏之塵 苟而蠹食 斷爛可勝歎哉 嗣孫圭生 爲是之懼 竭力傾資 招工伐石 記公之事 行以耀人觀聽屬 余以記之述敍其略 俾歸刻焉 歲 柔兆攝提格 三月下浣 小華遺民 李道復記
    【풀이】 고종 무진(戊辰, 고종 5, 1868)에 호남 유생 진사 박응종(朴膺宗) 등이 대종백(大宗伯, 예조판서)에게 글을 올리기를 “진안의 사인(士人) 이진옥(李振玉)은 익재(益齋)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서 대대로 그 훌륭함을 이어서 온갖 행실이 여유로웠고 오직 효로써 근본을 삼았으나 집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지었는데 산에서 땔나무를 해 오고 물에서 고기를 잡은 것은 봉양을 위해서이고 목소리에는 힘을 빼고 얼굴빛에는 온화한 기상을 잃지 않은 것은 지양(志養, 뜻을 받들음)을 위해서이며 얼음을 깨서 고기를 구하고 하늘에 빌어 몸소 대신하겠다고 한 것은 회생을 빌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병이 나자 손가락을 잘라 3년의 목숨을 연장하였고 아버지의 병이 더치자 또 같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명을 감동시키는 정성은 아무래도 하늘에 있는 정명(定命)을 이길 수 없어 연해 내외간(內外艱)을 당하여 6년을 시묘(侍墓)하면서 애훼(哀毁)함이 예절에 지나쳤으니 이 어찌 남들보다 한 단계 높은 효성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예조에서는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겨 특별히 장유(장유)하는 제음(題音)을 내렸으나 천총(天聰)에 입계(入啓)하여 정려(旌閭)를 내리시게 하지 못하였고 자손도 더욱 침체하여 조야(朝野)에서 아뢴 글을 먼지 낀 골방에 쳐박아 두어 좀이 슬고 찢겨져 너덜너덜하니 한탄스러움을 어찌 금하겠는가. 사손(嗣孫) 규생(圭生)이 이를 걱정하여 힘을 다하고 자산을 기울여 석공을 불러다가 돌을 다듬고 공의 사행(事行)을 기록하여 사람의 이목(耳目)을 빛나게 하려면서 나에게 기술하기를 부탁한지라 그 대략을 기록하여 돌아가 각하게 하였다. 정묘(丁卯, 1927) 3월 하순 소화유민(小華遺民) 이도복(李道復) 기(記)
  • 【비표】 成均進士小石李公善德宜人何東鄭氏孝烈碑(성균진사소석이공선덕의인하동정씨효열비)

    【위치】 성수면 좌포리 515-2. 봉촌마을 어귀 공주이씨 비석군 내
    【시기】 1986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정(石亭)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48cm, 너비 55cm., 두께 24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人之於世 生而人仰之 沒而人慕之者 必其事行 一出於至誠純粹底故也 是豈可以易致哉 余讀近故 小石李公 曁其配鄭氏狀 亦信知其然也 謹按 公諱浩季字胤敎 小石其號也 李氏系出公州 文成公松隱先生 諱明誠後 繕工監監役 諱禹欽子 監役公世稱 萬人積德 李某也 公幼而儀容端重 擧止異凡 性至孝 先意承順 年未成童 見宗人之貧窮 在遠者 輒悶之 進言于監役公 備田宅 而使居一里 年十九旱災太甚 遠近作人 難辨賭租 公又進言 乃減其半 農土賑給作人而使自作 鄕隣咸頌其德 紀之樹碑 公曰家産 瞻饒則賑恤窮乏 人之所當爲 安敢反受過分之稱乎 使人拔而埋之 年二十一 擧成均進士 若將有爲而未得展其所蘊 翌年辛巳 遽棄世 嗚呼惜哉 宜人鄭氏 河東人 文獻公一蠹先生后 諱耆鉉女 自髫齡 婉娩仁孝 閨範夙著 及歸于李公 未幾年 夫君遘疾 久在床褥 宜人祈天禱地 庸藥聞 無不爲誠 力調護 靡不以極 未得奏效 竟至危谹則裂指注血 亦無奈何 自謂寧欲代逝而延壽 投身於高軒絶砌之下者再 而未遂其志 竟遭晝哭 宜人時年二十二 哀痛如不欲生 旋念老舅在堂 血嗣幼冲 奉老扶幼重於殉從 忍痛視事 奉舅姑尤孝 育遺孤甚勤 待妯娌 御奴僕 恩義幷至 家門雍如也 年二十八之丙戌以疾卒 盖以憂勞憔瘁 不遑顧身而然歟 嗚呼 眞可謂是夫是妻也 夫世之人 有一善行 滔滔皆是 而若李公 與鄭氏 以妙齡 能知大本 施濟人之善而 惟恐人聞 忘其身而行人所難行 是其强爲之也哉 皆出於天賦之本心 至性純粹而然也 昔盛世 有卓異之行者則自國朝 官而榮之 旌而褒之 樹風敎而勸人爲善也 而今則母之 歡如之何 雖然 公議 尙在鄕中 士林 爲記而褒揚之 然文載簡編而已則曷若刻諸風碑 令行路人 皆得觀感而慕效哉 將竪碑於故宅之洞口 與祖父 同知中樞府事 諱載準孝行碑 父監役公功德碑及其弟注書公諱浩溶 倡義碑 齊立焉 偉歟盛哉 公之肖孫現基氏 以儒狀 囑余以文 顧人文 俱下 辭之固而未獲 遂書如右
    檀君紀元四千三百十九年 丙寅冬至節 礪山 宋河英 撰 首陽 吳炳根 書
    【풀이】 사람이 살아서는 존경을 받고 죽어서는 추모를 받는 것은 반드시 그 행실이 뛰어나게 지성스럽고 순수함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내가 소석(小石) 이공(李公) 및 그 부인 정씨(鄭氏)의 행장을 읽어보니 역시 그렇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삼가 살펴보니 공(公)의 휘(諱)는 호계(浩季)이고 자(字)는 윤교(胤敎)이고 소석(小石)은 그 호다. 공주이씨는 문성공(文成公) 송은선생(松隱先生) 휘(諱) 명성(明誠)의 후예로 공은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 휘(諱) 우흠(禹欽)의 자(子)로서 감역공(監役公)을 세칭(世稱) ‘만인에게 덕을 쌓은 이아무개(萬人積德李某)’라 부른다. 공은 어려서 몸가짐이 단정하고 정중하였으며 행동거지가 남달랐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님께서 묻기 전에 먼저 그 뜻을 받들어 승순(承順)하였다. 성동(成童 15세)이 되기 전에 먼 지방에 사는 빈궁한 종인(宗人)을 보고는 그를 불쌍하게 여겨 감역공(監役公)에게 말씀드려 전택(田宅)을 마련해 주고 같은 마을에서 살게 하였다. 19세가 되던 해에 한재(旱災)가 매우 심해 원근(遠近)의 소작인들이 도조(賭租)를 마련하기 어려웠다. 공이 또 말씀드려 그 반을 줄여 주고 농토를 소작인들에게 주어 자작(自作)하게 하니, 고을과 이웃이 함께 그 덕을 칭송하여 돌에 새겨 비를 세웠다. 공이 말하기를, “가산(家産)이 넉넉하면 궁핍한 사람을 진휼(賑恤)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어찌 감히 과분한 칭송을 받겠는가.”라고 하고는 사람을 시켜 비를 뽑아 땅에 묻게 했다. 21세에 성균관 진사로 천거되어 큰일을 할 듯했으나 오랫동안 쌓은 학식을 펴기도 전에 그 다음해인 신사년에 갑자기 기세(棄世)하였다. 오호라, 애석하도다. 의인 정씨는 하동(河東) 사람이니 문헌공(文獻公) 일두 선생(一蠹先生, 정여창(鄭汝昌))의 후손인 휘(諱) 기현(耆鉉)의 따님이다. 어릴 때부터 예쁘고 어질고 효성스러워 규방(閨房)의 법도를 일찍 드러내었다. 이공(李公)에게 시집갔다가 몇 년 되지 않아 부군(夫君)이 병이 들어 오랫동안 병상에 눕게 되었다. 의인은 하늘과 땅에 기도하고 약을 쓰는 데 정성을 다하며 힘써 구호(救護)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마침내 위급한 지경에 이르니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였으나 이 또한 어쩔 수 없었다. 그러자 스스로 차라리 남편을 대신해 죽어서 남편의 수명을 연장하게 하고 싶다고 말하고 높은 처마에서 섬돌로 몸을 던진 것이 두 번이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침내 남편의 상을 당했는데 의인의 나이 22세였다. 애통해 하며 죽고자 하였으나 곧바로 늙은 시아버지가 살아 계시고 혈손(血孫)이 어리며 늙은이를 봉양하고 어린 자식을 부양하는 것이 순사(殉死)하여 따르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슬픔을 참고 집안일을 보았다. 시부모 봉양을 더욱 효성스럽게 하고 남은 자식을 기르는 데 매우 애를 썼으며, 동서를 대하고 노비를 거느리는 데 은혜와 의리가 함께 지극하여 가문이 화평하였다. 나이 28세가 되던 병술년에 병으로 졸(卒)하니 아마도 근심과 피로로 초췌했으나 몸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나 보다. 오호라, 참으로 그 남편에 그 부인이라 할 만하다. 무릇 세상 사람들이 한 가지 잘한 일과 한 가지 못한 일이 있으면 모두가 명예를 구함이 세상의 흐름이로되 이공이나 정씨는 어릴 때부터 능히 큰 근본을 알고 선한 일을 베품에 오직 남이 들을 까 두려워하고 몸을 돌보지 않고 실천함은 사람들이 행하기 어려운 일이니 이 어찌 억지로 할 수 있는 일이리오. 대개 타고난 본심이 지성 순수함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옛날 세상이 좋았을 때는 뛰어난 일을 한 자가 있으면 나라에서 벼슬을 주고 이를 표창하여 풍속을 교화하여 사람에게 선을 권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못함을 탓한들 어쩌리오. 그러나 지방 사림(士林)들의 공론이 있고 유림(儒林)들이 이를 포양(褒揚)하나 글이 책에만 적혀 있을 따름인즉 어찌 비(碑)에 자세히 새겨 지나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보고 느끼게 하여 이를 사모하게 함만 같으리오. 이에 장차 고인의 옛집 동구 밖에 조부이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휘(諱) 재준(載準)의 효행비와 선고(先考)이신 감역공의 공덕비 및 아우인 주서공의 창의비와 같이 세우게 되니 훌륭하고 성(盛)하도다. 공의 손자인 현기(現基)씨가 유생들의 글로 나에게 글을 청하니 돌아보건대 사람됨이나 글재주가 모두 모자라 이를 굳이 사양했으나 이루지 못하여 마침내 이와 같이 적도다.
    단기 4319(1986)년 동지절
    여산(礪山) 송하영(宋河英撰) 찬하고, 수양(首陽) 오병근(吳炳根) 쓰다.
  • 【위치】 성수면 좌포리 1385-1. 양화마을 남서쪽 진입로변 양화비석군 내.
    【시기】 1962년
    【형태】 높이 106cm, 너비 37cm, 두께 13cm.
    【개요】 손학영(孫學永)의 자는 경찬(京贊). 본관은 밀양으로써 문효공(文孝公) 순(順)의 후손이다. 공은 천성이 세상을 위해 적선하는 것이었으니 세상에 드문 바로 이를 칭송하여 세운 비이다. 비의 양 옆으로‘天性慈惠 積善好施 鄕隣頌德 萬口成碑’라 새겨 있는데 풀이하면 ‘천성이 자혜(慈惠)롭고 적선하고 베풀기를 좋아하는지라 향린에서 칭송하고 많은 사람이 비를 세우자 했다.’라는 뜻이다.

    【시기】 1962년
    【형태】 높이 106cm, 너비 37cm, 두께 13cm.
    【개요】 손학영(孫學永)의 자는 경찬(京贊). 본관은 밀양으로써 문효공(文孝公) 순(順)의 후손이다. 공은 천성이 세상을 위해 적선하는 것이었으니 세상에 드문 바로 이를 칭송하여 세운 비이다. 비의 양 옆으로‘天性慈惠 積善好施 鄕隣頌德 萬口成碑’라 새겨 있는데 풀이하면 ‘천성이 자혜(慈惠)롭고 적선하고 베풀기를 좋아하는지라 향린에서 칭송하고 많은 사람이 비를 세우자 했다.’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