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연담거사 최치환 효행비(蓮潭居士崔致煥孝行碑)
    【비표】 蓮潭居士耽津崔公致煥孝行紀蹟碑(연담거사탐진최공치환효행기적비)

    【위치】 성수면 도통리 424. 조실길 북동쪽 변두리.
    【시기】 1982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29cm, 너비 42cm, 두께 21cm.
    【개요】 탐진최씨 재각인 지덕재(智德齋) 건너편에 최만성 비와 최치환 비가 좌우로 세워져 있다.

    【비문】 孝爲天下萬古之大經, 故堯舜之道, 亦孝悌而己. 盖五品之中, 事親爲首, 故孝爲百行之源, 萬善之本, 而修齊治平, 従此出焉. 豈不爲大經㦲? 由是孝子一出, 則千里之外, 聞風興起, 矧此學文兼備㦲? 曰耽津人崔蓮潭先生, 諱致煥, 字文秀, 高麗平章事謚莊景公諱思全爲鼻祖. 吏部尙書諱應奎, 其中祖也. 五傳諱沃, 以禦侮將軍至麗社旣屋, 抗節不仕, 謚貞簡公, 是生諱臨江, 成均生員. 是生諱膺遇, 中宗祖以扶社原從二等功臣, 官至通訓大夫益山倅, 謚忠貞. 於公爲十四世祖也.高祖諱聖福工曺叅議, 諱養直諱寧諱景老, 高與祖若曾祖, 而并著孝行. 妣安東金氏, 孝著鄕隣, 有三男, 公其長也. 憲宗丁酉正月七日擧公于第, 自幼志學, 以尊聖模賢四字, 爲脈膺, 而篤孝其親, 輕暖甘脆, 盡其口體之養, 其考遘奇疾, 百方治療, 病勢愈重, 愛護若嬰孩, 大小便躬執其器, 一不委人, 十二年如一日, 而醫云鳶肉好, 故公廣求至數百里外, 而終不求, 回路中, 數三兒童, 戱鳶而遊, 故重價買歸, 和藥進之, 果得其効. 後又沉重公, 又出外求藥, 而當村前潦水汎漲, 勢不能渡, 公號天哀訢, 水忽中斷, 蒼黃急渡, 洎至江畔, 水漲復合, 天地感應, 無加於此, 烏不可壯哉? 一日氣息頓絶, 公以血指連灌, 能禾魚蘇 三日, 終遭故, 哀痛過禮而執喪如禮, 其大夫人患腫六七朔, 吮之而拔根, 生新以安餘年, 洎丁憂三年間, 一如先考喪, 鄕隣亟稱其孝, 而鄕道交薦, 宜有天褒而運蔑未蒙, 此所以汲汲於銘石, 而其孫漢洙, 要役於余, 余亦秉彜所存, 豈敢辭之固耶?據其鄕儒上書道儒發文, 而書其所感, 一以頌彰孝爲先之道, 一以警㤀祖叛經者, 而系之銘曰, 高矣蓮潭 孝源曾閔 兼備學行 阿誰不式 名傳萬年 公得其詮 聿修燦然 賢人之阡. 歲昭陽大淵獻之 上月 下絃 慶州 金正復 謹撰 金海 金鍾寬 謹書.
    【풀이】 효(孝)는 천하(天下)에 만고(萬古)토록 변하지 않는 대경(大經)이다. 그러므로 요순(堯舜)의 도리도 또한 효제(孝悌)일 따름이다. 대체로 오품(五品) 중에 사친(事親)이 가장 우선이 되는 까닭에 효는 백행(百行)의 근원이고 만선(萬善)의 근본이며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가 이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어찌 대경(大經)이 되지 않겠는가? 이런 까닭에 효자가 한 명 나오면 천리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소문을 듣고 흥기(興起)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이 분은 학문(學文)까지 겸비하였음에랴. 탐진(耽津) 사람 최연담(崔蓮潭) 선생은 휘(諱)가 치환(致煥)이고 자(字)는 문수(文秀)이며,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시호(諡號)가 장경공(莊景公)인 휘(諱) 사전(思全)이 비조(鼻祖)이고,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낸 휘 응규(應奎)가 그 중시조(中始祖)이다. 이로부터 5세(世)를 전하여 휘 옥(沃)은 어모 장군(禦侮將軍)으로서 고려 왕조가 이미 망하자 절의(節義)로 항거하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이 분이 휘 임강(臨江)을 낳았는데 성균관 생원이었고 이 분이 휘 응우(膺遇)를 낳았는데 중종(中宗) 때 사직(社稷)을 부지(扶持)한 2등 원종 공신(原從功臣)으로서 벼슬이 통훈 대부(通訓大夫) 익산 현감(益山縣監)에 이르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이 분이 공에게 14세조(世祖)이다. 공의 고조(高祖)는 휘가 성복(聖福)으로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냈고 휘 양직(養直)과 휘 령(寧)과 휘 경로(景老)가 선고(先考)와 조(祖) 및 증조(曾祖)인데 모두 효행(孝行)으로 드러난 분들이다. 선비(先妣)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효심이 향리와 이웃에 알려졌고 아들 셋을 낳았는데 공이 장남이다. 헌종(憲宗) 정유년 정월 7일에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성인을 존경하고 현자를 본받는다[尊聖模賢]’는 네 글자를 맥락으로 삼아 가슴 속에 품었으며 어버이에게 매우 효성이 깊어서 가벼운 의복과 따뜻한 잠자리와 달고 연한 음식 등을 장만하여 부모의 입맛과 몸에 맞는 것들을 모두 봉양하였다. 공의 선고(先考)가 이상한 질병에 걸리자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나 병세가 갈수록 중해지니 마치 어린 아이를 사랑하고 보호하듯이 모시면서 대소변을 몸소 자기 손으로 받아내고 한번도 남에게 맡긴 적이 없었으며 12년 동안을 하루처럼 똑같이 그렇게 하였다. 의원(醫員)이 말하기를, “솔개 고기[鳶肉]가 이 병에 좋다.”고 하였으므로 공은 솔개 고기를 널리 구하려고 수백 리 밖에까지 갔다가 끝내 구하지 못한 채 돌아오는 길에서 어린애들 서너 명이 솔개를 데리고 장난치며 노는 것을 보고는 비싼 값을 주고 사갖고 돌아와서 약에 섞어 선고에게 드리니 과연 그 효험을 보게 되었다. 뒤에 다시 병세가 위독해지자 공은 다시 약을 구하려고 밖에 나가보니 마을 앞에 냇물이 불어나서 건널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이 하늘에 울부짖으며 애달프게 호소하니 냇물이 갑자기 흐름이 끊겼다. 이에 공은 급히 서둘러 내를 건너 건너편 강가에 이르자 냇물이 다시 합쳐져 세차게 솟구치며 흘렀으니 하늘과 땅이 공의 효심에 감응(感應)한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으니 어찌 장하지 않겠는가. 어느 날 하루는 부친의 숨[氣息]이 갑자기 끊기자 공은 자기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서 연거푸 부친의 입속에 흘러들게 하여 사흘간 소생시켰다. 마침내 상(喪)을 당하자 예법보다 지나칠 정도로 애통(哀痛)하였고 상례(喪禮)도 예법대로 치렀다. 그 대부인(大夫人)께서 6-7달이나 종기(腫氣)를 앓았는데 공이 고름을 빨아내어 뿌리를 뽑아내자 새 살이 돋아나서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냈으며 상을 당한 뒤로 삼년 동안 하루처럼 복상(服喪)하는 것을 선고의 상을 당했을 때와 똑같이 하였으므로 향리와 이웃이 그 효성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였고 향도(鄕道)가 서로 천거하였으니 마땅히 임금의 포상이 있어야 하는데도 운이 없어서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런 까닭에 비석에 새기는 일을 서두른 것이며, 공의 손자인 한수(漢洙)가 나에게 일을 요청하였는데, 나 또한 떳떳한 성품을 갖고 있으니 어찌 감히 고사(固辭)하겠는가. 향유(鄕儒)들이 올린 글과 도유(道儒)들의 발문(發文)에 근거하여 그 느낀 점을 써서 한편으로는 공의 효행을 드러내고 조선(祖先)을 위하는 도리를 칭송하고, 한편으로는 조상을 망각하고 원칙[經]을 배반하는 자들을 경계하노라. 명(銘)은 다음과 같다. 훌륭하도다 연담(蓮潭) 선생이여 / 효행이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에 근본하였네 / 학행(學行)까지 겸비하였으니 / 어느 누가 존경하지 않겠으랴 / 명성이 만년토록 전해지니 / 공은 그 설명을 얻었노라 / 이에 반짝이는 비석을 세웠노니 / 어진 분이 묻혀있는 무덤길이네. 歲 昭陽大淵獻(癸亥, 1983) 상월(上月) 하현(下絃) 경주(慶州) 김정복(金正復) 삼가 찬하고, 김해(金海) 김종관(金鍾寬) 삼가 쓰다.
  • 【비표】 監役愚石李公功德碑(감역우석이공공덕비)

    【위치】 성수면 좌포리 515-2. 봉촌마을 어귀
    【시기】 1986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정(石亭)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48cm, 너비 55cm., 두께 24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君子有德行之美而不得傳於世則是子姓 不明不仁之過也 豈不懼哉 月浪治西聖壽之坊 有隱君子以旣歿之百有一穓矣 其曾孫博士李現基甫 懼其懿德之泯沒 將治珉 樹於宗垈之傍 屬余識其事實以未辨魚魯之愚 安敢當 固辭不獲 謹按狀 敍之曰 公諱禹欽 字敬亮 號愚石 公州人 文武公 諱天一 爲上祖 至殿中侍御史 諱明誠 麗社旣屋 杜門不仕入本朝 贈諡文成 士林奉享于鳴灘書院 有諱元奭 號寒圃 師事宋文敬公性潭門 文學鳴世 贈司僕寺正 於公爲高祖也 公天性剛毅 心地正大 治産有度 自居儉約 極孝于兩庭 盡志體之養 友于昆季 析著深厚 設塾延師 敎門子弟 及 村秀才 貧不能就業者 期必使進學 各有所成焉 宗族鄕黨 莫不稱訟 接賓誠敬 雖有襤樓之客 同卓而飯 同衾而寢 毫無厭色 樂善好仁 恤窮周急 隨處頌德豎碑 皆使拔而埋之 或人標榜於完營門樓曰 萬人積善李某云 完伯李公秉文 按實啓薦 除繕工假監役 然不以名利動心 若風淸日和 則設筵邀朋 賦詩敍懷 手不釋券 探究性理 又愛山水之勝 遺芳躅于鳳山上 千仞亭矣 有子三人 浩季進士 浩溶文注書 浩殷 公以華閥肖裔 志行高潔 文翰瞻富 有遺稿 孝友根天 德望隆盛 一鄕矜式 垂蔭于後 麟趾熾昌 古人所謂 積善之家 必有餘慶者信不誣矣 銘曰 公山世家 寒圃肖孫 仁深德崇 之潔行敦 救貧恤窮 化被一鄕 刻諸貞石 庸闡幽光
    光復後 丙寅(1986) 小春下澣
    南陽 洪斗炫 撰 首陽 吳炳根 書
    【풀이】 군자가 선행의 아름다움이 있음에도 이를 세상에 널리 전하지 못함은 그 자손이 불명불인(不明不仁)의 과오를 범한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랴. 월랑(진안) 서쪽 성수마을에 숨은 군자가 있어 이미 타계하여 101년의 제사를 모셔온 바 그 증손 박사 이현기(李現基)씨가 그 선대의 높은 도덕이 민몰(泯沒)될까 두려워 장차 비를 만들어 종대(宗垈) 옆에 세우고자 하여 나에게 그 사실을 적어달라는 부탁이나 “어노(魚魯)도 분변(分辨)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어찌 감히 감당하리요”하고 고사했으나 이루지 못하여 삼가 실상을 살펴보건대 공의 휘(諱)는 우흠(禹欽)이요 자(字)는 경량(敬亮)이며 호(號)는 우석(愚石)이니 공주인(公州人)이라 시호(諡號)는 문무공(文武公)이며 휘(諱)가 천일(天一)이신 이가 윗대 선조요, 전중어사(殿中御史)이며 휘(諱) 명성(明誠)에 이르러 고려 사직이 이미 망하매 두문(杜門)하여 벼슬에 나가지 아니하니 조선조에 들어와 문무공의 시호를 내려 사림(士林)이 명탄서원(鳴灘書院)에 봉향(奉享)하다 휘(諱)가 원석(元奭)이요 호가 한포(寒圃)인 이가 있어 송문경공(宋文敬公) 성담(性潭)에게 사사(師司)하여 문학이 세상에 떨쳐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증직(贈職)하니 이분이 공의 고조(高祖)이시다. 공은 천성(天性)이 굳세고 심지(心地)가 정대(正大)하였다. 재산을 관리하는 데 법도가 있었고 검약한 생활을 했다. 양정(兩庭 타인의 부모에 대한 존칭)께 지극히 효성스러워 뜻과 몸을 봉양하는 데 극진했다. 형제에게 우애가 있어 분가(分家)할 때는 재산을 매우 후하게 나누어 주었다. 글방을 열고 선생을 모셔 와서 가문의 자제와 집이 가난해 배우지 못하는 시골 수재(秀才)들을 가르치게 하여 기필코 학업을 쌓아 각기 성취하는 바가 있게 하니, 종족(宗族)과 향당(鄕黨)에서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손님을 정성과 공경으로 손님을 접대하여 비록 남루한 나그네라 할지라도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자면서 조금도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선행을 즐거워하고 인애(仁愛)를 좋아하여 곤궁한 사람을 구휼하고 위급한 사람에게 주선(周旋)해 주어서 도처에서 송덕비(頌德碑)를 세웠으나 모두 뽑아서 묻게 했다. 어떤 사람이 전주 감영(全州監營)의 문루(門樓)에 방(榜)을 붙여 ‘만인(萬人)에게 적선(積善)한 사람은 이(李) 아무개이다.’라고 하였다. 전라 감사 이병문(李秉文) 공이 사실을 조사하고 장계로 천거해서 선공감(繕工監) 가감역(假監役)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명리(名利) 때문에 마음이 동요되지는 않았다. 바람이 맑고 따뜻한 날이면 자리를 마련하고 벗들을 맞이하여 시를 지어 회포를 서술하였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성리(性理)를 탐구했다. 또 산수(山水)의 승경(勝景)을 사랑하여 봉산(鳳山, 봉황대) 가에 아름다운 행적을 남겼는데 천인정(千仞亭, 지금은 없어짐)이다. 아들은 셋이 있어 맏이는 호계(浩季)로 성균진사(成均進士), 둘째는 호용(浩溶)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막내는 호은(浩殷)이다. 공은 명문의 후예로 지행이 고결하고 문장이 깊어 유고가 있으며 덕망이 융성하여 한 고장의 모범이었다. 음덕(蔭德)이 드리워 후예들도 기린의 발처럼 치성하였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선행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말은 틀리지 않는 말이다. 명(銘)하되, 공주이씨 가문 한포의 후예로 어질고, 덕이 고결하고 행의가 돈독하고 빈궁을 구휼하여 그 덕이 한 고을에 미쳤네. 이에 아름다운 돌을 새겨 비(碑)를 세움으로써 유광(幽光)을 드러내리.”
    남양(南陽) 홍두현 찬(洪斗炫撰) 수양(首陽) 오병근 서(吳炳根書)
  • 【위치】 성수면 좌포리 1385-1. 양화마을 남서쪽 진입로변 양화비석군 내.
    【시기】 1962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00cm, 너비 4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있다.

    【비문】 在昔先聖先王制五敎 而婦人之行曰 在家從父 適人從夫 夫死從子 此三者 天之經地之義也 故若能行之者 謂之烈而烈者 人人難行之事 故有一於此則 鄕有闡揚之文 國有旌褒之典 世降淑季 三綱九法 掃地無餘 能守先王之遺法 而特行彛性者 鮮有聞焉 以若少婦 不失秉彛之天性 遵行先王之遺法 爲世之謨楷 起敬稱烈者 吾於金氏夫人見之矣 夫人籍延安 文靖公諱自知後鳳基之女也 在家以孝順聞 及笄 歸于文孝公諱孫順后吉永家 事偏姑以禮 承君子以敬 壼範甚嚴 夫偶以痰症委席 沈綿幾朔 夫人晝宵扶護 迎醫合藥 竟得快差 越翌年甲申 夫又以赤痢 變之黃疸 委席三霜 百方救治 神扁殫技 空靑罔效 夫人築壇後園 夜禱北斗 願以身代 症至孔急 斷脂注口 漸而復蘇 其間三四星霜 不拘嚴寒雪夜 回救百方 手足浮凍 爪皮俱脫 少無痛苦之狀 豈不壯哉 其夫得生者 金氏之誠烈 可以感於神明之致也 玆以紀蹟短碑而壽傳 石雖可泐 名不可泯 其至行懿德 永久遺芳 宋斯文幸濂氏 遠來囑余 固辭不獲 謹書此而俾歸刻焉. 屠維大淵獻 小春哉生魄 全義 李丙殷 撰.
    【풀이】 옛날 선성(先聖)과 선왕(先王)이 오교(五敎: 오륜<五倫>의 가르침)를 펼치면서 부인(婦人)의 행실에 대하여 말하기를 “친정에 있어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을 가서는 지아비를 따르고 지아비가 죽으면 자식을 따른다”하였다. 이 세 가지는 하늘의 경위(經緯)이고 땅의 의리(義理)이다. 그러기 때문에 능히 행하는 자를 열(烈)이라 이르나 열이 저마다 행하기는 어려운 일이기에 여기에 하나라도 행한 바가 있으면 고을에서는 천양(闡揚)하는 글이 있고 나라에서는 정포(旌褒)하는 제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말세(末世)로 내려오면서 삼강(三綱)과 구법(九法: 홍범<洪範>의 구주<九疇>와 같음)이 땅을 쓸다시피 없어져 능히 선왕의 유법(遺法)을 지키고 이성(彝性: 윤리<倫理>에 합당한 성품)을 남달리 행한 자는 들어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그와 같은 앳된 부녀자로서 병이(秉彝)의 천성을 잃지 않고 선왕의 유법을 준행(遵行)하여 세상의 모범이 됨으로써 남의 존경심을 일으키고 서슴없이 열이라고 일컬어진 사람을 김씨부인(金氏夫人)에게서 보게 되었다. 부인의 본관(本貫)은 연안(延安)이니 문정공(文靖公) 휘 자지(自知)의 후예인 봉기(鳳基)의 따님이다. 친가(親家)에 있어서는 효순(孝順)으로 소문이 났고 혼기(婚期)가 되어서는 문효공(文孝公) 휘 손순(孫順)의 후예인 길영(吉永)의 집으로 시집가서 홀시어머니를 예(禮)로써 섬기고 부군(夫君)을 경(敬)으로써 받들어 곤범(壼範: 부녀자의 법도)이 매우 엄하였다. 부군이 우연히 담증(痰症)으로 자리에 누워 몇 달을 위중하게 지내니 부인이 밤낮으로 간호하여 의원을 청해다가 보이고 약을 구해 써서 마침내 쾌히 나았다. 그런데 이듬해인 갑신년(甲申年)에 부군이 또 적리(赤痢)를 얻어 점차 황달(黃疸)로 변하여 3년간을 자리에 누웠는데 백방으로 구료(求療)하였으나 편작(扁鵲: 옛날의 신의<神醫>)도 묘방(妙方)이 없고 공청(空靑: 광물질<鑛物質>인 약재)도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부인이 후원에다 단(壇)을 쌓고 밤이면 북두(北斗)에 빌어 자기가 대신 죽기를 바랐으며 병증이 위급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병자의 입에 피를 드리워 점차로 다시 소생하게 되었다. 그 동안 3~4년간을 엄한 추위와 눈 내리는 밤을 구애하지 않고 백방으로 병간호를 하여 손과 발은 얼어 부르트고 손톱과 피부는 모두 빠지고 벗겨졌으나 조금도 아픈 줄을 몰랐으니 어찌 장하지 아니한가 그 부군이 삶을 얻은 것은 김씨의 성열(誠烈)이 신명(神明)을 감동케 한 소치이다. 이에 단비(短碑)에 사적을 적어 구원토록 전하노니 돌은 비록 부스러져도 이름은 묻히지 않고 그 지극한 행실과 아름다운 덕은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송사문(宋斯文) 행렴씨(幸濂氏)가 멀리 찾아와 나에게 부탁하기에 굳이 사피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여 이 글을 써서 돌아가 각(刻)하게 하였다. 기해(己亥, 1959) (음) 10월 16일 전의(全義) 이병은(李丙殷) 찬(撰)
  • 【비표】 學生天安全公泰翼妻烈婦慶州金氏紀蹟碑(학생천안전공태익처열부경주김씨기적비)

    【위치】 성수면 구신리 172전. 원구신마을 남쪽 농로 어귀 우측.
    【시기】 1961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있다.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昔先王之制 夫人有三從之道 今能行此從之道者 惟天安全公訓練大將諱東屹之後 盛鎬子泰翼之妻 慶州金氏 樹隱諱冲漢後 明國女 是也 金氏自齠齡 孝從父母 嫁歸孝尊嫜敬夫君 坊里極稱其孝 夫君嬰疾委席數年 兼以眼昏百方醫治 産業整竭 生計無路 乃負兒行傭 甘旨之供 未嘗乏絶 忽於夫君疾革 將至殞命 蒼黃罔措 裂指注血 終不得回天命焉 與其從夫殉義 曷若善育幼孤 永保夫家 終身不改 固守一與齊之義也 不强然含痛 未遂常義 此卽不喪 生而行益 顯不隨死而節益彰者也 故鄕里揚其德而賞狀 列郡嘉其義而褒獎 可見公議之不泯也 其子宗根龍根元根 將竪石欲彰母德 袖列郡儒狀而來請 余以記文 於戱仁聲所聞之 令人有感 莫若孝烈也 故特書烈婦紀蹟碑 字使歸而刻之焉
    乙酉光復後辛丑 正月 日 南原 梁昌權序
    【풀이】 옛날 선왕의 법도에는 부인들이 삼종지도(三從之道)를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 삼종지도를 능히 행하는 사람은 오직 경주 김씨(慶州金氏)로 훈련대장(訓練大將) 동흘(東屹)의 후손인 천안(天安) 전성호(全盛鎬)의 아들 태익(泰翼)의 처이다. 김씨는 수은(樹隱) 충한(態漢)의 후손 명국(明國)의 따님인데, 어려서부터 효로 부모를 섬겼고, 출가해서는 시부모를 존봉(尊奉)하고 지아비를 공경하니 고을에서 그 효를 매우 칭찬하였다. 지아비가 병에 걸려 수년 동안 자리를 보전하여 눈이 보이지 않게 되자 백방으로 치료하였고, 가산이 바닥나 생계가 어려워지자 아이를 등에 업고 품팔이를 하며 감지(甘旨)로 봉양하되 떨어지지 않게 하였다. 부군의 병이 갑자기 위급해지자 열지(裂指)하여 피를 넣어 주었으나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천명을 다하였다. 또한 부군을 따라 죽기보다 어린 자식을 잘 키워 집안을 보전하게 하였으며, 종신토록 한결같은 마음으로 절개를 지켰다. 강하지 못하여 애통함을 참고 따라 죽지 못한 것이나, 이는 죽지 않고 살아서 행실이 더욱 두드러지며 절개가 더욱 빛난 것이다. 고로 고을에 덕이 떨치고 열군(列郡)에서 의를 가상히 여겨 상과 추천장을 내렸으며, 공의(公議)를 거쳐 불민(不泯)하도록 포장(褒狀)하였다. 아들 종근(宗根)·용근(龍根)·원근(元根)이 장차 비석을 세워 모친의 덕을 빛내려 하여, 열군의 유장(儒狀)을 가지고 찾아와 나에게 글을 써주기를 청하였다. 지금 사람들이 이와 같은 효열을 보고 감동을 받을 것이니, 오호라! 어진 행의가 들리는 바 사람으로 하여금 감격하게 함이 효열보다 더한 것이 없도다. 이에 특별히 ‘烈婦紀蹟碑’라고 써서 돌아가 새기게 하노라. 광복 후 신축(光復後辛丑)년 정월 일 남원(南原) 양창권(梁昌權) 서(序)
  • 【비표】 烈女淑夫人金海金氏之碑(열녀숙부인김해김씨지비)

    【위치】 성수면 구신리 374-4. 장성마을 진입로 좌측.
    【시기】 1928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있다. 높이 116cm, 너비 41cm, 두께 1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烈女淑夫人金海金氏 濯纓先生後裔炳眞女 全州人 李昌華之妻 溫寧君諱裎 壬亂功臣 司果諱天斗 漢城左尹諱亨春 通德郞諱之邦 承旨諱致煥 夫之父祖以上 夫亦至通政大夫 金氏自幼有賢淑之譽及于歸事舅姑以孝 相君子以禮 夫偶嬰疾 竭力調治 時値冬節 不避風雪夜登白馬山 禱天祈神願以身代之際 虎吼燐飜少不畏忌數月餘一日 至甚谹 割剮屑口暫甦 後五日金氏身遭奇疾 謂其夫曰 善保稚子禎弼 以成家道言訖而歿 時年二十七也 噫 凜凜其烈以身代夫死 爲千古女士中模楷 所以士林感薦 郡道褒題事載郡道誌及網獻文獻錄 揆其實蹟允合綽楔闡揚而時異制變尙在湮沒無聞矣 秉彛具性者先此表彰而千里繭足 求余記實之文 其言哽咽有足以憾人者 余何能不文辭 略綴其言以爲記
    崇祿大夫禮曹判書 奎章閣提士 金宗漢 序
    正憲大夫 前 議政府兼 奎章閣判書 朴箕陽 書
    【풀이】 열녀 숙부인(조선 헌종 12년[1846]〜고종 11년[1874])은 김해 김씨 탁영 선생의 후손인 병진(炳眞)의 따님으로 전주 후인 이창화(李昌華, 헌종 4년, 1838년〜1912년)의 처이다. 온녕군 휘 정(遼)과 임진란(壬辰亂) 공신(功臣)으로 사과(司果)를 지낸 휘 천두(天斗), 그리고 한성좌윤을 지낸 휘 형춘(亨春), 통덕랑을 지낸 휘 지방(之邦), 승지를 지낸 휘 치환(致煥)이 지아비의 부조(父祖) 이상이고, 지아비 또한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열녀 김씨는 어려서부터 어질고 행실이 바르기로 이름이 났으며, 시집을 와서도 시부모님 섬기기를 효로써 다하고, 남편 받들기를 예로써 다 하였다. 어느 날 지아비가 우연히 질병에 걸리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고 보살피던 중, 추운 겨울을 맞아 눈바람 몰아치는 한밤중도 무릅쓰고 백마산에 올라 자신의 몸을 대신하여 지아비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천지신명께 빌며 기도를 드렸다. 그 때 호랑이가 으르렁대고 도깨비불이 번쩍거려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않고 수개월을 하루같이 정성을 다 하였다. 그래도 지아비의 병이 더욱 악화되자 자신의 살을 베어내어 가루를 내어 입맛에 맞게 지아비에게 먹이니 소생하였다. 그 후 5일 뒤 열녀 김씨는 할고(割股)의 후유증으로 자신이 아주 기이한 질병을 얻게 되었다. 이에 지아비를 불러 이르기를 어린 아들 정필(禎弼)을 잘 보살펴서 가풍을 잘 이루시라고 말을 마친 후 그대로 운명하니, 그 때의 나이가 27세였다. 아 슬프도다! 늠름한 열녀의 기상이여! 자신이 지아비를 대신하여 목숨을 바쳐 죽으니 천고 여인의 역사에 훌륭한 본보기가 될 것인 바, 이런 연유로 유림 학자들이 감동하여 군과 도에 추천하여 포상하고 기록하니, 이 일이 군지와 도지와 강헌문헌록에 실려 있다. 이러한 사실을 헤아려 보니 진실로 열녀문을 세워 세상에 널리 알리고 빛나게 함이 합당하나, 세월이 바뀌고 제도가 변하여 위의 사실들이 오히려 묻히고 소문이 사라지니, 천성을 곧게 지키고 품성을 갖춘 뜻 있는 후손들이 우선적으로 조상의 이러한 일을 드러내 밝히고자 천리길을 발이 부르트게 와서 나에게 이 사실을 글로 기록해 줄 것을 바라니, 그 말이 목을 메이게 하고 족히 사람을 감탄케 하고 슬프게 하는 바, 내 어찌 감히 글을 짓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 사실을 간략히 요약하고 다듬어서 이에 기록하노라. 숭록대부예조판서규장각제사 김종한이 서문을 짓고, 정헌대부전의정부겸규장각판서 박기양이 글씨를 쓰다. 공자 탄생 2479(1928)년 무진(戊辰) 3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