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연담거사 최치환 효행비(蓮潭居士崔致煥孝行碑)
【비표】 蓮潭居士耽津崔公致煥孝行紀蹟碑(연담거사탐진최공치환효행기적비)
【위치】 성수면 도통리 424. 조실길 북동쪽 변두리.
【시기】 1982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29cm, 너비 42cm, 두께 21cm.
【개요】 탐진최씨 재각인 지덕재(智德齋) 건너편에 최만성 비와 최치환 비가 좌우로 세워져 있다.
【비문】 孝爲天下萬古之大經, 故堯舜之道, 亦孝悌而己. 盖五品之中, 事親爲首, 故孝爲百行之源, 萬善之本, 而修齊治平, 従此出焉. 豈不爲大經㦲? 由是孝子一出, 則千里之外, 聞風興起, 矧此學文兼備㦲? 曰耽津人崔蓮潭先生, 諱致煥, 字文秀, 高麗平章事謚莊景公諱思全爲鼻祖. 吏部尙書諱應奎, 其中祖也. 五傳諱沃, 以禦侮將軍至麗社旣屋, 抗節不仕, 謚貞簡公, 是生諱臨江, 成均生員. 是生諱膺遇, 中宗祖以扶社原從二等功臣, 官至通訓大夫益山倅, 謚忠貞. 於公爲十四世祖也.高祖諱聖福工曺叅議, 諱養直諱寧諱景老, 高與祖若曾祖, 而并著孝行. 妣安東金氏, 孝著鄕隣, 有三男, 公其長也. 憲宗丁酉正月七日擧公于第, 自幼志學, 以尊聖模賢四字, 爲脈膺, 而篤孝其親, 輕暖甘脆, 盡其口體之養, 其考遘奇疾, 百方治療, 病勢愈重, 愛護若嬰孩, 大小便躬執其器, 一不委人, 十二年如一日, 而醫云鳶肉好, 故公廣求至數百里外, 而終不求, 回路中, 數三兒童, 戱鳶而遊, 故重價買歸, 和藥進之, 果得其効. 後又沉重公, 又出外求藥, 而當村前潦水汎漲, 勢不能渡, 公號天哀訢, 水忽中斷, 蒼黃急渡, 洎至江畔, 水漲復合, 天地感應, 無加於此, 烏不可壯哉? 一日氣息頓絶, 公以血指連灌, 能禾魚蘇 三日, 終遭故, 哀痛過禮而執喪如禮, 其大夫人患腫六七朔, 吮之而拔根, 生新以安餘年, 洎丁憂三年間, 一如先考喪, 鄕隣亟稱其孝, 而鄕道交薦, 宜有天褒而運蔑未蒙, 此所以汲汲於銘石, 而其孫漢洙, 要役於余, 余亦秉彜所存, 豈敢辭之固耶?據其鄕儒上書道儒發文, 而書其所感, 一以頌彰孝爲先之道, 一以警㤀祖叛經者, 而系之銘曰, 高矣蓮潭 孝源曾閔 兼備學行 阿誰不式 名傳萬年 公得其詮 聿修燦然 賢人之阡. 歲昭陽大淵獻之 上月 下絃 慶州 金正復 謹撰 金海 金鍾寬 謹書.
【풀이】 효(孝)는 천하(天下)에 만고(萬古)토록 변하지 않는 대경(大經)이다. 그러므로 요순(堯舜)의 도리도 또한 효제(孝悌)일 따름이다. 대체로 오품(五品) 중에 사친(事親)이 가장 우선이 되는 까닭에 효는 백행(百行)의 근원이고 만선(萬善)의 근본이며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가 이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어찌 대경(大經)이 되지 않겠는가? 이런 까닭에 효자가 한 명 나오면 천리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소문을 듣고 흥기(興起)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이 분은 학문(學文)까지 겸비하였음에랴. 탐진(耽津) 사람 최연담(崔蓮潭) 선생은 휘(諱)가 치환(致煥)이고 자(字)는 문수(文秀)이며,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시호(諡號)가 장경공(莊景公)인 휘(諱) 사전(思全)이 비조(鼻祖)이고,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낸 휘 응규(應奎)가 그 중시조(中始祖)이다. 이로부터 5세(世)를 전하여 휘 옥(沃)은 어모 장군(禦侮將軍)으로서 고려 왕조가 이미 망하자 절의(節義)로 항거하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이 분이 휘 임강(臨江)을 낳았는데 성균관 생원이었고 이 분이 휘 응우(膺遇)를 낳았는데 중종(中宗) 때 사직(社稷)을 부지(扶持)한 2등 원종 공신(原從功臣)으로서 벼슬이 통훈 대부(通訓大夫) 익산 현감(益山縣監)에 이르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이 분이 공에게 14세조(世祖)이다. 공의 고조(高祖)는 휘가 성복(聖福)으로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냈고 휘 양직(養直)과 휘 령(寧)과 휘 경로(景老)가 선고(先考)와 조(祖) 및 증조(曾祖)인데 모두 효행(孝行)으로 드러난 분들이다. 선비(先妣)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효심이 향리와 이웃에 알려졌고 아들 셋을 낳았는데 공이 장남이다. 헌종(憲宗) 정유년 정월 7일에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성인을 존경하고 현자를 본받는다[尊聖模賢]’는 네 글자를 맥락으로 삼아 가슴 속에 품었으며 어버이에게 매우 효성이 깊어서 가벼운 의복과 따뜻한 잠자리와 달고 연한 음식 등을 장만하여 부모의 입맛과 몸에 맞는 것들을 모두 봉양하였다. 공의 선고(先考)가 이상한 질병에 걸리자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나 병세가 갈수록 중해지니 마치 어린 아이를 사랑하고 보호하듯이 모시면서 대소변을 몸소 자기 손으로 받아내고 한번도 남에게 맡긴 적이 없었으며 12년 동안을 하루처럼 똑같이 그렇게 하였다. 의원(醫員)이 말하기를, “솔개 고기[鳶肉]가 이 병에 좋다.”고 하였으므로 공은 솔개 고기를 널리 구하려고 수백 리 밖에까지 갔다가 끝내 구하지 못한 채 돌아오는 길에서 어린애들 서너 명이 솔개를 데리고 장난치며 노는 것을 보고는 비싼 값을 주고 사갖고 돌아와서 약에 섞어 선고에게 드리니 과연 그 효험을 보게 되었다. 뒤에 다시 병세가 위독해지자 공은 다시 약을 구하려고 밖에 나가보니 마을 앞에 냇물이 불어나서 건널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이 하늘에 울부짖으며 애달프게 호소하니 냇물이 갑자기 흐름이 끊겼다. 이에 공은 급히 서둘러 내를 건너 건너편 강가에 이르자 냇물이 다시 합쳐져 세차게 솟구치며 흘렀으니 하늘과 땅이 공의 효심에 감응(感應)한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으니 어찌 장하지 않겠는가. 어느 날 하루는 부친의 숨[氣息]이 갑자기 끊기자 공은 자기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서 연거푸 부친의 입속에 흘러들게 하여 사흘간 소생시켰다. 마침내 상(喪)을 당하자 예법보다 지나칠 정도로 애통(哀痛)하였고 상례(喪禮)도 예법대로 치렀다. 그 대부인(大夫人)께서 6-7달이나 종기(腫氣)를 앓았는데 공이 고름을 빨아내어 뿌리를 뽑아내자 새 살이 돋아나서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냈으며 상을 당한 뒤로 삼년 동안 하루처럼 복상(服喪)하는 것을 선고의 상을 당했을 때와 똑같이 하였으므로 향리와 이웃이 그 효성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였고 향도(鄕道)가 서로 천거하였으니 마땅히 임금의 포상이 있어야 하는데도 운이 없어서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런 까닭에 비석에 새기는 일을 서두른 것이며, 공의 손자인 한수(漢洙)가 나에게 일을 요청하였는데, 나 또한 떳떳한 성품을 갖고 있으니 어찌 감히 고사(固辭)하겠는가. 향유(鄕儒)들이 올린 글과 도유(道儒)들의 발문(發文)에 근거하여 그 느낀 점을 써서 한편으로는 공의 효행을 드러내고 조선(祖先)을 위하는 도리를 칭송하고, 한편으로는 조상을 망각하고 원칙[經]을 배반하는 자들을 경계하노라. 명(銘)은 다음과 같다. 훌륭하도다 연담(蓮潭) 선생이여 / 효행이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에 근본하였네 / 학행(學行)까지 겸비하였으니 / 어느 누가 존경하지 않겠으랴 / 명성이 만년토록 전해지니 / 공은 그 설명을 얻었노라 / 이에 반짝이는 비석을 세웠노니 / 어진 분이 묻혀있는 무덤길이네. 歲 昭陽大淵獻(癸亥, 1983) 상월(上月) 하현(下絃) 경주(慶州) 김정복(金正復) 삼가 찬하고, 김해(金海) 김종관(金鍾寬) 삼가 쓰다.
【비표】 烈女淑夫人金海金氏之碑(열녀숙부인김해김씨지비)
【위치】 성수면 구신리 374-4. 장성마을 진입로 좌측.
【시기】 1928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있다. 높이 116cm, 너비 41cm, 두께 1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烈女淑夫人金海金氏 濯纓先生後裔炳眞女 全州人 李昌華之妻 溫寧君諱裎 壬亂功臣 司果諱天斗 漢城左尹諱亨春 通德郞諱之邦 承旨諱致煥 夫之父祖以上 夫亦至通政大夫 金氏自幼有賢淑之譽及于歸事舅姑以孝 相君子以禮 夫偶嬰疾 竭力調治 時値冬節 不避風雪夜登白馬山 禱天祈神願以身代之際 虎吼燐飜少不畏忌數月餘一日 至甚谹 割剮屑口暫甦 後五日金氏身遭奇疾 謂其夫曰 善保稚子禎弼 以成家道言訖而歿 時年二十七也 噫 凜凜其烈以身代夫死 爲千古女士中模楷 所以士林感薦 郡道褒題事載郡道誌及網獻文獻錄 揆其實蹟允合綽楔闡揚而時異制變尙在湮沒無聞矣 秉彛具性者先此表彰而千里繭足 求余記實之文 其言哽咽有足以憾人者 余何能不文辭 略綴其言以爲記
崇祿大夫禮曹判書 奎章閣提士 金宗漢 序
正憲大夫 前 議政府兼 奎章閣判書 朴箕陽 書
【풀이】 열녀 숙부인(조선 헌종 12년[1846]〜고종 11년[1874])은 김해 김씨 탁영 선생의 후손인 병진(炳眞)의 따님으로 전주 후인 이창화(李昌華, 헌종 4년, 1838년〜1912년)의 처이다. 온녕군 휘 정(遼)과 임진란(壬辰亂) 공신(功臣)으로 사과(司果)를 지낸 휘 천두(天斗), 그리고 한성좌윤을 지낸 휘 형춘(亨春), 통덕랑을 지낸 휘 지방(之邦), 승지를 지낸 휘 치환(致煥)이 지아비의 부조(父祖) 이상이고, 지아비 또한 통정대부에 이르렀다. 열녀 김씨는 어려서부터 어질고 행실이 바르기로 이름이 났으며, 시집을 와서도 시부모님 섬기기를 효로써 다하고, 남편 받들기를 예로써 다 하였다. 어느 날 지아비가 우연히 질병에 걸리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고 보살피던 중, 추운 겨울을 맞아 눈바람 몰아치는 한밤중도 무릅쓰고 백마산에 올라 자신의 몸을 대신하여 지아비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천지신명께 빌며 기도를 드렸다. 그 때 호랑이가 으르렁대고 도깨비불이 번쩍거려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않고 수개월을 하루같이 정성을 다 하였다. 그래도 지아비의 병이 더욱 악화되자 자신의 살을 베어내어 가루를 내어 입맛에 맞게 지아비에게 먹이니 소생하였다. 그 후 5일 뒤 열녀 김씨는 할고(割股)의 후유증으로 자신이 아주 기이한 질병을 얻게 되었다. 이에 지아비를 불러 이르기를 어린 아들 정필(禎弼)을 잘 보살펴서 가풍을 잘 이루시라고 말을 마친 후 그대로 운명하니, 그 때의 나이가 27세였다. 아 슬프도다! 늠름한 열녀의 기상이여! 자신이 지아비를 대신하여 목숨을 바쳐 죽으니 천고 여인의 역사에 훌륭한 본보기가 될 것인 바, 이런 연유로 유림 학자들이 감동하여 군과 도에 추천하여 포상하고 기록하니, 이 일이 군지와 도지와 강헌문헌록에 실려 있다. 이러한 사실을 헤아려 보니 진실로 열녀문을 세워 세상에 널리 알리고 빛나게 함이 합당하나, 세월이 바뀌고 제도가 변하여 위의 사실들이 오히려 묻히고 소문이 사라지니, 천성을 곧게 지키고 품성을 갖춘 뜻 있는 후손들이 우선적으로 조상의 이러한 일을 드러내 밝히고자 천리길을 발이 부르트게 와서 나에게 이 사실을 글로 기록해 줄 것을 바라니, 그 말이 목을 메이게 하고 족히 사람을 감탄케 하고 슬프게 하는 바, 내 어찌 감히 글을 짓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 사실을 간략히 요약하고 다듬어서 이에 기록하노라. 숭록대부예조판서규장각제사 김종한이 서문을 짓고, 정헌대부전의정부겸규장각판서 박기양이 글씨를 쓰다. 공자 탄생 2479(1928)년 무진(戊辰) 3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