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注書砥山李公倡義碑(주서지산이공창의비)

    【위치】 성수면 좌포리 515-2. 봉촌마을 어귀 공주이씨 비석군 내
    【시기】 1986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정(石亭)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48cm, 너비 55cm., 두께 24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夫忠臣義士 爲國赤誠 要在其心志 眞僞如何耳 不可以成敗死生差殊觀也 方我韓社之將屋也 數百義士 蜂起於全國 坊坊曲曲 或擧義於國內 竄身於海外 以銃以彈 甚至以空拳赤手 期欲鏖敵乃已 自有人類史以來 不多見其例 此豈非吾民族 一大誇張耶 而其中能立 旋乾轉坤之功 櫛風沐雨之績 赫赫然與日星爭光 山岳增重者 固無可論 獨抱孤高之志 無蹟可見 無功可稱 將與草木同歸 澌盡磨滅而已者 其志誠可悲也 砥山李公 抑其非其一人也歟 公諱湖溶 字乃習 砥山自號也 公州之李 顯於羅麗兩朝 入李朝 簪纓雖遜而以文學行誼 爲世推重者譜不絶書 如諱光弼 諱公迪 諱元奭 是以 曾祖 諱周瑀贈戶參 祖諱載準 中司馬同樞 考諱禹欽繕工監役 公以高宗甲子六月七日 生于鳳浦里第 自幼嶷偉其在諸兒中殆若 群鶴之一鶴焉 年未弱冠 文藻蔚然 聲噪場屋 高宗戊子秋 擢文科 爲承政院注書 若將活步於天衢 旣而 時事大非耳 所謂開化之風 席捲天地 而至上自朝廷下及閭巷莫不靡然 於是 公不復留意䆠達 退而構千仞亭於鳳凰臺上 以寓飢不啄粟之意 淵齋宋文忠公 作記美之 間與淵齋朴芸牕崔勉菴諸賢 優游乎名勝之間 以洩幽憂 丙午 勉菴先生擧義淳昌也 先生手書前注書李某爲湖南倡義大將者 而任公以一方之責 公亦奮勇自擔 誓死報國 會先生被俘浮海 則事皆蒼荒 有不可抖擻者 因循躊躇之際 突然倭騎一隊來襲公邸宅 搜索諸秘藏文件 且致鞫于全州之獄 盖以有偵探者密爲告發耳 萬死一生之餘 得保首領以釋放焉 自是之後 神精脫落 軀殼徒存 然每痛飮斗酒 自作正氣長恨之歌 以放聲浪吟 聞者爲起英雄千載不遇之感 噫 若使公得肆其平日敵愾之氣 而與讐賊大決勝負於一場 則誓不與之共戴一天審矣 昔乎 未也 公之大節如是 在家細瑣宜可略之 公沒六十七年丙寅 湖南章甫某某等 追慕公益深 將竪其碑於故里之傍 命余以文之 顧余淺薄 安敢哉 屢辭不獲 略述梗槪如右 庶或慰公之遺恨於九原否也
    檀君紀元 四千三百十九年 丙寅 大雪之節 羅州 羅鉀柱 撰 首陽 吳炳根 書
    【풀이】 무릇 충신과 의사가 나라를 위하는 붉은 적성(赤誠)의 요체는 그 심지(心志)의 진위(眞僞)가 어찌한가에 있을 따름이지 성패(成敗)나 사생(死生)에 따라 달리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바야흐로 우리 대한 사직이 장차 기울어짐에 수백 의사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봉기(蜂起)하여 혹은 국내에서 거의(擧義)하고 혹은 해외로 몸을 숨겨 총탄으로 심지어 적수공권으로 적을 무찌르고자 하였다. 인류사 이래 그런 사례는 많지 않았으니 이 어찌 우리 민족의 자랑이 아니겠는가! 그중에는 능히 건곤(乾坤)을 뒤바꿀 만큼 큰 공을 세워 밝기로는 일성(日星)과 다투고 무게로는 산악과 견줄만한 공로는 달리 논할 것이 없지만, 홀로 고고한 뜻을 지녔으나 볼만한 업적이 없고 이를만한 공적이 없어 장차 초목으로 돌아가고 마멸되어 없어진다면 그 지성(志誠)이 슬픈 일인데 지산(砥山) 이공(李公)이 그 한 사람이 아닌가 한다. 공의 휘(諱)는 호용(浩溶)이고 자는 내습(乃習)이고 지산은 자호(自號)이다. 공주이씨는 신라, 고려 양조(兩朝)에서 드러나고 본조(本朝)에 들어서는 벼슬과 문학, 행의(行誼)로 세상에 드러난 자가 족보에서처럼 끊이지 않았다. 휘(諱) 광필(光弼) 휘(諱) 공적(公迪), 휘(諱) 원석(元奭)에 이어 바로 증조(曾祖)이신 휘(諱) 주우(周瑀)는 증직으로 호참(戶參), 조(祖)는 휘(諱) 재준(載準)으로 중사마동추(中司馬同樞)였고, 부(父) 휘(諱) 우흠(禹欽)은 선공감역(繕工監役)이었다. 공은 고종 갑자(1864)년 6월 7일 좌포리 봉촌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숙성하여 다른 아이에 비하여 군계일학이었다. 약관에 이르기 전부터 문장이 아름답고 목소리가 우렁찼다. 고종 무자년(1888 고종25) 가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어 하늘을 활보할 듯하였으나 이윽고 시사(時事)가 크게 잘못되었으니 이른바 개화(開化) 바람이라는 것이 천지를 석권(席捲)하여 위로는 조정에서부터 아래로는 여항(閭巷)에 이르기까지 휩쓸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에 공은 다시는 벼슬길에 마음을 두지 않고 물러나 봉황대(鳳凰臺) 옆에 천인정(千仞亭)을 지었는데 굶주려도 곡식을 쪼아 먹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인데, 연재(淵齋) 송문충공(宋文忠公, 宋秉璿)이 기문(記文)을 지어 아름답게 여겼다. 간간이 송 연재, 박운창(朴芸牕, 朴性陽), 최면암(崔勉菴, 崔益鉉) 등 여러 현자와 함께 명승지(名勝地)를 찾아 한가롭게 지내며 가슴속 깊은 근심을 드러내었다. 병오년(1906 고종43) 면암 선생이 순창(淳昌)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선생이 손수 전 주서(前注書) 이(李) 아무개를 호남 창의대장(湖南倡義大將)으로 삼는다고 쓰고 공에게 한 지방의 책임을 맡겼다. 공 또한 용감하게 떨쳐 일어나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할 것을 맹세했다. 마침 면암 선생이 포로가 되어 바다를 떠돌게 되니 일이 모두 급작스레 어찌할 수 없게 되어 진작(振作)할 수 없게 되었다. 머뭇거리며 주저하고 있을 때 갑자기 왜(倭)의 기병(騎兵) 1개 부대가 공의 저택을 습격하여 비장(秘藏)하고 있던 여러 문건을 수색하고 또 전주의 감옥에서 공을 국문(鞠問)했는데 이는 정탐하는 자가 밀고했던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그 우두머리의 보증으로 석방되었으나 이로부터 정신이 빠져나가고 껍데기인 몸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말술을 통음(痛飮)할 때마다 스스로 지은 정기 장한(正氣長恨)의 노래를 목을 놓아 눈을 흘리며 읊어서 듣는 사람들이 때를 만나지 못한 영웅에 대한 느낌을 가졌다. 아, 만약 공으로 하여금 평소에 적에게 분노하던 기개를 마음껏 발휘하여 원수의 도적과 한바탕 크게 승부를 겨루게 하였다면 맹세코 그와 함께 같은 하늘 아래 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애석하다, 그러지 못했구나. 공의 대절(大節)은 이와 같으나 집에서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생략하는 것이 가하다. 공(公)의 별세 후 67년이 지난 병인(丙寅, 1986)년에 호남의 선비 모모 등이 공을 추모하는 마음이 더 깊어져 향리(鄕吏) 옆에 비를 세우고자 나에게 글을 구하매 내 글이 천박하여 어찌 감당하겠는가 여러 번 사양하였지만 이루지 못하여 대략 우와 같이 약술하니 혹 구원(九原, 저승)에서라도 공의 유한(遺恨)에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단기 4319(1986)년 대설절에 나주(羅州) 나갑주(羅鉀柱) 찬하고 수양(首陽) 오병근(吳炳根)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