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습재 최제학 기념비(習齋崔濟學紀念碑)
운영자 23-12-22 14:20 59 hit
【비표】 愛國志士習齋崔濟學先生紀念碑(애국지사습재최제학선생기념비)

【위치】 성수면 도통리 352. 목동마을 남쪽.
【시기】 1987년
【형태】 높이 177cm, 너비 60cm, 두께 32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이곳 삼우당(三友堂)은 명문 탐진 최씨의 터로 효계의 가풍이 면면히 이어온 곳이며, 또 을사조약 직후에 의열에 불타던 최제학(崔濟學) 선생이 그 스승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을 받들고 호남 최초로 의병활동을 준비하던 곳이다. 선생의 자는 중열(仲悅)이요, 호는 습재(習齋)이다. 1882년 3월 아버지 성호(成鎬)와 어머니 흥덕 장씨의 차남으로 이곳 목동에서 태어나시었다. 일찍이 불류재(不流齋) 이기회(李起晦)의 문하에 들었고,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선생을 받들던 중 면암을 흠모하여 사제의 의리를 맺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통분한 선생은 곧 면암과 송사를 찾아 구국의 계책을 품의하고, 다음해 정월에 수남(秀男) 고석진(高石鎭)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방책을 마련한 뒤, 면암의 뜻을 받들어 돈헌(遯軒) 임병찬(林秉瓚)과 초기 의병활동 주도세력을 규합할 때, 돈헌은 태인(泰仁)의 종석(鍾石) 여막을 거점으로 하고, 습재는 면암을 이곳 임실태수 조규하(趙奎夏), 운봉주서 박봉양(朴鳳陽), 영남 면우(勉宇) 곽종석(郭鍾錫), 화개 강두령(姜頭領) 등과 연락하여 뜻을 모으며 형인 약천(若川) 제태(濟泰)와 함께 가산을 팔아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나이 25세에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순창으로 무기를 옮길 때 상여를 꾸며 일제의 눈을 피하였으니, 그 같은 지혜와 용기에 대하여 그 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면암이 없으면 습재도 없고, 습재가 없으면 면암도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녹슬은 창칼이 저들의 신예 무기를 대항할 수 있었으랴! 이때에 패진과 동시에 일광(一狂) 정시해(鄭時海)는 순국하고, 왜적에게 끌려가 면암은 3년, 돈현은 2년의 형을 비롯하여 선생과 수남도 4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출옥한 선생은 대마도로 면암을 찾아 극진히 간병하다가 면암이 순국하시니 장례를 극진히 모시었다. 고향에 돌아와 고산(高山) 윤자신(尹滋臣)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기회를 노려 방랑하다가 단기 4284년 가을에 지리산 하동 청암에 들어가 은거하던 중, 단기 4292년 가을에 한 많은 일생을 마치시니 78세였다. 실로 선생은 대한제국 말기의 쓰라린 역사 속에, 그리고 나라를 잃은 통분 속에, 또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혼란 속에 충렬과 정의에 몸부림치다가 돌아가시었으니, 이 의롭고 빛나는 일생을 기리어 작은 이 돌에 선생의 행적 일부나마 새겨 이 나라 자손 만대에 길이길이 전하고자 한다. 단기 4321년 12월 20일 대한민국 순국선열 유족회장 최창규(崔昌圭) 지음. 광복회원 정상렬(鄭相烈)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