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흥덕장씨 효열비(興德張氏孝烈碑) / 탐진 최치서 기적비(耽津崔公致瑞紀蹟碑)
운영자 23-12-22 14:20 76 hit
【비표】 興德張氏孝烈碑(흥덕장씨효렬비)
【비표】 耽津崔公致瑞紀蹟碑(탐진최공치서기적비)


【위치】 성수면 도통리 631-1. 원도통마을 어귀 외자로변.
【시기】 1973년
【형태】 비 주변은 석제 담장으로 둘려 있고,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30cm, 너비 45cm, 두께 20cm.
【개요】 이 비는 부강문(扶綱門) 내에 흥덕장씨와 아들 최치서 기적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흥덕장씨 효열비(興德張氏孝烈碑)
【비문】 月浪之鄉 木洞之里 孝烈婦張氏 莊景公 思全後 景祚妻也 太師公吉後 穉和女也 生長深閏 以嬿婉聞及其鳩居 事親極孝 奉夫克敬 愛育前配稚子 而奄作朝露 淚目未乾 隣里稱其賢 年卄三 夫病 垂絶注以指血 啖以股肉 甦延三日 而卒即欲下從夫 昏迷몽語曰 吾死命也 婦人今有身生而保育奉先立後則孝烈得矣只以殉從爲心則不過徑情之行吾何瞑目於隂界乎婦人恪遵遺志飮泣抱痛葬祭踰禮固守召史之節每於夫日悲痛如初終生子致瑞不以恩掩義使之摳衣於勉菴崔先生門篤修學業先生舉義誓死同盟力說熊掌之辨嚮導衛正斥邪之義一生一心飮恨而終鳴呼母以孝烈子以忠義孫以闡先流休範於季世綱常大道華在一家冝乎儒林薦之載錄載誌而余以文拙不得發揚光輝何遂銘曰 法家閨養 天姿端淑 惟孝惟烈 本於天植 夫病贍護 漸至危劇 不心己心 夫戒懇篤 指血無靈 繼以股肉 大命有限 竟至晝哭 大賢門下 命子修業 先生舉義 俾參盟錄 義氣撑空 衛正斥邪 以之報師 以之報國 翼然豎碑 爲世柯則
檀紀四千三百十六年癸亥應鍾月上日
晋陽河千秀 謹撰 金海金鍾寬 謹書
【풀이】 월랑땅 목동마을의 효열부 장씨는 장경공 사전의 후예인 경조의 아내인데 태사공 길의 후손인 치와의 따님이다. 원래 양반 가정의 규수로 마음씨 곱기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출가함에 어버이를 극진히 섬기고 부군을 공경스럽게 받들 뿐 아니라 전실 소생의 어린 자식까지도 사랑으로 정성껏 보살펴 이웃 사람들로부터 어질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나이 스물 셋에 부군께서 병을 앓아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바치고 허벅살을 베어 바치는 등 갖은 정성을 기울여 사흘 동안이나 꺼져가는 목숨을 연장시켰고 돌아가시자 곧바로 그 뒤를 따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군께서 혼미한 중에 부탁하기를 “나의 죽음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라, 부인은 지금 홀몸이 아니니 딴 뜻을 두지 말고 뱃속의 아이를 낳아 잘 길러 대를 이은 즉 효열을 얻을 것이라, 다만 나를 따라 목숨을 끊을 마음을 먹는다면 이는 곧 사사로운 정에 끌리는 행동일 것이오. 내 어찌 음부에서나마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으리오?” 하였다. 이에 부인은 부군의 유지를 받들어 비통한 마음을 달래며 예로써 장례를 치르고 홀어머니로서의 절개를 굳게 지키고 항상 비통한 마음을 한결같이 두었다. 이처럼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 치서를 엄히 가르치어 장성함에 면암선생의 문하로 보내어 학업에 열중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께서 의병을 일으킴에 공은 죽기를 맹세하고 뜻을 같이 하여 의리를 부르짖고 정의를 위해 앞장서서 싸우며 한 평생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다가 나라 잃은 한을 머금고 이생을 마치었다. 오호라! 어머니는 효열로 살고, 아들은 충의로 살고, 손자는 선영을 드러내는데 힘써 이 말세에 모범이 되고 강상대도가 온 집안에 빛나도다. 이에 유림은 이를 마땅히 여겨 각종 책에 기록한 바 있는데 나는 짧은 글로 이러한 사적을 다 들출 수 없어 몇자 새김을 붙여두노니, 銘曰, 법도있는 집안에서 곱게 자라나 / 품으신 마음 곱고 고왔네 / 이처럼 효열스런 그 마음도 / 타고난 천성일 터라 / 깊어지는 님의 병을 / 정성껏 돌보다가 / 하릴없이 되고보자 / 님의 뒤를 따르려고 마음 두었네 / 손 끊고 살 베어도 / 어찌할 수 없노니 / 인명은 재천인가. / 그만 홀로 되었네 / 크신 스승님께 / 귀한 자식 보냈거니 / 스승님 크신 뜻에 / 목숨 바쳐 뒤 따랐네 / 의로운 기운은 하늘을 뚫고 / 올바른 마음이 가슴 속에 가득하니 / 스승님께 보답하고 / 나라위한 일이었네 / 거룩한 부인의 뜻 길이길이 비에 새겨 / 어지러운 이 세상에 법도를 삼아보세.
단기 4306(1973)년 계해 10월 상일
진양 하천수 삼가 짓고, 김해 김종관 삼가 쓰다.

탐진 최치서 기적비(耽津崔致瑞紀蹟碑)
【비문】 勉庵崔先生 道學文章 忠孝節義 與日星並耀門多 耽津崔氏其縁由則習齊崔公濟學 勉庵舉義 爲招募迎入 此地 紏合同志 傾産籌備 故自然一門成蹊 耽津崔公 諱致瑞 字泰眞 亦其一也 及夫先生倡義 公與諸友歃血叅 同盟誓死 從先生於矢石 爲義㤀軀 先生被執繫 馬島抗賊 不食倭粟 而歿 公以精神 貫日華夷 見氣節凌霜 天地知之句 痛哭而加麻 一生一心仰慕 虎頭燕頷之風 常誦楚辭 與熊掌章讓彼附倭 知非遷善 臥薪嘗膽 竟至寃逝 崔氏以麗朝大賢 諡莊景 配仁宗廟廷 諱思全 爲始祖 贈戶曺叅判 諱萬成后 德多載 先代狀碣故 略之 公之事親 孝爲國忠 尊師義特出 於天賦之性 鄉省章甫議曰 挽回世途 五儒之責孤忠苦節之可以爲模範 於人者 是爲警俗之金柝 耽津崔公 嘉行徽蹟當闡 而揚之鐫而傳之 仍使其子 龍鉉 璟鉉 齎遺事與諸斯文來 余責其銘噫此豈如 余愚迷者所敢承當者乎 然余嘗欽慕公之歷履銘 諸肝肺且 不得辭諸賢之命 孝子之誠遂拜 銘曰 孝篤行潔 餘事文章 先生舉義 誓心従之 棟樑遽摧 一木難支 仁天下助 萬邦含悲 臥薪嘗膽 遹追先師 公議竣發 豎此穹碑
歲昭陽大淵獻之上月下絃 慶州金正復謹撰 金海金鍾寬謹書
【풀이】 면암 최익현선생의 도학문장과 충효절의는 해나 별과 더불어 빛날 것인데 그 문하에는 탐진최씨가 많다. 그 이유인즉 습재 최제학이 면암이 의병을 일으킬 때에 초모장이 되어 선생을 이 땅으로 모시고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가산을 기울여 의병활동을 준비했기 때문이라 자연히 한 집안이 뒤따라 모였던 것이다. 탐진최공 치서의 자는 태진이니 이도 또한 그러한 연유로 모인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면암께서 의병을 일으킴에 공을 비롯한 여러 동지들은 죽기를 맹세하고 뒤를 따라 의를 위해서 한 몸을 버리기로 작정한 바 있었고, 면암께서 대마도로 붙잡혀 가시어 끝내 왜놈의 곡식을 먹지 않으리라고 항거하시다가 돌아가심에 공은 ‘빼어난 애국정신은 해라도 뚫고, 높으신 절의는 서리보다 더 하다’는 추모시를 읊고, 제자의 예를 다하여 장례를 모셨다. 이 같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항상 면암선생의 풍모를 우러러 사모하며 언제나 굴원의 절개와 맹자의 의리를 읊으며 왜놈에 붙은 간사한 무리들이 돌아설 것과 국운을 회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끝까지 지니었다가 마침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원통히 일생을 마쳤다. 최씨는 고려조의 대현 장경공으로 인종묘정에 배향되어 있는 사전을 시조로 하고, 증 호조참판 만성의 후예로 그 빛나는 행적이 선대의 금석에 적혀 내려오기 때문에 약(略)하거니와 공은 부모에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스승을 높히 받드는 윤리실천이 천성적으로 남달랐다. 그리하여 고을의 여러 선비들이 의론하기를 ‘세도를 만회하는 것이 우리 유림의 책무라 공의 높은 충절은 가히 타인의 모범되고 또 풍속을 일신하는 데에 좋은 귀감이 될 만하다. 그러하니 탐진최공의 행적을 마땅히 드러내고 금석에 새겨 전함이 옳다.’고 하였다. 이에 공의 아들되는 용현, 경현이 남겨진 사적을 들고 여러 사문들과 함께 나를 찾아와 글을 부탁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매한 내가 어찌 이같은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한편 내 일찍이 공의 지난 사적을 흠모하여 가슴에 새겨둔 바라 어찌 꼭 사양만 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져 다만 제현의 명과 효자의 성의에 따라 기꺼이 명(銘)하노니, 두터운 효심과 맑은 행실이 근본이요 / 글공부는 다음이라 / 선생의 거의에 / 마음 다해 따랐으나 / 대들보 무너짐에 / 한 나무로 버틸까? / 하늘도 무심하지 / 온누리 울었네 / 나라를 못잊고 / 선생을 못 잊었다니 / 높으신 공의 뜻을 / 이 돌에 새겨두오
癸亥 시월 하순 경주 김정복 삼가 짓고, 김해 김종관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