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송사 최만성 신도비(松史崔萬成神道碑)
운영자 23-12-22 14:20 58 hit
【비표】 嘉善大夫戶曹參判松史崔先生神道碑(가선대부호조참판송사최선생신도비)【위치】 성수면 도통리 424. 조실길 북동쪽 변두리.

【시기】 1980년 1월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2cm, 너비 54cm, 두께 23cm.
【개요】 탐진최씨 재각인 지덕재(智德齋) 건너편에 최만성 비와 최치환 비가 좌우로 세워져 있다.

【풀이】 최만성(崔萬成)의 자는 사추(士樞)요, 호는 송사(松史)로 탐진인(耽津人)이다. 장경공(莊景公) 사전(思全)의 후예로 증참의(贈參議) 세원(世遠)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영오(穎悟)하고 재기(才器)가 남달랐고, 효성이 지극하여 어려서부터 부모의 심기(心氣)가 불편한 듯하면 한 시라도 옆을 떠나지 않고 사당(祠堂)에 들어가 속히 쾌유(快癒)하기를 빌었다. 스승을 모시고 글을 배움에 한 번 들은 글귀는 잊지 아니하고 암송(暗誦)하였으며, 운(韻)을 부르면 곧바로 시문(詩文)을 지어내어 문재(文才)가 날로 훌륭해졌다. 그리하여 향시(鄕試)에 이르러 문명(文名)을 온 고을에 떨치게 되었다. 부친께서 병환이 위중하니 보름이 넘도록 약 수발을 정성껏 드리며 밤낮을 불구하고 쉴 줄 몰랐으며, 친상(親喪)을 당해서는 죽 마저도 입안에 넣지 않고 심히 애통히 하였다. 그리하여 주위에서 억지로 권하여 겨우 진정시켰다. 집안 형편이 빈한(貧寒)한데도 망극한 일을 당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홀연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그대가 길지(吉地)를 구하고자 한다면 아무 산 아무 향의 자리보다 더한 곳이 없으니 그리 알라"고 하였다. 문득 깨어나 아침을 기다려 꿈대로 자리를 찾으니, 과연 전날 꿈에 계시 받은 자리가 있기에 온 재산을 기울여 선고(先考)를 모셨다. 그 소문을 들은 사람마다 공의 장한 효심에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공의 나이는 12살이었다. 그 후, 홀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 아니라 생전의 봉양은 물론 상제(喪祭)의 정성도 시종 여일(始終如一)하여 누구나 하늘이 낸 효자(孝子)라고 칭송하였다. 공은 평거(平居)에 간중 과묵(簡重寡黙)하여 바깥 사물에 중심을 잃지 않고 항상 정좌(靜坐)하였으며, 손에서 책을 떼지 않는 태도로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익혔다. 특히 퇴계(退溪)와 율곡(栗谷) 두 선생의 뜻을 두텁게 믿어 언제나 좌우에 그 글을 모시고 매일 읽고 힘써 행하며, 깊은 뜻을 뒷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任務)로 여겼다. 공은 지극한 효행과 깊은 학문으로 인하여 침랑(寢郞) 벼슬이 내려 졌으나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정조 갑진(甲辰, 1784)에 사림(士林)의 상언(上言)으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1980년 1월 진양 하천수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