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연담 최치환 효행비(蓮潭居士崔致煥孝行碑)
운영자 23-12-22 14:20 68 hit
14. 연담거사 최치환 효행비(蓮潭居士崔致煥孝行碑)
【비표】 蓮潭居士耽津崔公致煥孝行紀蹟碑(연담거사탐진최공치환효행기적비)

【위치】 성수면 도통리 424. 조실길 북동쪽 변두리.
【시기】 1982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29cm, 너비 42cm, 두께 21cm.
【개요】 탐진최씨 재각인 지덕재(智德齋) 건너편에 최만성 비와 최치환 비가 좌우로 세워져 있다.

【비문】 孝爲天下萬古之大經, 故堯舜之道, 亦孝悌而己. 盖五品之中, 事親爲首, 故孝爲百行之源, 萬善之本, 而修齊治平, 従此出焉. 豈不爲大經㦲? 由是孝子一出, 則千里之外, 聞風興起, 矧此學文兼備㦲? 曰耽津人崔蓮潭先生, 諱致煥, 字文秀, 高麗平章事謚莊景公諱思全爲鼻祖. 吏部尙書諱應奎, 其中祖也. 五傳諱沃, 以禦侮將軍至麗社旣屋, 抗節不仕, 謚貞簡公, 是生諱臨江, 成均生員. 是生諱膺遇, 中宗祖以扶社原從二等功臣, 官至通訓大夫益山倅, 謚忠貞. 於公爲十四世祖也.高祖諱聖福工曺叅議, 諱養直諱寧諱景老, 高與祖若曾祖, 而并著孝行. 妣安東金氏, 孝著鄕隣, 有三男, 公其長也. 憲宗丁酉正月七日擧公于第, 自幼志學, 以尊聖模賢四字, 爲脈膺, 而篤孝其親, 輕暖甘脆, 盡其口體之養, 其考遘奇疾, 百方治療, 病勢愈重, 愛護若嬰孩, 大小便躬執其器, 一不委人, 十二年如一日, 而醫云鳶肉好, 故公廣求至數百里外, 而終不求, 回路中, 數三兒童, 戱鳶而遊, 故重價買歸, 和藥進之, 果得其効. 後又沉重公, 又出外求藥, 而當村前潦水汎漲, 勢不能渡, 公號天哀訢, 水忽中斷, 蒼黃急渡, 洎至江畔, 水漲復合, 天地感應, 無加於此, 烏不可壯哉? 一日氣息頓絶, 公以血指連灌, 能禾魚蘇 三日, 終遭故, 哀痛過禮而執喪如禮, 其大夫人患腫六七朔, 吮之而拔根, 生新以安餘年, 洎丁憂三年間, 一如先考喪, 鄕隣亟稱其孝, 而鄕道交薦, 宜有天褒而運蔑未蒙, 此所以汲汲於銘石, 而其孫漢洙, 要役於余, 余亦秉彜所存, 豈敢辭之固耶?據其鄕儒上書道儒發文, 而書其所感, 一以頌彰孝爲先之道, 一以警㤀祖叛經者, 而系之銘曰, 高矣蓮潭 孝源曾閔 兼備學行 阿誰不式 名傳萬年 公得其詮 聿修燦然 賢人之阡. 歲昭陽大淵獻之 上月 下絃 慶州 金正復 謹撰 金海 金鍾寬 謹書.
【풀이】 효(孝)는 천하(天下)에 만고(萬古)토록 변하지 않는 대경(大經)이다. 그러므로 요순(堯舜)의 도리도 또한 효제(孝悌)일 따름이다. 대체로 오품(五品) 중에 사친(事親)이 가장 우선이 되는 까닭에 효는 백행(百行)의 근원이고 만선(萬善)의 근본이며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가 이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어찌 대경(大經)이 되지 않겠는가? 이런 까닭에 효자가 한 명 나오면 천리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소문을 듣고 흥기(興起)하는 법이거늘, 하물며 이 분은 학문(學文)까지 겸비하였음에랴. 탐진(耽津) 사람 최연담(崔蓮潭) 선생은 휘(諱)가 치환(致煥)이고 자(字)는 문수(文秀)이며,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시호(諡號)가 장경공(莊景公)인 휘(諱) 사전(思全)이 비조(鼻祖)이고,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낸 휘 응규(應奎)가 그 중시조(中始祖)이다. 이로부터 5세(世)를 전하여 휘 옥(沃)은 어모 장군(禦侮將軍)으로서 고려 왕조가 이미 망하자 절의(節義)로 항거하고 벼슬하지 않았으며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이 분이 휘 임강(臨江)을 낳았는데 성균관 생원이었고 이 분이 휘 응우(膺遇)를 낳았는데 중종(中宗) 때 사직(社稷)을 부지(扶持)한 2등 원종 공신(原從功臣)으로서 벼슬이 통훈 대부(通訓大夫) 익산 현감(益山縣監)에 이르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이 분이 공에게 14세조(世祖)이다. 공의 고조(高祖)는 휘가 성복(聖福)으로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지냈고 휘 양직(養直)과 휘 령(寧)과 휘 경로(景老)가 선고(先考)와 조(祖) 및 증조(曾祖)인데 모두 효행(孝行)으로 드러난 분들이다. 선비(先妣)는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효심이 향리와 이웃에 알려졌고 아들 셋을 낳았는데 공이 장남이다. 헌종(憲宗) 정유년 정월 7일에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성인을 존경하고 현자를 본받는다[尊聖模賢]’는 네 글자를 맥락으로 삼아 가슴 속에 품었으며 어버이에게 매우 효성이 깊어서 가벼운 의복과 따뜻한 잠자리와 달고 연한 음식 등을 장만하여 부모의 입맛과 몸에 맞는 것들을 모두 봉양하였다. 공의 선고(先考)가 이상한 질병에 걸리자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나 병세가 갈수록 중해지니 마치 어린 아이를 사랑하고 보호하듯이 모시면서 대소변을 몸소 자기 손으로 받아내고 한번도 남에게 맡긴 적이 없었으며 12년 동안을 하루처럼 똑같이 그렇게 하였다. 의원(醫員)이 말하기를, “솔개 고기[鳶肉]가 이 병에 좋다.”고 하였으므로 공은 솔개 고기를 널리 구하려고 수백 리 밖에까지 갔다가 끝내 구하지 못한 채 돌아오는 길에서 어린애들 서너 명이 솔개를 데리고 장난치며 노는 것을 보고는 비싼 값을 주고 사갖고 돌아와서 약에 섞어 선고에게 드리니 과연 그 효험을 보게 되었다. 뒤에 다시 병세가 위독해지자 공은 다시 약을 구하려고 밖에 나가보니 마을 앞에 냇물이 불어나서 건널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공이 하늘에 울부짖으며 애달프게 호소하니 냇물이 갑자기 흐름이 끊겼다. 이에 공은 급히 서둘러 내를 건너 건너편 강가에 이르자 냇물이 다시 합쳐져 세차게 솟구치며 흘렀으니 하늘과 땅이 공의 효심에 감응(感應)한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으니 어찌 장하지 않겠는가. 어느 날 하루는 부친의 숨[氣息]이 갑자기 끊기자 공은 자기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서 연거푸 부친의 입속에 흘러들게 하여 사흘간 소생시켰다. 마침내 상(喪)을 당하자 예법보다 지나칠 정도로 애통(哀痛)하였고 상례(喪禮)도 예법대로 치렀다. 그 대부인(大夫人)께서 6-7달이나 종기(腫氣)를 앓았는데 공이 고름을 빨아내어 뿌리를 뽑아내자 새 살이 돋아나서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냈으며 상을 당한 뒤로 삼년 동안 하루처럼 복상(服喪)하는 것을 선고의 상을 당했을 때와 똑같이 하였으므로 향리와 이웃이 그 효성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였고 향도(鄕道)가 서로 천거하였으니 마땅히 임금의 포상이 있어야 하는데도 운이 없어서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런 까닭에 비석에 새기는 일을 서두른 것이며, 공의 손자인 한수(漢洙)가 나에게 일을 요청하였는데, 나 또한 떳떳한 성품을 갖고 있으니 어찌 감히 고사(固辭)하겠는가. 향유(鄕儒)들이 올린 글과 도유(道儒)들의 발문(發文)에 근거하여 그 느낀 점을 써서 한편으로는 공의 효행을 드러내고 조선(祖先)을 위하는 도리를 칭송하고, 한편으로는 조상을 망각하고 원칙[經]을 배반하는 자들을 경계하노라. 명(銘)은 다음과 같다. 훌륭하도다 연담(蓮潭) 선생이여 / 효행이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에 근본하였네 / 학행(學行)까지 겸비하였으니 / 어느 누가 존경하지 않겠으랴 / 명성이 만년토록 전해지니 / 공은 그 설명을 얻었노라 / 이에 반짝이는 비석을 세웠노니 / 어진 분이 묻혀있는 무덤길이네. 歲 昭陽大淵獻(癸亥, 1983) 상월(上月) 하현(下絃) 경주(慶州) 김정복(金正復) 삼가 찬하고, 김해(金海) 김종관(金鍾寬)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