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효열부 전주이씨 기적비(孝烈婦全州李氏紀績碑)
운영자 23-12-22 14:20 61 hit
【비표】 學生東萊鄭公相黙之配 / 孝烈婦全州李氏紀績碑(학생동래정공상묵지배효열부전주이씨기적비)

【위치】 성수면 도통리 산127-1임. 지동마을 남쪽 진입로변.
【시기】 1985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60cm, 너비 55cm, 두께 55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東萊氏鄭은 望重鰈域이라 吏判公後에 曰有耘谷이라 其諱允泳이 有子相黙이라 早襲庭訓에 而孝而學이라 其齋李氏는 全州是籍에 起沅閨養이요 孝寧後績이라 姿性方潔에 具備四德이라 及其笄歸에 行義加勗이라 冀妻敬極에 陳婦孝篤이라 夫順婦恭에 人稱雙璧이라 和氣蕩蕩에 可期景福터니 夫罹貞疾에 長時蟄伏이라 晝宵贍護에 問醫供藥이라 秦緩無靈에 祈斗誠極이라 若歇無常에 漸至危谹이라 垂之指血하고 亦割股肉이라 夫方殊殊에 曰有懇託이 鰥舅在上에 孝事勤慤이요 稚孤在下에 煦嫗殫力하라 孝慈無欠이면 我可瞑目이라 願言夫人은 鄙意莫逆하라 延至三日에 畢竟皐復이라 夫人芳年이 才二十六이라 矢死靡他을 飜意改革이라 忍痛飮泣에 遵夫約束이라 送終如禮에 泄哀盡哭이라 勞身百役에 耘耔紡織이라 入廚上堂에 洞洞屬屬이라 問何食飮하여 問其寒燠이라 志養體養에 竭誠盡職이라 然而無嗣하니 不孝罪積이라 勸置繼室에 舅氏牢却이라 輕重緩急을 裁判胸臆이라 自爲媒婆하야 周旋親戚이라 幸得淑女하야 俾薦枕席이라 同居未幾에 無望生育이라 曰違所志에 歸守全節이라 夫人挽止에 延拕幾日이라 進舅靈丹에 强輔氣血이라 弄璋有慶에 團圝家室이라 其子相埰가 文藝秀發이라 神明感應은 夫人孝烈이라 風雨滔滔에 世無其匹이라 頌聲載路에 薦狀成軸이라 時制異古에 恩典寂寞이라 何必闡揚이 烏頭赤脚이 公議峻發에 礱此貞石이라 吾友柳川에 抄狀正確이라 導遠泰成은 儒林宿德이요 梱泳相濂은 强近親族이라 遠訪不佞하야 銘詞委囑이라 鍾權成勳이 擔當物力하니 兩婿誠意로 亦可感服이라 辭以老恤이 於心孔赫이라 忘拙書此하야 使歸之刻이라 於休徽蹟은 昏衢孤燭이라
大韓民國六十七年二月小晦 晉陽 河千秀 謹撰 慶州李容伯 謹書
【풀이】 동래 정씨는 우리나라에서 명망이 중한 집안인데 이판공(吏判公)의 후손에 운곡(耘谷)이 있다. 휘(諱) 윤영(允泳)의 자식이 상묵(相默)이라 일찍부터 가훈을 익혀 효도하고 학문하였다. 처 이(李)씨는 전주인(全州人) 기원(起沅)의 규수요, 효령(孝寧)대군의 후손이라, 자태는 방정하고 성품은 결백하여 4덕(四德)을 갖췄다. 출가한 후 행의에 더욱 힘써 기처(冀妻)처럼 극진히 공경하고, 진부(陳婦)처럼 효성이 지극하므로 지아비는 순종하고 며느리는 공경함에 사람들이 쌍벽이라 칭했다. 화기가 탕탕함에 경복을 기대함직 하였는데, 지아비가 병이 들어 오랫동안 누으니, 밤낮으로 구환하고 의원에 물어 약을 드렸으나 효험이 없었다. 북두칠성에게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했으나, 무상하게도 점점 위독해지니 손가락 피를 먹이고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였다. 지아비가 죽음에 이르러 말하기를 “홀아비된 시아비가 위에 있으니 효도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하오. 어린 아들이 아래에 있으니 힘써 훈육하고 효도와 자애가 무결하면, 나는 편히 눈을 감겠소. 원컨대 부인은 이 뜻을 거스르지 마시오”라고 하며, 사흘이 지나자 결국 숨을 거두었다. 부인 나이 20의 꽃다운 나이로 지아비를 따라 죽기로 맹세했으나, 마음을 고쳐먹고 슬픔을 참고 울음을 삼키며 지아비와의 약속을 지키기로 하고, 장례를 마침에 예절과 슬픔을 다하였다. 온갖 일을 가리지 않고 김매고 베를 짰으며, 부엌에 들거나 시아비를 뵈면 조심하여 어떤 음식을 잡수실지를 묻고, 춥고 더운지를 묻으며 뜻을 거스르지 않고 공양함에 정성과 도리를 다하였다. 그러나 대 이을 자식이 없으니, 불효하고 죄 짓는 일이라 후실을 들이기를 권했는 바, 시아비는 물리쳤으나 경중완급을 스스로 판단하여 스스로 매파가 되어 친척들에게 주선한 바, 다행히 숙녀를 구하여 침소에 들도록 천거하였으나 동거한지 얼마가 지나도 생산을 바랄 수 없었다. 그 숙녀가 이르기를 뜻대로 안 되니 자기 집으로 돌아가련다 하매, 부인이 며칠만 기다리라 하고 시아비에게 영단(靈丹)을 드려 강장(强壯)하고 기혈을 돋우어, 아들을 낳는 경사에 단란한 집안이 되었다. 그 아들 상채(相埰)가 문예에 뛰어나니 신명이 감응함은 부인의 효열 덕분이다. 풍우가 도도함에도 세상에는 그와 견줄만한 짝이 없다. 칭송소리 길에 널렸고, 천장이 성축이라 시대가 예전과 달라 정려를 내리는 은전이 없어졌으나 어찌 정려를 세우는 것만이 천양한다 하리요. 비석을 세우자는 공론이 준발하고, 내 벗 유천(柳川, 송승환[宋升煥]의 호)이 행장을 간추린 것이 정확(正確)하니 안도원(安導遠)과 전태성(全泰成)은 유림(儒林)의 덕망가요, 정곤영(鄭梱泳)과 정상렴(鄭相濂)은 가까운 친족(親族)이라. 재주없는 사람에게 멀리서 찾아와 명문을 맡기고 종권(鍾權)과 성훈(成勳)이 물력(物力)을 담당하며 두 사위 성의가 또한 감복이라,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함도 마음에 불안하여 졸함도 잊고 이 글을 써 돌아가 각하게 하니, 아름다운 자취는 민몰하지 않아 어두운 거리에 등촉과 같으리. 대한민국(大韓民國) 67년 2월 소회(小晦) 진양(晉陽) 하천수(河千秀) 근찬(謹撰), 경주(慶州) 이용백(李容伯) 근서(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