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송정 이진옥 효자려(松汀李振玉孝子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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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표 : 孝子慶州李振玉之閭(효자경주이공진옥지려)

【위치】 성수면 신기리 48. 내곡 신기저수지 제방아래 산기슭.
【시기】 1927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碑身) 높이 65cm, 너비 75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高宗戊辰 湖南儒生 進士朴膺宗等 上書于大宗伯曰 鎭安士人 李振玉 以益齋李文忠公之後孫 世趾其美 百行豁如 惟孝爲本 家貧 躬耕山而樵水而漁 爲其奉養也 聲不作其色不失 和爲其志養也 剖氷求魚 祝天身代 爲祈禱生也 母先遘疾 斷指以延三年之兪 父又病劇 亦如之然 感神之誠 終不能勝 在天之定命 連遭內外艱 六年居廬 哀毁逾禮 是豈■加入 一等之孝乎 該曹聞而駕尙 特下獎諭之訓 然未能入啓 天聰而旌表其閭 子姓又益零替 朝野拱申之狀藏之塵 苟而蠹食 斷爛可勝歎哉 嗣孫圭生 爲是之懼 竭力傾資 招工伐石 記公之事 行以耀人觀聽屬 余以記之述敍其略 俾歸刻焉 歲 柔兆攝提格 三月下浣 小華遺民 李道復記
【풀이】 고종 무진(戊辰, 고종 5, 1868)에 호남 유생 진사 박응종(朴膺宗) 등이 대종백(大宗伯, 예조판서)에게 글을 올리기를 “진안의 사인(士人) 이진옥(李振玉)은 익재(益齋) 문충공(文忠公,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서 대대로 그 훌륭함을 이어서 온갖 행실이 여유로웠고 오직 효로써 근본을 삼았으나 집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지었는데 산에서 땔나무를 해 오고 물에서 고기를 잡은 것은 봉양을 위해서이고 목소리에는 힘을 빼고 얼굴빛에는 온화한 기상을 잃지 않은 것은 지양(志養, 뜻을 받들음)을 위해서이며 얼음을 깨서 고기를 구하고 하늘에 빌어 몸소 대신하겠다고 한 것은 회생을 빌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병이 나자 손가락을 잘라 3년의 목숨을 연장하였고 아버지의 병이 더치자 또 같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명을 감동시키는 정성은 아무래도 하늘에 있는 정명(定命)을 이길 수 없어 연해 내외간(內外艱)을 당하여 6년을 시묘(侍墓)하면서 애훼(哀毁)함이 예절에 지나쳤으니 이 어찌 남들보다 한 단계 높은 효성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예조에서는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겨 특별히 장유(장유)하는 제음(題音)을 내렸으나 천총(天聰)에 입계(入啓)하여 정려(旌閭)를 내리시게 하지 못하였고 자손도 더욱 침체하여 조야(朝野)에서 아뢴 글을 먼지 낀 골방에 쳐박아 두어 좀이 슬고 찢겨져 너덜너덜하니 한탄스러움을 어찌 금하겠는가. 사손(嗣孫) 규생(圭生)이 이를 걱정하여 힘을 다하고 자산을 기울여 석공을 불러다가 돌을 다듬고 공의 사행(事行)을 기록하여 사람의 이목(耳目)을 빛나게 하려면서 나에게 기술하기를 부탁한지라 그 대략을 기록하여 돌아가 각하게 하였다. 정묘(丁卯, 1927) 3월 하순 소화유민(小華遺民) 이도복(李道復) 기(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