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효자 김석봉 기적비(孝子金錫鳳紀蹟碑)
운영자 23-12-22 14:20 68 hit
【비표】 孝子瑞興金公紀蹟碑(효자서흥김공기적비)

【위치】 성수면 좌산리 319-3. 중기마을 어귀 가외반로변.
【시기】 1966년
【형태】 비 주변은 벽돌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35cm, 너비 46cm, 두께 18cm.
【개요】 문중에서 연안부 송씨 열녀비와 나란히 건립하였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鎭安士人 瑞興金公諱錫鳳字洛弼 我朝文科參議諱中坤之后時權子 其母夫人 延安宋氏 禮判諱寶山號退休齋後泰喆女也 宋氏 事舅姑至孝 夫以擧業 早年遊京 經歲不返 永無消息 公其時尙乳 家無儲甖 情狀不忍言 而母夫人携幼守屋 以雇舂織紡 僅僅資生 而日望其夫子之生還 禱山祈水 祝天拜星 終身不變 公稍長 有感於是 事母至孝 養志洞屬 未嘗少咈 定省之節 供甘之誠 一是靡懈 母病數年 藥餌之物 躬資調進 行不以翔 笑不至矧 及至病革 嘗糞祈天 裂指垂血 回甦三日 竟遭大艱 哀毁之節 朔望哭墓 終身如一 祭亦齊戒 必致如在之誠 以家大人出外不還 爲平生大恨 每逢佳節 涕泣之痕 在於枕席之間 以母氏之心爲心 亦 祈於山水 祝天不懈 鄕里之人 皆曰孝子人也 光武六年壬寅 全州希堂道會時 全北各郡儒林代表 五十三人 及全州南原鎭安鄕校 儒生 齊聲發文 仰稟于所居地 鎭安郡守題曰 一家孝烈 有是母有是子 爲鄕隣矜式 令人欽歎 襃揚之節 益俟公議事其後載三綱錄及湖南縉紳錄 公之胤士文 與其族叔 眞燮議曰 吾家兩世 有如此之孝烈 而家勢寒微 不能闡揚于世 是可恨也 及吾未死之時 雖極少規模 刻記蹟于一片石 立于村右路邊 使行路之人 觀瞻而有可語之資 豈不可哉 乃使之齎文 而來謀於不侫 余曰 夫大孝 終身慕父母 終身慕者 余於此公見之矣 且祖先有美行之實則能闡揚於世者 是乃爲孝 若士文者 亦可謂孝矣 詩云孝子不匱 永錫爾類者 其此家之謂歟 大韓民國四十八年 丙午 冬至節 陜川 李英浩 撰 【풀이】 진안(鎭安)의 사인(士人) 서흥김공(瑞興金公) 휘 석봉(錫鳳) 자 낙필(洛弼)은 아조(我朝) 문과 참의 휘 중곤(中坤)의 후예인 시권(時權)의 아들이고 그 모부인(母夫人) 연안송씨(延安宋氏)는 예조판서 휘 보산(寶山) 호 퇴휴재(退休齋)의 후예인 태철(泰喆)의 따님이다. 송씨는 시부모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는데 부군(夫君)이 과거 공부를 하려고 일찍 서울로 유학하여 해가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다가 그 길로 영영 소식이 없었다. 공은 그 때에 아직 젖먹이였는데 집에는 한 단지의 곡식도 남은 것이 없어 그 정상은 참아 말 할 수가 없었다. 모부인은 어린 아이를 안고 집을 지키면서 삯 절구질과 길쌈으로 겨우 겨우 살아가면서 날마다 부군이 살아서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산과 물, 하늘과 별에 빌기를 종신토록 그치지 않았다. 공은 조금 자라자 여기에 감명을 받아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늘 조심스런 마음으로 뜻을 받들어 조금도 어김이 없었으며 혼정(昏定) 신성(晨省)하는 예절과 맛있고 음식을 올리는 정성에 한결같이 해이함이 없었다. 모부인이 몇 해를 병으로 누었으니 병석을 몸소 보살피고 약을 손수 달여서 올렸으며 수심에 쌓여 걸어도 힘이 없었고 웃어도 입을 벌리고 웃지 않았다. 이윽고 병이 더치니 변(便)을 맛보아 병증을 징험하고 하늘에 쾌유를 빌었으며 손가락을 깨서 피를 입에 드리워 사흘을 소생하게까지 하였다. 마침내 상을 당하게 되니 애훼(哀毁)하는 일이나 삭망(朔望)으로 성묘하고 곡하는 일을 일생동안 한결같이 하고 제사에는 재계(齋戒)하여 반드시 어머니가 곁에 계시는 것처럼 정성을 다하였다. 가대인(家大人: 아버지의 경칭)이 밖에 나가 돌아오지 않은 것을 평생의 대한(大恨)으로 여겨 매번 가절(佳節)을 만나면 눈물자욱으로 베개와 이부자리가 얼룩졌다.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 공 역시 산과 물에 빌고 하늘에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효자라고 일컬었다. 공의 아들 사문(士文)이 그의 족숙 진섭(眞燮)과 상의하기를 “우리 집 양세(兩世)에 이러한 효(孝)와 열(烈)이 있었으나 집안이 한미(寒微)하여 세상에 천양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한스러운 일입니다. 비록 작은 규모일망정 제가 죽기전에 그 사적을 돌에 새겨 마을 오른편 길 가에 세워 지나다니는 사람으로 하여금 보고서 말할 거리가 있게 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그분더러 글을 싸 가지고 나를 찾아가 도모해보라 하였다. 나는 이르노니 무릇 대효(大孝)는 종신토록 부모를 사모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이 분에게서 보게 되었다. 또 조상(祖上)에게 훌륭한 행실이 있었으면 세상에 천양하는 것이 바로 효가 되는 것인데 사문과 같은 사람은 가위 효라고 이를만하겠다. 시(詩: 시경<詩經>)을 말함)에 이르기를 “효자는 다함이 없나니 영원토록 그런 사람을 내려준다(孝子不匱, 水錫爾類)”고 하였는데 그 말은 이 집안을 두고 한 말인가보다. 대한민국 48년(1966) 병오 동지절 합천 이영호(李英浩) 찬(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