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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천면 망향의 동산에 서 있는 10기의 비석군. 이 비들은 본디 안천면사무소 앞과 안자동 등에 산재하였으나 용담댐 수몰로 이건되었다. 이곳의 비들은좌로부터 한상종 적공기념비, 허정석 진제선정비, 정병희 선정기념비, 한사규 공적비, 한종진 추도불망비, 허점달 추념비, 허완규 공적비, 허왕열 시혜불망비, 허유 시혜불망비, 윤추 선정비 등이 나란히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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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안천면 노성리 45. 안천망향의 동산 비석군 내
【시기】 1926년
【형태】 높이 85cm, 너비 34cm, 두께 15cm.
【개요】 안천면 삼락리 안자동마을어귀 길가에 있다가 2000년 안천망향의 동산으로 이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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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안천면 노성리 45. 안천망향의 동산 비석군.
【시기】 1695년
【형태】 높이 180cm, 너비 58cm, 두께 18cm.
【개요】 윤추(尹推)는 용담현령으로 1694년 5월에 부임하여 1695년 2월에 각 면에서 치적비를 세웠다. 이 비는 안천면 삼락리 안자동마을어귀 길가에 있다가 2000년 안천망향의 동산으로 이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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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안천면 노성리 427. 노채마을 어귀, 노산정 옆.
【시기】 1981. 12. 13.
【형태】 높이 125cm, 너비 45cm, 두께 18cm.
【개요】 비의 주인공들은 이 마을 의성정씨 집안에서 뛰어난 분들로 덕행이 있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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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안천면 신괴리 450-2. 괴목정마을 정자나무 건너편.
【시기】 1968년
【형태】 103cm, 두께 37cm, 두께 15cm.
【개요】 비의 후면에는 ‘先生 平素五倫兼備 處世仁慈 愛鄕愛族 救貧獎學 洞財積立 當家爲先爲孫專心致靖 其德其功永世不忘 一九六八年 十一月 日 鎭安郡 顔川面 新槐里 任民一同’이라 새겨있다. 풀이하면 ‘선생은 평소 오륜의 행실을 겸비하여 처세가 인자하고, 애향심과 애족심으로 가난을 구휼하고 동재(洞財)를 적립하고, 집에서는 조상을 잘 섬기고 슬하를 전심으로 보살펴 그 덕과 공로가 영세불망하리라.’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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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안천면 백화리 하배실마을 어귀
【시기】 1981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32cm, 너비 44cm, 두께 2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孝는 爲百行之源而人所難行이며 烈은 爲不二之謂而人所難事라 彰孝褒烈은 古今罕有之事나 然이니 孝當竭力하고 烈爲盡心이라 乃孝則孝요 烈則烈也라 故로 士人顔川面白華里金蘷欽妻竹山安氏는 竹城君文惠公諱元衡之后며 嘉善大夫鳳擧之女며 始祖監務樂安金公諱粹澄八世孫 贈右議政謚襄惠公諱贇吉之十七世孫이며 在忠之子也라 該妻가 天性이 柔仁端潔하고 行方而智圓하고 言溫而氣和하야 將有令持이러니 年纔十二에 父有奇疾하야 心憂色思하고 盡夜祈斗하고 百方救治하야 因得蘇快하고 及其婚期하야 謹受柱單而於焉歲月이 待秋成親之際에 聞其夫之病報沈重하야 卽歸夫家하니 幾至死境故로 嚼脂注血하여 因得回甦하니 實非格天之誠이면 何若是神感耶아 天命이 有限이라 纔過七日而逝去하니 痛哭奈何오 夫人時年이 十九歲라 烈烈其心이 卽欲追逝而惟恐尊堂之傷心故로 含痛止忍하고 送終以禮하고 事舅姑益誠하며 率養繼后하여 不墜家規하고 以終天年하니 前古後今에 孝烈炳炳하니 豈不褒揚之아 后孫爛商熟議하야 齊聲同起하고 修石表記하여 恭報一寸微誠하고 謹垂芳名千年焉하다
檀紀四千三百十四年 辛酉月 日
【풀이】 효는 백행의 근본이나 사람이 행하기 어려운 일이며, 열은 둘이 아니지만 사람이 행하기 어려운 바이다. 효를 표창하고 열을 포상함은 고금에 드문 일이나, 힘을 다하여 효하고 마음을 다하여 열을 행한 이가 있으니 효 중에 효요, 열 중에 열이라. 사인(士人) 안천면(顔川面) 백화리(白華里) 김기흠(金柏欽)의 처 죽산 안씨(竹山安氏)는 죽성군(竹城君) 문혜공(文惠公) 휘(諱) 원형(元衡)의 후손인 가선대부(嘉善大夫) 봉거(鳳擧)의 여(女)이며, 지아비는 시조(始祖) 감무(監務) 낙안 김공(樂安金公) 휘(諱) 수징(粹澄)의 8세손 증(贈) 우의정(右議政) 양혜공(襄惠公) 휘(諱) 빈길(贇吉)의 17세손인 재충(在忠)의 아들이다. 그 처의 천성이 유인단결(柔仁端潔)하고 품행이 방정할 뿐만 아니라, 지혜롭고 원만하고 말투가 정겹고 화애로운 기운이 있어 장래 기대할 만하더니, 나이 겨우 12살에 아비가 괴질에 걸리자, 마음에 근심이 있어 얼굴색이 변하여 밤새도록 북두칠성에 기도하며 백방으로 구환하여 쾌유토록 하였다. 혼기가 닥쳐 사주단자를 받아놓고 가을에 혼례를 치르기로 하였는데, 정혼자가 병이 들어 위중하다는 소식이 들리자 바로 정혼자 집에 가서 보니 사경에 이르렀는지라, 손가락을 물어뜯어 피를 넣어주니 실로 하늘이 낸 지성이라 어찌 신명이 감복치 아니하리오. 그러나 천명이 유한이라 겨우 7일 후에 졸하고 마니 통곡한들 어쩌리오. 이때 부인(夫人)의 나이가 19세라 열렬(烈烈)한 그 마음이 바로 정혼자의 뒤를 따르고 싶었으나 어른들이 상심할까 염려하여 슬픔을 참고 장례 절차를 예를 다하여 마치고 시부모를 섬김에 정성을 다하고, 양자를 들여 집안을 잇게 하여 집안을 멸문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고 천수를 누리니, 어찌 포양(褒揚)하지 아니하리오. 후손이 난상토의하고 모두 의견을 같이하여 비석에 기록하여 조그마한 성의라도 올리자고 하니, 삼가 방명(芳名)은 천년을 드리우소서. 단기 4314(1981)년 신유(辛酉) 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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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안천면 신괴리 450-2. 괴목정마을 정자나무 건너편.
【시기】 1926년
【형태】 암각서(岩刻書)
【개요】 정응신(丁應信, 1586-?)은 의성인 의성군(義城君) 영손(令孫)의 후손이며 이조판서 현(炫)의 7대손으로서 선조 정유(丁酉, 1597)년에 금산으로부터 이북면[顔川面] 괴정리에 들어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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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표】 道課長雲溪丁榮均永世紀念碑(도과장운계정영균영세기념비)
【위치】 안천면 신괴리 782. 지사마을 어귀.
【시기】 1971년 1월 5일
【형태】 103cm, 두께 37cm, 두께 15cm.
【개요】 비의 후면에는 ‘주민의 숙원사업을 위로 진달하여 농로와 교량을 잘 정비하여 교통을 편리하게 하여 조금도 걱정이 없게 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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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표】 晩星先生韓公相宗積功遺德紀念碑(만성선생한공상종적공유덕기념비)
【위치】 안천면 노성리 45. 안천망향의 동산 비석군 내
【시기】 1937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25cm, 너비 47cm, 두께 25cm.
【개요】 안천면사무소 앞에서 안천 망향탑 부지로 이건.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士生斯世 材識通鍊 抱需世宰物之具 遇於時 則爲蓍龜於國家 不遇而野 則慮深力强 事無不立辨 鄕黨有所依歸而爲柯則 縱未之車駟千鍾 亦足以利民澤物 盖千萬人中 鮮得其一二矣 今鎭安人士 爲韓君相宗 碑於其所止 夫碑者 盖欲嗣世不忘 而表異之也 君修何功德 今獲此報歟 及考其實 殆其卓熒之士 而不遇時者也 君淸州世家晩惺其號 旣稟魁偉 才兼幹局 其鄕顔川之魯城 環其里田土 卽百戶居民 所嘗占有 片土無外居人所有 三百年于玆 一自更張以來 時勢嬗而産業耗 該土轉八於完府朴奎洪家者 六萬餘坪 而借耕懸命者 三百餘人 苟又轉賣而地主變更 則作人貧不能自買 固勢也 君惟是之憂 獨先照驗 所以陰雨之備 交涉於金組理事 以作農創設之例互約 至春季 有此土賣買說 君往金組 則理事渡東 以書以電 承認如約 急訪朴氏家 願買者紹介者塡門 艱得接見 議及作人情境 竟不得唯 猶且輸肝竭血 屢日不休 地主始服君愛重之誠 且念作人生命之艱 排却衆人 而特許君六萬坪 價爲二萬千圜 而先渡金一千七百五十圜 是君之先自辨當 比他人定價 還減二千數 盖感其誠而示意也 殘額拂期在五月末日 而意外理事 以病歸國 無由手續 時適金融梗塞 百方幹旋 至六月終 竟獲特認 事始貼 一里人 如披雲覩靑 此所以碑而不忘也 碑成 請文于余 余曰以君之蘊抱 若竟展施奚止於一里之澤利焉 吁其韙矣 銘曰 謂天下大 曾不簇容 斂跡于野 視以土封 利小霑均 歡聲通天 尙有其碑 與之永年 歲丁丑之季秋上浣 嘉善大夫掌禮院少鄕原任奎章閣副提學 延安李炳觀 撰
【풀이】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 재식(才識)을 통달하게 연마하여 세상에 쓰이고 만물을 재결하는 능력을 갖추어 때를 만나면 국가의 원로(元老)가 되고, 때를 만나지 못하고 초야(草野)에 묻히게 되면 사려가 깊고 영향력도 커서 일에 대하여 선 자리에서 판단함으로, 향당(鄕黨)에서는 그를 의지하여 법칙으로 삼게 되나니, 비록 고거(高車) 사마(駟馬)와 천종록(千鍾祿)은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이 또한 족히 백성을 이롭게 하고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체로 천만인(千萬人) 중에서 하나 둘도 얻어보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 진안(鎭安)의 인사들이 한군(韓君) 상종(相宗)을 위하여 그가 살던 곳에 비를 세우려 하는 바, 대체로 비라는 것은 대를 이어서 잊지 않고 표장(表章)하려는 것이다. 군은 도대체 어떠한 공덕을 쌓았기에 지금 이러한 보답을 얻게 되었을까? 그 실적을 상고해 보건대, 군은 아마도 걸출(傑出)한 인물로 때를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군은 청주(淸州)의 세가(世家) 출신으로 만성(晩惺)은 호이다. 헌걸찬 천품에 재주는 간능(幹能)과 도량(度量)을 겸하였다. 고향인 안천면(顔川面) 노성(魯城)은 마을을 둘러싼 농토를 1백 호의 주민이 점유하고, 촌토(寸土)도 외지 사람 소유가 없이 내려오기를 지금껏 3백 년을 지내왔다. 그런데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세상은 바뀌고 산업은 위축되어 그 토지가 완산부(完山府)에 사는 박규홍(朴奎洪)의 집으로 들어간 것이 6만여 평이나 되고, 그 토지를 빌어 목숨을 매단 사람이 3백여 인이나 되었다. 만일 이 땅이 전매되어 지주가 바뀌게 된다면, 작인들은 힘이 없어 사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군은 오직 이 일을 걱정하였고, 지난 경험에 비추어 만일에 대비하는 견지에서 고을의 금융조합(金融組合) 이사(理事)와 교섭하여 작농계(作農契)를 설립하였다. 그 해 봄이 다할 무렵에 이 땅을 판다는 소문이 있어 군이 금융조합에 가 보았다. 이사는 동경(東京)에 가고 없어서 서신을 띄우고 전보를 쳐서 약속대로 승인을 받고 급히 박씨의 집을 찾아갔더니 원매자(願買者)와 소개자(紹介者)가 집안에 가득하였다. 어렵게 주인을 만나보고 작인들의 정경을 들어 사정하였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군은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끈질기게 달라붙어 며칠을 두고 호소하니, 지주도 비로소 군의 대중을 사랑하는 정성에 감복하고, 또 작인들의 살기 어려움을 생각하여 뭇사람들을 물리치고 특별히 군에게 6만 평을 팔기로 승낙하였다. 값은 2만1천환(記)이고, 선도금(先渡金)은 1천7백50환인데 선도금은 군이 사전에 마련해 둔 바가 있었다. 대금이 타인보다 2천여 환이나 싼값이었는데, 이는 군의 성의에 감동하여 특별히 낮추어 준 것이었다. 잔금을 지불할 기한이 5월말이었는데, 뜻밖에 조합이사가 병으로 귀국하여 수속을 밟을 수 없게 되었고, 또 때마침 금융도 경색이 되었으나 백방으로 주선하여 6월말에 가서 마침내 특별 인준을 받아 일을 마감 지으니, 그제야 온 마을 사람들이 마치 구름을 헤치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듯 한 심정이었다. 이것이 비를 세워 잊지 않겠다는 소이(所以)이다. 비가 이루어지자 나에게 글을 청하였는데, 내가 이르기를 “군이 가지고 있는 포부를 끝까지 펼치게만 된다면 어찌 한 마을의 이익을 도모함에만 그치겠는가?”라고 하였다. 아! 훌륭한 일이다. 명(銘)하기를 “천하가 크고 넓다 해도 / 그 포부 용납할 수 없는데 / 초야에 자취를 감추어 / 흙더미처럼 보았다네. / 이끗 적어도 분배는 고르니 / 환성은 하늘이 찔렀고 / 여기 빗돌이 세워지니 / 영세토록 함께 하리라.” 정축(丁丑, 1937) 9월 상순에 가선대부 장례원 소경 원임 규장각 부제학(嘉善大夫掌禮院少卿原任奎章閣副提學) 연안(延安) 이병관(李炳觀)이 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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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안천면 노성리 45. 안천망향의 동산 비석군 내
【시기】 1940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90cm, 너비 33cm, 두께 11cm.
【개요】 이 비들은 본디 수몰이전 안천면사무소 앞에 있던 것을 이건한 것이다. 허정석(許正錫, 1902~1974)은 구한말에서 정부수립 후 제 3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교육행정가이다. 안천면 삼락리 원주항에서 출생, 1924년 훈도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이래 면장과 교장직을 맡으면서 교육자치제가 실시됨에 따라 새로 구성된 교육위원회에서 초대 진안군교육감으로 당선되었다. 초대에서 3대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1952년~1961년) 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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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안천면 노성리 45. 안천망향의 동산 비석군 내
【시기】 1954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25cm, 너비 35cm, 두께 12cm.
【개요】 정병희는 안천면장이었다. 이 비는 본디 수몰이전 안천면복지관 마당에 있던 것을 이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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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안천면 노성리 45. 망향의 동산 비석군 내
【시기】 1967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75cm, 너비 46cm, 두께 22cm.
【개요】 이 비는 본디 수몰이전 하보마을 안천중학교에 있던 것을 이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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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안천면 노성리 45. 망향의 동산 비석군 내
【시기】 1967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37cm, 너비 40cm, 두께 16cm.
【개요】 이 비는 본디 수몰이전 면사무소 앞에 있던 것을 이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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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안천면 노성리 45. 안천 망향의 동산 비석군 내
【시기】 1982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75cm, 너비 45cm, 두께 20cm.
【개요】 이 비는 본디 수몰이전 면사무소 앞에 있던 것을 이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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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안천면 노성리 45. 안천망향의 동산 비석군 내
【시기】 1981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52cm, 너비 39cm, 두께 17cm.
【개요】 이 비들은 본디 수몰이전 면사무소 앞에 있던 것을 이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