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상종 적공유덕기념비(韓相宗積功遺德紀念碑)
운영자 23-12-22 14:20 114 hit
【비표】 晩星先生韓公相宗積功遺德紀念碑(만성선생한공상종적공유덕기념비)

【위치】 안천면 노성리 45. 안천망향의 동산 비석군 내
【시기】 1937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25cm, 너비 47cm, 두께 25cm.
【개요】 안천면사무소 앞에서 안천 망향탑 부지로 이건.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士生斯世 材識通鍊 抱需世宰物之具 遇於時 則爲蓍龜於國家 不遇而野 則慮深力强 事無不立辨 鄕黨有所依歸而爲柯則 縱未之車駟千鍾 亦足以利民澤物 盖千萬人中 鮮得其一二矣 今鎭安人士 爲韓君相宗 碑於其所止 夫碑者 盖欲嗣世不忘 而表異之也 君修何功德 今獲此報歟 及考其實 殆其卓熒之士 而不遇時者也 君淸州世家晩惺其號 旣稟魁偉 才兼幹局 其鄕顔川之魯城 環其里田土 卽百戶居民 所嘗占有 片土無外居人所有 三百年于玆 一自更張以來 時勢嬗而産業耗 該土轉八於完府朴奎洪家者 六萬餘坪 而借耕懸命者 三百餘人 苟又轉賣而地主變更 則作人貧不能自買 固勢也 君惟是之憂 獨先照驗 所以陰雨之備 交涉於金組理事 以作農創設之例互約 至春季 有此土賣買說 君往金組 則理事渡東 以書以電 承認如約 急訪朴氏家 願買者紹介者塡門 艱得接見 議及作人情境 竟不得唯 猶且輸肝竭血 屢日不休 地主始服君愛重之誠 且念作人生命之艱 排却衆人 而特許君六萬坪 價爲二萬千圜 而先渡金一千七百五十圜 是君之先自辨當 比他人定價 還減二千數 盖感其誠而示意也 殘額拂期在五月末日 而意外理事 以病歸國 無由手續 時適金融梗塞 百方幹旋 至六月終 竟獲特認 事始貼 一里人 如披雲覩靑 此所以碑而不忘也 碑成 請文于余 余曰以君之蘊抱 若竟展施奚止於一里之澤利焉 吁其韙矣 銘曰 謂天下大 曾不簇容 斂跡于野 視以土封 利小霑均 歡聲通天 尙有其碑 與之永年 歲丁丑之季秋上浣 嘉善大夫掌禮院少鄕原任奎章閣副提學 延安李炳觀 撰
【풀이】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 재식(才識)을 통달하게 연마하여 세상에 쓰이고 만물을 재결하는 능력을 갖추어 때를 만나면 국가의 원로(元老)가 되고, 때를 만나지 못하고 초야(草野)에 묻히게 되면 사려가 깊고 영향력도 커서 일에 대하여 선 자리에서 판단함으로, 향당(鄕黨)에서는 그를 의지하여 법칙으로 삼게 되나니, 비록 고거(高車) 사마(駟馬)와 천종록(千鍾祿)은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이 또한 족히 백성을 이롭게 하고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체로 천만인(千萬人) 중에서 하나 둘도 얻어보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 진안(鎭安)의 인사들이 한군(韓君) 상종(相宗)을 위하여 그가 살던 곳에 비를 세우려 하는 바, 대체로 비라는 것은 대를 이어서 잊지 않고 표장(表章)하려는 것이다. 군은 도대체 어떠한 공덕을 쌓았기에 지금 이러한 보답을 얻게 되었을까? 그 실적을 상고해 보건대, 군은 아마도 걸출(傑出)한 인물로 때를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군은 청주(淸州)의 세가(世家) 출신으로 만성(晩惺)은 호이다. 헌걸찬 천품에 재주는 간능(幹能)과 도량(度量)을 겸하였다. 고향인 안천면(顔川面) 노성(魯城)은 마을을 둘러싼 농토를 1백 호의 주민이 점유하고, 촌토(寸土)도 외지 사람 소유가 없이 내려오기를 지금껏 3백 년을 지내왔다. 그런데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세상은 바뀌고 산업은 위축되어 그 토지가 완산부(完山府)에 사는 박규홍(朴奎洪)의 집으로 들어간 것이 6만여 평이나 되고, 그 토지를 빌어 목숨을 매단 사람이 3백여 인이나 되었다. 만일 이 땅이 전매되어 지주가 바뀌게 된다면, 작인들은 힘이 없어 사지 못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군은 오직 이 일을 걱정하였고, 지난 경험에 비추어 만일에 대비하는 견지에서 고을의 금융조합(金融組合) 이사(理事)와 교섭하여 작농계(作農契)를 설립하였다. 그 해 봄이 다할 무렵에 이 땅을 판다는 소문이 있어 군이 금융조합에 가 보았다. 이사는 동경(東京)에 가고 없어서 서신을 띄우고 전보를 쳐서 약속대로 승인을 받고 급히 박씨의 집을 찾아갔더니 원매자(願買者)와 소개자(紹介者)가 집안에 가득하였다. 어렵게 주인을 만나보고 작인들의 정경을 들어 사정하였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군은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끈질기게 달라붙어 며칠을 두고 호소하니, 지주도 비로소 군의 대중을 사랑하는 정성에 감복하고, 또 작인들의 살기 어려움을 생각하여 뭇사람들을 물리치고 특별히 군에게 6만 평을 팔기로 승낙하였다. 값은 2만1천환(記)이고, 선도금(先渡金)은 1천7백50환인데 선도금은 군이 사전에 마련해 둔 바가 있었다. 대금이 타인보다 2천여 환이나 싼값이었는데, 이는 군의 성의에 감동하여 특별히 낮추어 준 것이었다. 잔금을 지불할 기한이 5월말이었는데, 뜻밖에 조합이사가 병으로 귀국하여 수속을 밟을 수 없게 되었고, 또 때마침 금융도 경색이 되었으나 백방으로 주선하여 6월말에 가서 마침내 특별 인준을 받아 일을 마감 지으니, 그제야 온 마을 사람들이 마치 구름을 헤치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듯 한 심정이었다. 이것이 비를 세워 잊지 않겠다는 소이(所以)이다. 비가 이루어지자 나에게 글을 청하였는데, 내가 이르기를 “군이 가지고 있는 포부를 끝까지 펼치게만 된다면 어찌 한 마을의 이익을 도모함에만 그치겠는가?”라고 하였다. 아! 훌륭한 일이다. 명(銘)하기를 “천하가 크고 넓다 해도 / 그 포부 용납할 수 없는데 / 초야에 자취를 감추어 / 흙더미처럼 보았다네. / 이끗 적어도 분배는 고르니 / 환성은 하늘이 찔렀고 / 여기 빗돌이 세워지니 / 영세토록 함께 하리라.” 정축(丁丑, 1937) 9월 상순에 가선대부 장례원 소경 원임 규장각 부제학(嘉善大夫掌禮院少卿原任奎章閣副提學) 연안(延安) 이병관(李炳觀)이 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