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천 망향의 동산 입구에는 모두 10기의 비석과 십수기의 마을 표지석이 서있다. 이 비석들은 정천면내에 산재하던 것을 용담댐 수몰로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비석들은 다음과 같다. 고봉주 연의불망비, 고원훈 영세불망비, 김오섭 영세불망비, 김우식 수은시혜기념비, 남계훈 영세불망비, 문택규 선덕비, 송갑용 제막불망비, 이민항 청간애민불망비, 이병훈 불망비, 류은장구지소 등이다.
  • 【비표】 縣令李侯敏恒淸簡愛民不忘碑(현령이후민항청간애민불망비)

    【위치】 정천면 모정리 970-40 정천망향의 동산 내.
    【시기】 1869년
    【형태】 높이 92cm, 너비 37cm, 두께 10cm.
    【개요】 이민항(李敏恒)은 용담현령으로 1867년 1월에 부임하여 1872년 9월에 처가 죽어 돌아갔다.
  • 【위치】 정천면 모정리 970-40 정천망향의 동산 내
    【시기】 1927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36cm, 두께 50cm, 두께 22cm.
    【개요】 이 비석은 본디 유은(柳隱) 장흥인(長興人) 고제룡(高濟龍)이 살던 자리라 해서 정천면 모정리 망덕 마을에 있었으나 용담댐으로 인한 수몰로 2000년 이 자리에 이건된 것이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鎭安之山水 湖之名勝 其俗醇 其人質 往往有恂恂君子風 諸章甫 爲其師 柳隱高公薰陶之蹟 將伐珉以表藏修之所 甚盛擧也 公諱濟龍 柳隱其自號 哲宗辛未生 贈禮曹判書 其先長澤人 長興伯諱福林 爲遠祖 監察諱梃 吏判號湖隱諱時樞 兵使號海隱諱亨鎭 其曾祖祖 若考也 公性孝天植 幼好讀書 事親盡古人之行 二親其安之 母癠誠靡不至 臨革 血指以甦三日 居憂 六載廬墓茹素 一鄕皆難之 遯跡林泉 身心之學是究 不屑於功令 啓牖後進 舋舋不倦 築室于程川之上 扁之以柳川沿川 植樹 繞屋扶疎 林木之蔥藉 軒區之敞楚 令人望之 依然有輞川盤谷之想 日與二三同志 論道講義 請益者日踵門 一辭事之以先生 屢登剡薦 亦載綱獻錄 高宗甲申卒 噫公在天下不讀之日 咾讀書如食飮 而所蓄者 一未展試於當世 命耶時耶 公旣不得於時 適也 時亦不能奪其守於公 何嗛焉 銘曰 長興古家 篤生英資 洛建徽言 櫛髮理絲 茶飯詩禮 箕裘孝睦 牖蒙裕後 有此片石. 疆圉單閼之復月. 崇祿大夫 禮曹判書 原任奎章閣提學 安東 金宗漢 撰 從孫 光宇 書, 崇祿大夫 吏曹判書 原任奎章閣 弘文學士 唐城 洪淳馨 書. 歲 丙子仲冬下浣.
    【풀이】 진안(鎭安)의 산수(山水)는 호남의 명승(名勝)이다. 풍속은 순후하고 사람은 질박(質朴)하여 왕왕 순실한 군자풍(君子風)이 있다. 여러 장보(章甫: 선비)가 그의 스승 유은(柳隱) 고공(高公)께서 훈도(薰陶: 덕성을 길러줌)한 사적을 생각하여 돌을 다듬어 그가 장수(藏修: 침잠<沈潛>하여 공부함) 하던 곳을 드러내려고 하니 극히 성대한 일이다. 공의 휘는 제룡(濟龍)이오 유은은 그 자호(自號)이니 철종(哲宗) 신미(辛未: 철종조엔 신미가 없음)에 탄생하여 예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그 선계(先系)는 장택인(長澤人)이니 장흠백(長興伯) 휘 복림(福林)이 그 원조(遠祖)이고 감찰(監察) 휘 정(挺)과 이판(吏判) 호 호은(湖隱) 휘 시추(時樞)와 병사(兵使) 호 해은(海隱) 휘 형진(亨鎭)은 그 증조 조부 및 아버지이다. 공은 타고난 효성으로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옛 사람의 행실을 다하니 양친이 불편한 대목이 없었다. 어머니가 병환이 나자 정성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고 병이 더하자 손가락에서 피를 뽑아 입에 드리워 사흘의 목숨을 연장하였으며 6년 동안 거상(居喪)하면서 여묘(廬墓)하고 소식(素食: 고기와 술이 없는 식사)만 하니 온 고을에서 모두 어렵게 여기었다. 그리고는 임천(林泉)에 몸을 숨기고 신심(身心)의 공부를 궁구하고 공령(功令: 과환<科宦>)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며 후진(後進)을 계도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또 정천(程川)가에 집을 지어 유천(柳川)이라 편액(扁額)을 하고 시내를 따라 버들을 심고 집을 둘러 나무를 가꾸어 임목(林木)의 울창함과 터서리의 창활(敞豁)함이 사람이 바라보면 어렴풋이 망천(輞川: 왕유<王維>의 별장)과 반곡(盤谷: 이원<李原>의 은거지)의 생각이 나게 하였다. 그리하여 날마다 몇 사람의 동지들과 도(道)를 논하고 듯을 강구하니 도움을 청하는 자가 날로 찾아들어 다 같이 선생으로 섬겨 여러 차례 천거에 오르고 강헌록(綱獻錄)에도 등재되었는데 고종(高宗) 갑신년(甲申年: 고종 21, 1884)에 졸하였다. 아, 공은 천하가 글을 읽지 않는 때에 있어서 글 읽기를 음식 좋아하듯 하였으나 속에 쌓인 바를 하나도 당세(當世)에 펴보지 못하였으니 명운(命運)이라 할까 시운(時運)이라 할까 공이 때를 얻지 못한 것도 쫌 맞게 당한 명운이겠지만 시대도 공에게서 조수(操守)를 빼앗지 않았으니 어찌 서운하다 하겠는가 명(銘)하기를 장흥(長興)의 고가(古家)에서 영걸스런 바탕 태어났는데 낙건(洛建: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훌륭한 말로써 머리 빗고 옷 지어 입듯 하였다네 시례(時禮)는 다반사(茶飯事)였고, 효목(孝睦)은 기구(箕裘: 전래하는 가업[家業])였다네 후진들 잘 계도하였기에 이 일편석(一片石) 서게 되었다네. 정묘(1927)년 11월. 숭록대부 예조판서 원임규장각제학 안동 김종한(金宗漢) 찬하고, 종손(從孫) 광우(光宇) 쓰다. 숭록대부 이조판서 원임규장각홍문학사 당성(唐城) 홍순형(洪淳馨) 쓰다. 병자(1936) 11월 하순.
  • 【비표】 嘉善大夫折衝將軍龍驤衛右護軍晉州姜成寬妻貞夫人坡州廉氏烈女碑(가선대부절충장군용양위우호군진주강성관처정부인파주염씨열녀비)

    【위치】 정천면 봉학리 544-1. 상조림 정천면사무소 옆
    【시기】 1938년
    【형태】 돌비각 안에 세운 비이다.
    【개요】 정천면 봉학리 신촌 동네 안에 있었는데 용담댐 수몰로 이건하였다. 본디 비각이 있었으나 이건 시에 없어졌다. 비표(碑表)에 ‘嘉善大夫 折衝將軍龍驤衛右護軍 晉州 姜成寬 妻 貞夫人 坡州廉氏 烈女碑’, 우측에 ‘戊寅(1938) 四月 日’ 좌측에 ‘崇祿大夫 吏曹判書 原任奎章閣弘文學士 唐城 洪淳聲’ 뒤에 ‘歲丙子(1936) 仲冬(11월) 下浣 龍潭 文廟直員 韓鎭洙 撰’의 글이 새겨져 있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姜參奉明善 將立其先妣 貞夫人坡州廉氏烈女碑 一日持道郡儒狀來示曰 子居一鄕 詳知貞夫人美跡 今圖久遠不朽 舍子其誰 子須爲記 謝非 其人不獲 曰貞夫人 梅軒諱悌臣后 承範女 關西大將軍諱元老后 嘉善貫晉州姜成寬之妻 性姿柔婉 及于歸 孝事舅姑 禮相君子 年三十三 夫嬰齊疾 百方救護 誠無不到 竟遭崩城 矢以下從 顧念先祀無托 幼孤難保 强忍執喪 葬祭如禮 時値東亂 家燒産焚 托寄族戚 勤孜紡績 立門戶於艱危之日 扶綱常於頹敗之地 儒論自在 建閣竪碑 略具事實以記焉. 龍潭文廟直員 韓鎭洙 撰. 戊寅 四月 日. 【풀이】 강참봉(姜參奉) 명선(明善)이 장차 그의 선비(先妣: 돌아가신 어머니) 정부인 파주염씨의 열녀비를 세우려고 하면서 하루는 도군(道郡)의 유장(儒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고 하는 말이 “자네는 한 고을에 사니까 정부인의 훌륭한 행적을 자세히 알고 있을걸세 지금 구원토록 전해질 일을 도모하려는데 자네를 두고 누구에게 청하겠는가 부디 자네가 기술해주게나” 하였다. 나는 내가 그럴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사절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정부인은 매헌(梅軒) 휘 제신(悌臣)의 후예인 승범(承範)의 따님이오 관서대장군(關西大將軍) 휘 원로(元老)의 후예인 가선(嘉善) 진주(晉州) 강성관(姜成寬)의 처이다. 천성이 부드럽고 아리따웠는데 시집을 와서는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군자(君子: 남편을 경칭하는 말)을 예(禮)로써 도왔다. 나이 33세 때에 부군이 병에 걸려 백방으로 구토하여 정성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마침내 붕성(朋城)의 슬픔을 당하게 되어 따라 죽기로 작정하였으나 돌이켜보니 선대의 제사를 맡길 데가 없고 어린 고아(孤兒)를 보전하지 못하게 되겠기에 억지로 참고 초상을 치르고 장례와 제사도 예절대로 거행하였다. 그때에 동학란(東學亂)을 만나 집과 가산을 불태우고 족척(族戚)에게 의탁하고 지냈으나 부지런히 길쌈을 하여 위급한 때에 문호(門戶: 집안)를 세우고 탕패(蕩敗)한 처지에서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였다. 능히 이와 같았으므로 유론(儒論)이 있어 비각(碑閣)을 짓고 비를 세우게 되어 간략히 그 사실을 갖추어 기술하는 바이다.
    용담문묘직원(龍潭文廟直員) 한진수(韓鎭洙) 찬(撰). 무인(戊寅) 4월 일
  • 【위치】 정천면 모정리 970-40 정천망향의 동산 내.
    【시기】 1912년
    【형태】 높이 114cm, 너비 34cm, 두께 18cm.
    【개요】 성재(誠齋) 김우식(金宇植 1842~?)은 용담 금산 고창 군수를 역임하였다.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숭선(崇善)의 후손으로 무과로 군수에 이르렀다. 4개 군에서 수령을 지냈으며 선행을 잘하고 학문을 가까이 하였다. 용담군수 재임시 향교를 보수하였고, 학교를 세웠으며, 의연금 1천여 원을 내놓아 주천면 운일암의 돌을 뚫어서 길을 내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혜택을 주었다. 서울에서 일서면(朱川面) 주자천에 들어와 살았다.
  • 【위치】 정천면 모정리 970-40 정천망향의 동산 내.
    【시기】 1934년
    【형태】 높이 92cm, 너비 34cm, 두께 11cm.
    【개요】 이 비석들은 본디 정천면 모정리 머리실 마을에 있었으나 용담댐담수로 인한 수몰로 2000년 이 자리에 이건된 것이다. 김오섭(金五燮)은 일제하 진안군수였다. 기록이 멸실되어 구체적 재임연대는 미상이나 1935년 이전에 재임하였다.
  • 【위치】 정천면 모정리 970-40 정천망향의 동산 내
    【시기】 1934년
    【형태】 높이 92cm, 너비 26cm, 두께 12cm.
    【개요】 이 비석들은 본디 정천면 모정리 머리실 마을에 있었으나 용담댐담수로 인한 수몰로 2000년 이 자리에 이건된 것이다. 고원훈(高元勳)은 1881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했다. 1924년 4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1925년 전라남도 참여관, 1927년 경상북도 참여관, 1929년 평안남도 참여관, 1930년 평안북도 참여관을 역임하고 1933년 전라북도 지사가 되었다. 1939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중추원 참의로 활동했다. 이밖에도 여러 직책을 맡아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했다. 해방 후 친일행적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를 받아 1949년 7월 특별위 검찰부에 송청되었으며,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 【위치】 정천면 모정리 970-40 정천망향의 동산 내.
    【시기】 1934년
    【형태】 높이 92cm, 두께 34cm, 두께 11cm.
    【개요】 본디 정천면 모정리 머리실 마을에 있었으나 용담댐 담수로 인한 수몰로 2000년 이건되었다.
  • 【비표】 前參判高公奉柱捐義不忘碑

    【위치】 정천면 모정리 970-40 정천망향의 동산 내.
    【시기】 불명
    【형태】 높이 108cm, 너비 33cm, 두께 11cm.
    【개요】 이 비석은 본디 정천파출소 앞에 있었으나 용담댐담수로 인한 수몰로 2000년 이 자리에 이건된 것이다. 고봉주는 일명 고영일이라고도 하며 한약방을 하던 사람으로 공명첩(空名帖)으로 참판벼슬을 얻기도 하였다. 앵일(영일)탕이란 한약으로 만병을 통치하고 부자가 되었는데, 모실에 정천파출소가 세워지는 것과 망덕 앞으로 신작로를 내는 것을 반대하였고, 정천파출소를 지어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용담 향교의 직원(오늘날의 전교)을 지내기도 하였다고 하였는데, 늦게 얻은 아들 때문에 망했다고도 전해진다.
  • 【위치】 정천면 모정리 970-40 정천망향의 동산 내.
    【시기】 1916년
    【형태】 높이 90cm, 너비 37cm, 두께 11cm.
    【개요】 본디 정천면 봉학리 신촌마을 옛 정천면사무소 자리에 매몰되어 있었으나 용담댐 담수 작업할 당시 발견되어 이건된 것이다. 의관(議官) 문택규(文宅奎)는 용담면 옥거리 출신이다. 베풀기를 좋아하여 남이 빈궁함을 보면 마치 자기가 당한 것처럼 여기고, 돈이고 곡식이며 있는 대로 구휼하되 못 주어서 한이 되는 듯이 하니 칭송하는 소리가 길에 널렸고, 만인의 입이 구비(口碑)를 이루었다. 갑오년(甲午年)의 동학란(東學亂)에는 몸소 앞장서서 의병을 모집하니 병세가 크게 떨쳤고, 누차 큰 공을 세웠다.
  • 【비표】 縣令南侯啓勳永世不忘碑(현령남후계훈영세불망비)

    【위치】 정천면 모정리 970-40 정천망향의 동산 내.
    【시기】 1876년
    【형태】 높이 84cm, 너비 34cm, 두께 8cm.
    【개요】 남계훈(南啓薰)은 용담현령으로 1873년 2월에 부임하여 1876년 4월에 맹산현령으로 전임하였다.
  • 【비표】 縣令李侯秉薰不忘碑(현령이후병훈불망비)

    【위치】 정천면 모정리 970-40 정천망향의 동산 내.
    【시기】 불명
    【형태】 높이 102cm, 너비 32cm, 두께 10cm.
    【개요】 이병훈(李秉薰)은 용담현령으로 1878년에 부임하여 1881년 재임 중 사망하였다. 읍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현령 이민항 청간애민불망비(縣令李敏恒淸簡愛民不忘碑)
    【비표】 縣令李侯敏恒淸簡愛民不忘碑(현령이후민항청간애민불망비)
    【위치】 정천면 모정리 970-40 정천망향의 동산 내.
    【시기】 1869년
    【형태】 높이 92cm, 너비 37cm, 두께 10cm.
    【개요】 이민항(李敏恒)은 용담현령으로 1867년 1월에 부임하여 1872년 9월에 처가 죽어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