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치】 정천면 모정리 970-40 정천망향의 동산 내
    【시기】 1927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36cm, 두께 50cm, 두께 22cm.
    【개요】 이 비석은 본디 유은(柳隱) 장흥인(長興人) 고제룡(高濟龍)이 살던 자리라 해서 정천면 모정리 망덕 마을에 있었으나 용담댐으로 인한 수몰로 2000년 이 자리에 이건된 것이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鎭安之山水 湖之名勝 其俗醇 其人質 往往有恂恂君子風 諸章甫 爲其師 柳隱高公薰陶之蹟 將伐珉以表藏修之所 甚盛擧也 公諱濟龍 柳隱其自號 哲宗辛未生 贈禮曹判書 其先長澤人 長興伯諱福林 爲遠祖 監察諱梃 吏判號湖隱諱時樞 兵使號海隱諱亨鎭 其曾祖祖 若考也 公性孝天植 幼好讀書 事親盡古人之行 二親其安之 母癠誠靡不至 臨革 血指以甦三日 居憂 六載廬墓茹素 一鄕皆難之 遯跡林泉 身心之學是究 不屑於功令 啓牖後進 舋舋不倦 築室于程川之上 扁之以柳川沿川 植樹 繞屋扶疎 林木之蔥藉 軒區之敞楚 令人望之 依然有輞川盤谷之想 日與二三同志 論道講義 請益者日踵門 一辭事之以先生 屢登剡薦 亦載綱獻錄 高宗甲申卒 噫公在天下不讀之日 咾讀書如食飮 而所蓄者 一未展試於當世 命耶時耶 公旣不得於時 適也 時亦不能奪其守於公 何嗛焉 銘曰 長興古家 篤生英資 洛建徽言 櫛髮理絲 茶飯詩禮 箕裘孝睦 牖蒙裕後 有此片石. 疆圉單閼之復月. 崇祿大夫 禮曹判書 原任奎章閣提學 安東 金宗漢 撰 從孫 光宇 書, 崇祿大夫 吏曹判書 原任奎章閣 弘文學士 唐城 洪淳馨 書. 歲 丙子仲冬下浣.
    【풀이】 진안(鎭安)의 산수(山水)는 호남의 명승(名勝)이다. 풍속은 순후하고 사람은 질박(質朴)하여 왕왕 순실한 군자풍(君子風)이 있다. 여러 장보(章甫: 선비)가 그의 스승 유은(柳隱) 고공(高公)께서 훈도(薰陶: 덕성을 길러줌)한 사적을 생각하여 돌을 다듬어 그가 장수(藏修: 침잠<沈潛>하여 공부함) 하던 곳을 드러내려고 하니 극히 성대한 일이다. 공의 휘는 제룡(濟龍)이오 유은은 그 자호(自號)이니 철종(哲宗) 신미(辛未: 철종조엔 신미가 없음)에 탄생하여 예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그 선계(先系)는 장택인(長澤人)이니 장흠백(長興伯) 휘 복림(福林)이 그 원조(遠祖)이고 감찰(監察) 휘 정(挺)과 이판(吏判) 호 호은(湖隱) 휘 시추(時樞)와 병사(兵使) 호 해은(海隱) 휘 형진(亨鎭)은 그 증조 조부 및 아버지이다. 공은 타고난 효성으로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어버이를 섬김에 옛 사람의 행실을 다하니 양친이 불편한 대목이 없었다. 어머니가 병환이 나자 정성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고 병이 더하자 손가락에서 피를 뽑아 입에 드리워 사흘의 목숨을 연장하였으며 6년 동안 거상(居喪)하면서 여묘(廬墓)하고 소식(素食: 고기와 술이 없는 식사)만 하니 온 고을에서 모두 어렵게 여기었다. 그리고는 임천(林泉)에 몸을 숨기고 신심(身心)의 공부를 궁구하고 공령(功令: 과환<科宦>)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며 후진(後進)을 계도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또 정천(程川)가에 집을 지어 유천(柳川)이라 편액(扁額)을 하고 시내를 따라 버들을 심고 집을 둘러 나무를 가꾸어 임목(林木)의 울창함과 터서리의 창활(敞豁)함이 사람이 바라보면 어렴풋이 망천(輞川: 왕유<王維>의 별장)과 반곡(盤谷: 이원<李原>의 은거지)의 생각이 나게 하였다. 그리하여 날마다 몇 사람의 동지들과 도(道)를 논하고 듯을 강구하니 도움을 청하는 자가 날로 찾아들어 다 같이 선생으로 섬겨 여러 차례 천거에 오르고 강헌록(綱獻錄)에도 등재되었는데 고종(高宗) 갑신년(甲申年: 고종 21, 1884)에 졸하였다. 아, 공은 천하가 글을 읽지 않는 때에 있어서 글 읽기를 음식 좋아하듯 하였으나 속에 쌓인 바를 하나도 당세(當世)에 펴보지 못하였으니 명운(命運)이라 할까 시운(時運)이라 할까 공이 때를 얻지 못한 것도 쫌 맞게 당한 명운이겠지만 시대도 공에게서 조수(操守)를 빼앗지 않았으니 어찌 서운하다 하겠는가 명(銘)하기를 장흥(長興)의 고가(古家)에서 영걸스런 바탕 태어났는데 낙건(洛建: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훌륭한 말로써 머리 빗고 옷 지어 입듯 하였다네 시례(時禮)는 다반사(茶飯事)였고, 효목(孝睦)은 기구(箕裘: 전래하는 가업[家業])였다네 후진들 잘 계도하였기에 이 일편석(一片石) 서게 되었다네. 정묘(1927)년 11월. 숭록대부 예조판서 원임규장각제학 안동 김종한(金宗漢) 찬하고, 종손(從孫) 광우(光宇) 쓰다. 숭록대부 이조판서 원임규장각홍문학사 당성(唐城) 홍순형(洪淳馨) 쓰다. 병자(1936) 11월 하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