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요】 주천면 대불리 진성대안학교[구 대불초등학교] 후정에 자연석에 石門塢․秋月亭․華陽山이라 각자된 석비 3기 있다. 비들은 일반적인 기념비들이 아니라, 일종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표지석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석문오(石門塢, 1906년 건립)는 석문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고, 추월정(秋月亭, 1906년 건립)은 본디 그 마을에 있던 추월정의 표지석이었고, 화양산(華陽山, 건립연대미상) 마을옆 화양산을 안내하는 표지석이었을 것이다.
  • 【비표】 金主事義淳恤貧施惠碑(김주사의순휼빈시혜비)

    【위치】 주천면 신양리 진용로 도로변 먹고개 비석군 내.
    【시기】 1931년
    【형태】 높이 98cm, 너비 33cm, 두께 13cm.
    【개요】 비표(碑表) 양 옆에는 ‘恤窮濟貧 除瘼之澤 其惟仁人 瞻頌四隣’이라 새겨져 있다. 풀이하면 ‘궁핍함과 가난을 건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은택은, 어진 사람이기 때문이라 사방의 이웃이 우러르고 칭송한다.’라는 뜻이다.
    김의순(金義淳)의 본관은 김녕(金寧)으로 백촌(白村) 문기(文起)의 후손이다. 고종 임인(壬寅, 1902)년에 음사(蔭仕)로 주사(主事)에 임명되었다.
  • 【위치】 주천면 신양리 진용로 도로변 먹고개 비석군 내.
    【시기】 己未(1919)년 9월
    【형태】 높이 104cm, 너비 36cm, 두께 11cm.
    【개요】 양학래(梁鶴來)는 1878년에 출생하여 일제하 1914년에서 1933년까지 주천면장을 재임하였다.
  • 【위치】 주천면 신양리 436-12. 상성암 마을앞 도로변.
    【시기】 1938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57cm, 너비 56cm, 두께 25cm.
    【개요】 이 지방 성암, 금평에 살던 11명의 인사들이 계(稧)를 맺고 이를 기념하여 세운 비. 비의 좌측면에 11명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다. [( )안은 본관임]
    寬齋 朴宗海(忠州) 敬齋 安致都(竹山) 鶴汀 安鳳臣(順興) 荷隱 鄭尙鎬(慶州)
    稼隱 朴宗泰(忠州) 蘭谷 宋光鼎(恩津) 淸慕 金成益(金寧) 竹軒 宋啓仁(恩津)
    荷谷 鄭成鎬(慶州) 松隱 金運聲(金寧) 誠菴 朴宗河(忠州)
    비의 후면에는 이 지방의 풍광을 찬양한 글과 11명이 수계(修稧)한 사실의 전말을 적고 있다.
  • 【위치】 주천면 신양리 산29-1. 상성암 북서쪽 산비탈.
    【시기】 1941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5cm, 너비 44cm, 두께 23cm.
    【개요】 이 지역에 입향한 은진 송씨의 내력을 찬양한 글이다.

    【비문】 供永日縣百世天基定鏡開千秋珉君子造歟君子士之讚也昔在姬朝周召動鎬基洛供王祈永故成王之治服文武而冠八百千載之下洛泗通氣孔夫子動鄕基邦供魯久禱以統万邦故道冠百王千聖德被万代生靈數千載之下洛泗正氣會通于 璿李漢洛 列聖朝祖周而政宗孔以敎一時儒賢大夫士爭以執簡秉筆以爲歌咏藻餙无非太平永久之頌禱矣降世以來漢洛氣脉分通嶺湖道南而士出惟大嶺義縣恩準津宋氏雙淸堂愉后黃齋叅判德崇七代孫蘭谷諱光鼎在空谷不以无人而不馨德湖隱諱一樞處江湖先天下之宸憂華岩諱性仁居岩穴立崇華攘狄之義理俱皆以道義讚號何其美也亦皆以率門弟次苐動嶺基湖當時國家灾異亂萌多露星變擧國不以爲禍至獨三士憂國憂道賞學得周孔之祈永禱久儒紳之頌禱璿祚故於潭縣聖巖祭天峰世世奉誨脩供國祈命血誠懇懇乎彼蒼冀有以消彌於未然故於邦於道多蒙天佑邦命維新是以遠近弟子聞風雲屯訓化大盛世皆稱三君子儒嶠南村於是世居近百年今蘭公玄孫泰用湖公曾孫炳用華公孫福用方伐石記實以覺來世請文於余余謂前面曰百世供命基面與陰記令次玄孫弼用皆書記之數百以大義一言蔽之歎曰今天下去而三公不換此江山寒山一片石堪共言歟賞讚咏三君子儒之造也有供永日縣百世天基定鏡開千秋珉之語可謂造道之極功不尤盛歟蓋三君儒卽三公云爾時
    重光言大荒落泰之下澣前徵章寢郞渾定十三道都講長
    完山 李德應 記
    【풀이】 영구히 받든 해 백세(百世) 하늘에 달리고, 터 정한 천추의 비(碑) 거울을 열렸으니, 군자의 나아감인가, 군자는 사(士)의 찬사라. 옛날 희씨조정(姬氏朝廷)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호경(鎬京)을 움직여 낙양(洛陽)에 터를 잡고 왕을 받들어 영구한 운명 기도(祈禱)함으로 성왕(成王)의 정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승복하여 8백년 으뜸이 되고, 천년의 아래 낙수(洛水)와 사수(泗水) 기운(起運)이 통하여 공부자(孔夫子) 향리를 움직여 나라의 터를 잡고, 노(魯)를 받들고 영구함을 빌어 만방(萬邦)을 거느림으로써 도덕이 백왕천성(百王千聖)의 으뜸이요, 덕이 만대 생령에게 입힘이라. 수천 년의 아래 낙수(洛水)와 사수(泗水)의 정기 모여 선원(璿源)의 이(李)씨 한양(漢陽)에 통하여 열성조(列聖朝) 주(周)나라를 조종(祖宗)하여 정치하고, 공부자(孔夫子)를 주종(主宗)하여 수화(數化)하니 일시의 유현(儒賢)과 대부(大夫)와 사(士)가 다투어 간책(簡策 옛날 종이 대신에 문자를 쓰던 대쪽)을 잡고 붓을 잡아 가영(歌鷺)과 문사(文辭)를 만듦이 태평(太平)과 영구(永久)를 송도(頌禱 경사를 기리고 축복함)하지 않음이 없는지라. 세상이 강하(降下)한 이래 한양(漢陽)의 기맥(氣帳)이 나뉘어 영호남(嶺湖南)에 선비의 산(産)이 오직 크니, 영의현(嶺義縣)의 은진 송씨(恩津宋氏) 쌍청당(雙淸堂) 유(愉)의 후손 황재참판(黃齋淙判) 덕숭(德崇)의 7대손 난곡(蘭谷) 휘(諱) 광정(光鼎)이 공곡(空谷)에 있으되, 사람 없으므로 덕이 향기롭지 않음이 없고, 호은(湖隱) 휘(諱) 일추(一樞)는 강호에 처하되 천하의 신우(宸憂 임금의 근심)를 먼저하고, 화암(華岩) 휘(諱) 성인(性仁)은 바위틈에 살되 중화(中華)를 높이고 이적(夷狄 오랑캐)을 물리치는 의리를 세워서 모두다 도의로 호(號)를 찬양하니, 어찌도 그리 아름다운지. 또한 문제자(門弟子)를 인솔하고 차제(次第)로 영남을 움직여 호남에 터전하니, 당시 국가 재앙과 이변이 어지러이 싹트고 별자리 변동이 많이 드러나 온 나라가 재앙이 이른다고 하지 않으나, 홀로 세 선비는 나라를 근심하고 도(道)를 근심하여 일찍이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긴 날을 빌고 장구함을 빌며, 유림신사(儒林紳士)를 선원(璿源 왕통)의 복조(福祚) 송도(頌禱)함을 배웠으므로 용담고을 성암(聖岩) 제천봉(祭天峰)에 대대로 가르침을 받들어 나라를 받들고 운명을 비는 일을 수행하여 저 하늘에 지극한 혈성(血誠)이 재앙을 미연에 소멸되기를 축원하였으므로 국가와 도(道)에 하늘의 도움을 많이 무릅써 나라 운명 오직 새로우니, 이로써 원근의 제자 풍도를 듣고 구름같이 모여 가르친 교화(敎化) 크게 성행하니, 세상이 다 3인을 군자유(君子儒)라 칭찬하였다. 이에 교남촌(嶠南村)에 세거(世居)한지 근 백년이라. 이제 난곡공(蘭谷公) 현손(玄孫) 태용(泰用)과 호은공(湖隱公) 증손(曾孫) 병용(炳用)과 화암공(華岩公) 손(孫) 복용(福用)이 방금 돌을 다듬어 사실을 기록하여 내세를 깨치려고 기문을 나에게 청하하였다. 내 비 전면에 백세공명기(百世供命基)라 이르고 전면과 후면 음기(陰記)를 차(次) 현손(玄孫) 필용(弼用)으로 하여금 수백 자를 다 써서 기록하니, 대의(大義)라는 일언(一言)으로 휩싸고 탄식하되 이제 온 천하가 떠나는데, 3인의 공(公)은 이 강산을 바꾸지 않으니, 한산(寒山)의 일편석(一片石)과 더불어 같이 말함일런지. 일찍이 삼군자유(三君子儒)의 나아감을 찬양하였으니, 영구히 받든지 백세 하늘 달리고, 터 정한 천추의 비(碑) 거울을 열었다는 말은 가히 도(道)에 나아가는 극공(極功)이라 이르리니, 더욱 성(盛)하지 아니한가. 대개 삼군자유(三君子儒)는 곧 삼공(三公)을 이름이니라. 때는 신미(辛未. 1931)년 태월하순(泰月下旬) 전징장(前徵章) 침랑혼정(寢郞渾定) 13도 도강장(十三道都講長) 완산(完山) 이덕응(李德應)이 기(記)함.
  • 【위치】 주천면 신양리 491. 금평마을 남쪽 진입로 옆 언덕.
    【시기】 1957년
    【형태】 높이 156cm, 너비 56cm, 두께 28cm.
    【개요】 비 전면은 ‘恩津宋氏世居碑銘’, 양 옆으로 ‘蘭谷君子 湖隱居士 華巖三賢 愛慕山水 出自嶠南 入居聖岩 兩程峯下 朱川中沚 奠接蕃衍 猗此雲仍 以繼以傳 永世無盡’이라 새겨져 있는데, 풀이하면 ‘난곡군자(蘭谷君子, 光鼎)와 호은거사(湖隱居士, 一樞), 화암선생(華岩先生, 性仁) 삼현(三賢)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영남(嶺南)에서 성암(聖岩)에 들어와 살게 되니, 양정봉(兩程峯) 아래요, 주천(朱川) 안의 물굽이라, 여기에 머무르매 이처럼 아름답게 자손이 번성하니 이어지고 전하여서 영세(永世)에 다함이 없으리.’라는 뜻이다.
  • 【비표】 湖隱宋公遺蹟碑(호은송공유적비)

    【위치】 주천면 신양리 553-4. 추월정 앞.
    【시기】 1980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55cm, 너비 58cm, 두께 23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湖隱居士宋公이 講孝悌於鎭安朱川坊할새 坊之人이 負笈而務本者衆하야 彬彬然有文學之風하니 嗚呼盛哉라 僉彦이 賢賢하야 醵貨拮据하야 備日後需盖有年所矣러니 公之玄孫錫政이 基其貲하야 謀竪石하야 謁余紀遺蹟이거늘 余生於文으로 辭호대 不獲命하야 接以叙之하니 公의 諱는 一樞요 字는 而建이요 湖隱은 其號也라 恩津之宋이 系出高麗判院事諱大原하고 三傳에 接廉使諱明誼善圃牧하고 入國朝하야 有諱愉 世稱雙淸堂處士니 公之十三世祖也라 考曰澤鼎이니 澤鼎이니 壽로 通政이요 妣晋州姜氏니 以癸卯十一月二十四日生公하니 將娩에 通政公이 有樞星落室之夢하야 因以名焉하니라 天賦高明하고 及長에 就世父道川公學할새 日課外에 兼他人課題하고 詩才超倫하야 聲譽振鄕하다 書齋位隈處하야 每夜往來에 人이 多苦魑戱러니 自公出入으로 厥崇頓息하니 人咸異之하다 通政公이 命多讀書經하니 以其姜夫人이 有甘掌夢也라 離鯉敎是遵호대 特於洛召兩誥有杜氏碎하다 處仁湖峽하야 擬周召例하야 壇奉誨幣하야 祈永國命하니 噫라 時當韓祚方衰하고 西湖東漸하야 尸周召位者不知敬德諴民之義하고 唯趍末遂外之是急이어늘 公隱淪草澤하야 易乎忘世而愛民憂國底赤忱이 猶有彌於彼蒼하야 無辭不本於洛召故義하니 視彼汲汲外來而徒富徒貴者에 奚霄壤懸哉아 歿於 哲宗壬戌 十二月 十六日하야 葬于錦山南一面瀑沛洞乙原러니 改葬于鎭安朱川面星岩洞寅原하야 有遺集하야 藏于家하다. 配利川徐氏니 鳳采女라 事舅若夫에 咸稱其職하다. 墓는 同原異壙이라 生一男하니 甲仁이요, 孫男에 元用과 俊用과 大用과 炳用이니 有文行하다. 請文者는 炳用의 子니 篤於繼述焉이라. 遂爲銘하니 銘曰 制行以方하고 守志以貞하야 跡潛光垂에 身困道亨하니 不遇者時오 可傳者名이라 刻徽于珉하야 示後久程하노라.
    檀紀四千三百十二年 己未九月十日 月城 鄭東暉 撰
    【풀이】 호은거사(湖隱居士) 송공(宋公)이 효제(孝悌)의 근본으로 진안 주천고을에서 강(講)하시니, 고을 사람이 책을 지고 찾아와 수업한 결과 사람들을 무본(務本)하게 하였고, 빈빈(彬彬)한 학풍(學風)을 일으켰으니 아아 성(盛)하도다. 이 뜻을 기리기 위하여 여러 선비들이 재화(財貨)를 갹출(醵出)하여 다음부터 매년 찬수(饌需)를 올리게 하였더니, 공(公)의 현손(玄孫) 석정(錫政)이 그 재화로 기반을 삼아 유적비 건립을 계획하고, 나에게 비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내 학문이 생소하여 사양하였으나 그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가장(家狀)을 살펴 서(書)하게 되었다. 공의 휘(諱)는 일추(一樞)요, 자는 이건(而建)이요, 호은(湖隱)은 그의 아호이다.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고려 판원사 휘(諱) 대원(大原)에서 계출(系出)하였고, 3대 후에 안렴사(按廉使) 휘(諱) 명(明)은 포은(圃隱, 정몽주)·목은(牧隱, 이색)과 교유하였으며, 국조(國朝) 들어 휘(諱) 유세(愉世)는 쌍청당(雙淸當) 처사라 칭하였으니, 공의 13세조 이시다. 고(考)는 택정(澤鼎)이니 장수하여 통정대부가 되었고, 비(騙)는 진주 강씨(晉州姜氏)이니 계묘(癸卯) 11월 24일 공을 낳으셨다. 통정공께서 추성(樞星, 북극성)이 방안에 떨어진 꿈을 꾸고 열 달 후 공을 낳으시니, 이 때문에 일추(一樞)라 이름하게 되었다. 공은 천부(天賦)가 고명(高明)하고 성장하여서 백부 도천공(道川公)에게 취학(就學)하여 일과 외(日課外)에 타인의 과제까지 겸하였고, 시문의 재질이 뛰어나 칭찬하는 소리가 향리에 자자하였다. 서재가 외진 곳에 위치하여 매일 밤 왕래 때마다 사람들은 도깨비 장난으로 괴로워하였으나, 공께서 출입한 이후부터 그런 일이 그치니, 사람들은 모두 이상히 여겼다. 통정공께서 서경(書經)을 많이 읽기를 명하니, 강부인(姜夫人)께서는 일찍이 감당(甘棠)의 꿈이 있었기에 아버지 곁을 떠나 가르침을 따르라 하고, 낙고(洛誥)와 소고(召誥)의 양고(兩誥)에 의하여 두(杜)씨가 쇄신(碎身)되었음을 일깨워 주셨으며, 호협(湖峽)에 인자(仁者)가 처(處)하였음을 주소공(周召公)의 예(例)에 비유하여 단(壇)을 받들어 폐백(幣帛)으로 회유(誨諭)하여 국가(國家)의 운명(運命)이 길게 하기를 빌었다. 아! 슬프도다. 대한제국의 전조(前祚)가 바야흐로 쇠(衰)할 때를 당(當)하여 서호(西湖)의 물결이 동방(東邦)에 젖어들어 직분(職分)을 다하지 못하고, 녹(祿)을 먹은 자들이 유덕자(有德者)를 공경하여 함민(牽民)의 의(義)를 알지 못하고, 오직 외래(外來)를 향(向)하여 추리(趨利)에 급급(急急)하는지라. 공께서는 초택(草澤)에 은륜(隱淪)하여 세상을 등지고 애민우국(愛民憂國)한 적침(赤沈)이 저 푸른 창공에 사무쳐 말씀마다 낙고(洛誥)와 소고(召誥)의 고의(古義)에 근본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저들의 외래(外來)에 급급(汲汲)하여 한갖 부와 귀에 눈먼 자들을 보고 어찌 목을 베어 하늘과 땅에 달아매지 않으랴 하셨다. 철종 임술(壬戌) 12월 16일 몰(歿)하니, 금산군 남일면 폭포동 을좌원(乙坐原)에 장례를 모셨다가 다시 주천면 성암동 인좌원(寅坐原)으로 모시게 되었으며, 유집(遺集)이 소장(所藏)되어 전래한다. 배(配)는 이천 서씨(利川徐氏)로 봉채(鳳彩)의 따님인데, 시부모와 부군(夫君)을 섬기되 그 직분을 다하였다. 묘는 같은 벌안이나 무덤은 따로 안장(安葬)되었다. 1남을 낳으니 갑인(甲仁)이요, 손(孫)은 원용(元用)·준용(俊用)·대용(大用)·병용(炳用)이니 문행(文行)이 있었다. 비문을 청한 자는 병용(炳用)의 아들이니, 조상을 계술(繼述)함에 독실하다. 명(銘)하여 이르되 “제행(制行)은 방정(方正)하게 하고, 수지(守志)는 정결(貞潔)하게 하였으며 / 잠적(潛跡)한 곳에 빛을 드리게 되니 / 몸은 곤고(困苦)하였으나 도(道)는 형통(亨通)하였으며 / 때를 만나지 못하였으나 그 이름은 전(傳)하게 되었도다. / 옥돌에 실행(實行)을 전각하여 후세인(後世人)에게 오래 전하고자 하노라.” 단기 4312년 기미(己未) 9월 10일 월성(月城) 정동휘(鄭東暉) 찬(撰)
  • 【비표】 荷隱鄭先生遺墟碑(하은정선생유허비)

    【위치】 주천면 신양리 성암2길 22-1 명덕재 담장 앞.
    【시기】 1938년 5월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200cm, 너비 62cm, 두께 29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龍潭之西聖巖則荷隱鄭先生講扉之所也 諱尙鎬 表德儀伯 貫鄕月城 我朝初大將軍謚忠烈公仁祚之十六世孫也 自父祖以上 襲詩禮之訓 述孝友之行 家門嚴正 心法惇厚 先生生于 哲廟辛亥 天姿剛明 自幼異凡 及就學 不須長師策勵 吃吃終日 嘗讀小學曰 但誦句讀而身不體行 則未免書自我自 猶有愧於子夏吾必謂之之辭 竟何益馬 躬子採拾 以供親旨 樂易兄弟 雍睦宗黨 孝悌謹愼 餘力做業修劑之方 治平之道 一一講究 簞瓢陋巷 有不政其樂底氣像 時人歎賞曰 古之君子 今復得見 鄕黨宿望 士友標準 往在甲午東匪猖獗 誘掖部落 無一漬染者 又於蒼龍歲 與其師西河金秦鉉 重修鄕約 齊室新設壁盒 秦陪朱呂兩先生影像于南原養士齊 妥侑當日 將讀法四規 講習生徒 賞罰善惡 鄕里之風化 至今尙存 行路之指點起敬興感 嗚呼此蓋先生之大略大節 而八旬一日 嘉言懿行 不可得以殫擧 日其門人金匡鉉甫 匱其狀牒而言曰 吾等若先生子姪 設楔鳩金者 計八年于滋 而遺稿鋟梓 貞珉表墟 使吾先生之道 垂無窮於來來 故敢請文 余薇盥讀狀 而對曰 荷翁之心學之況深簡奧 想有外史氏之弗律 而非若詅蚩符之所敢也 然義有所終不辭 捃摭其萬一 以竣後之君子採擇云 歲在乙亥維夏之中浣 完山李巽 書于龍攝堂
    【풀이】 용담(龍潭)의 서쪽 성암(聖巖)은 하은(荷隱) 정선생(鄭先生)께서 학문을 강마(講磨)하시던 곳이다. 선생의 휘는 상호(尙鎬)요 자는 의백(儀伯)이다. 본관은 월성(月城, 경주慶州의 고호)이니 아조(我朝) 초기의 대장군인 시호 충렬공(忠烈公) 인조(仁祚)의 16세손이다. 부조(父祖) 이상은 시례(詩禮)의 교훈을 이어받고 효우(孝友)의 행실로 계승하여 집안은 엄정하고 심법(心法)은 돈후(敦厚)하였다. 선생은 철종 신해(辛亥, 철종2, 1851)에 태어났는데 천성이 강명(剛明)하여 어려서부터 여느 아이들과는 같지 않았다. 서당에 들어가게 되자 스승이나 어른들이 독려를 하지 않아도 종일토록 공부에 열중하였다. 일찍이 소학(小學)을 읽으면서 이르기를 “다만 구두(句讀)만 읽고 몸으로 이행을 하지 않는다면 책은 책이고 나는 나여서 서로 각각임을 면치 못할 것이니, 오히려 자하(子夏, 공자의 제자)가 말한 ‘말이 믿음직스럽고 행실이 독실하면 비록 배우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 사람은 배운 사람이라 일컫겠다’ 한 말에 부끄럽게 되는 것이니 인간의 생활에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몸소 나물을 캐고 땔감을 주어다가 부모의 반찬을 장만하였고 형제간에는 즐겁고 평이(平易)하게 지냈으며 일가간에는 화목하여 효제(孝悌)하고 근신(勤愼)하였으며 그러고도 여가가 있으면 공부를 하였는데,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도리를 일일이 연구하여 일단사(一簞食) 일표음(一瓢飮)으로 누항(陋巷)에서 자락(自樂)하는 즐거움을 바꾸지 않을 기상을 가졌으니, 당시 사람들이 칭탄하기를 “옛날의 군자 안자(顔子)를 지칭한 말임을 오늘날 다시 보게 되었다.” 하였고 향당(鄕黨)에서는 숙망(宿望)으로 모시고 사우(士友)들은 표준으로 삼았다. 지난 갑오년(甲午年)에는 동학(東學)이 성하게 일어났는데 그 마을에서는 선생의 교도(敎導)로 한 사람도 동학에 물이 든 사람이 없었다. 또 갑진년(甲辰年)에는 스승인 서하(西河) 김태현(金泰鉉)과 함께 향약(鄕約)을 다시 실시하였고 남원(南原)의 양사재(養士齋)에다 벽장을 새로 들이고 주자(朱子)와 여동래(呂東萊, 남송의 학자인 여조겸[呂祖謙]의 호) 양 선생의 영정을 모셨다. 모시던 날 향약의 4조목을 가지고 생도들에게 강의하고 선악에 대하여 상과 벌을 내렸는데 고을의 풍교(風敎)가 지금까지 남게 되고 길을 가는 행인들도 그곳을 가리키면서 감격해하고 경의를 표하고는 한다. 오호라! 이는 선생의 대략의 큰 절행(節行)인데 팔십 평생을 하루와 같이 지내셔서 그 가언(嘉言)과 의행(懿行)은 이루 다 매거하기 어렵다. 어느 날 그 문인 김광현(金匡鉉) 선비가 장첩(狀牒)을 싸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우리들과 선생의 아들과 조카들이 계를 조직하여 돈을 모은 지가 우금 8년이 됩니다. 유고(遺稿)를 발간하고 유허(遺墟)에 비를 세워 우리 선생의 도학으로 하여금 내세에 다함이 없게 하기 위하여 감히 글을 청합니다.” 하였다. 나는 장미의 물에 손을 씻고 그 장독을 읽어보고 대답하기를 “하옹(荷翁)의 심학(心學)의 심오(深奧)함은 생각건대 외사씨(外史氏, 지방의 수령)의 크게 포양함이 있었을 터이므로 나같은 영치부(詅癡)符(무뢰한無賴漢과 비슷한 뜻)가 감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였다. 그러나, 의리상 끝내 사양할 수는 없어 그 만에 하나만 대강 간추려서 후세의 군자가 채택하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을해(乙亥) 1935 4월 중순에 완산(完山) 이손(李巽)은 용섭당(龍攝堂)에서 글을 짓다.
  • 【비표】 都事義城金公孝閣碑(도사의성김공효각비)

    【위치】 주천면 용덕리 산57. 산제봉 마을 뒤(북서) 산기슭
    【시기】 1946년
    【형태】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높이 150cm, 너비 44cm, 두께 22cm.
    【개요】 비문을 쓴 이기손(李起巽)은 자는 용섭(龍攝), 호는 금재(錦齋)로 한말의 의병 지도자였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晦庵夫子 編做人書 以立敎明倫爲首 栗谷先生 著擊蒙要訣 以讀書事親 法大率卽子曰弟子入則孝 出則悌 謹以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之大訓也 舍是則彛滅 天常則敗 而大本何從而立乎 故吾事吾親 豈可曰孝名 而孝之者 蓋鮮 是以 有之則鄕省剡薦 發揮揄揚 誠古聖王孝之道也 嗚呼 世衰道微 叔季卓行 聞者益不覺擊節歎賞者 近古有曰士人金鎭義 尙書居翼裔 其考曰俊入 妣曰昌寧曺氏 忠孝舊閥 世襲跡美 公生異凡 十三粗涉四書 名動坊內 事父母 極養志體 耕讀爲業 親癠之谹 嚼指禱天 靈藥自臻 以享天年 及其喪葬 三霜盡情文如一日 日愈遠而易忘 每於諱辰 孺慕如新 所謂孝無終始 於此可見 官至都事而卒 噫 如公者 大本立矣 家風敦矣 樵牧至今口誦 豈可以世路之聞不聞 爲公足輕重哉 次子在洛 繼孝之孝 錫類不匱也 賢孫世豪世豊 見島夷屛跡 心赤建國 前修謂求忠於孝門者 虛乎哉 孫世昌抱狀而請予文曰 閣已成而石將鑱 願賜一言 予按而睩之 嘉其懿行 不辭就銘 銘曰 相彼龍德 孝子正中 志軆血湯 都事金公 大本立矣 石則窿寤 王延故事 感歎者同 碩果不食 曰孝曰忠 行塗必式 有辭無窮 歲舍己丑遯月中浣完山李起巽撰 恩津宋弼用 書
    【풀이】 회암부자(晦菴夫子, 주희朱熹를 높혀서 쓴 말)는 주인서(做人書, 소학小學을 뜻함)를 엮으면서 입교(立敎)와 명륜(明倫)을 맨 앞에 내세웠고, 율곡선생(栗谷先生)은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으면서 독서(讀書)와 사친(事親)으로써 대체(大體)를 본받게 하였으니, 즉 공자(孔子)가 이른바 “자제들은 집에 들면 효도하고 밖에 나오면 공경하며 신의에 힘쓰고 널리 대중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하여 그러고도 여가가 있으면 그때에는 글을 배운다”라고 한 큰 훈계의 뜻과 같은 것이다. 이를 버리면 이성(彝性)이 멸절(滅絶)하고 천기(天紀)가 무너지는 것이니, 어디에서 대본(大本)을 세우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내 부모를 섬기는 것을 어찌 효도라 이름하겠는가마는 효도를 하는 사람은 대체로 적다. 그렇기에 그러한 사람이 있으면 군(郡)과 도(道)에서 천거하여 포양(襃揚)하는 것이니 이는 참으로 옛날의 성왕(聖王)이 효도를 권장하는 도리인 것이다. 오호라! 세상은 쇠퇴하고 도덕은 희미해졌으므로 말세의 드높은 행실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장단을 치면서 더욱 칭탄하게 하는데, 근고(近古)에는 사인(士人) 김진의(金鎭義)가 있었는 바 판서 거익(居翼)의 후예이다. 아버지는 준팔(俊八)이요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인데 충효(忠孝)의 오래된 가문에서 대대로 그 훌륭함을 이어받았다. 공은 낳으면서부터 범상하지 않았고 열 세 살에는 사서(四書)를 대략 섭렵하니, 명성이 방내(坊內)에 퍼졌다. 어버이를 섬김에는 지체(志體)의 봉양을 다하면서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일을 삼았는데 부모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쏟았고 하늘에 자신을 대신해달라고 비니, 영약(靈藥)이 저절로 굴러 들어와서 천수(天壽)를 다 누리게 하였다. 이윽고 상을 당하자 3년동안 정문(情文, 정은 슬픔을 문은 치레를 잘함을 뜻함)을 다하기를 하루와 같이 하였고, 세월이 더욱 흐르면 차츰 잊혀지기 쉬운 것이므로 매양 기신(忌辰)을 당하면 유모(孺慕, 어린이가 부모를 사모하듯 하는 일)함이 금방 초상을 당한 듯이 하였으니 이른바 ‘효도에는 종시(終始)가 없다’ 한 말의 뜻을 여기에서 보게 된다 하겠다. 벼슬은 도사(都事)에 이르고 졸하였다. 희라! 공과 같은 분은 대본(大本)이 서고 가풍(家風)이 돈독해졌다 할 것이고 초부(樵夫) 목동(牧童)들이 지금까지 전송(傳誦)하고 있으니, 세상에 알려지거나 말거나가 공에게 무엇이 손익(損益)이 되겠는가? 또 작은 아들 재락(在洛)은 효도의 집안에 효도로 이었으니 같은 무리로 점지하여 다함이 없게 함이요, 현손(賢孫) 세호(世豪)와 세풍(世豊)은 왜인(倭人)들이 자취를 감춤을 보고는 이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에 심혈을 바치고 있으니, 전현(前賢)들이 이른바 ‘충신은 효자의 집안에서 구한다’는 말이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손자인 세창(世昌)이 가장(家狀)을 안고 와서 나의 글을 청하면서 이르기를 “효각(孝閣)이 이미 이루어지고 돌도 다듬어졌으니 원컨대 한 말씀 하여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가장을 살펴보고 그 훌륭한 행실을 높이 평가하여 사양하지 않고 명(銘)을 지었다. 명에 이르기를,
    저 용덕(龍德)*을 보건대 / 효자는 정중(正中)을 얻었네 / 지체(志體)의 봉양에 약 수발에 / 도사(都事) 김공(金公)은 / 대본(大本)을 세웠으니 / 돌 또한 하늘에 높다랗구나 / 왕연(王延)*의 고사(故事)에 / 감탄하는 것은 고금이 같고 / 석과(碩果)*는 따먹지 않는 법 / 효자도 나고 충신도 났구려 / 길손들 틀림없이 경의 표하리니 / 무궁토록 전해짐이 있으리로다.
    기축(己丑, 1949) 6월 중순에 완산(完山) 이기손(李起巽)은 찬하다.

    *용덕龍德 : 높은 덕.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문언文言에 있기를 “초구初九에 잠룡물용潛龍勿用이라 함은 무슨 뜻입니까?”하니,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용덕을 지니고 숨은 자이니라”하였고 또 묻기를 “구이九二에 현룡재전見龍在田이니 이견대인利見大人이라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니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용덕을 지니고 정중正中을 얻은 자이니라”하였다. 이는 괘상卦象을 용에 비유하여 해석한 것이므로 잠심潛心하여 자득自得할 수 밖에 없다. 이상以上의 뜻에다가 효자가 살던 곳이 龍德里임을 빗대어 꾸민 글 같다.
    *왕연王延 : 전조前趙의 효자. 자는 연원延元.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읍혈泣血 3년을 하였고, 매양 기일忌日을 당하면 십여 일을 슬피 울었다.
    *석과碩果 : 석과불식碩果不食. 주역周易 박괘剝卦는 전부가 음효陰爻 속에 상구上九 하나만 양효陽爻이므로 과수나무에 다른 과일은 다 떨어지고 맨 윗 가지에 큰 과일 하나만 남은 형상이며 하나가 있으므로 없어지지 않고 다시 생성生成할 수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훌륭한 자손이 다시 태어남을 비유하여 말한 것임.
  • 【비표】 參奉全公善行紀蹟碑(참봉전공선행기적비)

    【위치】 주천면 용덕리 181-1. 미적동 진입로 좌측 하천 건너 논가.
    【시기】 1967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24cm, 두께 43cm, 두께 19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鎭安之北 二舍有餘 有明德峯 峰之下有一洞 名曰米積里 峯巒秀麗 溪流澄淸 可以爲隱者 盤旋之所 而中有一士 玉山全公是已 公諱文漢字永祚玉山其號也 系出沃川 百濟溫祚朝十濟功臣 歡城君煇聶爲鼻祖 至高麗忠肅王朝有緯侑官 奉翊大夫 密直副使 判圖判書上護軍 管城君 卽公之十八代祖也 高王父曰諱終善 勝國英庙朝官嘉善大夫 曾王父曰諱厚景 官通政大夫 王父曰諱榮範 父曰諱義達官嘉善大夫 妣曰貞夫人慶州金氏弼之女 憲庙丙午四月十五日 擧公于沃川故第 雁行有三曰 俊漢 武漢 公居其一 而生有異質 天性仁厚 孝友于篤 兼以聰明之才 文藝夙著經傳 百家九流之書 豁然貫通 高宗朝 除勳院參奉 不其年見時事日 非遂絶意宦海 浩然歸鄕 陪其親而隱居 于此徜洋乎 山水琴書自娛 惟以啓牖 後進爲己任 遠近才士 聞風執贄以來 濟濟滿堂焉 讀書之暇 亦涉于獻岐之方 精通鍼藥之妙 聞人危急 卽往必救 且本以寬裕之性 見人孤窮 捐財輒恤 其勞其澤洽于鄕隣頌聲藉藉 衆口成碑 時人咸稱曰 玉山先生 事載全北道誌焉 不幸至于帝閽便作玉樓之賊 乃丁卯 十一月 十二日 而壽八十二 遠近知不知者 皆曰 仁人去矣 葬于米積洞 上牟田谷 先妣塋下 子坐原 配淳昌薛氏 弘儒候聰之后 鎭允之女 生四男一女 男曰 世杓 在杓 益杓 年杓 女適金山人李明鎬也 世杓男 允夏在杓男 漢夏 興夏 基夏 善夏 年杓男 玹夏 益杓男 官夏 慶夏 曾玄以下 蕃行不錄 嗚呼 今去公之歲 四十餘年 而尙闕顯刻 爲其裔孫之咨嗟者久矣 乃於今春門議歸一 將伐石而竪之于其遺墟 以備永年不朽之資豈不休哉 日公之後孫 袖其家狀以來 徵余之文 余以樗櫟之材 斗宵之文 辭之半晌 而其請益强故 終不固辭 如右略敍 因爲之銘 詞曰, 猗歟玉山東方巨族 不好芬華寓樂泉石 學問高明開牖來學 慈惠庸力頌聲藉藉 吁被雲仍承承繼繼 嗚呼公蹟不泯千載. 檀紀四千三百年丁未正月中浣. 潘南人 武陵 朴贊萬 謹撰竝書. 【풀이】 진안(鎭安)의 북쪽 2사(舍: 1사는 약 30리) 남짓에 명덕봉(明德峰)이 있고 명덕봉 아래에 한 동네가 있으니 이름하여 미적리(米積里)로서 봉우리들이 수려(秀麗)하고 시냇물이 청정(淸淨)하여 은자(隱者)가 반선(盤旋: 소요하면서 지냄)할 만한 곳인데 그 마을에 한 선비가 있으니 옥산전공(玉山全公)이 그 분이다. 공의 휘는 문한(文漢)이오 자는 영조(永祚)이며 옥산은 그 호이다. 옥천(沃川)에서 계출(系出)하였으니 백제 온조왕조의 십제공신(十濟功臣 )인 환성군(歡城君) 휘 섭(聶)이 그 시조이고 고려 충숙왕조에 이르러 휘 유(侑)가 있어 벼슬이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 판도판서 상호군(密直副使判圖判書上護軍)에 훈봉(勳封) 관성군(管城君)이니 바로 공의 18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종선(終善)이니 조선 영묘조(英祖)의 가선대부(嘉善大夫)요 증조의 휘는 후경(厚景)이니 통정대부이며 조부의 휘는 영범(榮範)이오 아버지의 휘는 의달(義達)이니 가선대부이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경주김씨로 필(弼)의 따님인데 헌묘(憲宗) 병오(丙午: 헌종12, 1846) 4월 15일에 옥천(沃川)의 옛 집에서 공을 낳았다. 형제는 셋이 있어 준한(俊漢) 무한(武漢)과 공인데 공은 그 첫째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바탕이 있어 천성이 인후(仁厚)하고 효우(孝友)가 더욱 독실하였으며 총명한 재주를 겸하여 문예(文藝)가 일찍부터 드러났는데 경전(經典)을 위시하여 백가(百家)와 구류(九流)에 훤히 관통하였다. 고종조에 충훈부(忠勳府)의 참봉에 제수(除授) 되었으나 몇 해 되지 않아 세상이 날로 그릇되어 감을 보고 벼슬길에 뜻이 없어 호연(浩然)히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를 모시고 이곳에 은거하여 산수(山水) 사이에서 소요(逍遙)하고 금서(琴書)로 자락(自樂)하면서 오직 후진(後進)들을 깨우치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으니 원근의 재사(才士)들이 소문을 듣고 예물(禮物)을 들고 찾아왔으므로 귀한 기운이 온 당(堂)안에 가득하였다. 글을 읽는 여가에 또 헌기(獻岐: 황제와 기백, 둘 다 의술에 정통하였음)의 서적을 섭렵(涉獵)하여 침약(鍼藥)의 묘방(妙方)에 정통하였는데 남의 위급함을 들으면 즉시 달려가 구하였으며 또 본래 너그러운 성품이라 남의 고단하고 궁핍함을 보면 반드시 사재(私財)를 덜어 구휼하니 그 공로와 덕택이 온 고장에 두루 퍼져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하였으므로 말이 구비(口碑)가 되어 당시 사람들이 너나없이 옥산선생(玉山先生)이라 불렀는데 그 일은 전북도지(全北道誌)에 실려 있다. 불행히도 서울에 갔다가 그길로 졸하게 되었으니 정묘년(1927) 11월 12일이고 수는 82세이다. 멀고 가깝고 알고 모르고 간에 모두 말하기를 “인인(仁人)이 떠나갔다” 하였다. 미적리의 상모전(上牟田)골 선비(先妣) 영하(塋下) 자좌원(子坐原)에 장사지냈다. 배위 순창설씨는 홍유후(弘儒候) 총(聰)의 후예인 진윤(鎭允)의 따님으로 4남 1녀를 낳으니 아들은 세표(世杓), 재표(在杓), 익표(益杓), 연표(年杓)이고 딸은 금산인(金山人) 이명호(李明鎬)에게 출가하였다. 세표의 아들은 윤하이고 재표의 아들은 한하, 흥하, 기하, 선하이며 익표의 아들은 관하, 경하이고 연표의 아들은 현하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벌쭉하여 기록하지 않는다. 오호라 지금에서 공의 세대까지는 40여년이 되었으나 아직까지 현각(顯刻)이 없으니 자손된 사람들이 한스럽게 여긴지 오래이다. 금년 봄에야 문중의 논의가 귀일하여 돌을 다듬어 그 유허(遺墟)에다 세워 영구히 불후(不朽)케 하는 바탕으로 삼게 되었으니 어찌 갸륵한 일이 아니던가 어느 날 공의 후손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의 글을 청하였다. 나는 쓸모없는 인물이고 하찮은 글이라서 반 나절을 사양하였으나 어찌나 줄기차게 청하기에 굳이 사양할 수 없어 위와 같이 간략히 서술하고 명(銘)을 달았다. 훌륭하도다 옥산(玉山)은 동방의 거족(巨族)이었으나 분화(芬華, 화려함)를 좋아하지 않고 천석(泉石)에 낙을 부쳤다. 학문은 고명하여 후진 계도(啓導)하였고 자혜(慈惠)에 힘을 써 칭송이 자자하였다. 아, 저 자손들 계계승승(承承繼繼)하니 공의 사적 천년토록 묻히지 않으리라. 단기4300년 정월 중순. 반남인(潘南人) 무릉(武陵) 박찬만(朴贊萬) 삼가 짓고 쓰다.
  • 【위치】 주천면 주양리 와룡암 옆 금평1길 도로변 경작지 내.
    【시기】 1966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5cm, 두께 54cm, 두께 24cm.
    【개요】 김영덕(金永悳, 1926~1965)의 본관은 광산,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 출생. 평소에 마음씨가 곱기로 소문이 났으며 어린이를 몹시 좋아하여 항상 그들의 벗이 되었고, 자기의 아들․딸처럼 귀여워 해주어 어린이들도 그를 ‘혹 아저씨’라 부르며 잘 따랐다고 한다. 그러던 1965년 12월 28일 주양리 와룡소에서 썰매를 타고 놀던 세 어린이들이 얼음이 깨지면서 익사 직전에 있음을 보고, 옷을 입은 채 뛰어들어 2명을 구하고 1명을 또 구하려다 그만 익사하였다. 이때 나이 38세, 자기 몸을 희생한 의로운 죽음이었다. 그의 의로움에 감동하여 청소년 적십자사 단원이 기금을 모아 순의비를 세웠으며, 1968년 새싹회에서 고인의 장한 뜻을 기려 ‘소파상’ 수상자로 선정하였다.
  • 【비표】 縣令鄭侯老容遺德碑(현령정후노용유덕비)

    【위치】 주천면 대불리 163-13. 진등마을 앞 동상주천로 길가
    【시기】 판독불능
    【형태】 높이 97cm, 너비 42cm, 두께 18cm.
    【개요】 정노용(鄭老容)은 용담현령으로 1842년 6월에 부임하여 1845년 7월에 원주로 이임하였다.
  • 【비표】 縣令洪侯遠燮防弊善政碑(현령홍후원섭방폐선정비)

    【위치】 주천면 대불리 163-13 진등마을 앞 동상주천로 길가
    【시기】 1845년 3월
    【형태】 높이 100cm, 너비 43cm, 두께 18cm.
    【개요】 홍원섭(洪遠燮)은 용담현령으로 1837년 12월에 부임하여 1840년 12월에 교하현령으로 영전하였다.
  • 【위치】 주천면 대불리 운일암 대불암 암벽면
    【시기】 불명
    【형태】 암각서(岩刻書)
    【개요】 긍구당(肯構堂) 김중정(金重鼎)이 소요한 곳이라 해서 ‘雙高道德 大明日月(쌍고도덕대명일월)’이라고 8자가 새겨져 있다. 풀이하면 김중정(金重鼎)의 도(道)와 덕(德)이 대명(大明)한 일월(日月)처럼 높다는 뜻이다. 글씨는 김중정의 후손인 석파(石坡) 김정호(金正浩)가 썼다.
  • 【위치】 주천면 대불리 운일암반일암 동상주천로 길가 암벽
    【시기】 1919년
    【형태】 암벽을 깎아내고 대리석 석판 1개를 끼움.
    【개요】 긍구당(肯構堂) 김중정(金重鼎)의 자손들이 긍구당의 소요지에 기념비를 설치한 것이다. 비문은 앞의 ‘雙高道德 大明日月(쌍고도덕대명일월)’의 의미와 통한다. 다음에 그 원문과 풀이를 싣는다.

    【肯構堂金公遺蹟】 公諱重鼎 字子三 光山人 恭安公 諱謙光五世孫 學問醇正 文章簡古 爲世推重 崇禎末 絶意仕進及門 毅宗殉社 掛冠城門 隱於此■曰 明道明德兩峰雙高齋秀大明 日月可見于 此時登兩峰北望拜跪 終日痛哭 而歸 忠貫日月故 謹玆勒石以示後人 九世孫 泰鉉謹誌. 己未 八月 日立 箕宅 箕朳 在吉 在昌 在年 在豊 在春 在煥 在玉 在哲 在德 在華 在訓 元鉉 大鉉 重鉉 世鉉 夏 鉉 瑢鉉 吉鉉 永周 匡鉉 奎鉉 英鉉 周鉉.
    【풀이】 공의 휘는 중정(重鼎)이며, 자는 자삼(子三), 광산인으로 공안공 휘 겸광(謙光)의 5세손이다. 학문이 순수하며 바르고 문장이 간고(簡古)하여 세상에서 추앙하고 존경하였다. 승정(崇禎) 말년에 관직에 나아갈 뜻을 끊고 의종(毅宗,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사(殉社)의 문에 다다랐다. 갓(冠)을 성문에 걸고 이곳에 은거할 만하다 하고 말하기를, 명도(明道)․명덕(明德) 두 봉우리가 높고 뾰족하고 빼어나 명나라 해와 달을 가히 볼 수 있다 하여, 두 봉우리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무릎을 끊어 절을 한 뒤 하루종일 통곡하다가 돌아가니, 이 충성은 해와 달을 꿰었으므로, 이에 삼가 돌에 새겨 후인들에게 보인다. 9세손 태현(泰鉉)이 삼가 기록함. 기미(己未, 1919) 8월 일 세움. 기택 기팔 재길 재창 재년 재풍 재춘 재환 재옥 재철 재덕 재화 재훈 원현 대현 중현 세현 하현 용현 길현 영주 광현 규현 영현 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