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金主事義淳恤貧施惠碑(김주사의순휼빈시혜비)

    【위치】 주천면 신양리 진용로 도로변 먹고개 비석군 내.
    【시기】 1931년
    【형태】 높이 98cm, 너비 33cm, 두께 13cm.
    【개요】 비표(碑表) 양 옆에는 ‘恤窮濟貧 除瘼之澤 其惟仁人 瞻頌四隣’이라 새겨져 있다. 풀이하면 ‘궁핍함과 가난을 건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은택은, 어진 사람이기 때문이라 사방의 이웃이 우러르고 칭송한다.’라는 뜻이다.
    김의순(金義淳)의 본관은 김녕(金寧)으로 백촌(白村) 문기(文起)의 후손이다. 고종 임인(壬寅, 1902)년에 음사(蔭仕)로 주사(主事)에 임명되었다.
  • 【위치】 주천면 주양리 와룡암 옆 금평1길 도로변 경작지 내.
    【시기】 1966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5cm, 두께 54cm, 두께 24cm.
    【개요】 김영덕(金永悳, 1926~1965)의 본관은 광산,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 출생. 평소에 마음씨가 곱기로 소문이 났으며 어린이를 몹시 좋아하여 항상 그들의 벗이 되었고, 자기의 아들․딸처럼 귀여워 해주어 어린이들도 그를 ‘혹 아저씨’라 부르며 잘 따랐다고 한다. 그러던 1965년 12월 28일 주양리 와룡소에서 썰매를 타고 놀던 세 어린이들이 얼음이 깨지면서 익사 직전에 있음을 보고, 옷을 입은 채 뛰어들어 2명을 구하고 1명을 또 구하려다 그만 익사하였다. 이때 나이 38세, 자기 몸을 희생한 의로운 죽음이었다. 그의 의로움에 감동하여 청소년 적십자사 단원이 기금을 모아 순의비를 세웠으며, 1968년 새싹회에서 고인의 장한 뜻을 기려 ‘소파상’ 수상자로 선정하였다.
  • 【위치】 주천면 대불리 운일암반일암 동상주천로 길가 암벽
    【시기】 1919년
    【형태】 암벽을 깎아내고 대리석 석판 1개를 끼움.
    【개요】 긍구당(肯構堂) 김중정(金重鼎)의 자손들이 긍구당의 소요지에 기념비를 설치한 것이다. 비문은 앞의 ‘雙高道德 大明日月(쌍고도덕대명일월)’의 의미와 통한다. 다음에 그 원문과 풀이를 싣는다.

    【肯構堂金公遺蹟】 公諱重鼎 字子三 光山人 恭安公 諱謙光五世孫 學問醇正 文章簡古 爲世推重 崇禎末 絶意仕進及門 毅宗殉社 掛冠城門 隱於此■曰 明道明德兩峰雙高齋秀大明 日月可見于 此時登兩峰北望拜跪 終日痛哭 而歸 忠貫日月故 謹玆勒石以示後人 九世孫 泰鉉謹誌. 己未 八月 日立 箕宅 箕朳 在吉 在昌 在年 在豊 在春 在煥 在玉 在哲 在德 在華 在訓 元鉉 大鉉 重鉉 世鉉 夏 鉉 瑢鉉 吉鉉 永周 匡鉉 奎鉉 英鉉 周鉉.
    【풀이】 공의 휘는 중정(重鼎)이며, 자는 자삼(子三), 광산인으로 공안공 휘 겸광(謙光)의 5세손이다. 학문이 순수하며 바르고 문장이 간고(簡古)하여 세상에서 추앙하고 존경하였다. 승정(崇禎) 말년에 관직에 나아갈 뜻을 끊고 의종(毅宗,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사(殉社)의 문에 다다랐다. 갓(冠)을 성문에 걸고 이곳에 은거할 만하다 하고 말하기를, 명도(明道)․명덕(明德) 두 봉우리가 높고 뾰족하고 빼어나 명나라 해와 달을 가히 볼 수 있다 하여, 두 봉우리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무릎을 끊어 절을 한 뒤 하루종일 통곡하다가 돌아가니, 이 충성은 해와 달을 꿰었으므로, 이에 삼가 돌에 새겨 후인들에게 보인다. 9세손 태현(泰鉉)이 삼가 기록함. 기미(己未, 1919) 8월 일 세움. 기택 기팔 재길 재창 재년 재풍 재춘 재환 재옥 재철 재덕 재화 재훈 원현 대현 중현 세현 하현 용현 길현 영주 광현 규현 영현 주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