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湖隱宋公遺蹟碑(호은송공유적비)

    【위치】 주천면 신양리 553-4. 추월정 앞.
    【시기】 1980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55cm, 너비 58cm, 두께 23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湖隱居士宋公이 講孝悌於鎭安朱川坊할새 坊之人이 負笈而務本者衆하야 彬彬然有文學之風하니 嗚呼盛哉라 僉彦이 賢賢하야 醵貨拮据하야 備日後需盖有年所矣러니 公之玄孫錫政이 基其貲하야 謀竪石하야 謁余紀遺蹟이거늘 余生於文으로 辭호대 不獲命하야 接以叙之하니 公의 諱는 一樞요 字는 而建이요 湖隱은 其號也라 恩津之宋이 系出高麗判院事諱大原하고 三傳에 接廉使諱明誼善圃牧하고 入國朝하야 有諱愉 世稱雙淸堂處士니 公之十三世祖也라 考曰澤鼎이니 澤鼎이니 壽로 通政이요 妣晋州姜氏니 以癸卯十一月二十四日生公하니 將娩에 通政公이 有樞星落室之夢하야 因以名焉하니라 天賦高明하고 及長에 就世父道川公學할새 日課外에 兼他人課題하고 詩才超倫하야 聲譽振鄕하다 書齋位隈處하야 每夜往來에 人이 多苦魑戱러니 自公出入으로 厥崇頓息하니 人咸異之하다 通政公이 命多讀書經하니 以其姜夫人이 有甘掌夢也라 離鯉敎是遵호대 特於洛召兩誥有杜氏碎하다 處仁湖峽하야 擬周召例하야 壇奉誨幣하야 祈永國命하니 噫라 時當韓祚方衰하고 西湖東漸하야 尸周召位者不知敬德諴民之義하고 唯趍末遂外之是急이어늘 公隱淪草澤하야 易乎忘世而愛民憂國底赤忱이 猶有彌於彼蒼하야 無辭不本於洛召故義하니 視彼汲汲外來而徒富徒貴者에 奚霄壤懸哉아 歿於 哲宗壬戌 十二月 十六日하야 葬于錦山南一面瀑沛洞乙原러니 改葬于鎭安朱川面星岩洞寅原하야 有遺集하야 藏于家하다. 配利川徐氏니 鳳采女라 事舅若夫에 咸稱其職하다. 墓는 同原異壙이라 生一男하니 甲仁이요, 孫男에 元用과 俊用과 大用과 炳用이니 有文行하다. 請文者는 炳用의 子니 篤於繼述焉이라. 遂爲銘하니 銘曰 制行以方하고 守志以貞하야 跡潛光垂에 身困道亨하니 不遇者時오 可傳者名이라 刻徽于珉하야 示後久程하노라.
    檀紀四千三百十二年 己未九月十日 月城 鄭東暉 撰
    【풀이】 호은거사(湖隱居士) 송공(宋公)이 효제(孝悌)의 근본으로 진안 주천고을에서 강(講)하시니, 고을 사람이 책을 지고 찾아와 수업한 결과 사람들을 무본(務本)하게 하였고, 빈빈(彬彬)한 학풍(學風)을 일으켰으니 아아 성(盛)하도다. 이 뜻을 기리기 위하여 여러 선비들이 재화(財貨)를 갹출(醵出)하여 다음부터 매년 찬수(饌需)를 올리게 하였더니, 공(公)의 현손(玄孫) 석정(錫政)이 그 재화로 기반을 삼아 유적비 건립을 계획하고, 나에게 비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내 학문이 생소하여 사양하였으나 그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가장(家狀)을 살펴 서(書)하게 되었다. 공의 휘(諱)는 일추(一樞)요, 자는 이건(而建)이요, 호은(湖隱)은 그의 아호이다.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고려 판원사 휘(諱) 대원(大原)에서 계출(系出)하였고, 3대 후에 안렴사(按廉使) 휘(諱) 명(明)은 포은(圃隱, 정몽주)·목은(牧隱, 이색)과 교유하였으며, 국조(國朝) 들어 휘(諱) 유세(愉世)는 쌍청당(雙淸當) 처사라 칭하였으니, 공의 13세조 이시다. 고(考)는 택정(澤鼎)이니 장수하여 통정대부가 되었고, 비(騙)는 진주 강씨(晉州姜氏)이니 계묘(癸卯) 11월 24일 공을 낳으셨다. 통정공께서 추성(樞星, 북극성)이 방안에 떨어진 꿈을 꾸고 열 달 후 공을 낳으시니, 이 때문에 일추(一樞)라 이름하게 되었다. 공은 천부(天賦)가 고명(高明)하고 성장하여서 백부 도천공(道川公)에게 취학(就學)하여 일과 외(日課外)에 타인의 과제까지 겸하였고, 시문의 재질이 뛰어나 칭찬하는 소리가 향리에 자자하였다. 서재가 외진 곳에 위치하여 매일 밤 왕래 때마다 사람들은 도깨비 장난으로 괴로워하였으나, 공께서 출입한 이후부터 그런 일이 그치니, 사람들은 모두 이상히 여겼다. 통정공께서 서경(書經)을 많이 읽기를 명하니, 강부인(姜夫人)께서는 일찍이 감당(甘棠)의 꿈이 있었기에 아버지 곁을 떠나 가르침을 따르라 하고, 낙고(洛誥)와 소고(召誥)의 양고(兩誥)에 의하여 두(杜)씨가 쇄신(碎身)되었음을 일깨워 주셨으며, 호협(湖峽)에 인자(仁者)가 처(處)하였음을 주소공(周召公)의 예(例)에 비유하여 단(壇)을 받들어 폐백(幣帛)으로 회유(誨諭)하여 국가(國家)의 운명(運命)이 길게 하기를 빌었다. 아! 슬프도다. 대한제국의 전조(前祚)가 바야흐로 쇠(衰)할 때를 당(當)하여 서호(西湖)의 물결이 동방(東邦)에 젖어들어 직분(職分)을 다하지 못하고, 녹(祿)을 먹은 자들이 유덕자(有德者)를 공경하여 함민(牽民)의 의(義)를 알지 못하고, 오직 외래(外來)를 향(向)하여 추리(趨利)에 급급(急急)하는지라. 공께서는 초택(草澤)에 은륜(隱淪)하여 세상을 등지고 애민우국(愛民憂國)한 적침(赤沈)이 저 푸른 창공에 사무쳐 말씀마다 낙고(洛誥)와 소고(召誥)의 고의(古義)에 근본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저들의 외래(外來)에 급급(汲汲)하여 한갖 부와 귀에 눈먼 자들을 보고 어찌 목을 베어 하늘과 땅에 달아매지 않으랴 하셨다. 철종 임술(壬戌) 12월 16일 몰(歿)하니, 금산군 남일면 폭포동 을좌원(乙坐原)에 장례를 모셨다가 다시 주천면 성암동 인좌원(寅坐原)으로 모시게 되었으며, 유집(遺集)이 소장(所藏)되어 전래한다. 배(配)는 이천 서씨(利川徐氏)로 봉채(鳳彩)의 따님인데, 시부모와 부군(夫君)을 섬기되 그 직분을 다하였다. 묘는 같은 벌안이나 무덤은 따로 안장(安葬)되었다. 1남을 낳으니 갑인(甲仁)이요, 손(孫)은 원용(元用)·준용(俊用)·대용(大用)·병용(炳用)이니 문행(文行)이 있었다. 비문을 청한 자는 병용(炳用)의 아들이니, 조상을 계술(繼述)함에 독실하다. 명(銘)하여 이르되 “제행(制行)은 방정(方正)하게 하고, 수지(守志)는 정결(貞潔)하게 하였으며 / 잠적(潛跡)한 곳에 빛을 드리게 되니 / 몸은 곤고(困苦)하였으나 도(道)는 형통(亨通)하였으며 / 때를 만나지 못하였으나 그 이름은 전(傳)하게 되었도다. / 옥돌에 실행(實行)을 전각하여 후세인(後世人)에게 오래 전하고자 하노라.” 단기 4312년 기미(己未) 9월 10일 월성(月城) 정동휘(鄭東暉) 찬(撰)
  • 【비표】 荷隱鄭先生遺墟碑(하은정선생유허비)

    【위치】 주천면 신양리 성암2길 22-1 명덕재 담장 앞.
    【시기】 1938년 5월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200cm, 너비 62cm, 두께 29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龍潭之西聖巖則荷隱鄭先生講扉之所也 諱尙鎬 表德儀伯 貫鄕月城 我朝初大將軍謚忠烈公仁祚之十六世孫也 自父祖以上 襲詩禮之訓 述孝友之行 家門嚴正 心法惇厚 先生生于 哲廟辛亥 天姿剛明 自幼異凡 及就學 不須長師策勵 吃吃終日 嘗讀小學曰 但誦句讀而身不體行 則未免書自我自 猶有愧於子夏吾必謂之之辭 竟何益馬 躬子採拾 以供親旨 樂易兄弟 雍睦宗黨 孝悌謹愼 餘力做業修劑之方 治平之道 一一講究 簞瓢陋巷 有不政其樂底氣像 時人歎賞曰 古之君子 今復得見 鄕黨宿望 士友標準 往在甲午東匪猖獗 誘掖部落 無一漬染者 又於蒼龍歲 與其師西河金秦鉉 重修鄕約 齊室新設壁盒 秦陪朱呂兩先生影像于南原養士齊 妥侑當日 將讀法四規 講習生徒 賞罰善惡 鄕里之風化 至今尙存 行路之指點起敬興感 嗚呼此蓋先生之大略大節 而八旬一日 嘉言懿行 不可得以殫擧 日其門人金匡鉉甫 匱其狀牒而言曰 吾等若先生子姪 設楔鳩金者 計八年于滋 而遺稿鋟梓 貞珉表墟 使吾先生之道 垂無窮於來來 故敢請文 余薇盥讀狀 而對曰 荷翁之心學之況深簡奧 想有外史氏之弗律 而非若詅蚩符之所敢也 然義有所終不辭 捃摭其萬一 以竣後之君子採擇云 歲在乙亥維夏之中浣 完山李巽 書于龍攝堂
    【풀이】 용담(龍潭)의 서쪽 성암(聖巖)은 하은(荷隱) 정선생(鄭先生)께서 학문을 강마(講磨)하시던 곳이다. 선생의 휘는 상호(尙鎬)요 자는 의백(儀伯)이다. 본관은 월성(月城, 경주慶州의 고호)이니 아조(我朝) 초기의 대장군인 시호 충렬공(忠烈公) 인조(仁祚)의 16세손이다. 부조(父祖) 이상은 시례(詩禮)의 교훈을 이어받고 효우(孝友)의 행실로 계승하여 집안은 엄정하고 심법(心法)은 돈후(敦厚)하였다. 선생은 철종 신해(辛亥, 철종2, 1851)에 태어났는데 천성이 강명(剛明)하여 어려서부터 여느 아이들과는 같지 않았다. 서당에 들어가게 되자 스승이나 어른들이 독려를 하지 않아도 종일토록 공부에 열중하였다. 일찍이 소학(小學)을 읽으면서 이르기를 “다만 구두(句讀)만 읽고 몸으로 이행을 하지 않는다면 책은 책이고 나는 나여서 서로 각각임을 면치 못할 것이니, 오히려 자하(子夏, 공자의 제자)가 말한 ‘말이 믿음직스럽고 행실이 독실하면 비록 배우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 사람은 배운 사람이라 일컫겠다’ 한 말에 부끄럽게 되는 것이니 인간의 생활에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몸소 나물을 캐고 땔감을 주어다가 부모의 반찬을 장만하였고 형제간에는 즐겁고 평이(平易)하게 지냈으며 일가간에는 화목하여 효제(孝悌)하고 근신(勤愼)하였으며 그러고도 여가가 있으면 공부를 하였는데,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도리를 일일이 연구하여 일단사(一簞食) 일표음(一瓢飮)으로 누항(陋巷)에서 자락(自樂)하는 즐거움을 바꾸지 않을 기상을 가졌으니, 당시 사람들이 칭탄하기를 “옛날의 군자 안자(顔子)를 지칭한 말임을 오늘날 다시 보게 되었다.” 하였고 향당(鄕黨)에서는 숙망(宿望)으로 모시고 사우(士友)들은 표준으로 삼았다. 지난 갑오년(甲午年)에는 동학(東學)이 성하게 일어났는데 그 마을에서는 선생의 교도(敎導)로 한 사람도 동학에 물이 든 사람이 없었다. 또 갑진년(甲辰年)에는 스승인 서하(西河) 김태현(金泰鉉)과 함께 향약(鄕約)을 다시 실시하였고 남원(南原)의 양사재(養士齋)에다 벽장을 새로 들이고 주자(朱子)와 여동래(呂東萊, 남송의 학자인 여조겸[呂祖謙]의 호) 양 선생의 영정을 모셨다. 모시던 날 향약의 4조목을 가지고 생도들에게 강의하고 선악에 대하여 상과 벌을 내렸는데 고을의 풍교(風敎)가 지금까지 남게 되고 길을 가는 행인들도 그곳을 가리키면서 감격해하고 경의를 표하고는 한다. 오호라! 이는 선생의 대략의 큰 절행(節行)인데 팔십 평생을 하루와 같이 지내셔서 그 가언(嘉言)과 의행(懿行)은 이루 다 매거하기 어렵다. 어느 날 그 문인 김광현(金匡鉉) 선비가 장첩(狀牒)을 싸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우리들과 선생의 아들과 조카들이 계를 조직하여 돈을 모은 지가 우금 8년이 됩니다. 유고(遺稿)를 발간하고 유허(遺墟)에 비를 세워 우리 선생의 도학으로 하여금 내세에 다함이 없게 하기 위하여 감히 글을 청합니다.” 하였다. 나는 장미의 물에 손을 씻고 그 장독을 읽어보고 대답하기를 “하옹(荷翁)의 심학(心學)의 심오(深奧)함은 생각건대 외사씨(外史氏, 지방의 수령)의 크게 포양함이 있었을 터이므로 나같은 영치부(詅癡)符(무뢰한無賴漢과 비슷한 뜻)가 감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였다. 그러나, 의리상 끝내 사양할 수는 없어 그 만에 하나만 대강 간추려서 후세의 군자가 채택하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을해(乙亥) 1935 4월 중순에 완산(完山) 이손(李巽)은 용섭당(龍攝堂)에서 글을 짓다.
  • 【비표】 縣令鄭侯老容遺德碑(현령정후노용유덕비)

    【위치】 주천면 대불리 163-13. 진등마을 앞 동상주천로 길가
    【시기】 판독불능
    【형태】 높이 97cm, 너비 42cm, 두께 18cm.
    【개요】 정노용(鄭老容)은 용담현령으로 1842년 6월에 부임하여 1845년 7월에 원주로 이임하였다.
  • 【비표】 縣令洪侯遠燮防弊善政碑(현령홍후원섭방폐선정비)

    【위치】 주천면 대불리 163-13 진등마을 앞 동상주천로 길가
    【시기】 1845년 3월
    【형태】 높이 100cm, 너비 43cm, 두께 18cm.
    【개요】 홍원섭(洪遠燮)은 용담현령으로 1837년 12월에 부임하여 1840년 12월에 교하현령으로 영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