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요】 주천면 대불리 진성대안학교[구 대불초등학교] 후정에 자연석에 石門塢․秋月亭․華陽山이라 각자된 석비 3기 있다. 비들은 일반적인 기념비들이 아니라, 일종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표지석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석문오(石門塢, 1906년 건립)는 석문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고, 추월정(秋月亭, 1906년 건립)은 본디 그 마을에 있던 추월정의 표지석이었고, 화양산(華陽山, 건립연대미상) 마을옆 화양산을 안내하는 표지석이었을 것이다.
  • 【비표】 都事義城金公孝閣碑(도사의성김공효각비)

    【위치】 주천면 용덕리 산57. 산제봉 마을 뒤(북서) 산기슭
    【시기】 1946년
    【형태】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높이 150cm, 너비 44cm, 두께 22cm.
    【개요】 비문을 쓴 이기손(李起巽)은 자는 용섭(龍攝), 호는 금재(錦齋)로 한말의 의병 지도자였다.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晦庵夫子 編做人書 以立敎明倫爲首 栗谷先生 著擊蒙要訣 以讀書事親 法大率卽子曰弟子入則孝 出則悌 謹以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之大訓也 舍是則彛滅 天常則敗 而大本何從而立乎 故吾事吾親 豈可曰孝名 而孝之者 蓋鮮 是以 有之則鄕省剡薦 發揮揄揚 誠古聖王孝之道也 嗚呼 世衰道微 叔季卓行 聞者益不覺擊節歎賞者 近古有曰士人金鎭義 尙書居翼裔 其考曰俊入 妣曰昌寧曺氏 忠孝舊閥 世襲跡美 公生異凡 十三粗涉四書 名動坊內 事父母 極養志體 耕讀爲業 親癠之谹 嚼指禱天 靈藥自臻 以享天年 及其喪葬 三霜盡情文如一日 日愈遠而易忘 每於諱辰 孺慕如新 所謂孝無終始 於此可見 官至都事而卒 噫 如公者 大本立矣 家風敦矣 樵牧至今口誦 豈可以世路之聞不聞 爲公足輕重哉 次子在洛 繼孝之孝 錫類不匱也 賢孫世豪世豊 見島夷屛跡 心赤建國 前修謂求忠於孝門者 虛乎哉 孫世昌抱狀而請予文曰 閣已成而石將鑱 願賜一言 予按而睩之 嘉其懿行 不辭就銘 銘曰 相彼龍德 孝子正中 志軆血湯 都事金公 大本立矣 石則窿寤 王延故事 感歎者同 碩果不食 曰孝曰忠 行塗必式 有辭無窮 歲舍己丑遯月中浣完山李起巽撰 恩津宋弼用 書
    【풀이】 회암부자(晦菴夫子, 주희朱熹를 높혀서 쓴 말)는 주인서(做人書, 소학小學을 뜻함)를 엮으면서 입교(立敎)와 명륜(明倫)을 맨 앞에 내세웠고, 율곡선생(栗谷先生)은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지으면서 독서(讀書)와 사친(事親)으로써 대체(大體)를 본받게 하였으니, 즉 공자(孔子)가 이른바 “자제들은 집에 들면 효도하고 밖에 나오면 공경하며 신의에 힘쓰고 널리 대중을 사랑하되 어진 이를 가까이하여 그러고도 여가가 있으면 그때에는 글을 배운다”라고 한 큰 훈계의 뜻과 같은 것이다. 이를 버리면 이성(彝性)이 멸절(滅絶)하고 천기(天紀)가 무너지는 것이니, 어디에서 대본(大本)을 세우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내 부모를 섬기는 것을 어찌 효도라 이름하겠는가마는 효도를 하는 사람은 대체로 적다. 그렇기에 그러한 사람이 있으면 군(郡)과 도(道)에서 천거하여 포양(襃揚)하는 것이니 이는 참으로 옛날의 성왕(聖王)이 효도를 권장하는 도리인 것이다. 오호라! 세상은 쇠퇴하고 도덕은 희미해졌으므로 말세의 드높은 행실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장단을 치면서 더욱 칭탄하게 하는데, 근고(近古)에는 사인(士人) 김진의(金鎭義)가 있었는 바 판서 거익(居翼)의 후예이다. 아버지는 준팔(俊八)이요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인데 충효(忠孝)의 오래된 가문에서 대대로 그 훌륭함을 이어받았다. 공은 낳으면서부터 범상하지 않았고 열 세 살에는 사서(四書)를 대략 섭렵하니, 명성이 방내(坊內)에 퍼졌다. 어버이를 섬김에는 지체(志體)의 봉양을 다하면서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일을 삼았는데 부모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쏟았고 하늘에 자신을 대신해달라고 비니, 영약(靈藥)이 저절로 굴러 들어와서 천수(天壽)를 다 누리게 하였다. 이윽고 상을 당하자 3년동안 정문(情文, 정은 슬픔을 문은 치레를 잘함을 뜻함)을 다하기를 하루와 같이 하였고, 세월이 더욱 흐르면 차츰 잊혀지기 쉬운 것이므로 매양 기신(忌辰)을 당하면 유모(孺慕, 어린이가 부모를 사모하듯 하는 일)함이 금방 초상을 당한 듯이 하였으니 이른바 ‘효도에는 종시(終始)가 없다’ 한 말의 뜻을 여기에서 보게 된다 하겠다. 벼슬은 도사(都事)에 이르고 졸하였다. 희라! 공과 같은 분은 대본(大本)이 서고 가풍(家風)이 돈독해졌다 할 것이고 초부(樵夫) 목동(牧童)들이 지금까지 전송(傳誦)하고 있으니, 세상에 알려지거나 말거나가 공에게 무엇이 손익(損益)이 되겠는가? 또 작은 아들 재락(在洛)은 효도의 집안에 효도로 이었으니 같은 무리로 점지하여 다함이 없게 함이요, 현손(賢孫) 세호(世豪)와 세풍(世豊)은 왜인(倭人)들이 자취를 감춤을 보고는 이 나라를 다시 세우는 일에 심혈을 바치고 있으니, 전현(前賢)들이 이른바 ‘충신은 효자의 집안에서 구한다’는 말이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 손자인 세창(世昌)이 가장(家狀)을 안고 와서 나의 글을 청하면서 이르기를 “효각(孝閣)이 이미 이루어지고 돌도 다듬어졌으니 원컨대 한 말씀 하여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가장을 살펴보고 그 훌륭한 행실을 높이 평가하여 사양하지 않고 명(銘)을 지었다. 명에 이르기를,
    저 용덕(龍德)*을 보건대 / 효자는 정중(正中)을 얻었네 / 지체(志體)의 봉양에 약 수발에 / 도사(都事) 김공(金公)은 / 대본(大本)을 세웠으니 / 돌 또한 하늘에 높다랗구나 / 왕연(王延)*의 고사(故事)에 / 감탄하는 것은 고금이 같고 / 석과(碩果)*는 따먹지 않는 법 / 효자도 나고 충신도 났구려 / 길손들 틀림없이 경의 표하리니 / 무궁토록 전해짐이 있으리로다.
    기축(己丑, 1949) 6월 중순에 완산(完山) 이기손(李起巽)은 찬하다.

    *용덕龍德 : 높은 덕.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문언文言에 있기를 “초구初九에 잠룡물용潛龍勿用이라 함은 무슨 뜻입니까?”하니,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용덕을 지니고 숨은 자이니라”하였고 또 묻기를 “구이九二에 현룡재전見龍在田이니 이견대인利見大人이라 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니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용덕을 지니고 정중正中을 얻은 자이니라”하였다. 이는 괘상卦象을 용에 비유하여 해석한 것이므로 잠심潛心하여 자득自得할 수 밖에 없다. 이상以上의 뜻에다가 효자가 살던 곳이 龍德里임을 빗대어 꾸민 글 같다.
    *왕연王延 : 전조前趙의 효자. 자는 연원延元.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읍혈泣血 3년을 하였고, 매양 기일忌日을 당하면 십여 일을 슬피 울었다.
    *석과碩果 : 석과불식碩果不食. 주역周易 박괘剝卦는 전부가 음효陰爻 속에 상구上九 하나만 양효陽爻이므로 과수나무에 다른 과일은 다 떨어지고 맨 윗 가지에 큰 과일 하나만 남은 형상이며 하나가 있으므로 없어지지 않고 다시 생성生成할 수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훌륭한 자손이 다시 태어남을 비유하여 말한 것임.
  • 【위치】 주천면 신양리 진용로 도로변 먹고개 비석군 내.
    【시기】 1968년
    【형태】 개석(蓋石)과 대석(對石)이 있다. 높이 160cm, 너비 62cm, 두께 31cm.
    【개요】 6.25 전란 당시 공비들로부터 고향을 지키다가 산화한 33위의 영령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이곳에서 매년 현충일 추념행사를 하고 있다. 비문은 다음과 같다.

    【비문】 애향의 혼
    여기 애향에 살고 애족에 숨진 33인의 의로운 넋이 잠들어 누우셨다.
    궁서설묘(窮鼠囓猫)의 발악으로 집요(執拗)하게 교착(膠着)하여 출몰하는 북괴의 패잔병들이 낮이면 산에서 숨어 지내다가 야음을 타고 동네에 내려와 살육(殺戮)과 약탈(掠奪)을 자행(恣行)하던 6·25동란의 종반(終盤), 벽추(僻陬)된 고장에서 원군(援軍)을 기대하기 어려움을 깨닫고 면민들은 스스로 뭉치고 궐기(蹶起)하여 몽둥이와 지팡이를 야차뢰(夜叉檑)삼고 돌덩이나 육신(肉身)을 포탄삼아 용감하게 싸우다. 의(義)의 십자군(十字軍)은 죽음 앞에 억세고 침탈(侵奪) 앞에 굳세었다. 귀한 생명을 간성구축(干城構築)에 바친 넋이여.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향리수복(鄕里收復)에 희생한 넋이여. 이제 악의 무리는 사라지고 평화의 아침해가 비치는 화산봉 기슭에서 그날의 이야기를 속삭이며 흐르는 저 주자천의 유구(悠久)한 벽록(碧綠)을 듣는가?
    지금 태평연월(太平烟月)을 구가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가슴 가슴에 그대들의 영상이 깊숙하게 아롱져 가시지 않으리니 거룩한지고 그대들의 이름이여.
    송필용(宋弼用)·홍복기(洪福基)·송인성(宋寅宬)·이찬주(李贊周)·박택서(朴澤緖)·이영실(李永實)·이덕귀(李德貴)·고당주(高塘柱)·서상구(徐相九)·이이봉(李二峰)·김윤태(金允泰)·고진용(高鎭龍)·서상수(徐相洙)·오두환(吳斗煥)·이인철(李寅喆)·이갑순(李甲順)·양해붕(梁海鵬)·안귀동(安貴童)·박광래(朴光來)·김채정(金寀征)·김영만(金永萬)·최대준(崔大準)·전인수(全仁守)·권익선(權益善)·송문식(宋文植)·오문화(吳文化)·전연봉(全年峯)·문석근(文錫根)·안복열(安福烈)·정해두(鄭海斗)·남판송(南判松)·소인섭(蘇仁燮)·김옥봉(金玉峯)
    1966년 10월 한갑수 짓고, 신하균 쓰다.
    [편집자 주] 비문을 지은 한갑수는 한글학자, 글씨를 쓴 신하균은 해공 신익희의 자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