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백세공명기(百世供命基)
운영자 23-12-22 14:20 73 hit
【위치】 주천면 신양리 산29-1. 상성암 북서쪽 산비탈.
【시기】 1941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45cm, 너비 44cm, 두께 23cm.
【개요】 이 지역에 입향한 은진 송씨의 내력을 찬양한 글이다.

【비문】 供永日縣百世天基定鏡開千秋珉君子造歟君子士之讚也昔在姬朝周召動鎬基洛供王祈永故成王之治服文武而冠八百千載之下洛泗通氣孔夫子動鄕基邦供魯久禱以統万邦故道冠百王千聖德被万代生靈數千載之下洛泗正氣會通于 璿李漢洛 列聖朝祖周而政宗孔以敎一時儒賢大夫士爭以執簡秉筆以爲歌咏藻餙无非太平永久之頌禱矣降世以來漢洛氣脉分通嶺湖道南而士出惟大嶺義縣恩準津宋氏雙淸堂愉后黃齋叅判德崇七代孫蘭谷諱光鼎在空谷不以无人而不馨德湖隱諱一樞處江湖先天下之宸憂華岩諱性仁居岩穴立崇華攘狄之義理俱皆以道義讚號何其美也亦皆以率門弟次苐動嶺基湖當時國家灾異亂萌多露星變擧國不以爲禍至獨三士憂國憂道賞學得周孔之祈永禱久儒紳之頌禱璿祚故於潭縣聖巖祭天峰世世奉誨脩供國祈命血誠懇懇乎彼蒼冀有以消彌於未然故於邦於道多蒙天佑邦命維新是以遠近弟子聞風雲屯訓化大盛世皆稱三君子儒嶠南村於是世居近百年今蘭公玄孫泰用湖公曾孫炳用華公孫福用方伐石記實以覺來世請文於余余謂前面曰百世供命基面與陰記令次玄孫弼用皆書記之數百以大義一言蔽之歎曰今天下去而三公不換此江山寒山一片石堪共言歟賞讚咏三君子儒之造也有供永日縣百世天基定鏡開千秋珉之語可謂造道之極功不尤盛歟蓋三君儒卽三公云爾時
重光言大荒落泰之下澣前徵章寢郞渾定十三道都講長
完山 李德應 記
【풀이】 영구히 받든 해 백세(百世) 하늘에 달리고, 터 정한 천추의 비(碑) 거울을 열렸으니, 군자의 나아감인가, 군자는 사(士)의 찬사라. 옛날 희씨조정(姬氏朝廷)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호경(鎬京)을 움직여 낙양(洛陽)에 터를 잡고 왕을 받들어 영구한 운명 기도(祈禱)함으로 성왕(成王)의 정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승복하여 8백년 으뜸이 되고, 천년의 아래 낙수(洛水)와 사수(泗水) 기운(起運)이 통하여 공부자(孔夫子) 향리를 움직여 나라의 터를 잡고, 노(魯)를 받들고 영구함을 빌어 만방(萬邦)을 거느림으로써 도덕이 백왕천성(百王千聖)의 으뜸이요, 덕이 만대 생령에게 입힘이라. 수천 년의 아래 낙수(洛水)와 사수(泗水)의 정기 모여 선원(璿源)의 이(李)씨 한양(漢陽)에 통하여 열성조(列聖朝) 주(周)나라를 조종(祖宗)하여 정치하고, 공부자(孔夫子)를 주종(主宗)하여 수화(數化)하니 일시의 유현(儒賢)과 대부(大夫)와 사(士)가 다투어 간책(簡策 옛날 종이 대신에 문자를 쓰던 대쪽)을 잡고 붓을 잡아 가영(歌鷺)과 문사(文辭)를 만듦이 태평(太平)과 영구(永久)를 송도(頌禱 경사를 기리고 축복함)하지 않음이 없는지라. 세상이 강하(降下)한 이래 한양(漢陽)의 기맥(氣帳)이 나뉘어 영호남(嶺湖南)에 선비의 산(産)이 오직 크니, 영의현(嶺義縣)의 은진 송씨(恩津宋氏) 쌍청당(雙淸堂) 유(愉)의 후손 황재참판(黃齋淙判) 덕숭(德崇)의 7대손 난곡(蘭谷) 휘(諱) 광정(光鼎)이 공곡(空谷)에 있으되, 사람 없으므로 덕이 향기롭지 않음이 없고, 호은(湖隱) 휘(諱) 일추(一樞)는 강호에 처하되 천하의 신우(宸憂 임금의 근심)를 먼저하고, 화암(華岩) 휘(諱) 성인(性仁)은 바위틈에 살되 중화(中華)를 높이고 이적(夷狄 오랑캐)을 물리치는 의리를 세워서 모두다 도의로 호(號)를 찬양하니, 어찌도 그리 아름다운지. 또한 문제자(門弟子)를 인솔하고 차제(次第)로 영남을 움직여 호남에 터전하니, 당시 국가 재앙과 이변이 어지러이 싹트고 별자리 변동이 많이 드러나 온 나라가 재앙이 이른다고 하지 않으나, 홀로 세 선비는 나라를 근심하고 도(道)를 근심하여 일찍이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긴 날을 빌고 장구함을 빌며, 유림신사(儒林紳士)를 선원(璿源 왕통)의 복조(福祚) 송도(頌禱)함을 배웠으므로 용담고을 성암(聖岩) 제천봉(祭天峰)에 대대로 가르침을 받들어 나라를 받들고 운명을 비는 일을 수행하여 저 하늘에 지극한 혈성(血誠)이 재앙을 미연에 소멸되기를 축원하였으므로 국가와 도(道)에 하늘의 도움을 많이 무릅써 나라 운명 오직 새로우니, 이로써 원근의 제자 풍도를 듣고 구름같이 모여 가르친 교화(敎化) 크게 성행하니, 세상이 다 3인을 군자유(君子儒)라 칭찬하였다. 이에 교남촌(嶠南村)에 세거(世居)한지 근 백년이라. 이제 난곡공(蘭谷公) 현손(玄孫) 태용(泰用)과 호은공(湖隱公) 증손(曾孫) 병용(炳用)과 화암공(華岩公) 손(孫) 복용(福用)이 방금 돌을 다듬어 사실을 기록하여 내세를 깨치려고 기문을 나에게 청하하였다. 내 비 전면에 백세공명기(百世供命基)라 이르고 전면과 후면 음기(陰記)를 차(次) 현손(玄孫) 필용(弼用)으로 하여금 수백 자를 다 써서 기록하니, 대의(大義)라는 일언(一言)으로 휩싸고 탄식하되 이제 온 천하가 떠나는데, 3인의 공(公)은 이 강산을 바꾸지 않으니, 한산(寒山)의 일편석(一片石)과 더불어 같이 말함일런지. 일찍이 삼군자유(三君子儒)의 나아감을 찬양하였으니, 영구히 받든지 백세 하늘 달리고, 터 정한 천추의 비(碑) 거울을 열었다는 말은 가히 도(道)에 나아가는 극공(極功)이라 이르리니, 더욱 성(盛)하지 아니한가. 대개 삼군자유(三君子儒)는 곧 삼공(三公)을 이름이니라. 때는 신미(辛未. 1931)년 태월하순(泰月下旬) 전징장(前徵章) 침랑혼정(寢郞渾定) 13도 도강장(十三道都講長) 완산(完山) 이덕응(李德應)이 기(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