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호은 송일추 유적비(湖隱宋一樞遺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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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표】 湖隱宋公遺蹟碑(호은송공유적비)

【위치】 주천면 신양리 553-4. 추월정 앞.
【시기】 1980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55cm, 너비 58cm, 두께 23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湖隱居士宋公이 講孝悌於鎭安朱川坊할새 坊之人이 負笈而務本者衆하야 彬彬然有文學之風하니 嗚呼盛哉라 僉彦이 賢賢하야 醵貨拮据하야 備日後需盖有年所矣러니 公之玄孫錫政이 基其貲하야 謀竪石하야 謁余紀遺蹟이거늘 余生於文으로 辭호대 不獲命하야 接以叙之하니 公의 諱는 一樞요 字는 而建이요 湖隱은 其號也라 恩津之宋이 系出高麗判院事諱大原하고 三傳에 接廉使諱明誼善圃牧하고 入國朝하야 有諱愉 世稱雙淸堂處士니 公之十三世祖也라 考曰澤鼎이니 澤鼎이니 壽로 通政이요 妣晋州姜氏니 以癸卯十一月二十四日生公하니 將娩에 通政公이 有樞星落室之夢하야 因以名焉하니라 天賦高明하고 及長에 就世父道川公學할새 日課外에 兼他人課題하고 詩才超倫하야 聲譽振鄕하다 書齋位隈處하야 每夜往來에 人이 多苦魑戱러니 自公出入으로 厥崇頓息하니 人咸異之하다 通政公이 命多讀書經하니 以其姜夫人이 有甘掌夢也라 離鯉敎是遵호대 特於洛召兩誥有杜氏碎하다 處仁湖峽하야 擬周召例하야 壇奉誨幣하야 祈永國命하니 噫라 時當韓祚方衰하고 西湖東漸하야 尸周召位者不知敬德諴民之義하고 唯趍末遂外之是急이어늘 公隱淪草澤하야 易乎忘世而愛民憂國底赤忱이 猶有彌於彼蒼하야 無辭不本於洛召故義하니 視彼汲汲外來而徒富徒貴者에 奚霄壤懸哉아 歿於 哲宗壬戌 十二月 十六日하야 葬于錦山南一面瀑沛洞乙原러니 改葬于鎭安朱川面星岩洞寅原하야 有遺集하야 藏于家하다. 配利川徐氏니 鳳采女라 事舅若夫에 咸稱其職하다. 墓는 同原異壙이라 生一男하니 甲仁이요, 孫男에 元用과 俊用과 大用과 炳用이니 有文行하다. 請文者는 炳用의 子니 篤於繼述焉이라. 遂爲銘하니 銘曰 制行以方하고 守志以貞하야 跡潛光垂에 身困道亨하니 不遇者時오 可傳者名이라 刻徽于珉하야 示後久程하노라.
檀紀四千三百十二年 己未九月十日 月城 鄭東暉 撰
【풀이】 호은거사(湖隱居士) 송공(宋公)이 효제(孝悌)의 근본으로 진안 주천고을에서 강(講)하시니, 고을 사람이 책을 지고 찾아와 수업한 결과 사람들을 무본(務本)하게 하였고, 빈빈(彬彬)한 학풍(學風)을 일으켰으니 아아 성(盛)하도다. 이 뜻을 기리기 위하여 여러 선비들이 재화(財貨)를 갹출(醵出)하여 다음부터 매년 찬수(饌需)를 올리게 하였더니, 공(公)의 현손(玄孫) 석정(錫政)이 그 재화로 기반을 삼아 유적비 건립을 계획하고, 나에게 비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내 학문이 생소하여 사양하였으나 그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가장(家狀)을 살펴 서(書)하게 되었다. 공의 휘(諱)는 일추(一樞)요, 자는 이건(而建)이요, 호은(湖隱)은 그의 아호이다.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고려 판원사 휘(諱) 대원(大原)에서 계출(系出)하였고, 3대 후에 안렴사(按廉使) 휘(諱) 명(明)은 포은(圃隱, 정몽주)·목은(牧隱, 이색)과 교유하였으며, 국조(國朝) 들어 휘(諱) 유세(愉世)는 쌍청당(雙淸當) 처사라 칭하였으니, 공의 13세조 이시다. 고(考)는 택정(澤鼎)이니 장수하여 통정대부가 되었고, 비(騙)는 진주 강씨(晉州姜氏)이니 계묘(癸卯) 11월 24일 공을 낳으셨다. 통정공께서 추성(樞星, 북극성)이 방안에 떨어진 꿈을 꾸고 열 달 후 공을 낳으시니, 이 때문에 일추(一樞)라 이름하게 되었다. 공은 천부(天賦)가 고명(高明)하고 성장하여서 백부 도천공(道川公)에게 취학(就學)하여 일과 외(日課外)에 타인의 과제까지 겸하였고, 시문의 재질이 뛰어나 칭찬하는 소리가 향리에 자자하였다. 서재가 외진 곳에 위치하여 매일 밤 왕래 때마다 사람들은 도깨비 장난으로 괴로워하였으나, 공께서 출입한 이후부터 그런 일이 그치니, 사람들은 모두 이상히 여겼다. 통정공께서 서경(書經)을 많이 읽기를 명하니, 강부인(姜夫人)께서는 일찍이 감당(甘棠)의 꿈이 있었기에 아버지 곁을 떠나 가르침을 따르라 하고, 낙고(洛誥)와 소고(召誥)의 양고(兩誥)에 의하여 두(杜)씨가 쇄신(碎身)되었음을 일깨워 주셨으며, 호협(湖峽)에 인자(仁者)가 처(處)하였음을 주소공(周召公)의 예(例)에 비유하여 단(壇)을 받들어 폐백(幣帛)으로 회유(誨諭)하여 국가(國家)의 운명(運命)이 길게 하기를 빌었다. 아! 슬프도다. 대한제국의 전조(前祚)가 바야흐로 쇠(衰)할 때를 당(當)하여 서호(西湖)의 물결이 동방(東邦)에 젖어들어 직분(職分)을 다하지 못하고, 녹(祿)을 먹은 자들이 유덕자(有德者)를 공경하여 함민(牽民)의 의(義)를 알지 못하고, 오직 외래(外來)를 향(向)하여 추리(趨利)에 급급(急急)하는지라. 공께서는 초택(草澤)에 은륜(隱淪)하여 세상을 등지고 애민우국(愛民憂國)한 적침(赤沈)이 저 푸른 창공에 사무쳐 말씀마다 낙고(洛誥)와 소고(召誥)의 고의(古義)에 근본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저들의 외래(外來)에 급급(汲汲)하여 한갖 부와 귀에 눈먼 자들을 보고 어찌 목을 베어 하늘과 땅에 달아매지 않으랴 하셨다. 철종 임술(壬戌) 12월 16일 몰(歿)하니, 금산군 남일면 폭포동 을좌원(乙坐原)에 장례를 모셨다가 다시 주천면 성암동 인좌원(寅坐原)으로 모시게 되었으며, 유집(遺集)이 소장(所藏)되어 전래한다. 배(配)는 이천 서씨(利川徐氏)로 봉채(鳳彩)의 따님인데, 시부모와 부군(夫君)을 섬기되 그 직분을 다하였다. 묘는 같은 벌안이나 무덤은 따로 안장(安葬)되었다. 1남을 낳으니 갑인(甲仁)이요, 손(孫)은 원용(元用)·준용(俊用)·대용(大用)·병용(炳用)이니 문행(文行)이 있었다. 비문을 청한 자는 병용(炳用)의 아들이니, 조상을 계술(繼述)함에 독실하다. 명(銘)하여 이르되 “제행(制行)은 방정(方正)하게 하고, 수지(守志)는 정결(貞潔)하게 하였으며 / 잠적(潛跡)한 곳에 빛을 드리게 되니 / 몸은 곤고(困苦)하였으나 도(道)는 형통(亨通)하였으며 / 때를 만나지 못하였으나 그 이름은 전(傳)하게 되었도다. / 옥돌에 실행(實行)을 전각하여 후세인(後世人)에게 오래 전하고자 하노라.” 단기 4312년 기미(己未) 9월 10일 월성(月城) 정동휘(鄭東暉) 찬(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