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하은 정상호 유허비(荷隱鄭尙鎬遺墟碑)
운영자 23-12-22 14:20 73 hit
【비표】 荷隱鄭先生遺墟碑(하은정선생유허비)

【위치】 주천면 신양리 성암2길 22-1 명덕재 담장 앞.
【시기】 1938년 5월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200cm, 너비 62cm, 두께 29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龍潭之西聖巖則荷隱鄭先生講扉之所也 諱尙鎬 表德儀伯 貫鄕月城 我朝初大將軍謚忠烈公仁祚之十六世孫也 自父祖以上 襲詩禮之訓 述孝友之行 家門嚴正 心法惇厚 先生生于 哲廟辛亥 天姿剛明 自幼異凡 及就學 不須長師策勵 吃吃終日 嘗讀小學曰 但誦句讀而身不體行 則未免書自我自 猶有愧於子夏吾必謂之之辭 竟何益馬 躬子採拾 以供親旨 樂易兄弟 雍睦宗黨 孝悌謹愼 餘力做業修劑之方 治平之道 一一講究 簞瓢陋巷 有不政其樂底氣像 時人歎賞曰 古之君子 今復得見 鄕黨宿望 士友標準 往在甲午東匪猖獗 誘掖部落 無一漬染者 又於蒼龍歲 與其師西河金秦鉉 重修鄕約 齊室新設壁盒 秦陪朱呂兩先生影像于南原養士齊 妥侑當日 將讀法四規 講習生徒 賞罰善惡 鄕里之風化 至今尙存 行路之指點起敬興感 嗚呼此蓋先生之大略大節 而八旬一日 嘉言懿行 不可得以殫擧 日其門人金匡鉉甫 匱其狀牒而言曰 吾等若先生子姪 設楔鳩金者 計八年于滋 而遺稿鋟梓 貞珉表墟 使吾先生之道 垂無窮於來來 故敢請文 余薇盥讀狀 而對曰 荷翁之心學之況深簡奧 想有外史氏之弗律 而非若詅蚩符之所敢也 然義有所終不辭 捃摭其萬一 以竣後之君子採擇云 歲在乙亥維夏之中浣 完山李巽 書于龍攝堂
【풀이】 용담(龍潭)의 서쪽 성암(聖巖)은 하은(荷隱) 정선생(鄭先生)께서 학문을 강마(講磨)하시던 곳이다. 선생의 휘는 상호(尙鎬)요 자는 의백(儀伯)이다. 본관은 월성(月城, 경주慶州의 고호)이니 아조(我朝) 초기의 대장군인 시호 충렬공(忠烈公) 인조(仁祚)의 16세손이다. 부조(父祖) 이상은 시례(詩禮)의 교훈을 이어받고 효우(孝友)의 행실로 계승하여 집안은 엄정하고 심법(心法)은 돈후(敦厚)하였다. 선생은 철종 신해(辛亥, 철종2, 1851)에 태어났는데 천성이 강명(剛明)하여 어려서부터 여느 아이들과는 같지 않았다. 서당에 들어가게 되자 스승이나 어른들이 독려를 하지 않아도 종일토록 공부에 열중하였다. 일찍이 소학(小學)을 읽으면서 이르기를 “다만 구두(句讀)만 읽고 몸으로 이행을 하지 않는다면 책은 책이고 나는 나여서 서로 각각임을 면치 못할 것이니, 오히려 자하(子夏, 공자의 제자)가 말한 ‘말이 믿음직스럽고 행실이 독실하면 비록 배우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 사람은 배운 사람이라 일컫겠다’ 한 말에 부끄럽게 되는 것이니 인간의 생활에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몸소 나물을 캐고 땔감을 주어다가 부모의 반찬을 장만하였고 형제간에는 즐겁고 평이(平易)하게 지냈으며 일가간에는 화목하여 효제(孝悌)하고 근신(勤愼)하였으며 그러고도 여가가 있으면 공부를 하였는데,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도리를 일일이 연구하여 일단사(一簞食) 일표음(一瓢飮)으로 누항(陋巷)에서 자락(自樂)하는 즐거움을 바꾸지 않을 기상을 가졌으니, 당시 사람들이 칭탄하기를 “옛날의 군자 안자(顔子)를 지칭한 말임을 오늘날 다시 보게 되었다.” 하였고 향당(鄕黨)에서는 숙망(宿望)으로 모시고 사우(士友)들은 표준으로 삼았다. 지난 갑오년(甲午年)에는 동학(東學)이 성하게 일어났는데 그 마을에서는 선생의 교도(敎導)로 한 사람도 동학에 물이 든 사람이 없었다. 또 갑진년(甲辰年)에는 스승인 서하(西河) 김태현(金泰鉉)과 함께 향약(鄕約)을 다시 실시하였고 남원(南原)의 양사재(養士齋)에다 벽장을 새로 들이고 주자(朱子)와 여동래(呂東萊, 남송의 학자인 여조겸[呂祖謙]의 호) 양 선생의 영정을 모셨다. 모시던 날 향약의 4조목을 가지고 생도들에게 강의하고 선악에 대하여 상과 벌을 내렸는데 고을의 풍교(風敎)가 지금까지 남게 되고 길을 가는 행인들도 그곳을 가리키면서 감격해하고 경의를 표하고는 한다. 오호라! 이는 선생의 대략의 큰 절행(節行)인데 팔십 평생을 하루와 같이 지내셔서 그 가언(嘉言)과 의행(懿行)은 이루 다 매거하기 어렵다. 어느 날 그 문인 김광현(金匡鉉) 선비가 장첩(狀牒)을 싸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우리들과 선생의 아들과 조카들이 계를 조직하여 돈을 모은 지가 우금 8년이 됩니다. 유고(遺稿)를 발간하고 유허(遺墟)에 비를 세워 우리 선생의 도학으로 하여금 내세에 다함이 없게 하기 위하여 감히 글을 청합니다.” 하였다. 나는 장미의 물에 손을 씻고 그 장독을 읽어보고 대답하기를 “하옹(荷翁)의 심학(心學)의 심오(深奧)함은 생각건대 외사씨(外史氏, 지방의 수령)의 크게 포양함이 있었을 터이므로 나같은 영치부(詅癡)符(무뢰한無賴漢과 비슷한 뜻)가 감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였다. 그러나, 의리상 끝내 사양할 수는 없어 그 만에 하나만 대강 간추려서 후세의 군자가 채택하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을해(乙亥) 1935 4월 중순에 완산(完山) 이손(李巽)은 용섭당(龍攝堂)에서 글을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