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참봉 전문한 선행기적비(參奉全文漢善行紀蹟碑)
운영자 23-12-22 14:20 63 hit
【비표】 參奉全公善行紀蹟碑(참봉전공선행기적비)

【위치】 주천면 용덕리 181-1. 미적동 진입로 좌측 하천 건너 논가.
【시기】 1967년
【형태】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碑身) 높이 124cm, 두께 43cm, 두께 19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鎭安之北 二舍有餘 有明德峯 峰之下有一洞 名曰米積里 峯巒秀麗 溪流澄淸 可以爲隱者 盤旋之所 而中有一士 玉山全公是已 公諱文漢字永祚玉山其號也 系出沃川 百濟溫祚朝十濟功臣 歡城君煇聶爲鼻祖 至高麗忠肅王朝有緯侑官 奉翊大夫 密直副使 判圖判書上護軍 管城君 卽公之十八代祖也 高王父曰諱終善 勝國英庙朝官嘉善大夫 曾王父曰諱厚景 官通政大夫 王父曰諱榮範 父曰諱義達官嘉善大夫 妣曰貞夫人慶州金氏弼之女 憲庙丙午四月十五日 擧公于沃川故第 雁行有三曰 俊漢 武漢 公居其一 而生有異質 天性仁厚 孝友于篤 兼以聰明之才 文藝夙著經傳 百家九流之書 豁然貫通 高宗朝 除勳院參奉 不其年見時事日 非遂絶意宦海 浩然歸鄕 陪其親而隱居 于此徜洋乎 山水琴書自娛 惟以啓牖 後進爲己任 遠近才士 聞風執贄以來 濟濟滿堂焉 讀書之暇 亦涉于獻岐之方 精通鍼藥之妙 聞人危急 卽往必救 且本以寬裕之性 見人孤窮 捐財輒恤 其勞其澤洽于鄕隣頌聲藉藉 衆口成碑 時人咸稱曰 玉山先生 事載全北道誌焉 不幸至于帝閽便作玉樓之賊 乃丁卯 十一月 十二日 而壽八十二 遠近知不知者 皆曰 仁人去矣 葬于米積洞 上牟田谷 先妣塋下 子坐原 配淳昌薛氏 弘儒候聰之后 鎭允之女 生四男一女 男曰 世杓 在杓 益杓 年杓 女適金山人李明鎬也 世杓男 允夏在杓男 漢夏 興夏 基夏 善夏 年杓男 玹夏 益杓男 官夏 慶夏 曾玄以下 蕃行不錄 嗚呼 今去公之歲 四十餘年 而尙闕顯刻 爲其裔孫之咨嗟者久矣 乃於今春門議歸一 將伐石而竪之于其遺墟 以備永年不朽之資豈不休哉 日公之後孫 袖其家狀以來 徵余之文 余以樗櫟之材 斗宵之文 辭之半晌 而其請益强故 終不固辭 如右略敍 因爲之銘 詞曰, 猗歟玉山東方巨族 不好芬華寓樂泉石 學問高明開牖來學 慈惠庸力頌聲藉藉 吁被雲仍承承繼繼 嗚呼公蹟不泯千載. 檀紀四千三百年丁未正月中浣. 潘南人 武陵 朴贊萬 謹撰竝書. 【풀이】 진안(鎭安)의 북쪽 2사(舍: 1사는 약 30리) 남짓에 명덕봉(明德峰)이 있고 명덕봉 아래에 한 동네가 있으니 이름하여 미적리(米積里)로서 봉우리들이 수려(秀麗)하고 시냇물이 청정(淸淨)하여 은자(隱者)가 반선(盤旋: 소요하면서 지냄)할 만한 곳인데 그 마을에 한 선비가 있으니 옥산전공(玉山全公)이 그 분이다. 공의 휘는 문한(文漢)이오 자는 영조(永祚)이며 옥산은 그 호이다. 옥천(沃川)에서 계출(系出)하였으니 백제 온조왕조의 십제공신(十濟功臣 )인 환성군(歡城君) 휘 섭(聶)이 그 시조이고 고려 충숙왕조에 이르러 휘 유(侑)가 있어 벼슬이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 판도판서 상호군(密直副使判圖判書上護軍)에 훈봉(勳封) 관성군(管城君)이니 바로 공의 18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종선(終善)이니 조선 영묘조(英祖)의 가선대부(嘉善大夫)요 증조의 휘는 후경(厚景)이니 통정대부이며 조부의 휘는 영범(榮範)이오 아버지의 휘는 의달(義達)이니 가선대부이며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경주김씨로 필(弼)의 따님인데 헌묘(憲宗) 병오(丙午: 헌종12, 1846) 4월 15일에 옥천(沃川)의 옛 집에서 공을 낳았다. 형제는 셋이 있어 준한(俊漢) 무한(武漢)과 공인데 공은 그 첫째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바탕이 있어 천성이 인후(仁厚)하고 효우(孝友)가 더욱 독실하였으며 총명한 재주를 겸하여 문예(文藝)가 일찍부터 드러났는데 경전(經典)을 위시하여 백가(百家)와 구류(九流)에 훤히 관통하였다. 고종조에 충훈부(忠勳府)의 참봉에 제수(除授) 되었으나 몇 해 되지 않아 세상이 날로 그릇되어 감을 보고 벼슬길에 뜻이 없어 호연(浩然)히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를 모시고 이곳에 은거하여 산수(山水) 사이에서 소요(逍遙)하고 금서(琴書)로 자락(自樂)하면서 오직 후진(後進)들을 깨우치는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으니 원근의 재사(才士)들이 소문을 듣고 예물(禮物)을 들고 찾아왔으므로 귀한 기운이 온 당(堂)안에 가득하였다. 글을 읽는 여가에 또 헌기(獻岐: 황제와 기백, 둘 다 의술에 정통하였음)의 서적을 섭렵(涉獵)하여 침약(鍼藥)의 묘방(妙方)에 정통하였는데 남의 위급함을 들으면 즉시 달려가 구하였으며 또 본래 너그러운 성품이라 남의 고단하고 궁핍함을 보면 반드시 사재(私財)를 덜어 구휼하니 그 공로와 덕택이 온 고장에 두루 퍼져 칭송하는 소리가 자자하였으므로 말이 구비(口碑)가 되어 당시 사람들이 너나없이 옥산선생(玉山先生)이라 불렀는데 그 일은 전북도지(全北道誌)에 실려 있다. 불행히도 서울에 갔다가 그길로 졸하게 되었으니 정묘년(1927) 11월 12일이고 수는 82세이다. 멀고 가깝고 알고 모르고 간에 모두 말하기를 “인인(仁人)이 떠나갔다” 하였다. 미적리의 상모전(上牟田)골 선비(先妣) 영하(塋下) 자좌원(子坐原)에 장사지냈다. 배위 순창설씨는 홍유후(弘儒候) 총(聰)의 후예인 진윤(鎭允)의 따님으로 4남 1녀를 낳으니 아들은 세표(世杓), 재표(在杓), 익표(益杓), 연표(年杓)이고 딸은 금산인(金山人) 이명호(李明鎬)에게 출가하였다. 세표의 아들은 윤하이고 재표의 아들은 한하, 흥하, 기하, 선하이며 익표의 아들은 관하, 경하이고 연표의 아들은 현하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벌쭉하여 기록하지 않는다. 오호라 지금에서 공의 세대까지는 40여년이 되었으나 아직까지 현각(顯刻)이 없으니 자손된 사람들이 한스럽게 여긴지 오래이다. 금년 봄에야 문중의 논의가 귀일하여 돌을 다듬어 그 유허(遺墟)에다 세워 영구히 불후(不朽)케 하는 바탕으로 삼게 되었으니 어찌 갸륵한 일이 아니던가 어느 날 공의 후손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와서 나의 글을 청하였다. 나는 쓸모없는 인물이고 하찮은 글이라서 반 나절을 사양하였으나 어찌나 줄기차게 청하기에 굳이 사양할 수 없어 위와 같이 간략히 서술하고 명(銘)을 달았다. 훌륭하도다 옥산(玉山)은 동방의 거족(巨族)이었으나 분화(芬華, 화려함)를 좋아하지 않고 천석(泉石)에 낙을 부쳤다. 학문은 고명하여 후진 계도(啓導)하였고 자혜(慈惠)에 힘을 써 칭송이 자자하였다. 아, 저 자손들 계계승승(承承繼繼)하니 공의 사적 천년토록 묻히지 않으리라. 단기4300년 정월 중순. 반남인(潘南人) 무릉(武陵) 박찬만(朴贊萬) 삼가 짓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