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치】 진안군 진안읍 군상리 산 1-1 우화산 암벽.
    【시기】 불명
    【형태】 암각서(岩刻書)
    【개요】 가학(駕鶴)이란 학을 타고 노닌다는 뜻이니 신선이 노닌다 해서 명승이나 정자가 있는 곳에 이런 이름을 붙이는 것이 통례다. 실제로 이 앞에는 옛 우화정이 있었다가 퇴락한 것을 등성이 너머에 중건하였다. 가학대 왼쪽 옆에는 영모대(永慕臺)라 하여 천안전씨 세거에 관한 사항이 각자되어 있다.
  • 【비표】 觀察使徐公相鼎永世不忘碑(관찰사서공상정영세불망비)

    【위치】 진안읍 군상리 산1-1 우화산 옥류천 좌측 중턱 우화산 비석군 내.
    【시기】 1869년
    【형태】 높이 139cm, 너비 54cm, 두께 12cm.
    【개요】 서상정(徐相鼎, 1813.8월 23일 ~ 1876년 7월 13일)은 영의정 심재 서용보의 종손이고, 갑신정변의 주역인 개화파 서광범의 삼종조부, 서재필의 종증조부뻘 되는 친척이기도 하다. 1848년(헌종 14년) 응제에 합격하여 바로 직부전시의 자격이 부여되고, 그 해의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자헌대부 지경연춘추관사 겸 동지성균관사에 이르렀다. 지방관으로 전라도관찰사 재직 시 선정을 베풀어 두 번이나 연임되었다.
  • 【비표】 郡守鄭侯喆謨善政碑(군수정후철모선정비)

    【위치】 진안읍 군상리 산1-1 우화산 옥류천 좌측 중턱 우화산 비석군 내.
    【시기】 1958년
    【형태】 높이 163cm, 너비 48cm, 두께 15cm.
    【개요】 정철모(鄭喆謨)는 1956. 12. 17~1959. 1. 10. 진안군수로 재임하였다.
  • 【비표】 有明朝鮮國孝子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金公旌閭(유명조선국효자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김공정려)

    【위치】 진안읍 반월길 83-4. 원반월마을 뒤(북쪽) 밭 가운데
    【시기】 1929년 5월
    【형태】 비각(碑閣)에 들어있으며 비갓이 있다.
    【개요】 효자 김상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71년에 세운 비이다. 1868년 정려가 명하여졌다. 정려기는 다음과 같다. ‘有明朝鮮國孝子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金公尙鉉之門 上之五年(1868) 戊辰 十二月 日 命旌閭’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上之五年戊辰 三月 日 儒生李元孝等上言 閏四月日 知縣李復信査報 九月日 觀察使徐相鼎査啓據 十二月 日 禮曹判書李豊翼 同副承旨 金宗泰 入啓承傳 內全羅道 鎭安 金尙鉉 卽駕洛王後裔 金寧君牧卿十六世孫 佐翼原從功臣永堅十世也 自在孩提 篤於孝親 父年八耋 病勢沈重 朝夕嘗糞 以驗差劇 而奄奄之中 思食水芹 時値嚴冬 叩氷號泣 靑芹秀出 簿言采歸以遂 其願 及夫丁憂廬墓 枕苫垢面 啜粥 不梳不襪 又丁內艱 一如前喪 未及禫闋 偶得沈疴戒 其諸子曰 我以不肖 未能從孝 汝須黽勉 勿替孝思 似此卓異 世所罕有 特加褒典 事奉敎矣 自營邑飭役立旌 以示闡揚之義事
    孫 崇政大夫 明植 永植 曾孫 顯國 顯重 顯豊 顯謀 顯佐 顯杓
    玄孫 有培 光培 乙培 晟培 弼培 達培 禮培 甲培 學培 文培 安培 丙培
    五世孫 (이하판독불명)
    己巳 五月 十四日 立旌 八月 十四日 竪碑
    主事 曾孫 顯國 從事 顯謨
    【풀이】 금상(今上) 5년 무진(戊辰: 고종 5, 1868) 3월 일자 유생(儒生) 이원효(李元孝) 등의 상언(上言)과 윤 4월 일자 지현(知縣) 이복신(李復信)의 사보(査報)와 9월 일자 관찰사 서상정(徐相鼎)의 사계(査啓)에 의거하여 예조판서 이풍익(李豊翼)과 동부승지 김종태(金宗泰)가 입계(入啓) 하였더니 승전(承傳)에 “전라도 진안의 김상현(金尙鉉)은 가락왕(駕洛王)의 후예로서 금녕군(金寧君) 목경(牧卿)의 16세손인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영견(永堅)의 10세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나이 팔십여 세로 병세가 위중하니 아침 저녁으로 변(便)을 맛보아 병세의 더하고 덜함을 증험하였는데 위중한 중에도 미나리를 먹고 싶어 하니 그때는 엄동설한인지라 얼음을 깨고 울부짖고 있으려니 푸른 미나리가 솟아나와 그것을 캐다가 올렸다. 이윽고 상(喪)을 당하니 여묘(廬墓)를 하는데 흙 베개와 거적자리로 얼굴도 씻지 않고 죽만 먹고 지냈으며 빗질도 하지 않고 버선도 신지 않았다. 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자 전상(前喪)과 똑같이 하였는데 미처 담제(禫祭)를 지내기 전에 우연히 중병을 얻자 여러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나는 어질지 못하여 종효(終孝: 효도를 끝까지 함)를 못하나 너희들은 힘써서 효심(孝心)이 흐리지 말게 하라’ 하였다. 이와 같은 탁이(卓異)한 행실은 세상에 드물게 있는 일이므로 특별히 포전(褒典)을 내리노라” 하였다. 이에 영읍(營邑)에서 역사(役事)를 신칙하여 정려를 세워 천양(闡揚)하는 뜻을 보이는 바이다.
    손 (孫) 숭정대부(崇政大夫) 명식(明植)(이하 원문참조)
    기사(己巳, 1929) 5월 14일 정려를 세우고, 8월 14일 비를 세우다(이하 비 원문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