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孝子仁同張公烘相之碑(효자인동장공홍상지비)
    【비표】 孝子仁同張公志仲之碑(효자인동장공지중지비)

    【위치】 진안읍 탄곡길[가림리] 탄곡마을 진입로변.
    【시기】 1959년
    【형태】 비 주변은 벽돌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비신 높이 150cm, 너비 45cm.
    【개요】 이 비들은 좌측으로부터
  • 【비표】 縣監趙侯然明慕聖愛士碑(현감조후연명모성애사비)

    【위치】 진안읍 군상리 산1-1 우화산 옥류천 좌측 중턱 우화산 비석군 내.
    【시기】 1857년
    【형태】 높이 101cm, 너비 50cm, 두께 9cm.
    【개요】 조연명(趙然明)은 진안현감으로 1834년 1월에 부임하여 1836년 2월에 삼등으로 전임하였다. 비표(碑表)로 보아 향교를 중수한 듯 하다.
  • 【비표】 縣監趙侯秉和永世不忘碑(현감조후병화영세불망비)

    【위치】 진안읍 군상리 산1-1 우화산 옥류천 좌측 중턱 우화산 비석군 내.
    【시기】 불명
    【형태】 높이 152cm, 너비 56cm, 두께 14cm.
    【개요】 조병화(趙秉和)는 진안현감이었다. 1867년 7월에 부임하여 1864년 6월에 고성으로 전임하였다.
  • 【비표】 縣監李侯復信永世不忘碑(현감이후복신영세불망비)

    【위치】 진안읍 군상리 산1-1 우화산 옥류천 좌측 중턱 우화산 비석군 내.
    【시기】 1827년
    【형태】 높이 141cm, 너비 53cm, 두께 15cm.
    【개요】 이복신(李復信)은 진안현감으로 1867년 1월에 부임하여 1872년 6월에 이임하였다.
  • 【비표】 縣監林侯喜鎭永世不忘碑(현감임후희진영세불망비)

    【위치】 진안읍 군상리 산1-1 우화산 옥류천 좌측 중턱 우화산 비석군 내.
    【시기】 1856년
    【형태】 높이 152cm, 너비 56cm, 두께 14cm.
    【개요】 임희진(林喜鎭)은 진안현감으로 1856년 8월에 부임하여 1857년 7월에 봉고파직되었다.
  • 【비표】 縣監李侯承沼淸白善政碑(현감이후승소청백선정비)

    【위치】 진안읍 군상리 산1-1 우화산 옥류천 좌측 중턱 우화산 비석군 내.
    【시기】 1855년
    【형태】 높이 134cm, 너비 42cm, 두께 18cm.
    【개요】 이승소(李承沼)는 진안현감으로 1850년 7월에 부임하여 1853년 1월에 용담으로 전임하였다.
  • 【비표】 縣監李侯端和淸德善政碑(현감이후단화청덕선정비)

    【위치】 진안읍 군상리 산1-1 우화산 옥류천 좌측 중턱 우화산 비석군 내.
    【시기】 1859년
    【형태】 높이 140cm, 너비 51cm, 두께 12cm.
    【개요】 이단화(李端和)는 진안현감으로 1857년 12월에 부임하여 1858년 8월에 재령군수와 자리바꿈 하였다.
  • 【비표】 縣監趙秉燮永世不忘碑(현감조병섭영세불망비)

    【위치】 진안읍 군상리 산1-1 우화산 옥류천 좌측 중턱 우화산 비석군 내.
    【시기】 1850년
    【형태】 높이 152cm, 너비 56cm, 두께 14cm.
    【개요】 조병섭(趙秉燮)은 진안현감이었다. 1857년 7월에 부임하여 1857년 11월에 수원판관으로 전임하였다.
  • 【비표】 孝子水原白公致洙之閭(효자수원백공치수지려)
    【비표】 孝子通訓大夫忠訓府都事白公樂元之閭(효자통훈대부충훈부도사백공낙원지려)

    【위치】 진안읍 정곡리 산 149-2 연장저수지 제방 옆 도로변
    【시기】 1925년
    【형태】 비 주변은 벽돌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높이 150cm, 너비 54cm.
    【개요】 이 비는 왼쪽으로부터
  • 【비표】 縣監李侯益應愛民善政碑(현감이후익응애민선정비)

    【위치】 진안읍 연장리 산 237-6임. 농공단지 모롱이 언덕
    【시기】 1877년
    【형태】 높이 132cm, 너비 45cm, 두께 15cm.
    【개요】 이익응(李益應)은 진안현감으로 1876년 9월에 부임하여 1879년 4월에 재임중 사망하였다.
  • 【위치】 진안읍 운산리 산194-1. 유산마을 북쪽.
    【시기】 1936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높이 110cm, 너비 8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禮云 婦人之道 在家從父 適人從夫 夫死從子 如斯而已矣 若夫死 而不顧夫之身後 徑情而直行 自經於溝瀆 是傷勇也 世或以此爲烈 然聖人之所不許 而史氏之所不書者矣 近故雲山居士金公甲鎭妻 密陽朴氏 可謂行三從之道 而孝烈兼備者也 夫人以文敬公忠元後孫萬弼之女 幼有婦德 事父母孝 承順無違 及笄嫁于金門 金乃端宗名節忠毅公白村先生之玄冑也 夫人事舅姑 如事父母 溫凊定省 夙夜靡懈 年甫二十 夫嬰奇疾 數月彌留 漸至凘頓 迎醫合藥 空靑罔効 夫人爲之斷指注血 旣甦而旋絶 靑年孤孀 失我所天 不死何斯 乃欲自經下從 而反思之 上有二老在堂 下有一幼在褓 是所不忍也 自是動心忍性 終養二老 敎育孤兒 得保金氏之宗事 竟以天年終 鄕里感歎 取比漢之陳孝婦也 遠近士林 聞而嘉之 相繼襃獎焉 此可見百世之公議不泯也 公之嗣孫允秀 請余文以侈之 辭不獲已 謹書此而俾歸刻焉 歲柔兆困敦載陽節 小華遺民李道復記
    【풀이】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부인의 도리는 집에 있어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을 가서는 지아비를 따르며,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을 따른다”고 하였다. 만일 지아비가 죽었을 때, 지아비의 뒷일도 생각하지 않고 지레 마음 내키는 대로 곧장 행하여 스스로 개천에서 목을 맨다면, 이는 상용(傷勇, 만용[蠻勇]으로 일을 그르치다)인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열(烈)이라 말하나, 이는 성인이 허여하지 않은 바이자 역사가도 기록하지 않는 일이다. 근세에 작고한 운산거사(雲山居士) 김공(金公) 갑진(甲鎭)의 처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가위 삼종지도(三從之道)를 행하고 효와 열을 겸비한 사람이라 할 만하다. 부인은 문경공(文敬公) 충원(忠元)의 후손인 만필(萬弼)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부덕(婦德)이 있어 부모를 효성으로 모셔 순종하며 어김이 없었고, 계년(忌年, 20세)이 되어서는 김씨 가문으로 시집을 갔는데, 김씨는 단종의 명절신(名節臣)인 충의공(忠毅公) 백촌 선생(白村先生)의 후손이다. 부인은 시부모 섬기기를 마치 친부모 섬기듯이 하여 온정(溫砦)과 정성(定省)을 아침 저녁으로 해이함이 없이 하였다. 나이 겨우 20세에 부군이 괴이한 병에 들었다. 몇 달을 끌더니 점차 시들고 기울어져 의원을 맞아 약을 썼으나 공청(空靑, 희귀한 선약이라고 일컬어진 약)도 효과가 없었다. 이에 부인은 손가락을 잘라 피를 쏟아 넣었으나 깨어났다가 도로 운절(隕絶)하였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어 하늘과 같이 의지하던 남편을 잃었으니 죽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바로 목을 매어 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나 돌이켜 생각해 보니, 위로는 두 노인네가 당(堂)에 계시고, 아래로는 한 어린이가 강보에 싸여 있으니 이는 차마 못할 일이었다. 이로부터 슬픔을 참고 모진 마음을 먹고, 두 노인네를 끝까지 봉양하며 홀로 된 어린이를 교육시켜 김씨의 후사(後事)를 보전하게 하였다. 그 뒤 마침내 천명을 다하고 죽으니 향리(鄕里)에서 모두 감탄하여 한(漢)나라의 진효부(陳孝婦)에 비유하기까지 하였다. 원근의 사림(士林)도 이 말을 듣고 가상하게 여겨 뒤를 이어 서로 포장(褒奬)하였으니, 이로써 가히 백세(百世)의 공의(公議)는 없어지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하겠다. 부인의 사손(嗣孫) 윤수(允秀)가 나의 글을 청하여 치장하려 하니, 사양할 수 없어 삼가 글을 써서 주어 돌아가서 새기게 하였다. 병자(丙子, 1936) 재양절(載陽節, 음력 11월) 소화유민(小華遺民) 이도복(李道復)이 기술하다.
  • 진안읍 운산리 산311-2. 진안-정천간 지방도 진용로가 외후사길에 연결되는 후사동삼거리 서북쪽 모롱이 버스정류장 뒤 산기슭에 4기의 비석이 있는데 좌로부터 진사현 자선비, 문기주 선덕비, 김직현 영세불망비, 이복신 영세불망비 등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진안읍으로부터 정천, 용담으로 왕래하는 길손이 빈번한 곳으로 불망비가 들어설 만한 적지라 할 수 있다.
  • 【위치】 진안읍 운산리 산311-2. 진안-정천간 지방도 진용로가 외후사길에 연결되는 후사동삼거리 서북쪽 모롱이 버스정류장 뒤 산기슭.
    【시기】 1873년 11월(光緖三年 丁丑 十一月)
    【형태】 높이 85cm, 너비 40cm, 두께 8cm.
    【개요】 김직현(金稷鉉)은 진안현감으로 1872년 9월∼1874년 11월까지 재임하였다.
  • 【비표】 縣監李侯復信永世不忘碑(현감이후복신영세불망비)

    【위치】 진안읍 운산리 산311-2. 진안-정천간 지방도 진용로가 외후사길에 연결되는 후사동삼거리 서북쪽 모롱이 버스정류장 뒤 산기슭.
    【시기】 1871년(辛未 三月 二十六日)
    【형태】 높이 85cm, 너비 40cm, 두께 8cm.
    【개요】 이복신(李復信)은 진안현감으로 1867년 1월에 부임하여 1872년 6월에 이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