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표】 學生兆陽林公諱正淳配孺人沃川陸氏孝行碑(학생조양임공휘정순배유인옥천육씨효행비)

    【위치】 진안읍 가림리 선인동에서 사인동으로 넘어가는 얕은 고개 좌측 도로변
    【시기】 1987년
    【형태】 비 주변은 석제 담장으로 둘려 있다. 비갓과 대석(臺石)이 있다. 비신 높이 155cm, 너비 55cm, 두께 23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朱子曰人道는 莫大於三綱이라 하고 曰事孰大焉고 事親爲大라 하니 人能踐履其大者則其他細目은 自然脗合於爲仁之道라 今古以來로 鮮甚其人則果難矣哉而况世値霾曀에 淳朴己散하야 視禮義如弁髦하고 等倫理於芻狗에 有志之士憂心沖沖하야 不禁長太息而有一孺人이 特行古道에 如昏衢之燭大冬之松하야 扶一線之陽於群陰之中하야 以化及於餘人者를 今於沃川陸氏는 德谷諱麗後贊淑女요 兆陽林氏吏部尙書諱八及後士人正淳配에 見之矣라 氏以淑懿嘉柔之德으로 善事父母에 壺儀己成而母氏之病에 裂指注血하야 以致回甦하고 及其笄歸에 産業이 苟艱하야 桂玉難繼라 夫人이 晝以耘耔에 汗流竟趾하고 夜以紡織에 燈火達朝라 和顔順辭로 擧案齊眉하고 事姑嫜에 有陳婦之孝하야 承順無違에 候寒暖養其軆하고 供甘旨適其口하야 庋閣에 不乏珍品이라 昏之定晨而省하고 於祖先之忌에 潔其蘋藻하고 蠲其饎需에 盡如在之誠하고 待夫君에 有冀妻之敬하야 相對如賓에 極其內助하야 使之斷斷學業에 無氄
  • 【위치】 진안군 진안읍 군상리 산 1-1. 우화산 상부 암벽.
    【시기】 1889년
    【형태】 암각서(岩刻書)
    【개요】 고종 기축(己丑, 1889)년에 현감 김요협(金堯莢)이 고을의 선비 전의호(全懿鎬) 전재택(全載澤)과 이름을 연이어 각하고, 또 “夫士之題名石室 以其功與德而今日不然 吾與二三子暇日咏遊 嘆吾須臾羨彼無窮而記之然得無後日 邵場之譏歟噫”라고 각하였다. 풀이하면 “무릇 선비가 석실에 이름을 새긴 것은 공과 덕이 있어서이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내가 몇몇 사람으로 더불어 여가를 타서 노닐며 읊나니 우리들의 짧은 인생이 한탄스럽고 자연의 무궁함이 부러워서 기록한 것이나 후일에 소옹(邵雍, 송나라 때 문인)이나 양웅(揚雄, 한나라 때 문인) 같은 사람의 나무람이 없으리라고 단정할 수야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 진안읍 군상리 우화산 중턱에 있는 비석군. 우화산 비석군은 원래 진안군청 청사 뜰에 있었으나 진안군청 청사를 신축할 때 앞산인 우화산으로 옮겨놓았다. 비석군은 우화산 기슭에 남-북 방향으로 총 12기가 있으며, 대부분 지방관의 불망비와 선정비 등이다. 좌로부터 전종렬 기념비, 조연명 모성애사비, 조병화 영세불망비, 민달용 영세불망비, 정직조 영세불망비, 서상정 영세불망비, 이복신 영세불망비, 임희진 영세불망비, 이승소 청백선정비, 이단화 청덕선정비, 정철모 선정비, 조병섭 영세불망비 등이 있다.
  • 【비표】 御使閔公達鏞永世不忘碑(어사민공달용영세불망비)

    【위치】 진안읍 군상리 산1-1 우화산 옥류천 좌측 중턱 우화산 비석군 내.
    【시기】 1857년
    【형태】 높이 117cm, 너비 47cm, 두께 12cm.
    【개요】 민달용(閔達鏞, 1802년(순조 2)~미상)은 1858년(철종 9)에 전라좌도암행어사(全羅左道暗行御史)가 되어, 각 지방 관리들의 비리를 적발하였다. 1861년(철종 12)에는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중국을 다녀왔다.
  • 【비표】 御使鄭公稷朝永世不忘碑(어사정공직조영세불망비)

    【위치】 진안읍 군상리 산1-1 우화산 옥류천 좌측 중턱 우화산 비석군 내.
    【시기】 1869년
    【형태】 높이 139cm, 너비 54cm, 두께 19cm.
    【개요】 정직조(鄭稷朝, 1817~1881)는 1868년(고종 5)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다녀와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갔다. 1869년(고종 6)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다. 1871년(고종 8) 봉산군수(鳳山郡守)로 나갔다. 1875년(고종 12) 대거승지(對擧承旨)로서 가자(加資)되었다. 1879년(고종 16)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 【위치】 진안읍 마이산로(군하리 356) 진안 이씨 세천 내
    【시기】 1881년
    【형태】 비신(碑身)은 석곽(石廓) 안에 들어 있다. 높이 37cm, 너비 78cm, 두께 10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金氏卽進士重龜之女也 十六婦焉事舅姑 與夫克盡孝 頃十九當庚午 遭夫喪以其夫帶自縊幾絶 舅知急救之曰 汝雖欲死 汝腹中兒何金氏 始悟而止 强延日月 果生男撫之曰 汝若十歲無母能生 吾當從汝父 兒之三歲而夭 又以其帶縊項 家人急解則曰 此帶卽吾夫帶 至今深藏 要以一決也 吾死後以帶納棺仍不食不言七日而死 死之日昏霧漫室房闥如漆夜者一晝夜 四日而欽顔貌如生矣 以孝烈 戊寅春 本官轉報 己卯三月二十六日 遂下禮曹旌之
    崇禎紀元後 歲在辛巳六月 日
    【풀이】 김씨는 진사 중구(重龜)의 딸이다. 16세에 시집와서 시부모를 효로 극진히 섬겼고, 지아비를 공경하였다. 19세 되던 경오(庚午)년에 지아비의 상을 당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을 지경이 된 것을, 시아버지가 살려놓고 말하기를 “너는 죽으려 하나, 네 뱃속의 아이가 어찌 김씨이겠느냐” 하니, 비로소 깨닫고 그만두었다. 시간이 흘러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를 키우며 말하기를 “네가 10세가 되면 어미 없이도 능히 살 수 있으니, 나는 응당 네 아버지를 따라가겠다”고 하였는데, 아이가 3세에 요절하자 허리끈으로 목을 매었다. 집안 사람들이 급히 달려와 허리끈을 풀으니, 말하기를 “이 끈은 내 지아비의 것인데, 깊이 감추었다가 지금 끝을 내려 하오. 내가 죽거든 관에 넣어주오.” 하고는 7일 동안 먹지 않고 말하지 않더니 끝내 죽고 말았다. 그 날 짙은 안개가 방에 가득하여 온종일 방안이 칠흑같이 어두웠고, 4일이 지났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듯하였다. 무인(戊寅)년 봄 본관이 위에 보고하였으며, 기묘(己卯)년 3월 26일 드디어 예조에서 정려가 내렸다.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세재 신사(歲在辛巳, 1881) 6월 일
  • 【비표】 學生鎭安李公柄基配烈婦竹山安氏紀蹟碑(학생진안이공병기배열부죽산안씨기적비)

    【위치】 진안읍 마이산로(군하리 356) 진안 이씨 세천 내.
    【시기】 1958년
    【형태】 개석(蓋石)과 대석(臺石)이 있다. 높이 143cm, 너비 54cm, 두께 23cm.
    【개요】 비(碑) 주인공의 신상(身上)과 사적(事績)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비문】 一日에 吾鄕中李丈元有氏가 携其叔母安孺人烈行之籍而來言曰我叔母烈行卓節이 雖爲一鄕所共知나 時不遇而未遑旌褒之典하고 纔有搢紳之表章이나 然이나 世久而泯其實固耳라 爲先紀蹟竪碑하야 以待淸平立綱之日하노니 願得子之一言而圖不朽어늘 予以不德不文으로 固辭不獲己라 夫人은 籍竹山이니 文惠公諱元衡之后原錫之女라 年有及笄에 歸于故鎭安李公柄基하니 公은 是司成雙尖堂諱仁賢之后永洙之子也니 世有儒行이라 夫人이 幼有淑德하야 及嫁에 家道淸貧하여 與公으로 夫耕婦織하야 孝養舅姑하니 遠近이 稱其賢이라 倭政癸亥春에 公이 與村人으로 董役治道할새 突然一倭漢이 負銃醉到하야 叱辱諸衆하고 忽發銃丸하야 直射於公하야 因卽致死하니 目參人士 促取厥漢하야 將欲依法而夫人이 聞輒帶劍하고 剔殺倭漢의라 官憲輩急至하야 甚加威脅호대 夫人이 少無失色하고 辭氣森嚴하야 自訟以訴寃於城崩而意欲自刎이나 事覺未果하고 至大邱獄하니 慨然吁歎하야 辭於傍人曰吾東이 以禮義之邦으로 爲倭所倂은 士女共念이라 至於吾身하야 夫死於倭之手하고 婦人於倭之獄하니 徹天忿恨이 豈有須臾生存之義哉아 不粒食七日而逝하니 捨生取義之道於斯極矣라 嗚呼라 報夫讎於刀刃之快하고 立身節於刑獄之危하니 安氏之貞烈이 凜凜然若秋霜朔雪이요 亭亭乎如晩松寒竹而足可謂流芳千秋矣라 感歎之餘에 不揆文拙하고 書此歸之而俾爲刻焉하노라
    檀君紀元四千二百九十一年戊戌季冬 東萊 鄭貴泳記
    【풀이】 하루는 우리 고을 어르신네 이원유(李元有)께서 그 숙모(叔母) 안유인(安孺人)의 열행(烈行)을 담은 문적을 가지고 와서 말씀하시기를 “내 숙모(叔母)의 열행탁절(烈行卓節)이 비록 한 고을에서는 두루 아는 바지만, 시대가 아니라 정려의 은전은 받을 수 없고, 겨우 관(官)에서 내린 표장이 있지만 그러나 오래 되면 사실이 민몰될 것임은 확실하니, 먼저 기적비를 세워 청평(淸平)한 때에 입강(立綱)할 날을 기다리고자 하니, 그대가 한 말씀 써서 불후토록 하라”고 하였다. 나는 부덕하고 문장이 부족하여 고사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부인(夫人)은 본관이 죽산(竹山)이니 문혜공(文惠公) 휘(諱) 원형(元衡)의 후손 원석(原錫)의 딸이다. 나이가 차서 진안인(鎭安人) 이병기(李柄基)에게 출가하니, 공(公)은 사성(司成) 쌍첨당(雙尖堂) 휘(諱) 인현(仁賢)의 후손 영수(永洙)의 아들인 바, 대대로 유림(儒林)이다. 부인(夫人)은 어릴 적부터 숙덕(淑德)하여 출가해서도 집안이 청빈(淸貧)하여 공(公)과 더불어 지아비는 밭 갈고 지어미는 길쌈하여 효도로 시부모를 공궤하니 원근이 그들을 어질다 하였다. 왜정(倭政) 계해(癸亥, 1923)년 봄, 공(公)이 마을 사람들과 도로 부역을 감독할 때, 갑자기 왜놈 하나가 총을 메고 취해서 나타나 제중에게 욕설로 꾸짖고 갑자기 총탄을 발사하였다. 그 때 공이 총탄에 맞아 즉사에 이르니, 이를 본 사람들이 그 자를 붙잡아 법에 넘기려 하였다. 이를 알게 된 부인이 칼을 들고 와 왜놈을 척살(刺殺)하니, 관헌이 급히 와서 심히 위협(威脅)을 가했지만, 부인(夫人)은 얼굴색이 조금도 변치 않고 말과 얼굴빛이 삼엄(森嚴)하여 스스로 시비곡절을 다투고, 또 하소연하며 억울하게 지아비가 죽었으니 자진하려 하였으나 미리 발각되어 이루지 못하고 대구(大邱)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이에 분개하고 탄식하며 옆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예의지국으로 왜놈과 다투는 것은 남녀가 같으나, 내 처지는 지아비가 왜놈의 손에 죽고, 처는 왜놈의 감옥에 갇혔으니, 하늘에 사무치게 분하고 한스러우니 어찌 조금이라도 더 살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7일간을 먹지 않고 죽으니, 생을 버려 의를 취한 도리가 이처럼 지극하였다. “오호라! 지아비의 원수를 칼로 통쾌하게 갚고 / 자신의 절개를 형옥의 고통에서 세우니 / 안(安)씨의 정열(貞烈)이 늠름하고 추상(秋霜) 삭설(朔雪)과 같고 / 우뚝하기는 만송(晩松)과 한죽(寒竹) 같으니 / 가히 천추에 꽃다운 이름이 전하리라.” 감탄하는 사이에 문졸(文拙)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글을 써 이대로 돌아가 각하게 하노라. 단군기원 4291년 무술(戊戌) 계동(季冬) 동래(東萊) 정귀영(鄭貴泳) 기(記)
  • 【위치】 진안읍 운산리 산311-2. 진안-정천간 지방도 진용로가 외후사길에 연결되는 후사동삼거리 서북쪽 모롱이 버스정류장 뒤 산기슭.
    【시기】 1915년 2월(大正五年 二月 日)
    【형태】 높이 105cm, 너비 35cm, 두께 10cm.
    【개요】 문기주에 대한 기록은 불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