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천면 백삼로 30-1[백화리 906] 백화리 중배실 어귀에 있는 사당. 2016. 12. 28 진안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서원의 기능은 없어졌다. 방촌 황희(黃喜)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으며, 자손인 황보신(黃保信)·황징(黃懲) 등을 배향하고 있는 장수 황씨의 사당이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1970년 2월 중수되었다. 평평한 대지 위에 긴 네모꼴의 담으로 둘러 싸여 있는데, 담 안은 남북의 두 구역으로 나뉘어 뒷 부분 뒷담 쪽에 남향의 사당이 있고, 앞부분 동쪽 가에 서향의 강당이 있으며, 양쪽은 내삼문으로 연결된다. 사당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기와건물로 정면 중앙에 화산서원의 현판이 걸려 있고, 방에는 황희의 영정과 위패, 황보신과 황징의 위패 등이 모셔져 있다. 황희의 영정은 지방유형 문화재 129호로 지정되었다.

    【배향위(配享位)】
    황희(黃喜, 1363[공민왕 12]∼1452[문종 2])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황석부(黃石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균비(黃均庇)이고,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黃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金祐)의 딸이다.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때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으나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일정 기간 은둔생활을 하다가 1394년(태조 3) 태조의 적극적인 출사(出仕) 요청을 수용하여 성균관학관에 제수되면서 벼슬에 나갔으나 부침을 거듭하다가 1431년 다시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統理)하였다. 그리고 물러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황보신(黃保信, 생몰연대미상) : 황희의 차자(次子)로 사헌부감찰, 이조정랑을 역임하고, 한성소윤 이조참의 증직(贈職)되었다.
    황징(黃懲) : 황희의 현손(玄孫)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영평현령(永平縣令)을 지냈다. 셋째 아들이 황윤길(黃允吉)이다.

    【향사축문(享祀祝文)】
    維 歲次 某年 某月 朔 某日 後學 某 敢昭告于
    尨村黃先生 伏以 道廣無偏 德寬有容 闢異扶正 百世師宗 玆値秋季 謹以 牲幣禮齊 粢盛庶品 式陳明薦 尙 饗
    유세차 ○○○○년 음력 ○월 ○일 감히 분명하게 고하옵니다.
    방촌 황(희)선생은 업드려 생각하건대 도리가 넓고 치우치지 아니하며, 관용의 덕으로 이단을 물리치고 올바름을 세워 백세의 사종이셨습니다.
    漢城少尹 黃先生 伏以 性品仁厚 道崇德博 忠信孝友 永世淡白 玆値秋季 謹以 牲幣禮齊 粢盛庶品 式陳明薦 尙 饗
    한성소윤 황(보신)선생은 업드려 생각하건대 성품은 인후하시고, 도리는 높고 덕은 넓어 충신(忠信) 효우(孝友)로 담백히 사셨습니다.
    靜菴黃先生 伏以 克昭家聲 淵源淸昭 文望顯名 爲世師表
    정암 황(징)선생은 업드려 생각하건대 능히 집안의 명성을 밝히시고, 연원은 맑고 밝아 학문으로 이름을 드러내어 세상의 사표가 되셨습니다.

    玆値秋季 謹以 牲幣禮齊 粢盛庶品 式陳明薦 尙 饗
    가을을 맞이하여 삼가 예물을 갖추고 제수를 마련하여 올리오니 부디 흠향하옵소서.

    <참고>
    【황방촌 영정(黃厖村影幀)】 화산서원(華山書院)에 봉안된 황희(黃喜, 1363~1452)의 영정. 1987. 4. 28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비단바탕에 채색, 가로 54㎝ 세로 80㎝. 이곳에 봉안된 방촌(礬村) 황희의 영정은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소재 옥동서원(玉洞書院)에 소장되어 온 영정을 1884년(헌종 1)에 모사한 것이다. 옥동서원본은 황희가 62세 때 그려진 초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모본(模本)으로 하여 그린 영정이 5~6본이 산재하고 있었으나, 모두 전란 중에 소실되었고, 나주 노안면 노덕서원(老德書院)과 파주영당(坡州影堂)의 모사본이 전해오고 있다.
  • 안천면 하배실길 30-7(백화리 1374) 백화리 하배실 마을 동쪽에 있는 사당. 하배실[下梨]에 세거하는 낙안 김씨(樂安金氏) 김빈길(金贇吉)의 사당이다. 사우는 지형 때문에 부정형으로 둘러친 담 안에 따로따로 있다. 전체적으로는 뒤의 사당과 그 앞 동쪽의 학륜당, 그리고 서쪽의 관리사가 세모꼴을 이루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졌다. 앞쪽은 마루이고 뒤쪽은 방으로 되어 있다.
    김빈길은 조선 순조 신유(辛酉, 1801)년 낙안 삼충사(三忠祠)에 충장공 정분(鄭奔), 충민공 임경업(林慶業) 등과 더불어 배향되어 춘추로 향사하였는데, 고종 무진(戊辰, 1868)년에 훼철(毁撤)되자 후손들이 김빈길의 위패를 용담군 이북면(안천면) 하배실[下梨谷]으로 이안(移安)하여 별묘(別廟)를 세워 후손들이 봉사(奉祀)를 해오다 사론(士論)에 의하여 순종 정미(丁未, 1907)년에 화천사라 이름하였다.

    【배향위(配享位)】
    김빈길(金贇吉, 1370[공민왕 19]∼1405년[태종 5]) : 김함(金涵)의 자(子), 김주(金湊)의 손(孫), 김규(金糾)의 증손(曾孫)이다. 호는 죽강(竹岡). 태조(太祖) 때의 무인으로 낙안(樂安) 출신이다. 성품이 충직(忠直)하고 근검(勤儉)하였다. 1394년(태조 3) 전라수군첨절제사(全羅水軍僉節制使)로 있을 때 만호(萬戶) 김윤검(金允劍) 김문발(金文發) 등과 함께 왜적의 배 3척을 섬멸하는 등의 공적을 세웠다. 1405년(태종 5)에 전라도수군도절제사가 되었을 때에는 도내(道內)의 요해처(要害處)에다 만호(萬戶)를 두고, 병선(兵船)을 나누어 정박시켰고 또한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군비를 비축하게 하여 주는 것만을 바라는 폐단을 없애고. 평소 아랫 사람을 대함에도 한치도 소홀함이 없었다. 예로 그가 수군절제사로 있을 때에도 항상 사졸(士卒)들과 더불어 감고(甘苦)를 같이하였고, 또한 도적을 쫓아 행선(行船)할 때에도 분연(奮然)히 몸을 돌보지 않아 군사들이 모두 사력(死力)을 다하였으므로 가는 곳마다 승리하였다. 상을 받으면 항상 군사(軍士)의 공(功)이 있는 자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비록 외진 백성들이라도 그의 은혜을 입었다. 후에 양혜(襄惠)라는 시호를 받았다.

    【향사축문(享祀祝文)】
    維 歲次 某年 某月 朔 某日 後學 某 敢昭告于
    忠貫白日 德被蒼生 名傳百世 事光千秋
    모년 모월 모일 후학 아무개가 감히 분명히 고하옵니다.
    충성은 백일을 뚫고, 덕은 창생에 미쳤도다. 이름이 백세에 전하니, 사적이 천추에 빛납니다.

    <참고>
    【학륜당(學倫堂)】 화천사 경내에 있는 서당이었다. 2016. 12. 28 진안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전면 4칸, 측면 2칸으로 처마넓이 79㎡의 우진각 함석지붕이다. 마루 벽에는 화천사 중수기와 종친회 임원록 등의 판액(板額)이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