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령면 마이산남로 132(동촌리 78)에 소재한 열성(列聖)과 명현(名賢)·우국지사(憂國之士)를 봉안한 묘우(廟宇). 이산묘의 공식 명칭은 대한이산묘봉찬회(大韓駬山廟奉讚會)이다. 이산묘의 묘우로는 회덕전, 사당으로는 영모사, 영광사, 기타 건조물은 이산정사, 강당, 비각, 외삼문, 관리사 등이 있다.

    【건립 경위】 진안 고을은 한말의 거유(巨儒)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이 여러 번 들른 적이 있다. 또한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은 태인에서의 창의(倡義)를 준비하면서 1906년 어느 날 달포를 성수면 도통리 목동 최제학(崔濟學)의 삼우당(三友堂)에 머물면서 진안지방을 순행하기도 하였다. 진안 사람들 중에는 이들을 지극히 존숭(尊崇)하고 스승으로 모시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스승인 송병선을 기리기 위해 친친계(親親契)를 결성하고, 최익현을 기리기 위해서는 현현계(賢賢契)를 결성할 정도였다. 1924년 경 이들은 친친계와 현현계를 합하기로 하고 “조선 태조가 마이산에 주필(駐蹕)한 사실, 연재(淵齋)와 면암(勉庵) 두 분이 머물렀던 곳이니 현인을 존경하는 뜻이 없을 수 없다”고 하는 의견이 돌아 사당을 마련하기로 뜻을 모아 기금을 갹출하니 만여 금이 모아졌다. 또 마령의 송진환(宋振煥)은 마이산내 부지 한 구역(區域)을 희사하여 1925(乙丑)년 3월 건축을 시작하였다. 건물은 모두 4칸으로 서쪽은 인지재(仁知齋)이라 하고 동쪽은 여택헌(麗澤軒)이라 하였다. 또 집 한 채를 정사의 뒤에 짓고 연재와 면암 두 선생의 진영(眞影)을 본떠 그려 봉안하고 고경각(高景閣)이라 하였으며, 그 역내를 통칭하여 이산정사(駬山精舍)라 하며 문은 치종문(致宗門)이라 불렀다. 건물은 4월(음)에 완공하였다. 정사 뒤에 또 집 한 채를 지어 회덕전(會德殿)이라 이름하고, 조선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를 제사지내고자 하였으나 당시는 일제치하라 일경의 감시와 탄압이 심하여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다가 1945년 조국이 광복되고, 이듬해인 1946년 진안향교의 추향일(秋享日)에 오채열이 제안하기를, “우리 고장 마이산 이산사(駬山祠)의 회덕전(懷德殿)은 3천만 백성이 다 같이 받드는 곳이 되어야 마땅하지 한 고을에서만 맡아 모셔서는 안되니 여러 고을의 동의를 구함이 옳다”하자 중론(衆論)이 일치하였다. 이에 여러 고을의 향교에 돌아가며 문의하니, 모두가 쾌히 승낙하기를 백성이 옛 왕조의 덕을 사모한다면 어찌 조선 태조 한 분에 한정할 것인가? 단군성조(檀君聖祖)께서 나라를 창건하신 공이나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문자를 만드신 덕은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일이니 아울러 모심이 옳다”고 회답하였다. 이때부터 종래의 이산정사(駬山精舍)가 이산사(駬山祠)로 명칭이 달라졌다. 이에 1947년부터 회덕전에는 단군과 태조 및 세종의 세 분을 모시게 되었고, 회덕전 아래 동서에 두 사우(祠宇)를 지어 동쪽은 영모사(永慕祠)라 이름하여 조선의 개국 이래로 정충(精忠)한 명유(名儒) 40위를 모시고,(2008년에 후산 이도복(厚山 李道復)을 더 배향하여 41위가 되었다) 서쪽은 영광사(永光祠)라 이름하여 고종 을사년(乙巳年, 1905) 이후의 송병선·최익현 및 순국하신 선열 34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처소로 삼기로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사우(祠宇)를 중수할 기금이 없었다. 이에 계를 만들고 이름하여 회덕계(懷德契)라 하여 기금을 모았는데, 다소 넉넉한 사람은 자진하여 전답을 내어놓고 기타는 형편에 따라 금원을 희사하였으며, 전국 각지의 독지가들도 찬조한 사람이 많았다. 고종황제의 위판은 당초 옥구군의 해종전(海宗殿)에 있었는데, 일제하에 훼철(毁撤)을 당하여 임시로 전주의 건지산(乾止山)속에 봉안하였다가 전주의 유림들이 회덕전에 봉안하기를 발의하자, 여러 고을의 사론(士論)이 모두 함께 봉향(奉享)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여 1948년 가을에 회덕전에 옮겨서 봉안하니 모두 4위가 된 것이다. 이산묘(駬山廟)는 처음에는 이산사(駬山祠)라 칭하였으나 성균관의 사론(士論)이 묘(廟)와 전(殿)은 격(格)이 높으니, 이산묘로 개칭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옥(玉)으로 인장을 조각하여 보내주었기에 그대로 부르기로 하였고, 매년 음력 3월 중정일과 9월 12일에 향사(享祀)를 드리기로 정하였으나 지금은 봄철 향사만 드린다.

    【회덕전 위차(懷德殿位次)】
    대한 조선시조 단군(大韓朝鮮始祖檀君), 대한 태조 고황제(大韓世宗高皇帝), 대한 세종 장헌대왕(大韓世宗莊憲大王), 대한 고종황제(大韓高宗皇帝)

    【영모사 위차(永慕祠位次) 41위】
    문평공 전문식(文平公 全文軾, 本貫은 天安), 양경공 정희계(良景公 鄭熙啓, 慶州), 충경공 남재(忠景公 南在, 宜寧), 양렬공 신이충(襄烈公 愼以衷, 居昌), 문효공 하연(文孝公 河演, 晉州), 봉강 최진형(鳳岡 崔進亨, 全州), 괴은 이귀산(塊隱 李貴山, 延安), 오매당 김만서(寤寐堂 金晩緖, 泗川), 송당 전자온(松堂 全自溫, 天安), 죽헌 전자양(竹軒 全自讓, 天安), 충정공 박심문(忠貞公 朴審問, 密陽), 퇴헌 강이성(退軒 姜利誠, 晋州), 유산처사 김기(乳山處士 金機, 泗川), 죽재 전혜(竹齋 全惠, 天安), 유계 이달손(幽溪 李達孫, 鎭安), 월계 송림(月溪 宋琳, 延安), 송재 이숙남(松齋 李叔男, 全義), 문익공 정광필(文翼公 鄭光弼, 東萊), 문장공 박계현(文莊公 朴啓賢, 密陽), 귀락당 이광필(歸樂堂 李光弼, 公州), 문충공 이항복(文忠公 李恒福, 慶州), 성산 오빈(聖山 吳玭, 咸陽), 남은 오행(南隱 吳珩, 咸陽), 초은 손승경(楚隱 孫承憬, 密陽), 서산정 신중윤(西山亭 辛重胤, 靈山), 회당 태한정(晦堂 太漢鼎, 陜溪), 만헌 윤응남(晩軒 尹應南, 南原), 이산 전대승(駬山 全大昇, 天安), 취수당 김성진(醉睡堂 金聲振, 慶州), 가재 전동흘(佳齋 全東屹, 天安), 모재 정동협(慕齋 鄭東俠, 東萊), 우재 전응철(愚齋 全應喆, 天安), 입택 김감(笠澤 金鑑, 錦山), 용재 전응종(庸齋 全應鍾, 天安), 송운 원성모(松耘 元成模, 原州), 근재 이만정(謹齋 李萬楨, 鎭安), 노은 김경원(魯隱 金慶元, 慶州), 채헌 이여정(債軒 李如程), 송사 최만성(松史 崔萬成, 耽津), 만휴당 양하룡(晩休堂 梁夏龍, 南原) 후산 이도복(厚山 李道復)

    【영광사 위차(永光祠位次) 34위】
    문충공 연재 송병선(文忠公淵齋宋秉璿), 면암 최익현(勉菴崔益鉉), 충정공 산재 조병세(忠正公山齋趙秉世), 충정공 계정 민영환(忠正公桂庭閔泳煥), 충정공 홍만식(忠貞公洪萬植), 부재 이상설(溥齋李相卨), 일성 이준(一醒李儁), 녹천 고광순(鹿泉高光洵), 성재 기삼연(省齋奇參衍), 죽봉 김준(竹峯 金準), 의병장 민긍호(義兵將閔肯鎬), 정재 이석용(靜齋李錫庸), 해산 전기홍(海山全基泓), 인봉 고제량(麟峰高濟亮), 후은 김용구(後隱金容球), 녹동 김익중(鹿洞金翼中), 죽파 오인수(竹坡吳仁洙), 열사 이재명(烈士李在明), 의사 안중근(義士安重根), 일완 홍범식(一阮洪範植), 오천 김석진(梧泉金奭鎭), 소송 정재건(小松鄭在健), 모은 정동식(慕隱鄭東植), 향산 이만도(響山李晩燾), 일유재 장태수(一逌齋張泰秀), 회은 유도발(晦隱柳道發), 벽산 김도현(碧山金道鉉), 우당 이회영(友堂李會榮), 석정 황석(石庭黃王奭), 매하 김근배(梅下金根培), 의사 이봉창(義士李奉昌), 의사 윤봉길(義士尹奉吉), 의사 백정기(義士白貞基), 남파 설진영(南坡薛鎭永)

    【회덕전 상향축문(懷德殿尙饗祝文)】
    維 檀君幾年干支 幾月干支朔 十二日干支 某官(無官則云朝鮮遺民) 姓名 稽手. 拜手 謹昭告于 大朝鮮始祖檀君 猗歟神聖 首出東方 布濩德敎 以配陶唐 玆値季春秋 式薦芬馨 尙冀降臨 歆此微誠
    유(維) 단군(檀君)기년 간지(幾年干支) 기월 간지삭(幾月干支朔) 12일 간지에 모관(某官관직이 없으면 조선 유민〈朝鮮遺民〉이라 칭한다) (성명)은 계수(稽手) 배수(拜首)하고 삼가 대조선 시조(大朝鮮始祖) 단군(檀君)께 고하나이다. 훌륭하신 신성(神聖)께서는 맨 먼저 동방에 태어나셔 덕교(德敎)를 널리 베푸셔 도당(陶唐堯임금)에 비길 만합니다. 이에 봄, 가을철(季春秋)을 맞아 경건하게 향화(香火)를 올리오니 바라건대 강림(降臨)하셔서 작은 정성이나마 흠향(歆響)하시옵소서.

    維 檀君幾年干支 幾月干支朔 十二日干支 某官(無官則云朝鮮遺民) 姓名 稽手. 拜手 謹昭告于 大韓太祖高皇帝 應天順人 化家爲國 基業恢弘 曆數五百 玆値季春秋 式薦芬馨 尙冀降臨 歆次微誠
    유(維) 단군(檀君)기년 간지(幾年干支) 기월 간지삭(幾月干支朔) 12일 간지에 모관(某官, 관직이 없으면 조선 유민〈朝鮮遺民〉이라 칭한다) (성명)은 계수 배수하고 삼가 대한 태조고황제(大韓太祖高皇帝)에게 고하나이다. 천의(天意)에 응하고 인심(人心)에 순응하여 집안을 바꾸어 나라로 삼아(化家爲國) 기업(基業)이 크고 넓어 역년(歷年)이 5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이에 봄, 가을철(季春秋)을 맞아 경건히 향화를 올리오니 바라옵건대 강림하셔서 작은 정성이나마 흠향(歆饗)하시옵소서.

    維 檀君幾年干支 幾月干支朔 十二日干支 某官(無官則云朝鮮遺民) 姓名 稽手. 拜手 謹昭告于 大韓世宗大王 英文睿武 垂拱平章 創文造字 訓民有方 玆値季春秋 式薦芬馨 尙冀降臨 歆此微誠
    유(維) 단군(檀君)기년 간지(幾年干支) 기월 간지삭(幾月干支朔) 12일 간지에 모관(某官, 관직이 없으면 조선 유민〈朝鮮遺民〉이라 칭한다) (성명)은 계수 배수하고 삼가 대한 세종대왕(大韓世宗大王)께 고하나이다. 영문(英文) 예무(睿武)하셔 수공평장(垂拱平章, 띠만 드리우고 손을 맞잡고 섰기만 해도 나라는 저절로 잘 다스려지다)하시고 문자를 창조하셔 백성을 가르침에 도리가 있으셨습니다. 이에 봄, 가을철(季春秋)을 맞아 경건히 향화를 올리오니 바라옵건대 강림하셔서 작은 정성이나마 흠향(歆饗)하시옵소서.

    維 檀君幾年干支 幾月干支朔 十二日干支 某官(無官則云朝鮮遺民) 姓名 稽手. 拜手 謹昭告于 大韓高宗太皇帝 聖明肇極 受命維新 晩値百六 有君無臣 玆値季春秋 式薦芬馨 尙冀降臨 歆此微誠
    유(維) 단군(檀君)기년 간지(幾年干支) 기월 간지삭(幾月干支朔) 12일 간지에 모관(某官관직이 없으면 조선 유민〈朝鮮遺民〉이라 칭한다) 성명은 계수 배수하고 삼가 대한 고종태황제(大韓高宗太皇帝)께 고하나이다. 성명(聖明)께서는 황극(皇極)을 열으셔 천명(天命)을 받으심이 새로웠으나 만년에는 백육(百六厄會)를 만나 임금은 있어도 신하가 없으셨습니다. 이에 봄, 가을철(季春秋)을 맞아 경건히 향화를 올리오니 바라옵건대 강림하셔서 작은 정성이나마 흠향(歆饗)하시옵소서.

    【영모사 상향 축문(永慕祠常享祝文)】
    維 檀君紀元 幾年 歲次 某年 幾月干支朔 十二日干支 後學 姓名 敢昭告于
    유(維) 단군(檀君)기년 간지(幾年干支) 기월 간지삭(幾月干支朔) 12일 간지에 후학(後學) (성명)은 삼가 고하나이다.

    文平公 都隱 全先生 學傳淵源 忠貫日星 修而厥躬 揚于王庭
    문평공(文平公) 도은(都隱) 전문식(全文軾) 선생은 학문은 연원이 있고, 충성은 일성처럼 빛났으며, 몸을 닦아 이름이 조정에 드날렸습니다.
    良景公 養性軒 鄭先生 慈仁寬恕 令聞邵德 天意有在 佐命開國
    양경공(良景公) 양성헌(養性軒) 정희계(鄭熙啓))선생은 성품이 온화 인자하여 그 덕이 고을을 덮었으며, 천명에 따라 개국을 도왔습니다.
    忠景公 南先生 危難之際 公實定策 赫赫勳業 鐵券竹帛
    충경공(忠景公) 남재(南在)선생은 나라의 위기에 올바른 계책으로 혁혁한 공훈을 세워 그 이름 역사에 새겨졌습니다.
    襄烈公 愼先生 朝以疏諫 暮以退辭 位在列卿 若固有之
    양열공(襄烈公) 신이충(愼以衷)선생은 아침에 간언 올리고 저녁에 물러남에 지위는 공경에 있었으나 그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文孝公 河先生 斥佛定禮 功存斯文 賢相事業 際會聖君
    문효공(文孝公) 하연(河演)선생은 불교를 배척하고 예악을 정하여 도학을 드날렸는데 성군을 만나 재상의 사업을 이뤘습니다.
    鳳岡 崔先生 立朝謇諤 居家孝友 邃學篤行 寔有所受
    봉강(鳳岡) 최진형(進亨)선생은 조정에서는 강직하고 집에서는 효우 하였는데 깊은 학문과 돈독한 행실을 진실로 전수하였습니다.
    槐隱 李先生 觀察三道 政淸人和 兼判兩曹 淡若田家
    괴은(槐隱) 이귀산(李貴山)선생은 삼도의 관찰사를 지냈으나 청렴 인화하였으며, 양조의 판서를 지냈으나 농사꾼처럼 소탈하였습니다.
    寤寐堂 金先生 投緩歸隱 寤寐舊君 蜀魂一絶 令人聲呑
    오매당(寤寐堂) 김만서(金晩緖)선생은 벼슬자리 내던지고 돌아와 옛임금(단종)만 사모하였는데 두견시 한 구절은 사람들의 간장을 울렸습니다.
    松堂 全先生 丙丁之變 公在薇垣 敢言而貶 竟殉於君
    송당(松堂) 전자온(全自溫)선생은 병자호란때 사간원에 있으면서 곧은 말을 하여 좌천되었으나 마침내는 나라위해 순절했습니다.
    竹軒 全先生 兄及弟矣 俱殉莊陵 綱常義大 竹帛光增
    죽헌(竹軒) 전자양(全自讓)선생은 형제가 아울러 단종을 위해 순절하니 강상의 대의를 세워 역사에 빛났습니다.
    忠貞公 朴先生 密勿周旋 實與六臣 六臣死君 隨以成仁
    충정공(忠貞公) 박심문(朴審問)선생은 실제로 육신과 도모함이 없었음에도 육신이 단군을 위해 죽자 뒤따라 자결하여 어진 이름 남기었습니다.
    退軒 姜先生 光廟之世 矢心自靖 惟其秉執 千秋高景
    퇴헌(退軒) 강리성(姜利誠)선생은 광묘(세조)때에 올곧게 마음을 비우고 절개를 굳게 지켜 천추에 높이 추앙을 받았습니다.
    乳山 金先生 幼年抱贄 佔畢之門 屢違徵辟 一念斯文
    유산(乳山) 김기(金機)선생은 어릴 적부터 점필재(김종직) 문하에서 배웠는데 여러 차례 벼슬길에 불러도 한결같이 학문에만 전념하였습니다.
    竹齋 全先生 淸白是尙 望重朝端 猗猗竹林 晩暮考槃
    죽재(竹齋) 전혜(全惠)선생은 청백함이 드높아 조정에서도 인망이 높았는데 만년에는 죽림에서 은둔하며 보냈습니다.
    幽溪 李先生 經明行修 分憂循良 戊午一疏 鳳鳴朝陽
    유계(幽溪) 이달손(李達孫)선생은 경학에 밝고 행의도 높아 발탁되어 고을 수령을 맡았는데 무오년의 상소는 봉황이 아침 햇빛에 우는 듯하였습니다.
    月溪 宋先生 邃學碩德 拔類超群 闡理明氣 裨補斯文
    월계(月溪) 송림(宋琳)선생은 깊은 학문, 높은 덕이 무리에 뛰어났고, 이기를 밝히어 도학에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松齋 李先生 資以孝友 濟以循良 先於己卯 見幾歸鄕
    송재(松齋) 이숙남(李叔男)선생은 효우의 덕이 높아 발탁되어 고을 수령이 되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날 걸 미리 알고 물러나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文翼公 鄭先生 北門禍作 位在具瞻 牽裾泣諫 力救士林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선생은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정승으로 있으면서 임금에게 읍간하여 힘써 사림을 구해냈습니다.
    文莊公 朴先生 黼黻賁猷 羽翼斯文 夙夜匪躬 惟國與君
    문장공(文莊公) 박계현(朴啓賢)선생은 큰 계책으로 나라를 돕고, 도학에 이바지하였으며, 자나 깨나 자신을 잊고 나라와 임금만을 걱정했습니다.
    歸樂堂 李先生 斬賊樹功 名垂竹帛 申金諸賢 允矣同德
    귀락당(歸樂堂) 이광필(李光弼)선생은 적을 베고 공을 세워 이름을 역사에 남겼는데 신립, 김의현 등과 견주어도 공적이 비등했습니다.
    文忠公 白沙 李先生 擎天捧日 轉危爲安 中興勳業 帶河礪山
    문충공(文忠公)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선생은 천일을 받들어 나라의 위기를 구했으며, 중흥의 공훈은 대려처럼 길이 남을 것입니다.
    聖山 吳先生 侍從于朝 啓居不遑 仗義赴難 立殣晋陽
    성산(聖山) 오빈(吳玭)선생은 임금에게 시종하며 사생활은 돌보지 않았는데 나라의 위기에 의로써 전장에 나갔다가 진양성에서 순절했습니다.
    南隱 吳先生 擧義臨陣 堂兄已先 忠孝難倂 勸歸養親
    남은(南隱) 오왕행(吳王行)선생은 창의하여 전진에 나갔으나 충효는 양전키 어렵다는 종형의 권에 따라 귀향하여 어버이를 모셨습니다.
    楚隱 孫先生 亂中奮身 移奉睟容 率僮勤王 終殉于忠
    초은(楚隱) 손승경(孫承璟)선생은 임진란에 몸을 떨쳐 어진을 옮기다가 가복과 더불어 적과 싸워 마침내 순절했습니다.
    西山亭 辛先生 摳衣師門 早已聞道 仗義討敵 國以死報
    서산정(西山亭) 신중윤(辛重胤)선생은 사문에 종사하여 일찍이 도를 알았고, 의리를 드높여 적과 싸우다가 죽음으로써 국은에 보답했습니다.
    晦堂 太先生 召募義旅 力戰身沒 子若孫姪 一門七節
    회당(晦堂) 태한정(太漢鼎)선생은 의병을 모집하여 분투하다 아들, 손자, 조카 등 한 집안에서 일곱이 의롭게 전사하였습니다.
    晩軒 尹先生 從黃武愍 奮身鏖賊 兄及弟矣 宣武有勣
    만헌(晩軒) 윤응남(尹應南)선생은 무민공 황진(黃進)을 따라 적과 분투하였는데 형제가 아울러 선무의 공이 있었습니다.
    駬山 全先生 建虜脅和 大駕蒙塵 雪涕糾衆 勤王殉身
    이산(駬山) 전대승(全大昇)선생은 정묘호란 때에 임금이 몽진하니 눈물을 흘리고 의병을 모집하여 싸우다가 순국하였습니다.
    醉睡堂 金先生 老臥江湖 念切宗祊 二子軆父 叫閽勤王
    취수당(醉睡堂) 김성진(金聲振)선생은 강호에서 은둔하였으나 종사의 보존에 간절하니 두 아들 그 뜻 받들어 조정에 호소하고 의병을 이끌고 싸웠습니다.
    嘉齋 全先生 桓桓將軍 輕裘緩帶 於乎可忘 孝廟之志
    가재(嘉齋) 전동흘(全東屹)선생은 씩씩한 장군으로 가벼운 갓옷에 우유하였으나 아! 효종임금의 크신 뜻을 잊지 못해 하였습니다.
    慕齋 鄭先生 孝於養親 忠於勤王 鄕邦矜式 久而彌彰
    모재(慕齋) 정동협(鄭東俠)선생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스러워 고을에서 모범이 되었는데 오래 될수록 더욱 드러났습니다.
    愚齋 全先生 勤王未赴 南漢下城 忍痛含寃 自靖一生
    우재(愚齋) 전응철(全應哲)선생은 의병을 일으켰으나 싸워보지도 못하고 남한산성 함락되니 원통함을 참으면서 일생을 조용히 마쳤습니다.
    笠澤 金先生 勤王有民 銜璧何亟 言念國恥 坐不向北
    입택(笠澤) 김감(金鑑)선생은 의병과 백성들이 있는데 항복을 왜 그리 빨리 했는지 국치를 생각하여 앉아도 북쪽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庸齋 全先生 君父被圍 傾囷起兵 就使之罷 不失義名
    용재(庸齋) 전응종(全應鍾)선생은 임금이 포위되자 가산을 털어 기병하였는데 조정이 항복하여 중도에 그만두긴 하였으나 그 의로움은 잃지 않았습니다.
    松耘 元先生 禦敵殉國 與同二子 臣節已立 國耻不竢
    송운(松耘) 원성모(元成模)선생은 두 아들과 함께 적을 막다가 순국하였는데 신하의 도리를 세우고 미리 죽어 국치의 꼴은 보지 않았습니다.
    謹齋 李先生 己巳聯疏 有光竹帛 更化賜還 逍遙自適
    근재(謹齋) 이만정(李萬禎)선생은 기사년의 연명소로 역사에 빛을 발했고, 귀양이 풀려서도 유유자적하였습니다.
    魯隱 金先生 洛閩之學 魯山之隱 愷悌樂易 訓誨不吝
    노은(魯隱) 김경원(金慶元)선생은 정주(程朱)의 학문으로 노산에 은거하였는데 재미있고 쉽게 가르쳐 가르침이 옹색하지 않았습니다.
    債軒 李先生 親癠國哀 忠孝根天 講明義理 尤翁淵源
    채헌(債軒) 이여정(李如珵)선생은 어버이의 병환과 국상을 당함에 천성의 충효를 보였고, 의리를 밝힘이 우암의 연원이었습니다.
    松史 崔先生 孝源百行 惟公實篤 餘力爲學 經傳盈腹
    송사(松史) 최만성(崔萬成)선생은 백행의 근본인 효도에 남달리 독실하였고, 여가로 학문을 하여 경전이 온몸에 가득하였습니다.
    晩休堂 梁先生 孝感造物 學深淵源 敎誨不倦 闡明儒門
    만휴당(晩休堂) 양하룡(梁夏龍)선생은 효행이 하늘을 감동시켰고, 학문은 연원이 있었으며 가르침을 부지런히 하여 유학을 빛냈습니다.
    厚山 李先生 謇愕之操 爲世矜式 抗義陳章 聳動一國
    후산(厚山) 이도복(李道復)선생은 바른말 하는 지조가 세상에 본보기였으며, 대의를 들어 문장을 펼침에 일국에 우뚝 진동하였습니다.

    謹以 牲弊醴齊粢盛庶品式陳明薦尙 饗
    삼가 희생과 익은 술과 곡식을 여러 그릇에 담아 공경하여 올리오니 두루 흠향하시옵소서.

    【영광사 상향 축문(永光祠常享祝文)】
    維 檀君紀元 幾年 歲次 干支 幾月干支朔 十二日干支 後學 某 敢昭告于
    유(維) 단군(檀君)기년 간지(幾年干支) 기월 간지삭(幾月干支朔) 12일 간지에 후학(後學) (성명)은 삼가 고하나이다.

    文忠公 淵齋 宋先生 起自山林 泣血格君 義重宗社 終焉成仁
    문충공(文忠公)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선생은 산림에서 몸을 일으켜 눈물로써 임금을 간했고, 의리는 종사에 두터워 마침내 인을 이뤘습니다.
    勉菴 崔先生 諍震九重 望竦八域 白首擧義 一死報國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선생은 상소는 궁중을 흔들고, 명망은 팔방에 높았는데 백수로 거의하여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였습니다.
    忠正公 山齋 趙先生 身退國亡 國亡身亡 堂堂大義 有辭萬邦
    충정공(忠正公) 산재(山齋) 조병세(趙秉世)선생은 몸이 물러나니 나라가 망했고, 나라가 망하자 몸까지 망하였는데 당당한 대의는 만방에 알려졌습니다.
    忠正公 桂庭 閔先生 身出戚畹 志存殉國 十刺正氣 可透金石
    충정공(忠正公) 계정(桂庭) 민영환(閔泳煥)선생은 외척의 신분으로 나라 위해 목숨을 바쳤으니 굳건한 정기는 금석도 꿰뚫을 것입니다.
    忠貞公 洪先生 生丁不辰 家國俱亡 卄載自靖 獻于先王
    충정공(忠貞公) 홍만식(洪萬植)선생은 불운한 때에 태어나 집안과 나라가 함께 멸망함에 20년을 수신하며 선왕에게 충성을 바쳤습니다.
    溥齋 李先生 五洲夢夢 我義獨昭 孑立思復 遺恨弸霄
    부재(溥齋) 이상설(李相卨)선생은 5대주가 침침한데 의기 홀로 밝아 외롭게 일어서 광복을 꾀하다가 유한은 하늘에 닿았습니다.
    一醒 李先生 溥齋之行 公實副之 埋骨海外 精忠長輝
    일성(一醒) 이준(李雋)선생은 이상설선생과 더불어 일을 꾀하다가 뼈를 해외에 묻었으니 그 정충은 길이 빛날 것입니다.
    義兵將 鹿川 高先生 有祖風烈 飛檄南中 終殉于國 鐵石其衷
    의병장(義兵將)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선생은 조상의 기풍 있어 남쪽에 격문 띄우고 마침내 나라 위해 죽으니 그 심정 철석같았습니다.
    義兵將 省齋 奇先生 堂堂義旅 所向敵無 一夕星落 呑日夢虛
    의병장(義兵將)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선생은 당당한 의병군진으로 가는 곳마다 무적이었는데 하룻밤에 별처럼 떨어지니 해를 삼킨 꿈이 허망하였습니다.
    義兵將 竹峯 金先生 烈烈竹峯 白面書生 援枹殲敵 敵膽震驚
    의병장(義兵將) 죽봉(竹峯) 김준(金準)선생은 백면서생으로 열렬한 기개 있어 북 울리며 적을 섬멸하니 적의 간담 서늘하였습니다.
    義兵將 閔先生 矯詔不奉 麾旗討敵 屢戰屢捷 終殉于國
    의병장(義兵將) 민긍호(閔肯鎬)선생은 거짓조서 받들지 않고 기치 내걸고 적을 토벌했으며 싸움마다 이겼으나 마침내 순국하였습니다.
    義兵將 靜齋 李先生 倡義討賊 報國以死 一端正氣 矯矯國士
    의병장(義兵將) 정재(靜齋) 이석용(李錫庸)선생은 의병 일으켜 적을 토벌하고, 죽음으로써 보국했으니 한 가닥 정기가 꿋꿋한 국사였습니다.
    義兵將 海山 全先生 宗國垂亡 書生擧義 義以殉身 千秋正氣
    의병장(義兵將) 해산(海山) 전기홍(全基泓)선생은 나라가 망해가자 서생으로 거의하여 의로써 몸을 바쳤으니 정기는 천추에 빛날 것입니다.
    義士 麟峯 高先生 運籌設奇 長驅義旅 殉同鹿川 歸拜先祖
    의사(義士) 인봉(麟峯) 고제량(高濟亮)선생은 작전과 기개로 의병을 지휘했는데 녹천(고광순) 선생과 함께 순국하여 선조의 기개를 따랐습니다.
    義士 後隱 金先生 宗社云亡 省翁擧義 戰以身殉 不朽正氣
    의사(義士) 후은(後隱) 김용구(金容球)선생은 종사가 망하자 성옹(省翁)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싸움에서 목숨을 바쳤으니 정기는 길이 전해질 것입니다.
    義士 鹿洞 金先生 慷慨赴義 倒廩傾囷 丈夫志遂 裹革而還
    의사(義士) 록동(鹿洞) 김익중(金翼中)선생은 가산을 다바쳐 강개히 부의하여 장부의 뜻을 이루고 말가죽에 몸을 싸 돌아왔습니다.
    義士 竹坡 吳先生 弱齡奮身 赴義討敵 報國以死 一片心赤
    의사(義士) 죽파(竹坡) 오인수(吳仁洙)선생은 어린 나이에 몸을 떨쳐 의병에 가담하여 적을 치다가 죽음으로 보국하였으니 일편심 붉게 물들었습니다.
    烈士 李先生 旣僨其馭 剚刃賊腹 賊徒蟻附 身先賊戮
    열사(烈士) 이재명(李在明)선생은 말이 거꾸러지자 적의 배를 칼로 찌르고 적들이 개미처럼 달려들자 스스로 먼저 적을 죽였습니다.
    烈士 安先生 跟賊多歲 談笑一射 賊倒應響 名震萬國
    열사(烈士) 안중근(安重根)선생은 여러 해 적의 뒤를 밟아 담소 순간 총격하여 총성에 적이 거꾸러지니 이름이 만국에 떨쳤습니다.
    一阮 洪先生 夙夜一念 耿耿于國 國亡義激 俛首尺帛
    일완(一阮) 홍범식(洪範植)선생은 자나깨나 한가지 나라걱정에 간절하였다가 나라가 망하자 의분에 겨워 베자락에 목을 매어 자진하였습니다.
    梧泉 金先生 文正肖孫 洪陵藎臣 國亡身殉 式報國恩
    오천(梧泉) 김석진(金奭鎭)선생은 문정공의 초손으로 홍릉의 충신이었는데 나라가 망하자 목숨을 바쳐 국은에 보답하였습니다.
    小松 鄭先生 國破君亡 生亦何面 烈烈惟公 頸血是濺
    소송(小松) 정재건(鄭在健)선생은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망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 것인가, 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피를 뿌렸습니다.
    慕隱 鄭先生 天地崩塌 紫微晦光 孤臣一死 北樓之樑
    모은(慕隱) 정동식(鄭東植)선생은 천지가 무너져 북극성 빛을 잃으니 외로운 신하의 한목숨 북루의 들보에 매었습니다.
    響山 李先生 先正之家 大夫之身 殉國一念 絶食兼旬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선생은 선정의 집안이요, 대부의 몸인지라 순국할 일념으로 며칠을 곡기를 끊으셨습니다.
    一逌齋 張先生 松隱肖孫 憂君憂國 終焉就義 碩果不食
    일유재(一逌齋) 장태수(張泰洙)선생은 송은공의 초손으로 임금과 나라를 걱정하여 마침내 의를 따랐으니 큰 인물은 다르다 할 것입니다.
    晦隱 柳先生 父殉于國 子殉于君 一家樹立 千秋感人
    회은(晦隱) 류도발(柳道發)선생은 아버지는 나라 위해 죽고 아들은 임금 위해 죽었으니 한 집안이 세운 절의 천추 간에 사람을 감동케 할 것입니다.
    碧山 金先生 宗國云亡 且待終孝 東海碧波 平地以蹈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선생은 나라는 망했으나 죽지 못하고 어버이를 봉양타가 어버이 세상 뜨자 동해에 몸을 던졌습니다.
    友堂 李先生 白髮孤行 耿耿誰似 岐崎嶇載 不知有己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선생은 백발의 고고한 행실 뛰어나게 빛났으니 기구한 역정에도 자신은 돌보지 않았습니다.
    石庭 黃先生 素篤忠義 慮君無身 一刀判命 再刺成仁
    석정(石庭) 황왕석(黃王奭)선생은 본래 충의심이 강하여 임금밖에 몰랐는데 한칼로 절명하지 못하자 재차 찔러 인을 이루었습니다.
    梅下 金先生 成仁取義 勉行素履 立懦遺風 百世仰之
    매하(梅下) 김근배(金根培)선생은 의를 취해 인을 이루었고 소박한 생활에 힘썼으며, 나약한 유풍을 떨치고 백세에 추앙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烈士 李先生 滄海一椎 秦帝蒼黃 實爲韓仇 身許子房
    열사(烈士) 이재명(李在明)선생은 창해일퇴에 진시황이 놀랐듯이 나라의 원수 갚으려 장자방이 되었습니다.
    烈士 尹先生 虹口一彈 四海拭目 偉矣尹公 光我嶽瀆
    열사(烈士) 윤봉길(尹奉吉)선생은 홍구공원의 폭탄세례에 세계가 놀랐으며 윤공의 위대한 일은 우리의 산천까지를 빛냈습니다.
    烈士 白先生 志士一諾 鬼神其臨 事雖不成 義不負心
    열사(烈士) 백정기(白貞基)선생은 지사의 한번 약속 귀신을 두고 다짐하나니 일은 비록 이루지 못했으나 충의는 본마음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南坡 薛先生 玉川名閥 弘儒肖孫 殉於革姓 取義實大
    남파(南坡) 설진영(薛鎭永)선생은 옥천의 명문이요, 홍유후의 초손인데 창씨개명에 목숨 버렸으니 의를 취함이 실로 컸습니다.

    玆値季春秋謹以牲醴恭伸微誠尙 饗
    이에 봄, 가을의 철을 맞아 삼가 작은 정성이나마 희생과 익은 술을 올리오니 두루 흠향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