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령면 임진로 2361-82에 있는 사당. 마령면 강정리 월운마을 앞 신정천 건너 마령체련공원 뒤 수선루 오르는 길 오른쪽에 위치한다. 순조 28년(1828)에 퇴휴재 송보산(宋寶山)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되었으나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다. 1949년에 다시 설단하여 봉향하였으며, 1967년에 이르러 중건되었고, 1969년에 진안유림의 발의로 백촌 김문기(金文基)와 월계 송림(宋琳)이 추향되었다. 구산사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 맞배지붕으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음력 3월 15일에 제향(祭享)한다. 구산사 아래쪽에는 구산서원이 전면 4칸 측면 2칸의 함석팔작지붕으로 서 있다.

    【배향위(配享位)】
    송보산(宋寶山, 1432[세종 14]~1504[연산군 10]) : 자는 대인(大仁), 호는 퇴휴재(退休齋). 본관은 연안으로 숙의공(肅毅公) 경(卿)의 후손이며, 대사성 광언(光彦)의 손자이고, 화녕부 소윤(和寧府少尹) 흥도(興道)의 아들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에게 사사하였고,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과 교유하였다. 1448년(세종 30)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그 이듬해 성균관전적이 되었으며, 병조·예조좌랑 정언 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490년(성종 21) 가선대부 동지중추원사 그리고 도승지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통정대부에 올랐고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1490년(성종 21) 가선대부 동지중주원사, 그리고 도승지와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그 전에(?) 단종을 폐위시키고 수양대군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간신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였다. 장수의 월강서원과 진안 마령의 구산서원에 배향되어 있으며, 박성양(朴性陽)이 찬한 신도비명이 있다.
    김문기(金文起, 1399 ~ 145) : 본관 김녕(金寧). 자 여공(汝恭). 호 백촌(白村). 초명 효기(孝起). 시호 충의(忠毅).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다. 1430년 예문관검열(檢閱)·정언(正言)·함길도관찰사를 역임하고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복위(端宗復位)의 모의에 가담하였다. 모의가 발각되자 고문에 굴복하지 않다가 이개(李塏)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영조 때 9대손 정구(鼎九)의 송원(訟寃)으로 복관되었으며,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배향되었다. 1981년 서울시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고, 그의 가묘를 서울시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설치했다. 1977년에 김문기가 사육신에 해당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자 서울시, 문교부, 문화공보부, 국사편찬위원회 등이 심도 있는 연구와 논의를 하였다. 그 결과 서울시에서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합의사항을 참조하여, ‘유응부의 사육신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김문기 선생을 사육신과 같은 충신으로 현창’하는 것으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송림(宋琳, 1505[연산군 11]~1509[선조 33]) : 호는 월계(月溪), 본관은 연안으로 퇴휴재(退休齋) 보산(寶山)의 후손이며, 적순부위(迪順副尉) 유경(裕景)의 손자이다. 부는 맹현(孟賢)이며, 정여립(鄭汝立)의 외숙부이며, 이인현(仁賢)의 처남이다. 김건재(金健齋) 천일(千鎰), 기금강(奇錦江) 효간(孝諫) 등과 친분이 있었으며,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문인이었다. 어려서부터 성도가 장중하고 지혜가 밝았으며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다. 약관에 일재 이항의 문하에서 중용과 성리학의 제서들을 공부하였는데, 질문에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부모 생전의 봉양은 물론 3년상을 마친 뒤에도 매일 비바람을 무릅쓰고 큰 냇물을 건너 성묘의 정성을 지극히 하였다. 이에 동네 사람들이 그 정성에 감복하여 다리를 놓아주고 ‘송효자교’라 불렀다고 한다. 건재 김천일(健齋金千鎰), 금강 기효간(錦江奇孝諫), 쌍첨 이인현(雙尖李仁賢) 등과 우의가 매우 돈독하였으며, 그들과 태극음양동정지설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의 사표로 숭배되어 월계 선생(月溪先生)이라 불리웠다.

    【상향축문(尙饗祝文)】
    退休齋 宋先生 伏以 出處正大 洛建眞學 斯文儒賢 永瞻星嶽
    퇴휴재 송(보산)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출처가 공명정대하여 정주학을 배우는 우리 유현들이 길이 성악(星嶽)처럼 우러렀습니다.

    忠毅公 白村 金先生 伏以 力竭其孝 命盡其忠 與六爲一 報祀無窮
    충의공 백촌 김(문기)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효에 힘을 다하였고 충에 명을 바쳐 사육신과 더불어 무궁하게 향례를 받을 것입니다.

    月溪 宋先生 伏以 行篤孝悌 學明性理 爲世師表 高山仰止
    월계 송(림)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행실은 효제에 돈독하고 학문은 성리에 밝아 세상의 사표(師表)가 되어 높은 산처럼 우러러 봅니다.
  • 진안군 마령면 계남길 30-7(계서리 344-1) 계남마을 뒤(남)쪽에 있는 수당 정종엽(鄭鍾燁)을 배향하고 있는 사당. 담장 안에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서있다.
    제향일은 음력 3월 25일이다. 오른쪽에는 도장각(道藏閣)이 있다.

    【배향위(配享位)】
    정종엽(鄭鍾燁) :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수당(修堂), 자는 택신(宅新)이다. 진희(鎭喜)라는 이명(異名)도 있다. 1885년 3월 13일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 봉촌에서 아버지 성모(聖謨)와 어머니 천안 전씨(天安全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매우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함이 지극하였다. 공부에는 발군(拔群)의 진척으로 약관(弱冠)에 학문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간재 전우(艮齋田愚)에게 사사(師事)하여 성리(性理)의 근원을 들었고, 항일의사 곽종석(郭鍾錫)과 의병장 기우만(奇宇萬) 등 제현(諸賢)과 교유하여 더욱 지식을 넓혔다고 한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 걱정이 지극하였다. 나라가 어지러워짐을 들으면 탄식하고 통곡하기를 초야(草野)의 선비라 하여 덜하지 않았는데, 사직(社稷)이 무너지자 신하의 절의를 지켜 은둔의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 이병연(李炳淵, 고을의 선비)·전인권(全麟權, 고을의 선비) 등과 더불어 정재(靜齋) 이석용(李錫庸, 임실 출신의 의병장)과 해산(海山) 전기홍(全基弘, 임실 출신의 의병장)등이 의병을 일으키는 데 힘써 도왔다고 한다. 더불어 이석용의 종군기인 창의일기가 혹 일본 경찰에게 탈취될까봐 자청해서 자기 집에 깊이 보관하여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다. 28세 때에는 이석용과 항일우국결사조직인 임자밀맹단(壬子密盟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석용이 일경에 붙잡히자 그는 일경을 피하여 수시로 개명하고 정처 없이 피해 다니면서 초근목피로 연명하였다. 이처럼 굳게 은사의 도리를 지키니 가는 곳마다 명망을 듣고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이 문안에 가득했다고 한다. 말년에는 마령면 계남리 선산 재각인 도장각(道藏閣)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2003년 8월 15일. 우국충정과 항일운동 업적이 인정되어 보훈처에서 건국포장을 수상하였다. 현재 내산사(萊山祠)에 향사(享祀)되어 있다.

    【상향축문(尙饗祝文)】
    修堂 鄭先生伏以 宏見精識 卓孝孤節 士林不忘 式薦芬苾
    수당 정(종엽)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견식이 넓고 정밀하며, 효성과 절개가 높고 고고하여 사림들이 잊지 못하고 정성스레 향사 올립니다.
  • 주천면 정주천로 521-56(운봉리 883-1) 운봉리 상양명마을 위 저수지 제방 아래에 있는 사당. 단군전은 본디 단군과 기자를 모신 자그마한 사당으로 단운사(檀雲祠)라 했다. 본디의 건물은 함석지붕에 정면 1칸 측면 1칸의 산신각 형태였다. 사당 안 정면 벽에는 탱화가 걸려 있었는데, 전면의 3인상 중 중앙의 인물은 미상이고 왼편이 단군, 오른편이 기자이며 그 밑의 단위에는 왼쪽에 ‘단군천왕신위’ 오른쪽에 ‘기자성군신위’를 담은 함(函)이 있었다. 또한 왼쪽 벽에는 ‘단운사 제원명부(발기인 최일태 등 122명) 檀紀 四二九八年 三月 以降’ 현판이 있고, 천장에는 ‘龍 檀紀 四二九八年 乙巳 二月 二十八日 申時 立柱 上樑 龜’라는 상량문이 있었다. 단운사는 본디 채법선(蔡法善)과 최일태(崔一泰)의 발의로 122명의 제원(祭員)을 모으고 기금을 거두어 1956년 10월, 현재의 위치에 100평의 터를 닦아서 세웠다고 한다. 위의 제원 명부와 상량문을 통하여 1965년에 중수된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채법선은 절골 골짜기 안에 있는 천황암의 보살로 광복 직후부터 단군제를 성심으로 지내 왔던 바, 그에 감동한 동네 사람들이 대거 참여하여 단운사를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뒤에 2010년도 진안군에서 군비를 들여 전면 3칸, 측면 1칸의 새로운 사우를 짓고 단군전이라 하여 단장하였다. 매년 음 3월 15일에 향사드린다.

    【향사축문(享祀祝文)】
    檀君天皇 箕子聖君 陛下之壇前 伏以告曰 太史正筆 十有三言
    萬世皇統 此其本源 統天天皇 承統純治 同文輿輪 天爲天下師
    至誼至靈 義禪不改 松栢蒼蒼 斗化翔及 飛物屈首 殺一無辜 欺一不敏 自是不行 萬邦歸厚 庶賜降鑑
    단군천황 기자성군 섬돌 아래의 단에 나아가 삼가 고합니다. 태사정필에 열세 마디가 있는데 만세토록 황통은 바로 그 본원으로 하늘을 통괄한 천황이 제왕의 대를 이어 순치하여 문자와 수레바퀴를 다 같게 하니* 천하가 천하의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지극한 정의와 지극한 신령스러움으로 의로운 제사 고치지 않아 송백 창창하고 두화는 비상하며 날짐승은 머리를 숙이니 한명의 무고한 사람라도 죽이고, 한명의 어리숙한 사람이라도 속이는 일이 이때부터 행해지지 않으니 만방이 귀의하였습니다. 부디 강림하시어 흠향하옵소서.
    *중용(中庸)에 거동궤서동문(車同軌書同文)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천하가 통일되어 문물제도가 일치된 것을 말한다.
  • 동향면 내금2길 69(능금리 산142-1)에 소재한 반남 박씨 사당. 본디 순조 12년(1812) 무주 오도산 아래에 창건되어 도산사(道山祠)라 하여 박힐(朴詰)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박린(朴麟)과 박희권(朴希權)을 배향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인하여 훼철되자 지금의 위치로 몰래 옮겨 봉안하였고, 1959년 7월 사우를 지어 숭모사라 개칭하고 박지영(朴之英)을 추가하여 배향하였다.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매년 음력 3월 15일 반남 박씨 문중이 향사(享祀)하고 있다. 맞은편에는 역시 반남 박씨의 글방이던 지선당(止善堂)이 소재하고 있다.

    【배향위(配享位)】
    박힐(朴詰, 1336~) : 목은 이색의 문인이며, 고려가 멸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를 지키며 은거한 고려 말의 수절신(守節臣)이다.
    박린(朴麟) : 힐(詰)의 증손이다. 1455년 진산군수로 재임하던 중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금산 장평에 은거하였다.
    박희권(朴希權) : 린(麟)의 아들이다. 사헌부 감찰로 있던 중 단종이 폐위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박지영(朴之英) : 희권의 6세손이다. 원래는 금산에 세거하였으나 임진란을 피해 현재의 동향면 능금리 내금마을로 들어와 후손의 교육에 힘쓴 반남박씨의 입 동향조(入銅鄕祖)이다.

    【상향축문(尙饗祝文)】
    逃召齋 朴(詰)先生 一心秉義 賜第罔僕 伯夷淸風 仲連明月
    도소재 박(힐)선생께서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사한 집도 받지 아니하니 백이숙제의 청풍같고 노중련의 명월같습니다.

    擬栗齋 朴(麟)先生 投綏南遯 陶之靖節 扶我綱常 炳炳日月
    의율재 박(린)선생께서는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은둔하시어 도연명과 같은 정절로 강상을 북돋우셨으니 일월처럼 빛납니다.

    臨淮堂 朴(希權)先生 孝冠百行 淵源正學 潛跡江湖 志切君國 三世偉忠 千秋昭白 玆置小春 敬薦禋事 尙饗
    임회당 박(희권)선생은 효를 백행의 근본으로 삼으시고 바른 학문에 연원을 두셨으나 강호에 잠적하시어 임금과 나라만 걱정하셨습니다. 3세에 결친 큰 충성심은 천추에 빛날 것입니다. 소춘을 맞아 공경스럽게 제향을 받드오니 흠향하시옵소서.

    德隱堂 朴(之英)先生 伏以 隱德不仕 家傳淸白 道崇德博 垂範永世 玆置春季 謹以牲幣 庶品式陳 明薦 尙 饗
    덕은당 박(지영)선생은 은둔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시고 집안에 청백하고 도리를 숭상하며 덕을 베풀라는 가르침으로 영세에 수범을 보이셨습니다. 이에 봄철을 맞아 삼가 제수를 받들어 제향올리니 흠향하시옵소서.
  • 옥천사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어서각은 1402년 독곡 성석린에게 내린 왕지를 보관한 건물로 1824년 건축되었다. 이후 삼회에 걸쳐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16. 12. 28 진안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어서각은 정면 3칸인데, 가운데 칸만 왕지를 보관하도록 문이 달려 있고 좌우칸은 개방되어 있는 형태이다. 어서각은 옥천사와 건물의 격을 달리하기 위해 옥천사보다 1자 정도 높게 기단부를 조성하였다. 또한 자연석을 잘 다듬은 초석 위에 그렝이질한 약간의 배흘림을 둔 원기둥을 세우고 이익공의 포를 올렸다. 단청은 비교적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어서각과 옥천사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주변과 격리되어 있고, 남쪽에는 넓은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 마령면 원강정1길 42 강정마을 북서쪽에 있는 서원 겸 사당. 강정마을 북쪽 구릉지대에 영산사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만육 최양(崔瀁), 쌍첨 이인현(李仁賢), 충경공 이정란(李廷鸞), 규암 전계종(全繼宗)을 배향한 사당으로 인조 27년(1649)에 창건되었으나 고종 6년(1867)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그 뒤 1870년 유허비가 세워졌고, 1900년에 다시 설단되었으며, 1948년 복설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사우(祠宇)는 사당, 정문,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며, 정문인 명덕문(明德門) 1동과 관리사 1동이 있다.정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 맞배지붕으로 입구 명덕문 좌측에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에 제향한다.

    【배향위(配享位)】
    최양(崔瀁, 1351[충정왕 3]~1424[세종 6])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함(伯函), 호는 만육(晩六) 또는 장륙당(藏六堂). 아버지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지(贄)이며, 어머니는 영일 정씨(迎日鄭氏)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운관(云瓘)의 딸이다. 외삼촌 정몽주(鄭夢周)에게 수학하였으며,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상서·대제학 등을 지냈다. 1384년 예문관직제학에 재임할 때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서북면 정벌에 참여하였고, 그 뒤 대사간 문하찬성사에 이르렀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백운면 반송리 팔공산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태조가 친구로 대우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과 전록(田祿)을 하사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후에 전주의 대승동으로 옮겨 말년을 보냈다. 전주 서산원(西山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익공(忠翼公)이다. 백운면 반송리에 그를 기리는 구남각이 있고, 안에 비를 세웠다. 비에는 기정진(奇正鎭)이 찬한 둔적유허비명이 새겨져 있다.
    이인현(李仁賢, 1497~1570)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안으로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교(校)의 5대손이다. 임오년(壬午年 : 중종17, 1522)에 사마 양시(司馬兩試 :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3년 뒤인 을유년(乙酉年)에는 문과(文科)에 급제하니 그때 나이 29세였다. 성균관(成均館)에 분속(分屬)되어 얼마 후에는 전적(典籍)에 승배(陞拜)되고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종부시정(宗簿寺正)을 거쳐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제배(除拜)되었다가 김제군수(金提郡守)로 나갔었고 임기가 다하자 금마군수(金馬郡守)로 이수(移授) 되었다가 담양부사(潭陽府使)에 제수(除授)되었다가 영해부사(寧海府使), 공주목사(公州牧使)에 제배되었으나 임기가 다하기 전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유월촌(幽月村)에 터를 잡고 살았다. 마을 남쪽에는 산이 있어 마이(馬耳)인데 두 봉우리가 우뚝 반공(半空)에 속아있다. 거기에서 뜻을 취하여 당호(堂號)를 쌍첨(雙尖)이라 하니 대체로 그 유연(悠然)한 뜻을 취한 것이다. 그리하여 옛 사람의 서책을 좌우에 쌓아놓고 빠짐없이 훑어보면서 저술에 주력하였다.
    이정란(李廷鸞, 1529~1600)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다. 본관은 전의, 자는 문보, 시호는 충경으로 전북 전주 출신이다.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정자, 저작박사를 거쳐 성균관전적을 지냈으나 사이가 안 좋은 정여립의 배척으로 해미 현감, 양재찰방, 개성부도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왜군이 웅치 전투에서 관군과 의병을 무찌르고 전라도에 침입하자 64세의 노구로 부민을 거느리고 전주성을 지켰고 이 공으로 태상시첨정에 올랐고 군기시정을 거쳐 수원 부사와 공주 목사가 되었으나 진휼과 농정이 허술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왜군이 전주성을 포위하여 큰 혼란이 일어나자 수성부장이 되어 전주성을 지키다가 전주부윤이 죽자 전주부윤 겸 삼도소모사로 제수되었다. 사후 전주의 한계서원에 배향되었고, 진안군 마령면 영계사에 사우가 있다.
    전계종(全繼宗, 1516[중종 11]~1592[선조 25]) : 자는 백윤(伯胤). 호는 규암(葵菴). 본관은 천안으로 문평공(文平公) 문식(文軾)의 후손이며, 자온(自溫)의 증손이다. 중종 31년에 문과하여 시강원(侍講院) 습독(習讀)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적의 위협을 받자 분연(憤然)히 크게 꾸짖고 시종 굴하지 않으니, 마침내 적의 해침을 당하였다. 인조조에 공조참의에 증직되고 사림(士林)이 서원(書院)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묘는 거사곡의 자좌원(子坐原)에 있으며, 민여로(閔汝老)가 찬하고, 신응삼(申應三)이 글씨를 쓴 묘갈명이 있다. 또 조중목(趙重穆)이 글을 짓고, 유진찬(兪鎭贊)이 전액(篆額)을 쓰고, 이선호(李璇鎬)가 글씨를 쓴 묘갈명 병서(墓碣銘幷序)가 있다.

    【상향축문(尙饗祝文)】
    忠翼公 晩六 崔先生 伏以 義炳春秋 節爭日月 天經以立 百世風烈
    충익공 만육 최(양)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의로움은 춘추에 전하고, 절의는 일월과 다투며, 백세에 풍렬은 백세에 변치 않을 것입니다.
    雙尖 李先生 伏以 白首山廬 執喪過禮 賢孝之範 不肖者礪
    쌍첨 이(인현)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백수산 여막의 삼년상은 예를 넘어선 극진한 효성으로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忠景公 李先生 伏以 行篤孝友 忠著捍衛 風聲百代 崇報無替
    충경공 이(정란)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효우에 독실하고, 충성을 다해 적을 막아 명성은 백대에 전해질 것이며, 우러름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葵菴 全先生 伏以 乾剛之氣 永貞之節 忠孝兼備 百世風烈
    규암 전(계종)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건강(乾剛)한 기개와 곧은 절의에 충효를 겸비하여 그 명성은 백세에 전해질 것입니다.
  • 마령면 원강정1길 36(강정리 235) 원강정마을 북서쪽에 있는 사당. 영계사의 동쪽에 위치한다. 철종 13년(1862) 도은 전문식(全文軾)을 제향하기 위하여 창사되었는데,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뒤 1924년에 이르러 다시 설단 제향하였고, 1972년 중건하면서 전문식(全文軾)의 아들인 양헌 전극례(全克禮)와 손자인 송당 전자온(全子溫), 죽헌 전자양(全子讓)을 추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우는 사당과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돌담으로 둘러져 있는데, 경명문(景明門)이라는 출입문이 있다. 영산사에서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지점에 도은 선생의 묘와 1924년 세운 신도비가 있다. 입구 왼쪽에는 1979년에 후손들이 세운 신도비가 있다.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에 제향한다.

    [[배향위(配享位)]]
    전문식(全文軾) : 자는 문영(文英), 호는 도은(道隱), 본관은 천안(天安). 백제 10대 공신 환성군 섭(歡城君聶)의 후예이며 두양군(兜陽君) 희(熙)의 아들이다. 공민왕조에 덕이 높은 인재 30인을 선발하였는데, 이 때 뽑혀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우왕 때 김의(金義)가 명나라 사신을 살해하고 북원(北元)으로 도망친 일이 있었는데, 공은 당시 대신(臺臣)으로 이 사실을 들어 그 무리를 목 베도록 상소하였으나 오히려 이인임(李仁任)과 지연(池淵) 등에게 몰리어 하옥되고, 정몽주(鄭夢周)등 10여인과 함께 유배(流配)되었다. 병인(丙寅, 1386)에 평안백(平安伯)이 되었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공양왕(恭讓王)을 맞아 세운 공으로 형부상서사(刑部尙書事)에 올랐다. 농암(籠巖) 김주(金澍)와 함께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본국에 역성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귀국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태조께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 하였고, 정종의 간곡한 부름에 나아가 경상백(慶尙伯)이 되어 일시 선정(善政)을 베푼 바 있으나 만년에 치사(致仕)하고 산수간을 두루 방랑(放浪)하다가 월랑(月浪, 진안의 옛 이름)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여생(餘生)을 보내려 하였으나 얼마 후에 별세하니 마령면 강정리 석벽에 장구지대(杖屨之臺, 머무른 곳의 뜻)가 있다. 세종 때 좌찬성 대제학(左贊成大提學)에 증직(贈職)되었고 ‘문평(文平)’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전극례(全克禮) : 호는 낭헌(浪軒), 본관은 천안으로 문평공(文平公) 문식(文軾)의 증손이며, 판중추(判中樞) 사미(思美)의 아들이다. 일찍이 방촌(厖村) 황희(黃熹)와 경암(敬菴) 허조(許稠)와 함께 서로 사우(師友)를 삼고 지냈다. 세종조의 정시(庭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를 지냈으며, 호조판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다. 하지만 단종 폐위를 보고 강정으로 낙향하여 은둔하게 되었으니, 이 곳은 그의 증조인 문평공 문식이 마련한 곳이다. 그의 아들 사간(司諫) 자온(自溫)과 사직(司直) 자양(自讓)은 청령포(淸泠浦)에서 함께 순절하여 뒤에 사림의 공의(公議)로 나란히 이산사(駬山祠)에 배향되어 있다. 묘는 거사곡(居士谷) 자좌원(子坐原)에 있으며, 후손 광로(光魯)가 찬하고 한풍(翰豊)이 글씨를 쓴 묘갈명이 있다. 또 박기양(朴箕陽), 판서 민철훈(閔哲勳), 참판 김재순(金在珣), 참판 이용구(李龍九), 승지 이범석(李範錫), 승지 서광필(徐光弼) 등의 이름이 적힌 도학포장이 있으며, 이선호(李璇鎬)가 찬한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있다.
    전자온(全自溫) : 호는 송당(松堂), 천안인(天安人)이다. 문평공 문식(文平公 文軾)의 현손(玄孫)이요, 호조판서(戶曹判書) 극례(克禮)의 아들이다. 타고난 자품(資稟)이 탁월하고 품성(稟性)이 강직(剛直)하여 충군애국(忠君愛國)을 스스로의 임무(任務)로 여겼다.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간(司諫)에까지 이르렀다. 세조 원년 병자(丙子)에 성삼문(成三問) 등이 상왕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런 일에 거리낌 없이 정론(正論)을 펴다가 세조의 미움을 받아 만호(萬戶)로 강등(降等)되었다. 그 이듬해 상왕 단종이 승하(昇遐)하심에 아우인 사직(司直) 자양(自讓)과 같이 영월 청령포(寧越淸泠浦)에서 순절하니, 부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도 공의 뒤를 따랐다. 이런 사적이 동학지(東鶴誌)와 호남지(湖南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전자양(全自讓) : 호는 죽헌(竹軒), 천안인(天安人)이다. 문평공 문식(文平公 文軾)의 현손(玄孫)이요, 호조판서(戶曹判書) 극례(克禮)의 아들이다. 타고난 바탕이 영오(穎悟)하고 지기(志氣)가 강개(慷慨)하였다. 세종조에 형인 사간(司諫) 자온(自溫)과 같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직(司直)에 이르렀다. 청현(淸顯)을 들어냄에 거리낌이 없어서 바른 말을 잘하여 세조의 미움을 받았다. 상왕이신 단종께서 승하(昇遐)하심에 백씨인 사간 자온과 함께 영월 청령포에서 순절하니,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도 그 뒤를 따랐다. 이런 사적이 동학지(東鶴誌)와 호남지(湖南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향사 축문(享祀祝文)]]
    文平公 都隱 全先生 伏以 偉勳碩德 昭代名臣 道學文章 嘉惠後人
    문평공 도은 전(문식)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덕이 높고 공로가 혁혁하셨고, 고려조의 명신으로 도학과 문장이 후인들에게 아름다운 은혜로 드리웠습니다.
    浪軒 全先生 伏以 學本洛閩 敬直義方 貞忠卓節 烈日秋霜
    낭헌 전(극례)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학문은 낙민[洛閩 낙양(洛陽) 출신인 정호(程顥)ㆍ정이(程頤)와 민(閩) 출신인 주희(朱熹)]에 근본하여 공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을 방정하게 하였으며, 곧은 충성과 절개가 추상과 같았습니다.
    松堂 全先生 伏以 竭忠報國 大義莫伸 兄難弟難 一體成仁
    송당 전(자온)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했으나 대의를 펴지 못하고 형제가 한 몸으로 인을 이루었습니다.
    竹軒 全先生 伏以 拒逆新王 舊主有臣 見義授命 扶植彛倫
    죽헌 전(자양)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신왕을 따르지 않고 구주(舊主)의 신하로 의를 보아 목숨을 바쳐 이륜(彛倫)을 부식하셨습니다.
  • 마령면 원강정2길 3[강정리 124-1]에 있는 사당. 임진왜란 때 거의한 전계종(全繼宗)과 신기(辛麒), 정대수(鄭大壽), 홍필(洪滭), 송대홍(宋大弘) 등 오현의 의거를 기리기 위해 1977년 창건하였다. 이들은 마을의 입향조이기도 하다. 사우(祠宇)는 본당과 동재, 숙직사, 창고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남향한 사당을 중심으로 동측에 모현재(慕賢齋), 서측에 관리사가 자리하여 전체적으로 ‘ㄷ’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모현재는 1984년에 건축되었다. 4칸 전퇴집으로 전퇴는 마루를 시설하였다. 내부는 모두 터서 방으로 활용한다. 남쪽 측면에도 쪽마루를 시설하여 편의를 도모하였다. 관리사는 본래 3칸 초가였으나 지금은 시멘트로 벽을 마감했고 지붕은 골함석을 올렸다. 주위에는 기와 얹은 토석 담장이 둘러져 있고 뒤쪽에는 조그만 텃밭이 있다.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한다.

    【배향위(配享位)】
    전계종(全繼宗, 1516[중종 11]~1592[선조 25]) : 자는 백윤(伯胤). 호는 규암(葵菴). 본관은 천안으로 문평공(文平公) 문식(文軾)의 후손이며, 자온(自溫)의 증손이다. 중종 31년에 문과하여 시강원(侍講院) 습독(習讀)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적의 위협을 받자 분연(憤然)히 크게 꾸짖고 시종 굴하지 않으니, 마침내 적의 해침을 당하였다. 인조조에 공조참의에 증직되고 사림(士林)이 서원(書院)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묘는 거사곡의 자좌원(子坐原)에 있으며, 민여로(閔汝老)가 찬하고, 신응삼(申應三)이 글씨를 쓴 묘갈명이 있다. 또 조중목(趙重穆)이 글을 짓고, 유진찬(兪鎭贊)이 전액(篆額)을 쓰고, 이선호(李璇鎬)가 글씨를 쓴 묘갈명 병서(墓碣銘幷序)가 있다.
    정대수(鄭大壽,생몰연대 불명) : 본관은 동래. 호는 이은(駬隱). 습독관(習讀官)의 직함을 받았다. 강정리에 세거하며 5성동계를 맺었는데 전계종(全繼宗)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신기(辛麒), 홍필(洪滭), 송대홍(宋大弘) 등과 더불어 군량을 모집하고 운반하며 뒷바라지를 하였다.
    홍필(洪滭, 1551~1623) : 본관은 남양. 호는 운암(雲庵). 효성이 지극하여 천거를 받아 진사로 무안현감에 제수되었다. 강정리에 세거하며 5성동계를 맺었는데 전계종(全繼宗)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신기(辛麒), 정대수(鄭大壽), 송대홍(宋大弘) 등과 더불어 군량을 모집하고 운반하며 뒷바라지를 하였다.
    신기(辛麒, ?~1622) : 본관은 영산(靈山). 호는 운계(雲溪). 효성이 지극하여 감찰(監察)의 직함이 내려졌다. 강정리에 세거하며 5성동계를 맺었는데 전계종(全繼宗)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정대수(鄭大壽), 홍필(洪滭), 송대홍(宋大弘) 등과 더불어 군량을 모집하고 운반하며 뒷바라지를 하였다.
    송대홍(宋大弘, 1558~1629) :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운포(雲圃). 효성이 지극하여 감찰(監察)의 직함이 내려졌다. 강정리에 세거하며 5성동계를 맺었는데 전계종(全繼宗)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신기(辛麒), 정대수(鄭大壽), 홍필(洪滭) 등과 더불어 군량을 모집하고 운반하며 뒷바라지를 하였다.

    【향사 축문(享祀祝文)】
    葵庵全先生 伏以 學博德崇 就義成仁 勤王敵愾 輝暎千春
    규암 전(계종)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학문이 넓고 덕이 높아 의로써 인을 이루었으며 적개심으로 근왕하여 천추에 길이 빛났습니다.
    駬隱鄭先生 伏以 在家篤孝 爲國貞忠 凜凜節操 抑抑淸風
    이은 정(대수)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집에서는 효를 돈독히 하고 나라를 위해서는 정충(貞忠)으로 늠름한 지조와 절개가 청풍처럼 주밀하였습니다.
    雲庵洪先生 伏以 至孝事親 倡義報君 五賢聯壁 齋誠薦芬
    운암 홍(필)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럽고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여 의병을 일으켜 오현사에 배향되어 정성스러운 향례를 받습니다.
    雲溪辛先生 伏以 傳檄列邑 志士影從 六三奚暇 憤氣撑空
    운계 신(기)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여러 고을에 격문을 전하니 뜻있는 선비들이 그림자처럼 따라 六三(편자주, 不明)겨를 없이 분기탱천하였습니다.
    雲圃宋先生 伏以 道學淵源 忠孝家門 崇德廣業 百世遺芬
    운포 송(대홍)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도학에 연원을 두고 충효가문에서 높은 덕에 많은 사업으로 백세토록 향기로움을 남겼습니다.

    【慕賢齋記】 傳曰, 樹垂世之功者, 享垂世之報. 又曰, 可謂師表則祀之, 惟此五賢祠, 習讀葵菴天安全公, 習讀駬隠東萊鄭公, 縣監雲菴南陽洪公, 監察雲溪靈山辛公, 雲圃處士延安宋公, 五先生妥侑之所, 寔畏壘之民, 尸祝庚桑椘之義也. 其五賢之報國忠節, 導俗禮貌, 精硏學術, 著在狀碣, 不須日下添燈, 而此齋卽守護齋蠲之堂, 賓主揖讓之處. 有東西階戺, 老少序次之筵. 有上下廳室, 於是焉行餕禮, 於斯講鹿藍之規, 於斯培養人材, 於斯一遵乎五賢之懿, 則淸芬嗜學如豢, 樂善如歇軆之於心, 行之於身, 以此人倫爲角翼, 禮義爲氊腥之世, 能薰化逺近, 改弦易轍, 則古人所謂陽光熾烈, 堅氷立消, 何患乎異教之鴟張簧鼓乎? 吾道之復明, 如不食之果, 將囬春於重隂之中, 月浪之爲磁針於鄕省, 大矣! 柳川宋友升煥翁, 以僉士林意, 屈杖数百長程, 屬以楣端之揭者, 是豈昏耗人微者所能承當者乎? 此無異書空而尋跡, 而况鄙於是祠, 敢以杜撰文句, 招穢佛之譏累矣. 居常一念, 愧如撻市, 固辭而固請, 終不得躱避, 遂抒經緯之厓略, 以賀諸斯文尊賢衛道之誠. 歲赤虎振 羽月之初三日, 晉陽河千秀謹記.
    【풀이】 전(傳)에 이르기를, “세상에 전해질 만한 공(功)을 세운 자는 후세에 전해지는 보답을 누린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사표(師表)라고 이를 만 하면 제사를 모신다.”고 하였으니, 생각건대 이 다섯 선현(先賢)의 사당(祠堂)은 습독(習讀)을 지낸 규암(葵菴) 천안(天安) 전공(全公), 습독을 지낸 이은(駬隱) 동래(東萊) 정공(鄭公), 현감(縣監)을 지낸 운암(雲菴) 남양(南陽) 홍공(洪公), 감찰(監察)을 지낸 운계(雲溪) 영산(靈山) 신공(辛公), 운포처사(雲圃處士) 연안(延安) 송공(宋公) 다섯 선생을 제향(祭享)하는 곳이니 참으로 외루(畏壘)의 백성들이 경상초(庚桑楚)를 시축(尸祝)하는 뜻*이다. 이 다섯 선현(先賢)이 나라에 보답한 충절(忠節)과 풍속의 예모(禮貌)를 선도하고 학술을 정밀하게 연구한 것들은 행장(行狀)과 묘갈(墓碣)에 드러나 있으니 굳이 태양 아래에 등불을 보탤 필요가 없으나, 이 재실(齋室)은 곧 묘(墓)를 수호(守護)하고 제수(祭需)를 장만하는 집으로, 빈객과 주인이 읍양(揖讓)하는 곳이다. 동쪽과 서쪽의 계단이 있어서 노인과 젊은이가 차례에 따라 잔치에 나아가고, 위와 아래의 청실(廳室)이 있어 이곳에서 향음례(鄕飮禮)를 거행하고 이곳에서 녹남(鹿藍)의 규약(規約)*을 강론하고, 이곳에서 인재를 배양(培養)하고, 이곳에서 한결같이 다섯 선현의 훌륭함을 따르니, 청분(淸芬)*이 학문을 즐기는 것이 마치 짐승이 꼴을 좋아하는 것과 같았고 선행(善行)을 즐기는 것이 마치 마음보다 몸이 헐(歇)하듯 하여 몸에서 실천하였다. 이런 까닭에 인륜(人倫)은 뿔과 날개가 되고 예의(禮義)는 담요의 비린 생선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능히 원근의 사람들을 훈화(薰化)하고 개현 역철(改弦易轍)*하였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양광(陽光)이 치열하면 단단한 얼음도 금세 녹아버린 셈이니, 어찌 이교(異敎)가 설치고 드날리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우리 도(道)가 다시 밝아지는 것은 마치 아직 먹지 않은 과일과 같아서 장차 짙게 낀 구름 속에서 회춘(回春)할 것이니 월랑(月浪)의 향성(鄕省 고향이나 시골을 말함)에서 나침반 역할을 한 것이 크다고 하겠다. 유천(柳川) 송우(宋友) 승환옹(升煥翁)이 여러 사림(士林)의 뜻을 받들어 수백 리나 되는 먼 길을 지팡이를 짚고 나에게 와서 재실의 문 위에 매다는 현판에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어찌 늙어서 혼미하고 신분이 미천한 자가 감이 받들어 감당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것은 허공에 글씨를 써놓고 그 자취를 찾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하물며 못난 내가 이 사당에 감히 문구(文句)를 두찬(杜撰)하여 부처를 더럽혔다는 비난을 초래할 수 있겠는가? 평상시에 줄곧 생각해보니 저자에서 매를 맞는 것처럼 부끄러운 노릇이어서 고사(固辭)하였으나 굳이 요청하여 피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경위(經緯)의 개략을 서술하여 여러 사문(斯文)들이 선현을 존숭하고 사도(斯道)를 보위(保衛)하는 정성을 경하(慶賀)하노라. 병인년(丙寅年, 1986) 월 초3일에 진양(晉陽) 하천수(河千秀)가 삼가 쓰다.
    *외루(畏壘)의...뜻: 노자(老子)의 제자에 경상초(庚桑楚)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노자의 도를 일부분만 터득하였다. 북쪽의 외루(畏壘)라는 산에 가서 살면서 그 하인들 중에 분명하여 지혜로운 자는 쫓아 버리고 그 첩들 중에 의기양양하게 어진 자는 멀리하여, 순박한 사람하고만 같이 살고 부지런히 힘써 일하는 하인들만 부리고 살았는데, 이렇게 산 지 3년 만에 외루 지방에 큰 풍년이 들어서 축문(祝文)을 낭독하는 시축(尸祝)이 제사를 지내주었다.
    *녹남(鹿藍)의 규약(規約): 백롱동 서원(白鹿洞書院)의 남전 향약(藍田鄕約)을 말함.
    *청분(淸芬): 맑은 향기라는 말로, 훌륭한 인품을 의미한다. 위(魏)나라 순욱(荀彧)이 특이한 향(香)을 취하여 항상 옷에 훈증(薰蒸)시켜 입고 다녔으므로, 그가 한 번 다녀간 집에는 남은 향기가 3일 동안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개현 역철(改弦易轍): 전면적인 개혁을 말한다.
  • 동향면 대량리 662-1 하양지마을에 있는 창녕 성씨 사당. 하양지마을 한가운데 어서각과 나란히 건립되어 있다. 1945년 창건되었으며, 여기에는 성여완(成汝完)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성석린(成石璘)과 성계종(成繼宗)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성계종(?~1459)은 석린의 증손이다. 예천군수로 재직하던 중 단종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관직을 버리고 금산 금성면에 은거하며 일생을 마쳤다. 그의 아들 세필(世弼)이 동향(銅鄕)의 입향조(入鄕祖)이다. 옥천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팔작지붕 건물로 추녀넓이는 38㎥이다. 부속건물로 사우 앞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으로 된 강당이 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며, 매년 음력 3월 10일에 향사하고 있다.
  • 마령면 임진로 1932(평지리 162), 원평지마을 남동쪽 큰길가에 있는 추모재 최두칠(崔斗七)을 배향한 사당. 조선 철종 11년(1860)에 창건되었고,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60년 다시 설단되었고, 1980년 현위치에 복설되었다. 사우는 사당과 정문인 숭덕문(崇德門), 용동재(龍洞齋), 교직사(校直舍)로 되어 있다. 앞 건물은 용동재(龍洞齋)이고, 뒷 건물은 용계사(龍溪祠), 그 문은 숭덕문(崇德門)이다. 용계사는 전면 3칸 측면 2칸 기와 맞배지붕 양식이고, 용동재(龍洞齋)는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사당 앞 도로변에는 1945년에 세워진 이조참판 민병승이 찬한 최두칠묘도비(崔斗七墓道碑)가 있다. 용동재에 용계서원중건기(龍溪書院重建記)와 용동재기(龍洞齋記)가 걸려있다. 여기에는 중건의 연혁이 실려있다. 매년 음 2월 27일 제향한다.

    【배향위(配享位)】
    최두칠(崔斗七, 1683[숙종 9]~1756[영조 32]) : 자는 자건(子建), 호는 추모재(追慕齋). 본관은 전주로 충익공(忠翼公) 만육(晩六) 양(瀁)의 후손이다. 공은 자질이 특이하고 효우(孝友)가 천성을 이루어 어버이 섬김에 도리가 있었고, 존양(存養, 존심[存心] 양성[養性])이 깊고 조리(操履)가 굳건하여 성신(誠信)은 붕우간에 믿음을 주었고, 은애(恩愛)는 향당(鄕黨)에 두루 미쳐 사림이 그의 학문과 효행을 열거하여 사당에 제사도 지내고 조정에 천거도 하였다. 고종 기묘년(고종 16, 1879)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포숭(褒崇)을 가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추증되었다. 묘는 괘양산(掛陽山) 간좌원(艮坐原)에 있으며, 민병승(閔丙承)이 글을 짓고 김영한(金寗漢)이 전액(篆額)을 쓴 묘비명이 있다. 마령 원평지 용계사(龍溪祠)에 배향되어 있다.

    【축문(祝文)】
    追慕齋 崔先生 伏以 養志老萊 居憂于平章 敬薦芬苾 禮貌休明
    추모재 최(두칠)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내동산 아래서 늙도록 지조를 지키시고, 상을 당하시매 평장리에서 시묘하시어 공경스럽게 향례를 올리니 예모가 밝습니다.

    【용계서원 중건기(龍溪書院重建記)】 鎭은文獻鄕也라 先賢明宮이 在匸相望하니 馬靈之龍溪院도 亦其一也라 祠以妥追慕齋 崔先生 諱 斗七은 一方士林이 因而爲畏壘之奉者也라 先生이 以忠翼公 晩六先生 遠裔로 姿性이 敏悟하고 宇量이 弘偉하니 家庭氣脈之傳이 有不可誣者라 從遊於櫟泉 宋(明欽)先生하여 薰襲基爐鞴에 以孝悌忠信으로 爲其址하고 詩書禮樂으로 爲間架하여 奨進後學을 一如胡安定規模하고 救恤窮困하고 收育棄孩는 盖天性然也 而隠居山林에 能趾先美하여 爲昭代逸民焉이라 院之創이 在於純祖庚申 而撤於髙宗戊辰하니是其斯文之厄會也耶아 氣数之適然也耶아 蒼桑이 屢嬗에冉冉過百禩之遠이라 荒艸茂林이 蒙茸於邱園하고 破瓦殘礎가 埋沒於田畦하니 尋常樵牧도 指點而興嗟은 而况冠儒服儒하여 爲士林爲後昆者安得不愓然而感傷하고 䀌然而彷徨乎아 乃者雲裔 峻烈 相晥이 議於士林하여 周旋重建而峻烈이 嬰於二竪하여 命其子成就하고 因作修文之行이라 淳燁이 克遵遺訓하여 多擔物力하고 與諸族으로 竭蹶奔趍하며 多士가 釋經敦事에 聲援誼助而 澧鉉 永玉 永孫 元錫이 董其役하니 誠之極에 事利成이라 神棲靜肅하고 院宇精潔이라 於是에 進薦蘋藻하고 退講學問하여 上以寓羹墻之慕하고 下以報塵刹之誠이라 詩云髙山仰止에 景行行止라하니 可知僉君子讀先生之書하고 學先生之行하여 踐履篤實에 以副建祠建院之深誠而功告竣에 宋升煥 崔相晥 二氏 友가 屈賀長程하여 徵其記하니 是豈昏愚者所可堪가 辭不獲이라 謹書如右하니 烏能免掠美名涴壁之譏乎아 歲 辛酉(1981)春分節 晉陽 河千秀 謹記

    【용동재 기(龍洞齋記)】 齋者난 齋戒之義니 稱之以龍洞은 因地名而揭其額者也니 卽龍溪祠之一齋戒室也라 其爲洞也山 有掛陽之雄蹲하고 江有白馬之淸漣하야 爲天作地藏之名區니 地靈人傑이 其理不差라 従古以來로 多碩德君子生於其間하야 淸風遠韻이 薰陶鄕省하니 追慕齋崔先生이 亦近世之其人이라 文章道學之經與緯난 先輩之述이 備焉하니 以淺識後生으로 不敢贅說而生而爲士林之師表요 歿而爲士林之宗仰하야 祠而報祀난 是子朱子之古禮요 周愼齋之遺䂓라 切惟僉章甫齋於斯也에 必有其所思乎山저 吾儕奉先生之祠하고 學先生之道하니 不以心而以靣則其祭也學也가 歸之於欺人也欺我也니 行義焉何如而不失於先生之訓迪하고 學問焉何如而不悖於先生之遺戒也오 有過則改之하고 無過則加勉하야 言顧行行顧言에 深省於朝하고 猛察於暮하야 切瑳焉琢磨焉互相飭厲에 百尺竿頭에 今日進一步하고 明日進一步하야 進進不己니 登髙自卑요 行遠自邇라 十尤之木도 生於毫末하고 九仭之山도 成於一簣니 孝友爲茶飯하고 詩禮爲裘葛하야 小心翼翼에 實踐力行하야 不讓於胡安定之門徒로 期之矣리라 院之復設也에 儒林與院裔가 竭蹷效勞而淳燁君이 遵先公意하야 特誠成就하니 可謂祖先之孝孫이요 父翁之孝子요 亦多公益事業하고 今爲崔氏大宗中都有事라 以相睆氏之命으로 賴余請記者난 永孫君也라 誼不獲辭하야 謹書如右나 未免乎釋氏所謂灸石爲粥이니 惟冀僉章甫匡正焉하노라. 有國之六十六年(1984) 甲子 春分節 晉陽 河千秀 謹記
  • 주천면 금평1길 30-7(주양리 139)주자천변에 소재하는 사당이자 서원. 현재 서원의 기능은 없다. 사우는 홍살문, 외삼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자천변에 홍살문이 있고, 그곳에서 20m 동쪽 산기슭 담장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솟을대문인 삼문에는 ‘월요문(月要門)’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사당은 자연석 1단 쌓기를 하여 낮게 기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주좌가 있는 원형 초석을 놓았다. 앞면 3칸 옆면 1.5칸에 주심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에는 마루가 있고 뒷면에는 방이 있다. 1998. 11, 27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소유자는 광산 김씨 주천종중이다. 주자(朱子)를 주벽(主壁)으로 여대림(呂大臨)·주잠(朱潛)·이황(李滉)·이이(李珥)·김충립(金忠立)·김중정(金重鼎) 등 7인(人)을 배향하고 있다. 해마다 음력 9월 15일 제사지내고 있다. 1924년 김대현(金大鉉)과 이덕응(李德應)이 전국의 사우와 유림을 심방하여 협조를 구하고, 광산 김씨 문중에서 주도적으로 창건하여 ‘주천사(朱川祠)’라 하였다. 이후 1972년 중수하는 등 여러 차례 보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5년 성균관장의 인증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배향위(配享位) 중 주잠은 주자의 증손으로 이곳에 은거하였다고 전해져 주자천(朱子川)이라는 지명의 근거가 되었고, 김충립과 김중정은 이 지역에 처음 내려온 광산 김씨들로 조손(祖孫)간이다. 김중정은 와룡암(臥龍庵)을 건립하여 주민 교육의 장을 마련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908년 근대식 학교인 화동학교(華東學校)가 주양리에 설립되기도 하였다.
    【향사축문(享祀祝文)】
    太師徽國朱文公 道大德隆 永樹風敎
    藍田呂先生 入鄕結約 永守準則
    淸溪先生 朱公 官志翰林 德高道淸
    退溪李先生 敎化法道 極天罔墜
    栗谷李先生 道德淵源 冠于萬邦
    梅谷金先生 文學顯明 刷新美風
    肯構堂金先生 雙高道德 大明日月
    玆値秋季 謹以 粢盛牲幣禮齊 敍品式薦 明禋儼列 配 尙 饗
    태사 휘국의 주(희)문공, 도덕이 크고 높으시니 길이 풍속을 교화하리.
    남전의 여(대림) 선생, 향약을 세워 길이 준칙을 만드시고,
    청계 주(잠)선생, 뜻은 유학에 두시고, 도덕은 높고도 맑았네.
    퇴계 이(황)선생, 교화법도가 하늘에 닿았네.
    율곡 이(이)선생, 도덕연원이 만방을 덮었네.
    매곡 김(충립)선생, 문학이 밝게 드러나 미풍을 쇄신했네.
    긍구당 김(중정)선생, 도와 덕이 더불어 높아 일원처럼 밝았네.
    가을을 맞이하여 삼가 예물을 갖추고 제수를 마련하여 제사 올리오니 부디 흠향하옵소서.

    【朱川祠重修記】 湖南山川佳麗中 龍潭縣 名勝古跡 山佳水麗之文鄕也 縣西朱子川 朱子曾孫 淸溪公 以中國亂 寓居九曲 淸溪上 白鹿洞 世人謂其村曰 朱子川也 隕日岩半日岩東 明道峰 華山峰下 龍蟠龜蹲澄潭上 有朱川祠 七賢妥精靈之所也 甲子年 朱嶠 金公大鉉 與諸族及 士林努力建祠而歲去年 深滲漏頹落 不可形言 莫可睹視也 然而尊賢隆師 國家之明倫 士林之正義矣 辛亥秋享時 金英鉉, 裵岐泳, 金仁鉉, 金東鉉 重修發議 衆議樂從也 總務 金勝鉉 鳩財募金進行中 道知事李春成 善政化民以文化財保護誠意 特別補修金 士林尊賢 衛道之誠 自願出義金 重修着工 會長 安桓吉 金永福 盡力監董之下 不過數個月而竣工完了 祠宇倍新矣 惟勤勸勉則庶斯祠之益新矣 補助金出義金 敍左永世不忘云耳 壬子年 十二月 日 朱川祠 院長 潘南 朴仲緖 謹識.
    【풀이】 호남산천이 아름다운 가운데 용담현은 명승고적이 많고 산천이 수려한 문향(文鄕)이다. 현의 서쪽 주자천에 주자(朱子)의 증손(曾孫) 청계공(淸溪公, 朱潛)이 중국의 난리에 피란하여 구곡(九曲)의 청계(淸溪) 위 백록동(白鹿洞)에 우거(寓居)하니 세인이 이르기를 그 마을을 주자천이라 했다. 운일암반일암 동쪽 명도봉 화산봉아래 용이 서리는 듯 거북이 웅크린 듯 맑은 못 위에 주천사(朱川祠)가 있는데 칠현(七賢)의 정령(精靈)이 깃든 곳이다. 갑자년(1924) 주교(朱嶠) 김대현(金大鉉)이 여러 종족(宗族)과 사림(士林)과 더불어 노력하여 사당을 세운 뒤 여러 해가 지나 비가 새고 퇴락(頹落)하여 형언하기 어렵고 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존현(尊賢) 융사(隆師)가 국가의 명륜(明倫)이고, 사림(士林)의 정의(正義)라 신해년(辛亥年, 1971) 추향(秋享)시 김영현(金英鉉), 배기영(裵岐泳), 김인현(金仁鉉), 김동현(金東鉉) 등이 중수(重修)를 발의(發議)하여 중론(衆論)이 즐겁게 따랐다. 총무 김승현(金勝鉉)이 모금을 진행중 도지사 이춘성(李春成)이 국민을 위하여 선정을 하고자 문화재 보호 성의로 특별보수금을 협찬하고 사림 존현들께서도 도리를 지키는 성금으로 자원(自願) 출재(出財)하여 중수 착공하여 회장 안환길(安桓吉) 김영복(金永福)이 진력(盡力) 감역(監役)하여 불과 몇 달만에 준공 완료하여 사우(祠宇)는 배로 새로워졌다. 오직 바라는 바는 후인(後人)이 오늘의 정신을 이어받아 세세(世世)에 찬동하고 더 참여하기를 권면(勸勉)한다면 이 사당이 더욱 새로워질 것이다. 보조금(補助金) 출의금(出義金)을 좌(左)와 같이 기록하니 영세토록 잊지 않을 것이다. 임자(1972)년 12월 일 주천사(朱川祠) 원장(院長) 반남(潘南) 박중서(朴仲緖) 근지(謹識)(이하 성명생략)

    【朱川書院記】 述夫龍潭之陽 有一名區 焉曰朱川也 山秀明道峯之高 川流朱子川之長 峨峨洋洋 道德氣像 天慳而地秘 俗厚而民淳 檀祖舊彊 箕聖遺黎 賢良才智 代不之人 典章文物 世皆取法 燦然史 編垂至半萬年矣 曁我龍潭之儒林諸賢 建祠于此 朱夫子之主壁 藍田呂先生 淸溪朱先生 退栗兩先生 並亨梅谷肯搆堂金先生二位 追配焉 卽朱川祠也 故每嵗春秋 士林齊會 虔奉祠享 而霜星屢變 歲月攸久 祠祀奉亨 何忍黙視 於是僉議攸同 據金盡誠 以祠復院 卽朱川書院 噫 天地間 大倫大綱 終不墮廢 而典校 韓圭台 祠長 安桓吉 金英鉉 金萬鉉 金東鉉 總務 金勝鉉 諸氏之誠力 實爲至大 豈不欣感㦲 凢有秉彜之性者 孰無同感 興起之誠乎 嵗乙卯秋 精設院亨 庶幾尊靈 如臨其上 倍有色於前祠 又盡誠於斯院 若能以前祠 不忘之誠 鮮光 有終之戒 相互勸勉 千萬幸甚 鳶飛魚躍 道心之自然 光風霽月 賢思之燦然 則書院之誠至矣盡矣 伏願 院祀新亨之後 絃誦洋洋 鄒魯之士輩出 衣冠濟濟 伊洛之風不絶 則不亦悅乎 在鎬鄕中儒林 稀餘老軀 本以不文 然切有勵善獎義之心 畧記謹俟. 士林諸君子之後評 而継之一律 虔奉祠事幾星天 尊影降如獻俎豆 / 書院懸名在是年 靈神臨若告香烟 / 風光今日臥龍峀 洙泗淵源従此盡 / 月霽千秋朱子川 應知伊後講斯筵. 乙卯(1975) 秋九月 昌寧后人 南旅 成在鎬 謹記.
    【풀이】 용담의 남쪽에 이름난 한 지역이 있으니 주천이다. 빼어난 산으로는 높은 명도봉(明道峯)이 있고 흐르는 물로는 긴 주자천(朱子川)이 있다. 높고 높으며 넘실넘실 하여 도덕(道德)의 기상(氣像)이어서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긴 곳이며 풍속이 두텁고 사람이 순박한 곳이다. 단군 선조께서 옛날 사시고 기자(箕子) 성인(聖人)께서 남긴 백성들에 현량(賢良) 재지(才智)가 대대로 끊이지 않고 전장(典章) 문물(文物)을 대대로 본받으며 찬연한 역사가 반만 년 동안 이어왔다. 우리 용담의 유림 제현이 이곳에 사당을 건립할 때에 주자(朱子)를 주벽으로 하여, 남전(藍田) 여선생(呂先生)과 청계(淸溪) 주선생(朱先生), 퇴계(退溪) 율곡(栗谷) 두 선생이 모두 배향(配享)되었고 매곡(梅谷), 긍구당(肯構堂) 김선생(金先生) 2위를 여기에 추가로 배향하였는데 바로 주천사(朱川祠)였다. 그래서 해마다 봄 가을에 사림이 일제히 모여 경건히 사향(祠享)을 받들었다. 성상(星霜)이 여러 번 바뀌고 세월이 유구히 흘렀는데도 사사(祠祀)를 받드는 것을 어찌 차마 묵묵히 보고 있겠는가. 이에 여러 사람의 의론이 일치하여 재원을 마련하고 정성을 다하여 사(祠)를 원(院)으로 부활시켰으니 바로 주천서원이다. 아, 천지간에 대륜(大倫)과 대강(大綱)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전교(典敎) 한규태(韓圭台), 사장(祠長) 안환길(安桓吉)·김영현(金英鉉)·김만현(金萬鉉)·김동현(金東鉉), 총무(總務) 김승현(金勝鉉) 제씨(諸氏)의 성력(誠力)이 실로 지극히 크니, 어찌 흔연히 감격하지 않겠는가, 병이(秉彛)의 본성이 있는 자로서 누가 동감하고 흥기하는 정성이 없겠는가. 을묘년 가을 서원의 제향을 정갈히 배설하니 존령(尊靈)이 그 위에 임하는 듯하고 이전의 사당보다 곱절로 빛이 나기를 바란다. 또 이 서원에 정성을 다하면서도 만약 이전의 사당을 잊지 않음으로써 끝까지 제대로 마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경계를 가지고 서로 권면할 수 있다면 천만 다행일 것이다. 연비어약(鳶飛魚躍, 솔개는 하늘 높이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은 자연스러운 도심(道心)이고 광풍제월(光風霽月, 비 갠 뒤의 화창한 바람과 밝은 달)은 찬연한 현사(賢思)이니 서원을 세우는 데 바친 정성이 극진하도다. 삼가 바라건대 서원을 짓고 새로 제사를 올린 뒤에 거문고 타고 글 읽는 소리가 귀에 가득하여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를 따르는 선비가 무더기로 나오고, 의관(衣冠)이 제제(濟濟)하여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학풍이 끊이지 않는다면 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내가 이 고을에 얼마 남지 않은 늙은 유림으로서 글을 잘하지 못하나 선(善)에 힘쓰고 의(義)를 장려하는 마음이 절실하여 대략 사실을 기록하고 사림의 여러 군자(君子)들의 평가를 삼가 기다린다. 그리고 율시 한 수를 짓는다. 오두막 사당에서 제사를 올린 지 몇 년이던가. / 진설한 제수(祭需) 위에 존귀한 그림자가 강림한 듯하다. / 올해 서원에 이름을 달았다고 / 신령(神靈)이 임한 듯하여 향기로운 연기 속에 고하네. / 비 갠 뒤의 화창한 바람 오늘 와룡(臥龍)의 산골에서 불어오니 / 공자(孔子)의 학통(學統)이 이를 따라 다하였도다. / 비 갠 뒤의 밝은 달이 천년토록 주자천을 비추니 / 이천(伊川)의 후예가 이 자리에서 학문을 강마할 것을 알겠도다. 을묘(1975) 가을 구월 창녕인(昌寧人) 남려(南旅) 성재호(成在鎬) 근지(謹記)
  • 주천면 용덕리 산제마을 북쪽 산기슭에 있는 고령(高靈) 신씨(申氏) 사당. 청덕사는 후세 교육에 일생을 바친 한운재 신익형(閒雲齋 申益衡), 우한재 신득권(又閒齋 申得權), 난규재 신만휴(蘭葵齋 申萬休)를 배향한 사당으로 1928년에 건립되었으나 6․25 전란 때 소실되어 1954년 10월 27일 재건되었다. 맞배지붕의 함석집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이며, 앞은 맨 바닥, 뒤는 방으로 되어 있다. 3문은 함석지붕의 솟을대문으로 1957년에 세운 것이다.

    【배향위(配享位)】
    신익형(申益衡) : 유학자. 당호(堂號) 한운재(閒雲齋)
    신득권(申得權) : 유학자. 당호(堂號) 우한재(又閒齋). 신익형의 자(子).
    신만휴(申萬休) : 중학교교관. 당호(堂號) 난규재(蘭葵齋) 신득권의 증손(曾孫)

    【향사축문(享祀祝文)】
    維 檀君紀元四千三百○○年 歲次 九月朔二十日 敢昭告于
    유세차 단군기원 4300년 음력 9월 20일 감히 분명하게 고하옵니다.
    閑雲齋申先生 昭乎日月 巍乎泰山 却雲對坐 大知閑閑
    한운재 신선생은 일월보다 밝고 태산보다 높아 구름 물리치고 마주 앉으니 큰 지혜 언제나 여유롭네.
    又閑齋申先生 天性之親 愛日樂山 濂月胸灑 卲天心閑
    우한재 신선생은 천성의 친함이 해를 아끼고 산을 좋아하였으며 깨끗한 달로 마음을 씻고 높은 하늘로 마음 한가로이 하였네.
    蘭葵齋申先生 蘭氣葵忱 拜日香山 曷月告功 功極反閑
    난규재 신선생은 난초 향기와 해바라기의 정성이라 해를 향하고 산 가득 향기롭게 하네. 어느 달에나 공을 아뢰나 공이 다하니 도리어 한가롭네.
    玆値秋季 謹以 牲幣醴齊 粢盛庶品 式陳明薦 配 尙饗
    가을을 맞이하여 삼가 예물을 갖추고 제수를 마련하여 이렇게 바치옵니다. 부디 흠향하옵소서.

    【청덕사 기(淸德祠記)】 보한재(保閒齋) 선생의 뒤를 이어받은 후손들이 있으니 아름다운 일이다. 그는 오직 한운재(閒雲齋) 신공 휘 익형(益衡)이요 또 큰아드님 통정대부 우한재(又閒齋) 휘 득권(得權)이니 이 부자분의 사욕 없이 시원스런 행의는 명 조상에 명 후손임을 드러냄이다. 대개 한운재, 우한재 두 선생은 하나같이 천성이 영특하고 총명하며 학문이 넓고 깊어서 일찍이 서울에 유학하여 고관들과 사귀었으니 당시의 재상이나 장수들을 방문하여 시국에 관해 자기의 주장을 설명하고 권할 때는 “정치의 궁극적인 목표는 천하를 평안하게 하자는 것이니 그러자면 현철하고 사리에 밝은 선비를 천거해 기용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그 후 조정의 문무 재상들이 모여 문무 간에 지모 있는 인물을 천거할 제 이미 한운재 우한재 선생을 아는 인사도 많거니와 설사 모르는 인사라 할지라도 어찌 이 두 선생을 버리겠는가. 그런데 겉보기에는 국가 치안에 오히려 뒷짐 지고 있던 재상들이 두 선생을 기꺼이 받아들여서 연명으로 임금님께 상주하여 우한재 선생에게 정삼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내리니 선생은 옥관자에 금토를 입으시고 고향에 돌아오셨다. 이로부터 군왕에 대한 충성스런 마음 잊지 않을 것을 시문으로서 다했고 돌아가신 부조와 조상의 제사 장사에 이르기까지 예로서 정성을 다하였다. 우한재 선생이 성균관에 들어가 여러 박사들에게 주역과 경전을 강의할 때 박사들이 머지않아 공자 안자의 성인시대가 회복된다는 뜻에 대해 질문을 하니 공이 노래를 지어 대답하기를 “허물과 허물이 있음이여 나의 성남과 억울함을 나 스스로 잊어버리리로다. 어질고 어짊이 있음이여 나의 어질고 착함을 나 스스로 감당하리로다.” 하니 그러면 안자가 허물을 두 번 거듭하지 아니함과 성나되 다른 이에게 옮기지 아니함과 만인에 대하여 인자한 마음을 어기지 아니하는 옛 성현의 뜻과 참으로 가깝습니다. 하매 공이 대답하여 “그것이 공자님의 실당에 들어감이다.” 하였다. 학사들이 시를 읊으며 공의 학문과 견식이 넓고 큼에 감탄 하였고 공자의 십언인 충의의 뜻과 안자의 낙사인 넉넉함의 뜻을 얻었다고 하니 공은 영화로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어서 정훈을 이어받은 아름다운 행실이 날로 두드러져 효도하고 공경하고 화목하고 우애하는 일에 험잡거나 이간시키는 사람이 없었다. 아, 천지간에 이치가 있고 의리가 있고 성실이 있다한들 나라의 임금님과 가정의 부모님 외에 더 큰 분이 누가 있으리오. 임금을 진실로 사모하는 까닭에 방에서도 충성을 노래하고 다락에서도 충성을 다짐하며 시문으로 읊조리니 산에서는 개암이 드러나고 습지에서도 복령이 드러나 보였으며 부모를 진실로 사랑하니 흰 제비와 붉은 까마귀가 집안에 들어와 뜰에서 서식하는 이적을 보이니 이것이 두 선생을 가히 증험한 대략적인 현상이었다. 거룩하다! 천년이 가도록 두 선생의 아름다운 향기는 흐를 것이고, 두 선생은 혈식군자로서 사당에 영원히 봉향할 것이로다. 내가 신씨 가문이 명문이 된 까닭을 살펴보니 진실함은 문학을 겸하고 문학은 덕과 도리를 덮었기 때문에 한운재 우한재 두분의 현손이며 증손인 난규재(蘭葵齋) 신공 휘 만휴(萬休)가 청백한 행실과 절묘한 문사로 중학교관이 된 것을 알았도다. 난규제 선생의 맏아들 제헌 시우와 우한재 선생의 현손인 패우, 용우, 세 분이 선조상의 아름다운 도덕과 문학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별로 한 채 가묘를 세우니 용덕리의 운치와 경색이 훤하게 빛나도다. 가묘의 이름을 나에게 묻거늘 글 쓸 판자를 대하여 ‘청덕사(淸德祠)’로 하니 이와
  • 동향면 천향로 497(성산리126-1) 하향마을 입구 도로변 소나무숲에 있는 충신 열사를 배향한 사당. 1948년 창건되었다. 처음에는 학선사(鶴仙祠)라 칭하였는데 충렬사로 개칭되었다. 담장 안에 사당이 있는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사우에는 구한말 이후 일제에 항거한 오충(五忠, 송병선·최익현·민영환·조병세·홍만식)과 오열사(五烈士, 이준·안중근·윤봉길·이봉창·백정기)의 위패가 연벽으로 배향되어 있다. 사당은 하향마을 출신인 성선호에 의해 세워졌으며, 뒤이어 사장(祠長) 남상수, 총무 권인순에 의하여 매년 음력 3월 27일 향사되고 있다.

    【향사축문(享祀祝文)】
    維 歲次 月 朔 日 後學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 후학 아무개는 감히 분명히 고하옵니다.
    文忠公 宋先生 道學節儀 百世師表
    문충공 송(병선)선생은, 도학절의가 백세의 사표이십니다.
    勉庵 崔先生 道學節儀 儒林宗匠
    면암 최(익현)선생은 도학절의가 유림의 종장이십니다.
    忠正公 閔先生 動天之忠 貫日之誠
    충정공 민(영환)선생은 하늘을 움직이는 충성심, 해를 뚫는 지성이십니다.
    忠正公 趙先生 忠貫白日 成仁就義
    충정공 조(병세)선생은 충성스러움은 밝은 태양을 뚫었고, 의로써 인을 이루었습니다.
    忠貞公 洪先生 愛國盡忠 日星侖彩
    충정공 홍(만식)선생은 애국심과 충성심은 태양과 별처럼 빛납니다.
    烈士 李儁 先生 呼訴萬邦 殉國壇上
    열사 이준 선생은 나라의 억울함을 만방에 호소하며 순국하셨습니다.
    義士 安重根 先生 投彈殺敵 義貫白日
    의사 안중근 선생은 국적을 사살하심으로써 빛나는 태양처럼 의를 실천하셨습니다.
    義士 李奉昌 先生 投彈日皇 義滿乾坤
    의사 이봉창 선생은 일왕에게 총탄을 발사하여 의로움을 건곤에 채웠습니다.
    義士 白定基 先生 盡忠救國 殺身成義
    의사 백정기 선생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시고, 죽음으로써 의를 이뤘습니다.
    玆値春季 精禋是宜 勤以牲幣 粢盛庶品 式陳明薦 配 尙 饗
    이에 봄철을 맞아 삼가 제수를 받들어 제향올리니 흠향하시옵소서.
  • 성수면 봉황길 31-9[좌포리 31-9] 봉좌마을 북동쪽 산기슭 언덕에 있는 공주 이씨 사당. 순조 6년(1806) 이 마을에 세거하던 공주 이씨의 중시조 문성공(文成公) 송은 이명성(松隱李明誠)과 공숙공(恭肅公) 사봉 이명덕(沙峰李明德)을 제향하기 위해 창사하였다. 그 뒤 고종 6년(1869)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914년 다시 설단하여 제향하였고, 1971년 복설하여 오늘에 이른다. 사당에는 오병근(吳炳根)이 찬한 충절사 중건기(忠節祠重建記)와 문성공(文成公) 20대손 현기(現基)가 찬한 충절사 중수기(忠節祠重修記) 판액(板額)이 걸려있다. 담장 안에 사당이 있다. 사당은 전면 3칸 측면 1칸의 기와 맞배지붕이며,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다. 예전에는 충절사 앞에 작은 관리소가 있었는데, 2005년에 벽돌로 다시 건립하였다. 문중에서 매년 음력 2월 20일에 향사하고 있다.

    【배향위(配享位)】
    이명성(李明誠)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성수면 좌포리에 세거하는 공주 이씨의 중시조이다. 자는 경장(敬章), 호는 송은(松隱)이다. 고려 말 전공판서 정경공(貞敬公) 이엽(李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아우 사봉과 같이 목은에게 나가 학문을 닦았으며, 포은 정몽주와 친교를 맺은 사이였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적성감무를 거쳐 감찰어사 지제고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탄식하며, “나라가 망하는데도 목숨을 바칠 수 없게 되었으니 충신이 아니고, 어머니께서 늙으셨는데도 끝까지 봉양할 수 없게 되었으니 효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끝내 개성 만월대 아래에서 포은과 눈물을 흘리며 작별한 후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이천 산중으로 들어가 백이숙제와 같이 절의를 지키며 숨어 살았다. 조선 태종이 여러 번 불렀으나 “물에 빠져 죽을지언정 새 왕조에서는 벼슬하지 않겠다.” 하고는 끝내 나오지 않고 은둔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송은의 기록은 고려조 충열록에 실려 있다.
    이명덕(李明德, 1373~1444)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성수면 좌포리에 세거하는 공주 이씨의 중시조이다. 자는 신지(新之), 호는 사봉(沙峰). 할아버지는 운증(屛曾)이며, 아버지는 엽(曄)이다. 1396년(태조 5)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춘추관에 보직되었으며, 사헌부감찰·사간원우헌납·장령·사인·집의·좌사간대부·형조참의 겸 지도관사(刑曹參議兼知都官事) 등을 역임하였다. 1415년(태종 15)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이 되고 좌부대언에 승진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이조참판을 거쳐 병조참판으로 전임되었고, 그 뒤 강원도관찰사·예조참판·대사헌·동지총제를 역임하였다. 1430년(세종 12) 공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다. 1438년 중추원부사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그 뒤 판한성부사·인순부윤(仁順府尹)을 지냈다. 1442년 70세가 되어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다시 지중추원사로 복직하였다. 이어서 판중추원사에 승진하여 궤장을 하사받았다.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공주의 명탄서원(鳴灘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충절사 상향문(忠節祠 尙饗文)】
    文成公 松隱 李先生 伏以 遯世不悔 立我人極 秉義維何 同歸圃牧
    문성공 송은 이(명성)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세상을 등지고도 후회가 없으니 우리 인도의 극치를 세우셨고 의가 무엇인가를 포은(정몽주)·목은(이색)과 함께 드러내셨습니다.
    恭肅公 沙峰 李先生 伏以 在家孝子 立朝忠臣 隱顯終始 要盡天倫
    공숙공 사봉 이(명덕)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집에서는 효자요 입조해서는 충신이니, 진퇴가 분명하셨고 천륜을 다하고자 하셨습니다.

    【忠節祠重建記】 鎭安 佐浦里在 龍沼之下 鳳臺之陽山 回水抱洞府 氤氳而開豁 麗明寔爲 月浪之一名區 李氏居焉 田園門弟櫛比隣接 奉先聚族之勝所也 其先有文成公松隱先生 恭肅公沙峰先生 二公兄弟而受業于牧隱先生之門 講磨於圃隱先生 遂成大儒而 松翁殿中侍御使 見麗運訖入杜門洞 固守 罔僕之義 沙翁仕於李氏歷事四朝而盡已 出處雖殊 忠節一也 故國家賜諡 士林祠祀 公州之鳴灘 鎭安之佐浦祠是矣 高宗戊辰(1868) 見撤雲裔之恨 士林之嘆 曷勝道哉 乃封壇薦芬有年 後孫現基與儒林東萊鄭貴泳諸甫 不忍於地水之荒廢 合謀而現其翁全擔財政 裁源助役 重建巋然祠宇 復若舊貌 於是雲裔之寓祠 士林之駿奔 是有其所 歲乙酉(1945)也 後四十一丙寅 南至月 近入八旬之現基翁 遠來徵其於余 余今大耋 實難堪當 固辭不得 遂書如右而塞請 檀紀四三一九年 丙寅 大雪節 垂楊 吳炳根 謹述 文成公 二十代孫 燾基 謹書.
    【풀이】 진안 좌포리에 있는 용소(龍沼) 아래에 봉황대가 있는 양산이 있는데 물이 마을을 굽어돌고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참으로 밝고 고우니 월랑 명구의 하나로 이씨가 세거하는데 그 자손이 인접에 즐비하여 선영제사에 모이기 좋은 곳이다. 그 선조에 문성공(文成公) 송은선생(松隱先生) 공숙공(恭肅公) 사봉선생(沙峰先生) 두 형제분이 목은선생(牧隱先生)과 포은선생(圃隱先生)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송은선생은 전중시어사(殿中侍御使)에 이르렀는데 고려왕조가 망하는 것을 보고 두문동에 들어가 의를 지키고 은둔하였다. 사봉선생은 조선왕조에서 네분 임금을 대대로 섬기며 충절로 일관하여 조정으로부터 시호가 내렸다. 사림들이 公州(公州)의 명탄(鳴灘)과 진안 좌포의 사당에 배향하였다. 고종5(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니 후손들의 한이 되고 사림들이 탄식하였으나 시세의 흐름을 어찌 이기리요. 이에 봉분으로 설단을 하고 향사를 지내오기를 여러 해였다. 후손 현기(現基)와 더불어 유림(儒林) 정귀영(鄭貴泳)등 선비들이 (사우 터가) 황폐해 감을 이기지 못하여 서로 의논하여 현기 옹(現基翁)이 재정(財政)을 전담(全擔)하기로 하고 서로 도와 옛자리에 규연(巋然)한 사우를 중건하니 옛모습을 찾았다. 이에 후손들은 사당에서 향사(享祀)를 올리게 되고 사림(士林)은 준망(駿奔)했는데 바로 을유(1945)년이었다. 그후 41년이 지난 병인(1986)년 동짓달 팔순이 다 되는 현기옹이 멀리 나를 찾아 글을 청하니 나도 80이 넘어 실로 감당키 어렵다 고사(固辭)했으나 뿌리치지 못하여 우측 글로 청에 응한다. 단기4319(1986)년 병인 대설절 수양(垂楊) 오병근(吳炳根) 삼가 적고, 문성공 20대손 도기(燾基) 삼가 쓰다.

    【忠節祠重修記】 祠宇之建이 在於往乙酉之歲하니 距今甲戌하면 倏爾星霜이 於焉五十年也라 以風雨之所侵으로 間生補修處하니 諸族이 各自隨力出財하야 不拘罕有之酷暑하고 遂至完役하니 實是先靈陰隲之德이며 後孫齊誠之所致也니 其非欣懽哉아 是役也여 族大父 金仁(金龍)씨 六仁(六燮)氏 族叔 炳鎭(龍鎭)氏와 再從弟 燾基(炳燾) 族弟 龍基(炳龍) 烈基(炳烈) 振基(炳振) 族孫 栽源(吉善) 等이 始終賢勞하니 惟願來裔는 相承爲鑑하야 隨毁卽補하고 勿惰修葺之道하야 惟誠慕先之事하면 百世不替而繼新矣리니 以是切望焉하다. 檀紀4327(1994)年 甲戌 小雪節 文成公二十代孫 現基 謹識, 文成公二十代孫 燾基 謹書.
    【풀이】 사우(祠宇)를 세운 때가 지난 을유(乙酉, 1945)년이니 지금 갑술(甲戌)년으로부터 어언 50년이 흘러 풍우가 스며들어 틈새로 보수할 곳이 생기니 제족(諸族)이 각자 형편대로 출재(出財)하여 드문 혹서(酷暑)를 불구하고 드디어 역사(役事)를 마치니 이것이 바로 선령(先靈)의 음덕이며 후손들 모두의 정성에 따름이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이 역사는 족대부(族大父) 金仁(金龍)씨 六仁(六燮)氏 族叔 炳鎭(龍鎭)氏와 再從弟 燾基(炳燾) 族弟 龍基(炳龍) 烈基(炳烈) 振基(炳振) 族孫 栽源(吉善) 등이 시종 힘써 주셨으니 생각건대 오는 후손들은 이를 이어 훼손되면 바로 보수하고 지붕을 보수하는데 게으르지 않아 정성으로 선조를 추모하면 백세에 바꾸어지지 않고 새로 이어질 것이니 이를 바라는 바다. 단기4327(1994)년 갑술 소설절 문성공 20대손 현기(現基) 삼가 적고, 도기(燾基) 삼가 쓰다.
  • 백운면 원노길 17[노촌리 511], 노촌리 원노촌마을 북쪽 끝자락에 있는 사당. 문열공 김천일(文烈公 金千鎰), 무민공 황진(武愍公 黃進)의 충절과 미계 신의련(愼義連)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철종 7년 (1856)에 창건하였다. 그러나 고종 6년(1869)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고, 1947년 복설(復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담장 안에 사당이 있다. 사우는 전면 3칸 측면 1칸으로 너와 맞배지붕이다. 상의문(尙義門) 1동과 4칸 20평의 강당, 3칸 12평의 수직사로 구성되어 있다. 매년 음력 2월 23일에 향사하고 있다.

    【배향위(配享位)】
    김천일(金千鎰, 1537~1593)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언양. 자 사중(士重). 호 건재(健齋)·극념당(克念堂). 시호 문열(文烈). 나주 출생. 이항(李恒)의 문인. 삼장사(三壯士)의 한 사람. 1573년(선조 6)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되고, 1578년 임실현감(任實縣監)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나주에 있다가 고경명(高敬命)·박광옥(朴光玉)·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선조가 피란간 평안도를 향해 가다가, 왜적과 싸우면서 수원성(水原城)을 거쳐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 공으로 판결사(判決事)가 되고 창의사(倡義使)의 호를 받았다. 왜적에게 점령된 서울에 결사대를 잠입시켜 싸우고, 한강변의 여러 적진을 급습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다음해 정월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의 군대가 개성을 향해 남진(南進)할 때, 그들을 도와 도로(道路)·지세(地勢) 및 적정(敵情) 등을 알려 작전을 도왔다. 또 왜군이 남쪽으로 퇴각하자, 절도사 최경회 등과 함께 진주성(晋州城)을 사수(死守)하였다. 그 뒤 진주성을 지킬 때 백병전이 벌어져, 화살이 떨어지고 창검이 부러져 대나무 창으로 응전하였다.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아들 상건(象乾)과 남강(南江)에 투신자결하였다.
    황진(黃進, 1550~1593)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장수(長水). 자 명보(明甫). 호 아술당(蛾述堂). 시호 무민(武愍).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1591년 조선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와 미구에 일본이 내침(來侵)할 것을 예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복(同福)현감으로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북상하여 용인(龍仁)에서 패전하고 이어 진안(鎭安)에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한 뒤 적군을 안덕원(安德院)에서 격퇴하고, 훈련원 판관(判官)이 되어 이치(梨峙)전투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공으로 익산(益山)군수 겸 충청도 조방장(助防將)에 오르고, 절도사 선거이(宣居怡)를 따라 수원(水原)에서 싸웠다. 이듬해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승진하여 패퇴하는 적을 추격, 상주(尙州)에 이르는 동안 연승(連勝)을 거두고, 적의 대군이 진주성(晉州城)을 공략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절도사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성중에 들어가 9일 동안 혈전 끝에 전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진주 창렬사(彰烈祠), 남원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
    신의련(愼義連, 1546~1606) : 자는 의숙(宜叔), 호는 미계(美溪). 본관은 거창으로 양렬공(襄烈公) 이충(以衷)의 7대손이다. 임진왜란 때 병든 부모를 모시고 있었는데, 적이 부친을 죽이려 하자 자신의 몸으로 막아서서 대신 죽기를 빌었다. 이에 왜장이 효성에 감동하여 동구 밖에 방을 붙였는데, 효자가 사는 곳이라 하여 왜적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이곳으로 피난하여 살아남은 사람이 5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동네의 이름을 오만동(五萬洞)이라 부르고, 그 들판을 면화평(免禍坪)이라 하였으며, 산을 덕태산(德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수의부위(修義副尉)의 품계와 정려가 내렸으며, 명나라까지 알려졌다.

    【충효사 상향문(忠孝祠 尙饗文)】
    文烈公 金先生 學有淵源 忠爭日月
    문열공 김(천일) 선생께서는 학문은 연원이 있으시고, 충성은 일월과 다툽니다.
    武愍公 黃先生 凜凜忠義 永樹江山
    무민공 황(진) 선생의 늠름한 충의는 길이 강산에 기리 전할 것입니다.
    美溪公 愼先生 孝能感物 道有安貧
    미계공 신(의련) 선생의 효성은 능히 만물을 감동시키고, 안빈낙도에 뜻을 두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