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천면 용덕리 산제마을 북쪽 산기슭에 있는 고령(高靈) 신씨(申氏) 사당. 청덕사는 후세 교육에 일생을 바친 한운재 신익형(閒雲齋 申益衡), 우한재 신득권(又閒齋 申得權), 난규재 신만휴(蘭葵齋 申萬休)를 배향한 사당으로 1928년에 건립되었으나 6․25 전란 때 소실되어 1954년 10월 27일 재건되었다. 맞배지붕의 함석집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이며, 앞은 맨 바닥, 뒤는 방으로 되어 있다. 3문은 함석지붕의 솟을대문으로 1957년에 세운 것이다.

    【배향위(配享位)】
    신익형(申益衡) : 유학자. 당호(堂號) 한운재(閒雲齋)
    신득권(申得權) : 유학자. 당호(堂號) 우한재(又閒齋). 신익형의 자(子).
    신만휴(申萬休) : 중학교교관. 당호(堂號) 난규재(蘭葵齋) 신득권의 증손(曾孫)

    【향사축문(享祀祝文)】
    維 檀君紀元四千三百○○年 歲次 九月朔二十日 敢昭告于
    유세차 단군기원 4300년 음력 9월 20일 감히 분명하게 고하옵니다.
    閑雲齋申先生 昭乎日月 巍乎泰山 却雲對坐 大知閑閑
    한운재 신선생은 일월보다 밝고 태산보다 높아 구름 물리치고 마주 앉으니 큰 지혜 언제나 여유롭네.
    又閑齋申先生 天性之親 愛日樂山 濂月胸灑 卲天心閑
    우한재 신선생은 천성의 친함이 해를 아끼고 산을 좋아하였으며 깨끗한 달로 마음을 씻고 높은 하늘로 마음 한가로이 하였네.
    蘭葵齋申先生 蘭氣葵忱 拜日香山 曷月告功 功極反閑
    난규재 신선생은 난초 향기와 해바라기의 정성이라 해를 향하고 산 가득 향기롭게 하네. 어느 달에나 공을 아뢰나 공이 다하니 도리어 한가롭네.
    玆値秋季 謹以 牲幣醴齊 粢盛庶品 式陳明薦 配 尙饗
    가을을 맞이하여 삼가 예물을 갖추고 제수를 마련하여 이렇게 바치옵니다. 부디 흠향하옵소서.

    【청덕사 기(淸德祠記)】 보한재(保閒齋) 선생의 뒤를 이어받은 후손들이 있으니 아름다운 일이다. 그는 오직 한운재(閒雲齋) 신공 휘 익형(益衡)이요 또 큰아드님 통정대부 우한재(又閒齋) 휘 득권(得權)이니 이 부자분의 사욕 없이 시원스런 행의는 명 조상에 명 후손임을 드러냄이다. 대개 한운재, 우한재 두 선생은 하나같이 천성이 영특하고 총명하며 학문이 넓고 깊어서 일찍이 서울에 유학하여 고관들과 사귀었으니 당시의 재상이나 장수들을 방문하여 시국에 관해 자기의 주장을 설명하고 권할 때는 “정치의 궁극적인 목표는 천하를 평안하게 하자는 것이니 그러자면 현철하고 사리에 밝은 선비를 천거해 기용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그 후 조정의 문무 재상들이 모여 문무 간에 지모 있는 인물을 천거할 제 이미 한운재 우한재 선생을 아는 인사도 많거니와 설사 모르는 인사라 할지라도 어찌 이 두 선생을 버리겠는가. 그런데 겉보기에는 국가 치안에 오히려 뒷짐 지고 있던 재상들이 두 선생을 기꺼이 받아들여서 연명으로 임금님께 상주하여 우한재 선생에게 정삼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내리니 선생은 옥관자에 금토를 입으시고 고향에 돌아오셨다. 이로부터 군왕에 대한 충성스런 마음 잊지 않을 것을 시문으로서 다했고 돌아가신 부조와 조상의 제사 장사에 이르기까지 예로서 정성을 다하였다. 우한재 선생이 성균관에 들어가 여러 박사들에게 주역과 경전을 강의할 때 박사들이 머지않아 공자 안자의 성인시대가 회복된다는 뜻에 대해 질문을 하니 공이 노래를 지어 대답하기를 “허물과 허물이 있음이여 나의 성남과 억울함을 나 스스로 잊어버리리로다. 어질고 어짊이 있음이여 나의 어질고 착함을 나 스스로 감당하리로다.” 하니 그러면 안자가 허물을 두 번 거듭하지 아니함과 성나되 다른 이에게 옮기지 아니함과 만인에 대하여 인자한 마음을 어기지 아니하는 옛 성현의 뜻과 참으로 가깝습니다. 하매 공이 대답하여 “그것이 공자님의 실당에 들어감이다.” 하였다. 학사들이 시를 읊으며 공의 학문과 견식이 넓고 큼에 감탄 하였고 공자의 십언인 충의의 뜻과 안자의 낙사인 넉넉함의 뜻을 얻었다고 하니 공은 영화로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어서 정훈을 이어받은 아름다운 행실이 날로 두드러져 효도하고 공경하고 화목하고 우애하는 일에 험잡거나 이간시키는 사람이 없었다. 아, 천지간에 이치가 있고 의리가 있고 성실이 있다한들 나라의 임금님과 가정의 부모님 외에 더 큰 분이 누가 있으리오. 임금을 진실로 사모하는 까닭에 방에서도 충성을 노래하고 다락에서도 충성을 다짐하며 시문으로 읊조리니 산에서는 개암이 드러나고 습지에서도 복령이 드러나 보였으며 부모를 진실로 사랑하니 흰 제비와 붉은 까마귀가 집안에 들어와 뜰에서 서식하는 이적을 보이니 이것이 두 선생을 가히 증험한 대략적인 현상이었다. 거룩하다! 천년이 가도록 두 선생의 아름다운 향기는 흐를 것이고, 두 선생은 혈식군자로서 사당에 영원히 봉향할 것이로다. 내가 신씨 가문이 명문이 된 까닭을 살펴보니 진실함은 문학을 겸하고 문학은 덕과 도리를 덮었기 때문에 한운재 우한재 두분의 현손이며 증손인 난규재(蘭葵齋) 신공 휘 만휴(萬休)가 청백한 행실과 절묘한 문사로 중학교관이 된 것을 알았도다. 난규제 선생의 맏아들 제헌 시우와 우한재 선생의 현손인 패우, 용우, 세 분이 선조상의 아름다운 도덕과 문학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별로 한 채 가묘를 세우니 용덕리의 운치와 경색이 훤하게 빛나도다. 가묘의 이름을 나에게 묻거늘 글 쓸 판자를 대하여 ‘청덕사(淸德祠)’로 하니 이와
  • 동향면 천향로 497(성산리126-1) 하향마을 입구 도로변 소나무숲에 있는 충신 열사를 배향한 사당. 1948년 창건되었다. 처음에는 학선사(鶴仙祠)라 칭하였는데 충렬사로 개칭되었다. 담장 안에 사당이 있는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사우에는 구한말 이후 일제에 항거한 오충(五忠, 송병선·최익현·민영환·조병세·홍만식)과 오열사(五烈士, 이준·안중근·윤봉길·이봉창·백정기)의 위패가 연벽으로 배향되어 있다. 사당은 하향마을 출신인 성선호에 의해 세워졌으며, 뒤이어 사장(祠長) 남상수, 총무 권인순에 의하여 매년 음력 3월 27일 향사되고 있다.

    【향사축문(享祀祝文)】
    維 歲次 月 朔 日 後學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 후학 아무개는 감히 분명히 고하옵니다.
    文忠公 宋先生 道學節儀 百世師表
    문충공 송(병선)선생은, 도학절의가 백세의 사표이십니다.
    勉庵 崔先生 道學節儀 儒林宗匠
    면암 최(익현)선생은 도학절의가 유림의 종장이십니다.
    忠正公 閔先生 動天之忠 貫日之誠
    충정공 민(영환)선생은 하늘을 움직이는 충성심, 해를 뚫는 지성이십니다.
    忠正公 趙先生 忠貫白日 成仁就義
    충정공 조(병세)선생은 충성스러움은 밝은 태양을 뚫었고, 의로써 인을 이루었습니다.
    忠貞公 洪先生 愛國盡忠 日星侖彩
    충정공 홍(만식)선생은 애국심과 충성심은 태양과 별처럼 빛납니다.
    烈士 李儁 先生 呼訴萬邦 殉國壇上
    열사 이준 선생은 나라의 억울함을 만방에 호소하며 순국하셨습니다.
    義士 安重根 先生 投彈殺敵 義貫白日
    의사 안중근 선생은 국적을 사살하심으로써 빛나는 태양처럼 의를 실천하셨습니다.
    義士 李奉昌 先生 投彈日皇 義滿乾坤
    의사 이봉창 선생은 일왕에게 총탄을 발사하여 의로움을 건곤에 채웠습니다.
    義士 白定基 先生 盡忠救國 殺身成義
    의사 백정기 선생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시고, 죽음으로써 의를 이뤘습니다.
    玆値春季 精禋是宜 勤以牲幣 粢盛庶品 式陳明薦 配 尙 饗
    이에 봄철을 맞아 삼가 제수를 받들어 제향올리니 흠향하시옵소서.
  • 성수면 봉황길 31-9[좌포리 31-9] 봉좌마을 북동쪽 산기슭 언덕에 있는 공주 이씨 사당. 순조 6년(1806) 이 마을에 세거하던 공주 이씨의 중시조 문성공(文成公) 송은 이명성(松隱李明誠)과 공숙공(恭肅公) 사봉 이명덕(沙峰李明德)을 제향하기 위해 창사하였다. 그 뒤 고종 6년(1869)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914년 다시 설단하여 제향하였고, 1971년 복설하여 오늘에 이른다. 사당에는 오병근(吳炳根)이 찬한 충절사 중건기(忠節祠重建記)와 문성공(文成公) 20대손 현기(現基)가 찬한 충절사 중수기(忠節祠重修記) 판액(板額)이 걸려있다. 담장 안에 사당이 있다. 사당은 전면 3칸 측면 1칸의 기와 맞배지붕이며,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다. 예전에는 충절사 앞에 작은 관리소가 있었는데, 2005년에 벽돌로 다시 건립하였다. 문중에서 매년 음력 2월 20일에 향사하고 있다.

    【배향위(配享位)】
    이명성(李明誠)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성수면 좌포리에 세거하는 공주 이씨의 중시조이다. 자는 경장(敬章), 호는 송은(松隱)이다. 고려 말 전공판서 정경공(貞敬公) 이엽(李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아우 사봉과 같이 목은에게 나가 학문을 닦았으며, 포은 정몽주와 친교를 맺은 사이였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적성감무를 거쳐 감찰어사 지제고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탄식하며, “나라가 망하는데도 목숨을 바칠 수 없게 되었으니 충신이 아니고, 어머니께서 늙으셨는데도 끝까지 봉양할 수 없게 되었으니 효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끝내 개성 만월대 아래에서 포은과 눈물을 흘리며 작별한 후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이천 산중으로 들어가 백이숙제와 같이 절의를 지키며 숨어 살았다. 조선 태종이 여러 번 불렀으나 “물에 빠져 죽을지언정 새 왕조에서는 벼슬하지 않겠다.” 하고는 끝내 나오지 않고 은둔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송은의 기록은 고려조 충열록에 실려 있다.
    이명덕(李明德, 1373~1444)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성수면 좌포리에 세거하는 공주 이씨의 중시조이다. 자는 신지(新之), 호는 사봉(沙峰). 할아버지는 운증(屛曾)이며, 아버지는 엽(曄)이다. 1396년(태조 5)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춘추관에 보직되었으며, 사헌부감찰·사간원우헌납·장령·사인·집의·좌사간대부·형조참의 겸 지도관사(刑曹參議兼知都官事) 등을 역임하였다. 1415년(태종 15)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이 되고 좌부대언에 승진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이조참판을 거쳐 병조참판으로 전임되었고, 그 뒤 강원도관찰사·예조참판·대사헌·동지총제를 역임하였다. 1430년(세종 12) 공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다. 1438년 중추원부사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그 뒤 판한성부사·인순부윤(仁順府尹)을 지냈다. 1442년 70세가 되어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다시 지중추원사로 복직하였다. 이어서 판중추원사에 승진하여 궤장을 하사받았다.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공주의 명탄서원(鳴灘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충절사 상향문(忠節祠 尙饗文)】
    文成公 松隱 李先生 伏以 遯世不悔 立我人極 秉義維何 同歸圃牧
    문성공 송은 이(명성)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세상을 등지고도 후회가 없으니 우리 인도의 극치를 세우셨고 의가 무엇인가를 포은(정몽주)·목은(이색)과 함께 드러내셨습니다.
    恭肅公 沙峰 李先生 伏以 在家孝子 立朝忠臣 隱顯終始 要盡天倫
    공숙공 사봉 이(명덕)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집에서는 효자요 입조해서는 충신이니, 진퇴가 분명하셨고 천륜을 다하고자 하셨습니다.

    【忠節祠重建記】 鎭安 佐浦里在 龍沼之下 鳳臺之陽山 回水抱洞府 氤氳而開豁 麗明寔爲 月浪之一名區 李氏居焉 田園門弟櫛比隣接 奉先聚族之勝所也 其先有文成公松隱先生 恭肅公沙峰先生 二公兄弟而受業于牧隱先生之門 講磨於圃隱先生 遂成大儒而 松翁殿中侍御使 見麗運訖入杜門洞 固守 罔僕之義 沙翁仕於李氏歷事四朝而盡已 出處雖殊 忠節一也 故國家賜諡 士林祠祀 公州之鳴灘 鎭安之佐浦祠是矣 高宗戊辰(1868) 見撤雲裔之恨 士林之嘆 曷勝道哉 乃封壇薦芬有年 後孫現基與儒林東萊鄭貴泳諸甫 不忍於地水之荒廢 合謀而現其翁全擔財政 裁源助役 重建巋然祠宇 復若舊貌 於是雲裔之寓祠 士林之駿奔 是有其所 歲乙酉(1945)也 後四十一丙寅 南至月 近入八旬之現基翁 遠來徵其於余 余今大耋 實難堪當 固辭不得 遂書如右而塞請 檀紀四三一九年 丙寅 大雪節 垂楊 吳炳根 謹述 文成公 二十代孫 燾基 謹書.
    【풀이】 진안 좌포리에 있는 용소(龍沼) 아래에 봉황대가 있는 양산이 있는데 물이 마을을 굽어돌고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참으로 밝고 고우니 월랑 명구의 하나로 이씨가 세거하는데 그 자손이 인접에 즐비하여 선영제사에 모이기 좋은 곳이다. 그 선조에 문성공(文成公) 송은선생(松隱先生) 공숙공(恭肅公) 사봉선생(沙峰先生) 두 형제분이 목은선생(牧隱先生)과 포은선생(圃隱先生)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송은선생은 전중시어사(殿中侍御使)에 이르렀는데 고려왕조가 망하는 것을 보고 두문동에 들어가 의를 지키고 은둔하였다. 사봉선생은 조선왕조에서 네분 임금을 대대로 섬기며 충절로 일관하여 조정으로부터 시호가 내렸다. 사림들이 公州(公州)의 명탄(鳴灘)과 진안 좌포의 사당에 배향하였다. 고종5(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니 후손들의 한이 되고 사림들이 탄식하였으나 시세의 흐름을 어찌 이기리요. 이에 봉분으로 설단을 하고 향사를 지내오기를 여러 해였다. 후손 현기(現基)와 더불어 유림(儒林) 정귀영(鄭貴泳)등 선비들이 (사우 터가) 황폐해 감을 이기지 못하여 서로 의논하여 현기 옹(現基翁)이 재정(財政)을 전담(全擔)하기로 하고 서로 도와 옛자리에 규연(巋然)한 사우를 중건하니 옛모습을 찾았다. 이에 후손들은 사당에서 향사(享祀)를 올리게 되고 사림(士林)은 준망(駿奔)했는데 바로 을유(1945)년이었다. 그후 41년이 지난 병인(1986)년 동짓달 팔순이 다 되는 현기옹이 멀리 나를 찾아 글을 청하니 나도 80이 넘어 실로 감당키 어렵다 고사(固辭)했으나 뿌리치지 못하여 우측 글로 청에 응한다. 단기4319(1986)년 병인 대설절 수양(垂楊) 오병근(吳炳根) 삼가 적고, 문성공 20대손 도기(燾基) 삼가 쓰다.

    【忠節祠重修記】 祠宇之建이 在於往乙酉之歲하니 距今甲戌하면 倏爾星霜이 於焉五十年也라 以風雨之所侵으로 間生補修處하니 諸族이 各自隨力出財하야 不拘罕有之酷暑하고 遂至完役하니 實是先靈陰隲之德이며 後孫齊誠之所致也니 其非欣懽哉아 是役也여 族大父 金仁(金龍)씨 六仁(六燮)氏 族叔 炳鎭(龍鎭)氏와 再從弟 燾基(炳燾) 族弟 龍基(炳龍) 烈基(炳烈) 振基(炳振) 族孫 栽源(吉善) 等이 始終賢勞하니 惟願來裔는 相承爲鑑하야 隨毁卽補하고 勿惰修葺之道하야 惟誠慕先之事하면 百世不替而繼新矣리니 以是切望焉하다. 檀紀4327(1994)年 甲戌 小雪節 文成公二十代孫 現基 謹識, 文成公二十代孫 燾基 謹書.
    【풀이】 사우(祠宇)를 세운 때가 지난 을유(乙酉, 1945)년이니 지금 갑술(甲戌)년으로부터 어언 50년이 흘러 풍우가 스며들어 틈새로 보수할 곳이 생기니 제족(諸族)이 각자 형편대로 출재(出財)하여 드문 혹서(酷暑)를 불구하고 드디어 역사(役事)를 마치니 이것이 바로 선령(先靈)의 음덕이며 후손들 모두의 정성에 따름이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이 역사는 족대부(族大父) 金仁(金龍)씨 六仁(六燮)氏 族叔 炳鎭(龍鎭)氏와 再從弟 燾基(炳燾) 族弟 龍基(炳龍) 烈基(炳烈) 振基(炳振) 族孫 栽源(吉善) 등이 시종 힘써 주셨으니 생각건대 오는 후손들은 이를 이어 훼손되면 바로 보수하고 지붕을 보수하는데 게으르지 않아 정성으로 선조를 추모하면 백세에 바꾸어지지 않고 새로 이어질 것이니 이를 바라는 바다. 단기4327(1994)년 갑술 소설절 문성공 20대손 현기(現基) 삼가 적고, 도기(燾基) 삼가 쓰다.
  • 백운면 원노길 17[노촌리 511], 노촌리 원노촌마을 북쪽 끝자락에 있는 사당. 문열공 김천일(文烈公 金千鎰), 무민공 황진(武愍公 黃進)의 충절과 미계 신의련(愼義連)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철종 7년 (1856)에 창건하였다. 그러나 고종 6년(1869)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고, 1947년 복설(復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담장 안에 사당이 있다. 사우는 전면 3칸 측면 1칸으로 너와 맞배지붕이다. 상의문(尙義門) 1동과 4칸 20평의 강당, 3칸 12평의 수직사로 구성되어 있다. 매년 음력 2월 23일에 향사하고 있다.

    【배향위(配享位)】
    김천일(金千鎰, 1537~1593)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언양. 자 사중(士重). 호 건재(健齋)·극념당(克念堂). 시호 문열(文烈). 나주 출생. 이항(李恒)의 문인. 삼장사(三壯士)의 한 사람. 1573년(선조 6)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되고, 1578년 임실현감(任實縣監)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나주에 있다가 고경명(高敬命)·박광옥(朴光玉)·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선조가 피란간 평안도를 향해 가다가, 왜적과 싸우면서 수원성(水原城)을 거쳐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 공으로 판결사(判決事)가 되고 창의사(倡義使)의 호를 받았다. 왜적에게 점령된 서울에 결사대를 잠입시켜 싸우고, 한강변의 여러 적진을 급습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다음해 정월 명나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의 군대가 개성을 향해 남진(南進)할 때, 그들을 도와 도로(道路)·지세(地勢) 및 적정(敵情) 등을 알려 작전을 도왔다. 또 왜군이 남쪽으로 퇴각하자, 절도사 최경회 등과 함께 진주성(晋州城)을 사수(死守)하였다. 그 뒤 진주성을 지킬 때 백병전이 벌어져, 화살이 떨어지고 창검이 부러져 대나무 창으로 응전하였다.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아들 상건(象乾)과 남강(南江)에 투신자결하였다.
    황진(黃進, 1550~1593) :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 장수(長水). 자 명보(明甫). 호 아술당(蛾述堂). 시호 무민(武愍).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1591년 조선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와 미구에 일본이 내침(來侵)할 것을 예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복(同福)현감으로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북상하여 용인(龍仁)에서 패전하고 이어 진안(鎭安)에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한 뒤 적군을 안덕원(安德院)에서 격퇴하고, 훈련원 판관(判官)이 되어 이치(梨峙)전투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공으로 익산(益山)군수 겸 충청도 조방장(助防將)에 오르고, 절도사 선거이(宣居怡)를 따라 수원(水原)에서 싸웠다. 이듬해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승진하여 패퇴하는 적을 추격, 상주(尙州)에 이르는 동안 연승(連勝)을 거두고, 적의 대군이 진주성(晉州城)을 공략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절도사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성중에 들어가 9일 동안 혈전 끝에 전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진주 창렬사(彰烈祠), 남원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
    신의련(愼義連, 1546~1606) : 자는 의숙(宜叔), 호는 미계(美溪). 본관은 거창으로 양렬공(襄烈公) 이충(以衷)의 7대손이다. 임진왜란 때 병든 부모를 모시고 있었는데, 적이 부친을 죽이려 하자 자신의 몸으로 막아서서 대신 죽기를 빌었다. 이에 왜장이 효성에 감동하여 동구 밖에 방을 붙였는데, 효자가 사는 곳이라 하여 왜적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이곳으로 피난하여 살아남은 사람이 5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동네의 이름을 오만동(五萬洞)이라 부르고, 그 들판을 면화평(免禍坪)이라 하였으며, 산을 덕태산(德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수의부위(修義副尉)의 품계와 정려가 내렸으며, 명나라까지 알려졌다.

    【충효사 상향문(忠孝祠 尙饗文)】
    文烈公 金先生 學有淵源 忠爭日月
    문열공 김(천일) 선생께서는 학문은 연원이 있으시고, 충성은 일월과 다툽니다.
    武愍公 黃先生 凜凜忠義 永樹江山
    무민공 황(진) 선생의 늠름한 충의는 길이 강산에 기리 전할 것입니다.
    美溪公 愼先生 孝能感物 道有安貧
    미계공 신(의련) 선생의 효성은 능히 만물을 감동시키고, 안빈낙도에 뜻을 두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