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천사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어서각은 1402년 독곡 성석린에게 내린 왕지를 보관한 건물로 1824년 건축되었다. 이후 삼회에 걸쳐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16. 12. 28 진안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어서각은 정면 3칸인데, 가운데 칸만 왕지를 보관하도록 문이 달려 있고 좌우칸은 개방되어 있는 형태이다. 어서각은 옥천사와 건물의 격을 달리하기 위해 옥천사보다 1자 정도 높게 기단부를 조성하였다. 또한 자연석을 잘 다듬은 초석 위에 그렝이질한 약간의 배흘림을 둔 원기둥을 세우고 이익공의 포를 올렸다. 단청은 비교적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어서각과 옥천사 주변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주변과 격리되어 있고, 남쪽에는 넓은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 마령면 원강정1길 42 강정마을 북서쪽에 있는 서원 겸 사당. 강정마을 북쪽 구릉지대에 영산사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만육 최양(崔瀁), 쌍첨 이인현(李仁賢), 충경공 이정란(李廷鸞), 규암 전계종(全繼宗)을 배향한 사당으로 인조 27년(1649)에 창건되었으나 고종 6년(1867)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그 뒤 1870년 유허비가 세워졌고, 1900년에 다시 설단되었으며, 1948년 복설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사우(祠宇)는 사당, 정문,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며, 정문인 명덕문(明德門) 1동과 관리사 1동이 있다.정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 맞배지붕으로 입구 명덕문 좌측에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에 제향한다.

    【배향위(配享位)】
    최양(崔瀁, 1351[충정왕 3]~1424[세종 6])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함(伯函), 호는 만육(晩六) 또는 장륙당(藏六堂). 아버지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지(贄)이며, 어머니는 영일 정씨(迎日鄭氏)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운관(云瓘)의 딸이다. 외삼촌 정몽주(鄭夢周)에게 수학하였으며,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상서·대제학 등을 지냈다. 1384년 예문관직제학에 재임할 때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서북면 정벌에 참여하였고, 그 뒤 대사간 문하찬성사에 이르렀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백운면 반송리 팔공산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태조가 친구로 대우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과 전록(田祿)을 하사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후에 전주의 대승동으로 옮겨 말년을 보냈다. 전주 서산원(西山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익공(忠翼公)이다. 백운면 반송리에 그를 기리는 구남각이 있고, 안에 비를 세웠다. 비에는 기정진(奇正鎭)이 찬한 둔적유허비명이 새겨져 있다.
    이인현(李仁賢, 1497~1570)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안으로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교(校)의 5대손이다. 임오년(壬午年 : 중종17, 1522)에 사마 양시(司馬兩試 :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3년 뒤인 을유년(乙酉年)에는 문과(文科)에 급제하니 그때 나이 29세였다. 성균관(成均館)에 분속(分屬)되어 얼마 후에는 전적(典籍)에 승배(陞拜)되고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종부시정(宗簿寺正)을 거쳐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제배(除拜)되었다가 김제군수(金提郡守)로 나갔었고 임기가 다하자 금마군수(金馬郡守)로 이수(移授) 되었다가 담양부사(潭陽府使)에 제수(除授)되었다가 영해부사(寧海府使), 공주목사(公州牧使)에 제배되었으나 임기가 다하기 전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유월촌(幽月村)에 터를 잡고 살았다. 마을 남쪽에는 산이 있어 마이(馬耳)인데 두 봉우리가 우뚝 반공(半空)에 속아있다. 거기에서 뜻을 취하여 당호(堂號)를 쌍첨(雙尖)이라 하니 대체로 그 유연(悠然)한 뜻을 취한 것이다. 그리하여 옛 사람의 서책을 좌우에 쌓아놓고 빠짐없이 훑어보면서 저술에 주력하였다.
    이정란(李廷鸞, 1529~1600)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다. 본관은 전의, 자는 문보, 시호는 충경으로 전북 전주 출신이다.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정자, 저작박사를 거쳐 성균관전적을 지냈으나 사이가 안 좋은 정여립의 배척으로 해미 현감, 양재찰방, 개성부도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왜군이 웅치 전투에서 관군과 의병을 무찌르고 전라도에 침입하자 64세의 노구로 부민을 거느리고 전주성을 지켰고 이 공으로 태상시첨정에 올랐고 군기시정을 거쳐 수원 부사와 공주 목사가 되었으나 진휼과 농정이 허술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왜군이 전주성을 포위하여 큰 혼란이 일어나자 수성부장이 되어 전주성을 지키다가 전주부윤이 죽자 전주부윤 겸 삼도소모사로 제수되었다. 사후 전주의 한계서원에 배향되었고, 진안군 마령면 영계사에 사우가 있다.
    전계종(全繼宗, 1516[중종 11]~1592[선조 25]) : 자는 백윤(伯胤). 호는 규암(葵菴). 본관은 천안으로 문평공(文平公) 문식(文軾)의 후손이며, 자온(自溫)의 증손이다. 중종 31년에 문과하여 시강원(侍講院) 습독(習讀)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적의 위협을 받자 분연(憤然)히 크게 꾸짖고 시종 굴하지 않으니, 마침내 적의 해침을 당하였다. 인조조에 공조참의에 증직되고 사림(士林)이 서원(書院)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묘는 거사곡의 자좌원(子坐原)에 있으며, 민여로(閔汝老)가 찬하고, 신응삼(申應三)이 글씨를 쓴 묘갈명이 있다. 또 조중목(趙重穆)이 글을 짓고, 유진찬(兪鎭贊)이 전액(篆額)을 쓰고, 이선호(李璇鎬)가 글씨를 쓴 묘갈명 병서(墓碣銘幷序)가 있다.

    【상향축문(尙饗祝文)】
    忠翼公 晩六 崔先生 伏以 義炳春秋 節爭日月 天經以立 百世風烈
    충익공 만육 최(양)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의로움은 춘추에 전하고, 절의는 일월과 다투며, 백세에 풍렬은 백세에 변치 않을 것입니다.
    雙尖 李先生 伏以 白首山廬 執喪過禮 賢孝之範 不肖者礪
    쌍첨 이(인현)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백수산 여막의 삼년상은 예를 넘어선 극진한 효성으로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忠景公 李先生 伏以 行篤孝友 忠著捍衛 風聲百代 崇報無替
    충경공 이(정란)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효우에 독실하고, 충성을 다해 적을 막아 명성은 백대에 전해질 것이며, 우러름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葵菴 全先生 伏以 乾剛之氣 永貞之節 忠孝兼備 百世風烈
    규암 전(계종)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건강(乾剛)한 기개와 곧은 절의에 충효를 겸비하여 그 명성은 백세에 전해질 것입니다.
  • 마령면 원강정1길 36(강정리 235) 원강정마을 북서쪽에 있는 사당. 영계사의 동쪽에 위치한다. 철종 13년(1862) 도은 전문식(全文軾)을 제향하기 위하여 창사되었는데,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뒤 1924년에 이르러 다시 설단 제향하였고, 1972년 중건하면서 전문식(全文軾)의 아들인 양헌 전극례(全克禮)와 손자인 송당 전자온(全子溫), 죽헌 전자양(全子讓)을 추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우는 사당과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돌담으로 둘러져 있는데, 경명문(景明門)이라는 출입문이 있다. 영산사에서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지점에 도은 선생의 묘와 1924년 세운 신도비가 있다. 입구 왼쪽에는 1979년에 후손들이 세운 신도비가 있다.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에 제향한다.

    [[배향위(配享位)]]
    전문식(全文軾) : 자는 문영(文英), 호는 도은(道隱), 본관은 천안(天安). 백제 10대 공신 환성군 섭(歡城君聶)의 후예이며 두양군(兜陽君) 희(熙)의 아들이다. 공민왕조에 덕이 높은 인재 30인을 선발하였는데, 이 때 뽑혀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우왕 때 김의(金義)가 명나라 사신을 살해하고 북원(北元)으로 도망친 일이 있었는데, 공은 당시 대신(臺臣)으로 이 사실을 들어 그 무리를 목 베도록 상소하였으나 오히려 이인임(李仁任)과 지연(池淵) 등에게 몰리어 하옥되고, 정몽주(鄭夢周)등 10여인과 함께 유배(流配)되었다. 병인(丙寅, 1386)에 평안백(平安伯)이 되었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공양왕(恭讓王)을 맞아 세운 공으로 형부상서사(刑部尙書事)에 올랐다. 농암(籠巖) 김주(金澍)와 함께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본국에 역성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귀국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태조께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 하였고, 정종의 간곡한 부름에 나아가 경상백(慶尙伯)이 되어 일시 선정(善政)을 베푼 바 있으나 만년에 치사(致仕)하고 산수간을 두루 방랑(放浪)하다가 월랑(月浪, 진안의 옛 이름)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여생(餘生)을 보내려 하였으나 얼마 후에 별세하니 마령면 강정리 석벽에 장구지대(杖屨之臺, 머무른 곳의 뜻)가 있다. 세종 때 좌찬성 대제학(左贊成大提學)에 증직(贈職)되었고 ‘문평(文平)’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전극례(全克禮) : 호는 낭헌(浪軒), 본관은 천안으로 문평공(文平公) 문식(文軾)의 증손이며, 판중추(判中樞) 사미(思美)의 아들이다. 일찍이 방촌(厖村) 황희(黃熹)와 경암(敬菴) 허조(許稠)와 함께 서로 사우(師友)를 삼고 지냈다. 세종조의 정시(庭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를 지냈으며, 호조판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다. 하지만 단종 폐위를 보고 강정으로 낙향하여 은둔하게 되었으니, 이 곳은 그의 증조인 문평공 문식이 마련한 곳이다. 그의 아들 사간(司諫) 자온(自溫)과 사직(司直) 자양(自讓)은 청령포(淸泠浦)에서 함께 순절하여 뒤에 사림의 공의(公議)로 나란히 이산사(駬山祠)에 배향되어 있다. 묘는 거사곡(居士谷) 자좌원(子坐原)에 있으며, 후손 광로(光魯)가 찬하고 한풍(翰豊)이 글씨를 쓴 묘갈명이 있다. 또 박기양(朴箕陽), 판서 민철훈(閔哲勳), 참판 김재순(金在珣), 참판 이용구(李龍九), 승지 이범석(李範錫), 승지 서광필(徐光弼) 등의 이름이 적힌 도학포장이 있으며, 이선호(李璇鎬)가 찬한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있다.
    전자온(全自溫) : 호는 송당(松堂), 천안인(天安人)이다. 문평공 문식(文平公 文軾)의 현손(玄孫)이요, 호조판서(戶曹判書) 극례(克禮)의 아들이다. 타고난 자품(資稟)이 탁월하고 품성(稟性)이 강직(剛直)하여 충군애국(忠君愛國)을 스스로의 임무(任務)로 여겼다.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간(司諫)에까지 이르렀다. 세조 원년 병자(丙子)에 성삼문(成三問) 등이 상왕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런 일에 거리낌 없이 정론(正論)을 펴다가 세조의 미움을 받아 만호(萬戶)로 강등(降等)되었다. 그 이듬해 상왕 단종이 승하(昇遐)하심에 아우인 사직(司直) 자양(自讓)과 같이 영월 청령포(寧越淸泠浦)에서 순절하니, 부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도 공의 뒤를 따랐다. 이런 사적이 동학지(東鶴誌)와 호남지(湖南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전자양(全自讓) : 호는 죽헌(竹軒), 천안인(天安人)이다. 문평공 문식(文平公 文軾)의 현손(玄孫)이요, 호조판서(戶曹判書) 극례(克禮)의 아들이다. 타고난 바탕이 영오(穎悟)하고 지기(志氣)가 강개(慷慨)하였다. 세종조에 형인 사간(司諫) 자온(自溫)과 같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직(司直)에 이르렀다. 청현(淸顯)을 들어냄에 거리낌이 없어서 바른 말을 잘하여 세조의 미움을 받았다. 상왕이신 단종께서 승하(昇遐)하심에 백씨인 사간 자온과 함께 영월 청령포에서 순절하니,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도 그 뒤를 따랐다. 이런 사적이 동학지(東鶴誌)와 호남지(湖南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향사 축문(享祀祝文)]]
    文平公 都隱 全先生 伏以 偉勳碩德 昭代名臣 道學文章 嘉惠後人
    문평공 도은 전(문식)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덕이 높고 공로가 혁혁하셨고, 고려조의 명신으로 도학과 문장이 후인들에게 아름다운 은혜로 드리웠습니다.
    浪軒 全先生 伏以 學本洛閩 敬直義方 貞忠卓節 烈日秋霜
    낭헌 전(극례)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학문은 낙민[洛閩 낙양(洛陽) 출신인 정호(程顥)ㆍ정이(程頤)와 민(閩) 출신인 주희(朱熹)]에 근본하여 공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을 방정하게 하였으며, 곧은 충성과 절개가 추상과 같았습니다.
    松堂 全先生 伏以 竭忠報國 大義莫伸 兄難弟難 一體成仁
    송당 전(자온)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했으나 대의를 펴지 못하고 형제가 한 몸으로 인을 이루었습니다.
    竹軒 全先生 伏以 拒逆新王 舊主有臣 見義授命 扶植彛倫
    죽헌 전(자양)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신왕을 따르지 않고 구주(舊主)의 신하로 의를 보아 목숨을 바쳐 이륜(彛倫)을 부식하셨습니다.
  • 마령면 원강정2길 3[강정리 124-1]에 있는 사당. 임진왜란 때 거의한 전계종(全繼宗)과 신기(辛麒), 정대수(鄭大壽), 홍필(洪滭), 송대홍(宋大弘) 등 오현의 의거를 기리기 위해 1977년 창건하였다. 이들은 마을의 입향조이기도 하다. 사우(祠宇)는 본당과 동재, 숙직사, 창고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남향한 사당을 중심으로 동측에 모현재(慕賢齋), 서측에 관리사가 자리하여 전체적으로 ‘ㄷ’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모현재는 1984년에 건축되었다. 4칸 전퇴집으로 전퇴는 마루를 시설하였다. 내부는 모두 터서 방으로 활용한다. 남쪽 측면에도 쪽마루를 시설하여 편의를 도모하였다. 관리사는 본래 3칸 초가였으나 지금은 시멘트로 벽을 마감했고 지붕은 골함석을 올렸다. 주위에는 기와 얹은 토석 담장이 둘러져 있고 뒤쪽에는 조그만 텃밭이 있다.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한다.

    【배향위(配享位)】
    전계종(全繼宗, 1516[중종 11]~1592[선조 25]) : 자는 백윤(伯胤). 호는 규암(葵菴). 본관은 천안으로 문평공(文平公) 문식(文軾)의 후손이며, 자온(自溫)의 증손이다. 중종 31년에 문과하여 시강원(侍講院) 습독(習讀)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적의 위협을 받자 분연(憤然)히 크게 꾸짖고 시종 굴하지 않으니, 마침내 적의 해침을 당하였다. 인조조에 공조참의에 증직되고 사림(士林)이 서원(書院)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묘는 거사곡의 자좌원(子坐原)에 있으며, 민여로(閔汝老)가 찬하고, 신응삼(申應三)이 글씨를 쓴 묘갈명이 있다. 또 조중목(趙重穆)이 글을 짓고, 유진찬(兪鎭贊)이 전액(篆額)을 쓰고, 이선호(李璇鎬)가 글씨를 쓴 묘갈명 병서(墓碣銘幷序)가 있다.
    정대수(鄭大壽,생몰연대 불명) : 본관은 동래. 호는 이은(駬隱). 습독관(習讀官)의 직함을 받았다. 강정리에 세거하며 5성동계를 맺었는데 전계종(全繼宗)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신기(辛麒), 홍필(洪滭), 송대홍(宋大弘) 등과 더불어 군량을 모집하고 운반하며 뒷바라지를 하였다.
    홍필(洪滭, 1551~1623) : 본관은 남양. 호는 운암(雲庵). 효성이 지극하여 천거를 받아 진사로 무안현감에 제수되었다. 강정리에 세거하며 5성동계를 맺었는데 전계종(全繼宗)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신기(辛麒), 정대수(鄭大壽), 송대홍(宋大弘) 등과 더불어 군량을 모집하고 운반하며 뒷바라지를 하였다.
    신기(辛麒, ?~1622) : 본관은 영산(靈山). 호는 운계(雲溪). 효성이 지극하여 감찰(監察)의 직함이 내려졌다. 강정리에 세거하며 5성동계를 맺었는데 전계종(全繼宗)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정대수(鄭大壽), 홍필(洪滭), 송대홍(宋大弘) 등과 더불어 군량을 모집하고 운반하며 뒷바라지를 하였다.
    송대홍(宋大弘, 1558~1629) :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운포(雲圃). 효성이 지극하여 감찰(監察)의 직함이 내려졌다. 강정리에 세거하며 5성동계를 맺었는데 전계종(全繼宗)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신기(辛麒), 정대수(鄭大壽), 홍필(洪滭) 등과 더불어 군량을 모집하고 운반하며 뒷바라지를 하였다.

    【향사 축문(享祀祝文)】
    葵庵全先生 伏以 學博德崇 就義成仁 勤王敵愾 輝暎千春
    규암 전(계종)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학문이 넓고 덕이 높아 의로써 인을 이루었으며 적개심으로 근왕하여 천추에 길이 빛났습니다.
    駬隱鄭先生 伏以 在家篤孝 爲國貞忠 凜凜節操 抑抑淸風
    이은 정(대수)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집에서는 효를 돈독히 하고 나라를 위해서는 정충(貞忠)으로 늠름한 지조와 절개가 청풍처럼 주밀하였습니다.
    雲庵洪先生 伏以 至孝事親 倡義報君 五賢聯壁 齋誠薦芬
    운암 홍(필)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럽고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여 의병을 일으켜 오현사에 배향되어 정성스러운 향례를 받습니다.
    雲溪辛先生 伏以 傳檄列邑 志士影從 六三奚暇 憤氣撑空
    운계 신(기)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여러 고을에 격문을 전하니 뜻있는 선비들이 그림자처럼 따라 六三(편자주, 不明)겨를 없이 분기탱천하였습니다.
    雲圃宋先生 伏以 道學淵源 忠孝家門 崇德廣業 百世遺芬
    운포 송(대홍)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도학에 연원을 두고 충효가문에서 높은 덕에 많은 사업으로 백세토록 향기로움을 남겼습니다.

    【慕賢齋記】 傳曰, 樹垂世之功者, 享垂世之報. 又曰, 可謂師表則祀之, 惟此五賢祠, 習讀葵菴天安全公, 習讀駬隠東萊鄭公, 縣監雲菴南陽洪公, 監察雲溪靈山辛公, 雲圃處士延安宋公, 五先生妥侑之所, 寔畏壘之民, 尸祝庚桑椘之義也. 其五賢之報國忠節, 導俗禮貌, 精硏學術, 著在狀碣, 不須日下添燈, 而此齋卽守護齋蠲之堂, 賓主揖讓之處. 有東西階戺, 老少序次之筵. 有上下廳室, 於是焉行餕禮, 於斯講鹿藍之規, 於斯培養人材, 於斯一遵乎五賢之懿, 則淸芬嗜學如豢, 樂善如歇軆之於心, 行之於身, 以此人倫爲角翼, 禮義爲氊腥之世, 能薰化逺近, 改弦易轍, 則古人所謂陽光熾烈, 堅氷立消, 何患乎異教之鴟張簧鼓乎? 吾道之復明, 如不食之果, 將囬春於重隂之中, 月浪之爲磁針於鄕省, 大矣! 柳川宋友升煥翁, 以僉士林意, 屈杖数百長程, 屬以楣端之揭者, 是豈昏耗人微者所能承當者乎? 此無異書空而尋跡, 而况鄙於是祠, 敢以杜撰文句, 招穢佛之譏累矣. 居常一念, 愧如撻市, 固辭而固請, 終不得躱避, 遂抒經緯之厓略, 以賀諸斯文尊賢衛道之誠. 歲赤虎振 羽月之初三日, 晉陽河千秀謹記.
    【풀이】 전(傳)에 이르기를, “세상에 전해질 만한 공(功)을 세운 자는 후세에 전해지는 보답을 누린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사표(師表)라고 이를 만 하면 제사를 모신다.”고 하였으니, 생각건대 이 다섯 선현(先賢)의 사당(祠堂)은 습독(習讀)을 지낸 규암(葵菴) 천안(天安) 전공(全公), 습독을 지낸 이은(駬隱) 동래(東萊) 정공(鄭公), 현감(縣監)을 지낸 운암(雲菴) 남양(南陽) 홍공(洪公), 감찰(監察)을 지낸 운계(雲溪) 영산(靈山) 신공(辛公), 운포처사(雲圃處士) 연안(延安) 송공(宋公) 다섯 선생을 제향(祭享)하는 곳이니 참으로 외루(畏壘)의 백성들이 경상초(庚桑楚)를 시축(尸祝)하는 뜻*이다. 이 다섯 선현(先賢)이 나라에 보답한 충절(忠節)과 풍속의 예모(禮貌)를 선도하고 학술을 정밀하게 연구한 것들은 행장(行狀)과 묘갈(墓碣)에 드러나 있으니 굳이 태양 아래에 등불을 보탤 필요가 없으나, 이 재실(齋室)은 곧 묘(墓)를 수호(守護)하고 제수(祭需)를 장만하는 집으로, 빈객과 주인이 읍양(揖讓)하는 곳이다. 동쪽과 서쪽의 계단이 있어서 노인과 젊은이가 차례에 따라 잔치에 나아가고, 위와 아래의 청실(廳室)이 있어 이곳에서 향음례(鄕飮禮)를 거행하고 이곳에서 녹남(鹿藍)의 규약(規約)*을 강론하고, 이곳에서 인재를 배양(培養)하고, 이곳에서 한결같이 다섯 선현의 훌륭함을 따르니, 청분(淸芬)*이 학문을 즐기는 것이 마치 짐승이 꼴을 좋아하는 것과 같았고 선행(善行)을 즐기는 것이 마치 마음보다 몸이 헐(歇)하듯 하여 몸에서 실천하였다. 이런 까닭에 인륜(人倫)은 뿔과 날개가 되고 예의(禮義)는 담요의 비린 생선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능히 원근의 사람들을 훈화(薰化)하고 개현 역철(改弦易轍)*하였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양광(陽光)이 치열하면 단단한 얼음도 금세 녹아버린 셈이니, 어찌 이교(異敎)가 설치고 드날리는 것을 걱정하겠는가. 우리 도(道)가 다시 밝아지는 것은 마치 아직 먹지 않은 과일과 같아서 장차 짙게 낀 구름 속에서 회춘(回春)할 것이니 월랑(月浪)의 향성(鄕省 고향이나 시골을 말함)에서 나침반 역할을 한 것이 크다고 하겠다. 유천(柳川) 송우(宋友) 승환옹(升煥翁)이 여러 사림(士林)의 뜻을 받들어 수백 리나 되는 먼 길을 지팡이를 짚고 나에게 와서 재실의 문 위에 매다는 현판에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어찌 늙어서 혼미하고 신분이 미천한 자가 감이 받들어 감당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것은 허공에 글씨를 써놓고 그 자취를 찾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하물며 못난 내가 이 사당에 감히 문구(文句)를 두찬(杜撰)하여 부처를 더럽혔다는 비난을 초래할 수 있겠는가? 평상시에 줄곧 생각해보니 저자에서 매를 맞는 것처럼 부끄러운 노릇이어서 고사(固辭)하였으나 굳이 요청하여 피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경위(經緯)의 개략을 서술하여 여러 사문(斯文)들이 선현을 존숭하고 사도(斯道)를 보위(保衛)하는 정성을 경하(慶賀)하노라. 병인년(丙寅年, 1986) 월 초3일에 진양(晉陽) 하천수(河千秀)가 삼가 쓰다.
    *외루(畏壘)의...뜻: 노자(老子)의 제자에 경상초(庚桑楚)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노자의 도를 일부분만 터득하였다. 북쪽의 외루(畏壘)라는 산에 가서 살면서 그 하인들 중에 분명하여 지혜로운 자는 쫓아 버리고 그 첩들 중에 의기양양하게 어진 자는 멀리하여, 순박한 사람하고만 같이 살고 부지런히 힘써 일하는 하인들만 부리고 살았는데, 이렇게 산 지 3년 만에 외루 지방에 큰 풍년이 들어서 축문(祝文)을 낭독하는 시축(尸祝)이 제사를 지내주었다.
    *녹남(鹿藍)의 규약(規約): 백롱동 서원(白鹿洞書院)의 남전 향약(藍田鄕約)을 말함.
    *청분(淸芬): 맑은 향기라는 말로, 훌륭한 인품을 의미한다. 위(魏)나라 순욱(荀彧)이 특이한 향(香)을 취하여 항상 옷에 훈증(薰蒸)시켜 입고 다녔으므로, 그가 한 번 다녀간 집에는 남은 향기가 3일 동안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개현 역철(改弦易轍): 전면적인 개혁을 말한다.
  • 동향면 대량리 662-1 하양지마을에 있는 창녕 성씨 사당. 하양지마을 한가운데 어서각과 나란히 건립되어 있다. 1945년 창건되었으며, 여기에는 성여완(成汝完)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성석린(成石璘)과 성계종(成繼宗)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성계종(?~1459)은 석린의 증손이다. 예천군수로 재직하던 중 단종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관직을 버리고 금산 금성면에 은거하며 일생을 마쳤다. 그의 아들 세필(世弼)이 동향(銅鄕)의 입향조(入鄕祖)이다. 옥천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로 된 팔작지붕 건물로 추녀넓이는 38㎥이다. 부속건물로 사우 앞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으로 된 강당이 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며, 매년 음력 3월 10일에 향사하고 있다.
  • 마령면 임진로 1932(평지리 162), 원평지마을 남동쪽 큰길가에 있는 추모재 최두칠(崔斗七)을 배향한 사당. 조선 철종 11년(1860)에 창건되었고,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60년 다시 설단되었고, 1980년 현위치에 복설되었다. 사우는 사당과 정문인 숭덕문(崇德門), 용동재(龍洞齋), 교직사(校直舍)로 되어 있다. 앞 건물은 용동재(龍洞齋)이고, 뒷 건물은 용계사(龍溪祠), 그 문은 숭덕문(崇德門)이다. 용계사는 전면 3칸 측면 2칸 기와 맞배지붕 양식이고, 용동재(龍洞齋)는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사당 앞 도로변에는 1945년에 세워진 이조참판 민병승이 찬한 최두칠묘도비(崔斗七墓道碑)가 있다. 용동재에 용계서원중건기(龍溪書院重建記)와 용동재기(龍洞齋記)가 걸려있다. 여기에는 중건의 연혁이 실려있다. 매년 음 2월 27일 제향한다.

    【배향위(配享位)】
    최두칠(崔斗七, 1683[숙종 9]~1756[영조 32]) : 자는 자건(子建), 호는 추모재(追慕齋). 본관은 전주로 충익공(忠翼公) 만육(晩六) 양(瀁)의 후손이다. 공은 자질이 특이하고 효우(孝友)가 천성을 이루어 어버이 섬김에 도리가 있었고, 존양(存養, 존심[存心] 양성[養性])이 깊고 조리(操履)가 굳건하여 성신(誠信)은 붕우간에 믿음을 주었고, 은애(恩愛)는 향당(鄕黨)에 두루 미쳐 사림이 그의 학문과 효행을 열거하여 사당에 제사도 지내고 조정에 천거도 하였다. 고종 기묘년(고종 16, 1879)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포숭(褒崇)을 가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추증되었다. 묘는 괘양산(掛陽山) 간좌원(艮坐原)에 있으며, 민병승(閔丙承)이 글을 짓고 김영한(金寗漢)이 전액(篆額)을 쓴 묘비명이 있다. 마령 원평지 용계사(龍溪祠)에 배향되어 있다.

    【축문(祝文)】
    追慕齋 崔先生 伏以 養志老萊 居憂于平章 敬薦芬苾 禮貌休明
    추모재 최(두칠)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내동산 아래서 늙도록 지조를 지키시고, 상을 당하시매 평장리에서 시묘하시어 공경스럽게 향례를 올리니 예모가 밝습니다.

    【용계서원 중건기(龍溪書院重建記)】 鎭은文獻鄕也라 先賢明宮이 在匸相望하니 馬靈之龍溪院도 亦其一也라 祠以妥追慕齋 崔先生 諱 斗七은 一方士林이 因而爲畏壘之奉者也라 先生이 以忠翼公 晩六先生 遠裔로 姿性이 敏悟하고 宇量이 弘偉하니 家庭氣脈之傳이 有不可誣者라 從遊於櫟泉 宋(明欽)先生하여 薰襲基爐鞴에 以孝悌忠信으로 爲其址하고 詩書禮樂으로 爲間架하여 奨進後學을 一如胡安定規模하고 救恤窮困하고 收育棄孩는 盖天性然也 而隠居山林에 能趾先美하여 爲昭代逸民焉이라 院之創이 在於純祖庚申 而撤於髙宗戊辰하니是其斯文之厄會也耶아 氣数之適然也耶아 蒼桑이 屢嬗에冉冉過百禩之遠이라 荒艸茂林이 蒙茸於邱園하고 破瓦殘礎가 埋沒於田畦하니 尋常樵牧도 指點而興嗟은 而况冠儒服儒하여 爲士林爲後昆者安得不愓然而感傷하고 䀌然而彷徨乎아 乃者雲裔 峻烈 相晥이 議於士林하여 周旋重建而峻烈이 嬰於二竪하여 命其子成就하고 因作修文之行이라 淳燁이 克遵遺訓하여 多擔物力하고 與諸族으로 竭蹶奔趍하며 多士가 釋經敦事에 聲援誼助而 澧鉉 永玉 永孫 元錫이 董其役하니 誠之極에 事利成이라 神棲靜肅하고 院宇精潔이라 於是에 進薦蘋藻하고 退講學問하여 上以寓羹墻之慕하고 下以報塵刹之誠이라 詩云髙山仰止에 景行行止라하니 可知僉君子讀先生之書하고 學先生之行하여 踐履篤實에 以副建祠建院之深誠而功告竣에 宋升煥 崔相晥 二氏 友가 屈賀長程하여 徵其記하니 是豈昏愚者所可堪가 辭不獲이라 謹書如右하니 烏能免掠美名涴壁之譏乎아 歲 辛酉(1981)春分節 晉陽 河千秀 謹記

    【용동재 기(龍洞齋記)】 齋者난 齋戒之義니 稱之以龍洞은 因地名而揭其額者也니 卽龍溪祠之一齋戒室也라 其爲洞也山 有掛陽之雄蹲하고 江有白馬之淸漣하야 爲天作地藏之名區니 地靈人傑이 其理不差라 従古以來로 多碩德君子生於其間하야 淸風遠韻이 薰陶鄕省하니 追慕齋崔先生이 亦近世之其人이라 文章道學之經與緯난 先輩之述이 備焉하니 以淺識後生으로 不敢贅說而生而爲士林之師表요 歿而爲士林之宗仰하야 祠而報祀난 是子朱子之古禮요 周愼齋之遺䂓라 切惟僉章甫齋於斯也에 必有其所思乎山저 吾儕奉先生之祠하고 學先生之道하니 不以心而以靣則其祭也學也가 歸之於欺人也欺我也니 行義焉何如而不失於先生之訓迪하고 學問焉何如而不悖於先生之遺戒也오 有過則改之하고 無過則加勉하야 言顧行行顧言에 深省於朝하고 猛察於暮하야 切瑳焉琢磨焉互相飭厲에 百尺竿頭에 今日進一步하고 明日進一步하야 進進不己니 登髙自卑요 行遠自邇라 十尤之木도 生於毫末하고 九仭之山도 成於一簣니 孝友爲茶飯하고 詩禮爲裘葛하야 小心翼翼에 實踐力行하야 不讓於胡安定之門徒로 期之矣리라 院之復設也에 儒林與院裔가 竭蹷效勞而淳燁君이 遵先公意하야 特誠成就하니 可謂祖先之孝孫이요 父翁之孝子요 亦多公益事業하고 今爲崔氏大宗中都有事라 以相睆氏之命으로 賴余請記者난 永孫君也라 誼不獲辭하야 謹書如右나 未免乎釋氏所謂灸石爲粥이니 惟冀僉章甫匡正焉하노라. 有國之六十六年(1984) 甲子 春分節 晉陽 河千秀 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