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사(靈山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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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사영산사 경명문
마령면 원강정1길 36(강정리 235) 원강정마을 북서쪽에 있는 사당. 영계사의 동쪽에 위치한다. 철종 13년(1862) 도은 전문식(全文軾)을 제향하기 위하여 창사되었는데,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뒤 1924년에 이르러 다시 설단 제향하였고, 1972년 중건하면서 전문식(全文軾)의 아들인 양헌 전극례(全克禮)와 손자인 송당 전자온(全子溫), 죽헌 전자양(全子讓)을 추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우는 사당과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돌담으로 둘러져 있는데, 경명문(景明門)이라는 출입문이 있다. 영산사에서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지점에 도은 선생의 묘와 1924년 세운 신도비가 있다. 입구 왼쪽에는 1979년에 후손들이 세운 신도비가 있다.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에 제향한다.

[[배향위(配享位)]]
전문식(全文軾) : 자는 문영(文英), 호는 도은(道隱), 본관은 천안(天安). 백제 10대 공신 환성군 섭(歡城君聶)의 후예이며 두양군(兜陽君) 희(熙)의 아들이다. 공민왕조에 덕이 높은 인재 30인을 선발하였는데, 이 때 뽑혀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우왕 때 김의(金義)가 명나라 사신을 살해하고 북원(北元)으로 도망친 일이 있었는데, 공은 당시 대신(臺臣)으로 이 사실을 들어 그 무리를 목 베도록 상소하였으나 오히려 이인임(李仁任)과 지연(池淵) 등에게 몰리어 하옥되고, 정몽주(鄭夢周)등 10여인과 함께 유배(流配)되었다. 병인(丙寅, 1386)에 평안백(平安伯)이 되었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공양왕(恭讓王)을 맞아 세운 공으로 형부상서사(刑部尙書事)에 올랐다. 농암(籠巖) 김주(金澍)와 함께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본국에 역성혁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귀국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태조께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 하였고, 정종의 간곡한 부름에 나아가 경상백(慶尙伯)이 되어 일시 선정(善政)을 베푼 바 있으나 만년에 치사(致仕)하고 산수간을 두루 방랑(放浪)하다가 월랑(月浪, 진안의 옛 이름)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여생(餘生)을 보내려 하였으나 얼마 후에 별세하니 마령면 강정리 석벽에 장구지대(杖屨之臺, 머무른 곳의 뜻)가 있다. 세종 때 좌찬성 대제학(左贊成大提學)에 증직(贈職)되었고 ‘문평(文平)’이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전극례(全克禮) : 호는 낭헌(浪軒), 본관은 천안으로 문평공(文平公) 문식(文軾)의 증손이며, 판중추(判中樞) 사미(思美)의 아들이다. 일찍이 방촌(厖村) 황희(黃熹)와 경암(敬菴) 허조(許稠)와 함께 서로 사우(師友)를 삼고 지냈다. 세종조의 정시(庭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정자(權知承文院正字)를 지냈으며, 호조판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다. 하지만 단종 폐위를 보고 강정으로 낙향하여 은둔하게 되었으니, 이 곳은 그의 증조인 문평공 문식이 마련한 곳이다. 그의 아들 사간(司諫) 자온(自溫)과 사직(司直) 자양(自讓)은 청령포(淸泠浦)에서 함께 순절하여 뒤에 사림의 공의(公議)로 나란히 이산사(駬山祠)에 배향되어 있다. 묘는 거사곡(居士谷) 자좌원(子坐原)에 있으며, 후손 광로(光魯)가 찬하고 한풍(翰豊)이 글씨를 쓴 묘갈명이 있다. 또 박기양(朴箕陽), 판서 민철훈(閔哲勳), 참판 김재순(金在珣), 참판 이용구(李龍九), 승지 이범석(李範錫), 승지 서광필(徐光弼) 등의 이름이 적힌 도학포장이 있으며, 이선호(李璇鎬)가 찬한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있다.
전자온(全自溫) : 호는 송당(松堂), 천안인(天安人)이다. 문평공 문식(文平公 文軾)의 현손(玄孫)이요, 호조판서(戶曹判書) 극례(克禮)의 아들이다. 타고난 자품(資稟)이 탁월하고 품성(稟性)이 강직(剛直)하여 충군애국(忠君愛國)을 스스로의 임무(任務)로 여겼다.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간(司諫)에까지 이르렀다. 세조 원년 병자(丙子)에 성삼문(成三問) 등이 상왕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죽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런 일에 거리낌 없이 정론(正論)을 펴다가 세조의 미움을 받아 만호(萬戶)로 강등(降等)되었다. 그 이듬해 상왕 단종이 승하(昇遐)하심에 아우인 사직(司直) 자양(自讓)과 같이 영월 청령포(寧越淸泠浦)에서 순절하니, 부인 순흥 안씨(順興安氏)도 공의 뒤를 따랐다. 이런 사적이 동학지(東鶴誌)와 호남지(湖南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전자양(全自讓) : 호는 죽헌(竹軒), 천안인(天安人)이다. 문평공 문식(文平公 文軾)의 현손(玄孫)이요, 호조판서(戶曹判書) 극례(克禮)의 아들이다. 타고난 바탕이 영오(穎悟)하고 지기(志氣)가 강개(慷慨)하였다. 세종조에 형인 사간(司諫) 자온(自溫)과 같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직(司直)에 이르렀다. 청현(淸顯)을 들어냄에 거리낌이 없어서 바른 말을 잘하여 세조의 미움을 받았다. 상왕이신 단종께서 승하(昇遐)하심에 백씨인 사간 자온과 함께 영월 청령포에서 순절하니,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도 그 뒤를 따랐다. 이런 사적이 동학지(東鶴誌)와 호남지(湖南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향사 축문(享祀祝文)]]
文平公 都隱 全先生 伏以 偉勳碩德 昭代名臣 道學文章 嘉惠後人
문평공 도은 전(문식)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덕이 높고 공로가 혁혁하셨고, 고려조의 명신으로 도학과 문장이 후인들에게 아름다운 은혜로 드리웠습니다.
浪軒 全先生 伏以 學本洛閩 敬直義方 貞忠卓節 烈日秋霜
낭헌 전(극례)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학문은 낙민[洛閩 낙양(洛陽) 출신인 정호(程顥)ㆍ정이(程頤)와 민(閩) 출신인 주희(朱熹)]에 근본하여 공경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을 방정하게 하였으며, 곧은 충성과 절개가 추상과 같았습니다.
松堂 全先生 伏以 竭忠報國 大義莫伸 兄難弟難 一體成仁
송당 전(자온)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했으나 대의를 펴지 못하고 형제가 한 몸으로 인을 이루었습니다.
竹軒 全先生 伏以 拒逆新王 舊主有臣 見義授命 扶植彛倫
죽헌 전(자양)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신왕을 따르지 않고 구주(舊主)의 신하로 의를 보아 목숨을 바쳐 이륜(彛倫)을 부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