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계사(龍溪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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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계사 전경용계사용계사 숭덕문용계서원 중건기
마령면 임진로 1932(평지리 162), 원평지마을 남동쪽 큰길가에 있는 추모재 최두칠(崔斗七)을 배향한 사당. 조선 철종 11년(1860)에 창건되었고,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60년 다시 설단되었고, 1980년 현위치에 복설되었다. 사우는 사당과 정문인 숭덕문(崇德門), 용동재(龍洞齋), 교직사(校直舍)로 되어 있다. 앞 건물은 용동재(龍洞齋)이고, 뒷 건물은 용계사(龍溪祠), 그 문은 숭덕문(崇德門)이다. 용계사는 전면 3칸 측면 2칸 기와 맞배지붕 양식이고, 용동재(龍洞齋)는 전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사당 앞 도로변에는 1945년에 세워진 이조참판 민병승이 찬한 최두칠묘도비(崔斗七墓道碑)가 있다. 용동재에 용계서원중건기(龍溪書院重建記)와 용동재기(龍洞齋記)가 걸려있다. 여기에는 중건의 연혁이 실려있다. 매년 음 2월 27일 제향한다.

【배향위(配享位)】
최두칠(崔斗七, 1683[숙종 9]~1756[영조 32]) : 자는 자건(子建), 호는 추모재(追慕齋). 본관은 전주로 충익공(忠翼公) 만육(晩六) 양(瀁)의 후손이다. 공은 자질이 특이하고 효우(孝友)가 천성을 이루어 어버이 섬김에 도리가 있었고, 존양(存養, 존심[存心] 양성[養性])이 깊고 조리(操履)가 굳건하여 성신(誠信)은 붕우간에 믿음을 주었고, 은애(恩愛)는 향당(鄕黨)에 두루 미쳐 사림이 그의 학문과 효행을 열거하여 사당에 제사도 지내고 조정에 천거도 하였다. 고종 기묘년(고종 16, 1879)에 이르러서는 특별히 포숭(褒崇)을 가하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추증되었다. 묘는 괘양산(掛陽山) 간좌원(艮坐原)에 있으며, 민병승(閔丙承)이 글을 짓고 김영한(金寗漢)이 전액(篆額)을 쓴 묘비명이 있다. 마령 원평지 용계사(龍溪祠)에 배향되어 있다.

【축문(祝文)】
追慕齋 崔先生 伏以 養志老萊 居憂于平章 敬薦芬苾 禮貌休明
추모재 최(두칠)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내동산 아래서 늙도록 지조를 지키시고, 상을 당하시매 평장리에서 시묘하시어 공경스럽게 향례를 올리니 예모가 밝습니다.

【용계서원 중건기(龍溪書院重建記)】 鎭은文獻鄕也라 先賢明宮이 在匸相望하니 馬靈之龍溪院도 亦其一也라 祠以妥追慕齋 崔先生 諱 斗七은 一方士林이 因而爲畏壘之奉者也라 先生이 以忠翼公 晩六先生 遠裔로 姿性이 敏悟하고 宇量이 弘偉하니 家庭氣脈之傳이 有不可誣者라 從遊於櫟泉 宋(明欽)先生하여 薰襲基爐鞴에 以孝悌忠信으로 爲其址하고 詩書禮樂으로 爲間架하여 奨進後學을 一如胡安定規模하고 救恤窮困하고 收育棄孩는 盖天性然也 而隠居山林에 能趾先美하여 爲昭代逸民焉이라 院之創이 在於純祖庚申 而撤於髙宗戊辰하니是其斯文之厄會也耶아 氣数之適然也耶아 蒼桑이 屢嬗에冉冉過百禩之遠이라 荒艸茂林이 蒙茸於邱園하고 破瓦殘礎가 埋沒於田畦하니 尋常樵牧도 指點而興嗟은 而况冠儒服儒하여 爲士林爲後昆者安得不愓然而感傷하고 䀌然而彷徨乎아 乃者雲裔 峻烈 相晥이 議於士林하여 周旋重建而峻烈이 嬰於二竪하여 命其子成就하고 因作修文之行이라 淳燁이 克遵遺訓하여 多擔物力하고 與諸族으로 竭蹶奔趍하며 多士가 釋經敦事에 聲援誼助而 澧鉉 永玉 永孫 元錫이 董其役하니 誠之極에 事利成이라 神棲靜肅하고 院宇精潔이라 於是에 進薦蘋藻하고 退講學問하여 上以寓羹墻之慕하고 下以報塵刹之誠이라 詩云髙山仰止에 景行行止라하니 可知僉君子讀先生之書하고 學先生之行하여 踐履篤實에 以副建祠建院之深誠而功告竣에 宋升煥 崔相晥 二氏 友가 屈賀長程하여 徵其記하니 是豈昏愚者所可堪가 辭不獲이라 謹書如右하니 烏能免掠美名涴壁之譏乎아 歲 辛酉(1981)春分節 晉陽 河千秀 謹記

【용동재 기(龍洞齋記)】 齋者난 齋戒之義니 稱之以龍洞은 因地名而揭其額者也니 卽龍溪祠之一齋戒室也라 其爲洞也山 有掛陽之雄蹲하고 江有白馬之淸漣하야 爲天作地藏之名區니 地靈人傑이 其理不差라 従古以來로 多碩德君子生於其間하야 淸風遠韻이 薰陶鄕省하니 追慕齋崔先生이 亦近世之其人이라 文章道學之經與緯난 先輩之述이 備焉하니 以淺識後生으로 不敢贅說而生而爲士林之師表요 歿而爲士林之宗仰하야 祠而報祀난 是子朱子之古禮요 周愼齋之遺䂓라 切惟僉章甫齋於斯也에 必有其所思乎山저 吾儕奉先生之祠하고 學先生之道하니 不以心而以靣則其祭也學也가 歸之於欺人也欺我也니 行義焉何如而不失於先生之訓迪하고 學問焉何如而不悖於先生之遺戒也오 有過則改之하고 無過則加勉하야 言顧行行顧言에 深省於朝하고 猛察於暮하야 切瑳焉琢磨焉互相飭厲에 百尺竿頭에 今日進一步하고 明日進一步하야 進進不己니 登髙自卑요 行遠自邇라 十尤之木도 生於毫末하고 九仭之山도 成於一簣니 孝友爲茶飯하고 詩禮爲裘葛하야 小心翼翼에 實踐力行하야 不讓於胡安定之門徒로 期之矣리라 院之復設也에 儒林與院裔가 竭蹷效勞而淳燁君이 遵先公意하야 特誠成就하니 可謂祖先之孝孫이요 父翁之孝子요 亦多公益事業하고 今爲崔氏大宗中都有事라 以相睆氏之命으로 賴余請記者난 永孫君也라 誼不獲辭하야 謹書如右나 未免乎釋氏所謂灸石爲粥이니 惟冀僉章甫匡正焉하노라. 有國之六十六年(1984) 甲子 春分節 晉陽 河千秀 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