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덕사(淸德祠)
운영자 23-12-26 18:25 67 hit
청덕사 전경청덕사 우측면
주천면 용덕리 산제마을 북쪽 산기슭에 있는 고령(高靈) 신씨(申氏) 사당. 청덕사는 후세 교육에 일생을 바친 한운재 신익형(閒雲齋 申益衡), 우한재 신득권(又閒齋 申得權), 난규재 신만휴(蘭葵齋 申萬休)를 배향한 사당으로 1928년에 건립되었으나 6․25 전란 때 소실되어 1954년 10월 27일 재건되었다. 맞배지붕의 함석집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이며, 앞은 맨 바닥, 뒤는 방으로 되어 있다. 3문은 함석지붕의 솟을대문으로 1957년에 세운 것이다.

【배향위(配享位)】
신익형(申益衡) : 유학자. 당호(堂號) 한운재(閒雲齋)
신득권(申得權) : 유학자. 당호(堂號) 우한재(又閒齋). 신익형의 자(子).
신만휴(申萬休) : 중학교교관. 당호(堂號) 난규재(蘭葵齋) 신득권의 증손(曾孫)

【향사축문(享祀祝文)】
維 檀君紀元四千三百○○年 歲次 九月朔二十日 敢昭告于
유세차 단군기원 4300년 음력 9월 20일 감히 분명하게 고하옵니다.
閑雲齋申先生 昭乎日月 巍乎泰山 却雲對坐 大知閑閑
한운재 신선생은 일월보다 밝고 태산보다 높아 구름 물리치고 마주 앉으니 큰 지혜 언제나 여유롭네.
又閑齋申先生 天性之親 愛日樂山 濂月胸灑 卲天心閑
우한재 신선생은 천성의 친함이 해를 아끼고 산을 좋아하였으며 깨끗한 달로 마음을 씻고 높은 하늘로 마음 한가로이 하였네.
蘭葵齋申先生 蘭氣葵忱 拜日香山 曷月告功 功極反閑
난규재 신선생은 난초 향기와 해바라기의 정성이라 해를 향하고 산 가득 향기롭게 하네. 어느 달에나 공을 아뢰나 공이 다하니 도리어 한가롭네.
玆値秋季 謹以 牲幣醴齊 粢盛庶品 式陳明薦 配 尙饗
가을을 맞이하여 삼가 예물을 갖추고 제수를 마련하여 이렇게 바치옵니다. 부디 흠향하옵소서.

【청덕사 기(淸德祠記)】 보한재(保閒齋) 선생의 뒤를 이어받은 후손들이 있으니 아름다운 일이다. 그는 오직 한운재(閒雲齋) 신공 휘 익형(益衡)이요 또 큰아드님 통정대부 우한재(又閒齋) 휘 득권(得權)이니 이 부자분의 사욕 없이 시원스런 행의는 명 조상에 명 후손임을 드러냄이다. 대개 한운재, 우한재 두 선생은 하나같이 천성이 영특하고 총명하며 학문이 넓고 깊어서 일찍이 서울에 유학하여 고관들과 사귀었으니 당시의 재상이나 장수들을 방문하여 시국에 관해 자기의 주장을 설명하고 권할 때는 “정치의 궁극적인 목표는 천하를 평안하게 하자는 것이니 그러자면 현철하고 사리에 밝은 선비를 천거해 기용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그 후 조정의 문무 재상들이 모여 문무 간에 지모 있는 인물을 천거할 제 이미 한운재 우한재 선생을 아는 인사도 많거니와 설사 모르는 인사라 할지라도 어찌 이 두 선생을 버리겠는가. 그런데 겉보기에는 국가 치안에 오히려 뒷짐 지고 있던 재상들이 두 선생을 기꺼이 받아들여서 연명으로 임금님께 상주하여 우한재 선생에게 정삼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내리니 선생은 옥관자에 금토를 입으시고 고향에 돌아오셨다. 이로부터 군왕에 대한 충성스런 마음 잊지 않을 것을 시문으로서 다했고 돌아가신 부조와 조상의 제사 장사에 이르기까지 예로서 정성을 다하였다. 우한재 선생이 성균관에 들어가 여러 박사들에게 주역과 경전을 강의할 때 박사들이 머지않아 공자 안자의 성인시대가 회복된다는 뜻에 대해 질문을 하니 공이 노래를 지어 대답하기를 “허물과 허물이 있음이여 나의 성남과 억울함을 나 스스로 잊어버리리로다. 어질고 어짊이 있음이여 나의 어질고 착함을 나 스스로 감당하리로다.” 하니 그러면 안자가 허물을 두 번 거듭하지 아니함과 성나되 다른 이에게 옮기지 아니함과 만인에 대하여 인자한 마음을 어기지 아니하는 옛 성현의 뜻과 참으로 가깝습니다. 하매 공이 대답하여 “그것이 공자님의 실당에 들어감이다.” 하였다. 학사들이 시를 읊으며 공의 학문과 견식이 넓고 큼에 감탄 하였고 공자의 십언인 충의의 뜻과 안자의 낙사인 넉넉함의 뜻을 얻었다고 하니 공은 영화로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어서 정훈을 이어받은 아름다운 행실이 날로 두드러져 효도하고 공경하고 화목하고 우애하는 일에 험잡거나 이간시키는 사람이 없었다. 아, 천지간에 이치가 있고 의리가 있고 성실이 있다한들 나라의 임금님과 가정의 부모님 외에 더 큰 분이 누가 있으리오. 임금을 진실로 사모하는 까닭에 방에서도 충성을 노래하고 다락에서도 충성을 다짐하며 시문으로 읊조리니 산에서는 개암이 드러나고 습지에서도 복령이 드러나 보였으며 부모를 진실로 사랑하니 흰 제비와 붉은 까마귀가 집안에 들어와 뜰에서 서식하는 이적을 보이니 이것이 두 선생을 가히 증험한 대략적인 현상이었다. 거룩하다! 천년이 가도록 두 선생의 아름다운 향기는 흐를 것이고, 두 선생은 혈식군자로서 사당에 영원히 봉향할 것이로다. 내가 신씨 가문이 명문이 된 까닭을 살펴보니 진실함은 문학을 겸하고 문학은 덕과 도리를 덮었기 때문에 한운재 우한재 두분의 현손이며 증손인 난규재(蘭葵齋) 신공 휘 만휴(萬休)가 청백한 행실과 절묘한 문사로 중학교관이 된 것을 알았도다. 난규제 선생의 맏아들 제헌 시우와 우한재 선생의 현손인 패우, 용우, 세 분이 선조상의 아름다운 도덕과 문학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별로 한 채 가묘를 세우니 용덕리의 운치와 경색이 훤하게 빛나도다. 가묘의 이름을 나에게 묻거늘 글 쓸 판자를 대하여 ‘청덕사(淸德祠)’로 하니 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