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절사(忠節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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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사 전경충절사 고명문충절사
성수면 봉황길 31-9[좌포리 31-9] 봉좌마을 북동쪽 산기슭 언덕에 있는 공주 이씨 사당. 순조 6년(1806) 이 마을에 세거하던 공주 이씨의 중시조 문성공(文成公) 송은 이명성(松隱李明誠)과 공숙공(恭肅公) 사봉 이명덕(沙峰李明德)을 제향하기 위해 창사하였다. 그 뒤 고종 6년(1869)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914년 다시 설단하여 제향하였고, 1971년 복설하여 오늘에 이른다. 사당에는 오병근(吳炳根)이 찬한 충절사 중건기(忠節祠重建記)와 문성공(文成公) 20대손 현기(現基)가 찬한 충절사 중수기(忠節祠重修記) 판액(板額)이 걸려있다. 담장 안에 사당이 있다. 사당은 전면 3칸 측면 1칸의 기와 맞배지붕이며,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다. 예전에는 충절사 앞에 작은 관리소가 있었는데, 2005년에 벽돌로 다시 건립하였다. 문중에서 매년 음력 2월 20일에 향사하고 있다.

【배향위(配享位)】
이명성(李明誠)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성수면 좌포리에 세거하는 공주 이씨의 중시조이다. 자는 경장(敬章), 호는 송은(松隱)이다. 고려 말 전공판서 정경공(貞敬公) 이엽(李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아우 사봉과 같이 목은에게 나가 학문을 닦았으며, 포은 정몽주와 친교를 맺은 사이였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적성감무를 거쳐 감찰어사 지제고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자 탄식하며, “나라가 망하는데도 목숨을 바칠 수 없게 되었으니 충신이 아니고, 어머니께서 늙으셨는데도 끝까지 봉양할 수 없게 되었으니 효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끝내 개성 만월대 아래에서 포은과 눈물을 흘리며 작별한 후 그 길로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이천 산중으로 들어가 백이숙제와 같이 절의를 지키며 숨어 살았다. 조선 태종이 여러 번 불렀으나 “물에 빠져 죽을지언정 새 왕조에서는 벼슬하지 않겠다.” 하고는 끝내 나오지 않고 은둔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송은의 기록은 고려조 충열록에 실려 있다.
이명덕(李明德, 1373~1444)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성수면 좌포리에 세거하는 공주 이씨의 중시조이다. 자는 신지(新之), 호는 사봉(沙峰). 할아버지는 운증(屛曾)이며, 아버지는 엽(曄)이다. 1396년(태조 5)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춘추관에 보직되었으며, 사헌부감찰·사간원우헌납·장령·사인·집의·좌사간대부·형조참의 겸 지도관사(刑曹參議兼知都官事) 등을 역임하였다. 1415년(태종 15)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이 되고 좌부대언에 승진하였다. 세종이 즉위하자 이조참판을 거쳐 병조참판으로 전임되었고, 그 뒤 강원도관찰사·예조참판·대사헌·동지총제를 역임하였다. 1430년(세종 12) 공조판서가 되었고, 이듬해 병조판서를 거쳐 다시 공조판서가 되었다. 1438년 중추원부사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그 뒤 판한성부사·인순부윤(仁順府尹)을 지냈다. 1442년 70세가 되어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다시 지중추원사로 복직하였다. 이어서 판중추원사에 승진하여 궤장을 하사받았다.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공주의 명탄서원(鳴灘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충절사 상향문(忠節祠 尙饗文)】
文成公 松隱 李先生 伏以 遯世不悔 立我人極 秉義維何 同歸圃牧
문성공 송은 이(명성)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세상을 등지고도 후회가 없으니 우리 인도의 극치를 세우셨고 의가 무엇인가를 포은(정몽주)·목은(이색)과 함께 드러내셨습니다.
恭肅公 沙峰 李先生 伏以 在家孝子 立朝忠臣 隱顯終始 要盡天倫
공숙공 사봉 이(명덕)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집에서는 효자요 입조해서는 충신이니, 진퇴가 분명하셨고 천륜을 다하고자 하셨습니다.

【忠節祠重建記】 鎭安 佐浦里在 龍沼之下 鳳臺之陽山 回水抱洞府 氤氳而開豁 麗明寔爲 月浪之一名區 李氏居焉 田園門弟櫛比隣接 奉先聚族之勝所也 其先有文成公松隱先生 恭肅公沙峰先生 二公兄弟而受業于牧隱先生之門 講磨於圃隱先生 遂成大儒而 松翁殿中侍御使 見麗運訖入杜門洞 固守 罔僕之義 沙翁仕於李氏歷事四朝而盡已 出處雖殊 忠節一也 故國家賜諡 士林祠祀 公州之鳴灘 鎭安之佐浦祠是矣 高宗戊辰(1868) 見撤雲裔之恨 士林之嘆 曷勝道哉 乃封壇薦芬有年 後孫現基與儒林東萊鄭貴泳諸甫 不忍於地水之荒廢 合謀而現其翁全擔財政 裁源助役 重建巋然祠宇 復若舊貌 於是雲裔之寓祠 士林之駿奔 是有其所 歲乙酉(1945)也 後四十一丙寅 南至月 近入八旬之現基翁 遠來徵其於余 余今大耋 實難堪當 固辭不得 遂書如右而塞請 檀紀四三一九年 丙寅 大雪節 垂楊 吳炳根 謹述 文成公 二十代孫 燾基 謹書.
【풀이】 진안 좌포리에 있는 용소(龍沼) 아래에 봉황대가 있는 양산이 있는데 물이 마을을 굽어돌고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참으로 밝고 고우니 월랑 명구의 하나로 이씨가 세거하는데 그 자손이 인접에 즐비하여 선영제사에 모이기 좋은 곳이다. 그 선조에 문성공(文成公) 송은선생(松隱先生) 공숙공(恭肅公) 사봉선생(沙峰先生) 두 형제분이 목은선생(牧隱先生)과 포은선생(圃隱先生)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송은선생은 전중시어사(殿中侍御使)에 이르렀는데 고려왕조가 망하는 것을 보고 두문동에 들어가 의를 지키고 은둔하였다. 사봉선생은 조선왕조에서 네분 임금을 대대로 섬기며 충절로 일관하여 조정으로부터 시호가 내렸다. 사림들이 公州(公州)의 명탄(鳴灘)과 진안 좌포의 사당에 배향하였다. 고종5(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니 후손들의 한이 되고 사림들이 탄식하였으나 시세의 흐름을 어찌 이기리요. 이에 봉분으로 설단을 하고 향사를 지내오기를 여러 해였다. 후손 현기(現基)와 더불어 유림(儒林) 정귀영(鄭貴泳)등 선비들이 (사우 터가) 황폐해 감을 이기지 못하여 서로 의논하여 현기 옹(現基翁)이 재정(財政)을 전담(全擔)하기로 하고 서로 도와 옛자리에 규연(巋然)한 사우를 중건하니 옛모습을 찾았다. 이에 후손들은 사당에서 향사(享祀)를 올리게 되고 사림(士林)은 준망(駿奔)했는데 바로 을유(1945)년이었다. 그후 41년이 지난 병인(1986)년 동짓달 팔순이 다 되는 현기옹이 멀리 나를 찾아 글을 청하니 나도 80이 넘어 실로 감당키 어렵다 고사(固辭)했으나 뿌리치지 못하여 우측 글로 청에 응한다. 단기4319(1986)년 병인 대설절 수양(垂楊) 오병근(吳炳根) 삼가 적고, 문성공 20대손 도기(燾基) 삼가 쓰다.

【忠節祠重修記】 祠宇之建이 在於往乙酉之歲하니 距今甲戌하면 倏爾星霜이 於焉五十年也라 以風雨之所侵으로 間生補修處하니 諸族이 各自隨力出財하야 不拘罕有之酷暑하고 遂至完役하니 實是先靈陰隲之德이며 後孫齊誠之所致也니 其非欣懽哉아 是役也여 族大父 金仁(金龍)씨 六仁(六燮)氏 族叔 炳鎭(龍鎭)氏와 再從弟 燾基(炳燾) 族弟 龍基(炳龍) 烈基(炳烈) 振基(炳振) 族孫 栽源(吉善) 等이 始終賢勞하니 惟願來裔는 相承爲鑑하야 隨毁卽補하고 勿惰修葺之道하야 惟誠慕先之事하면 百世不替而繼新矣리니 以是切望焉하다. 檀紀4327(1994)年 甲戌 小雪節 文成公二十代孫 現基 謹識, 文成公二十代孫 燾基 謹書.
【풀이】 사우(祠宇)를 세운 때가 지난 을유(乙酉, 1945)년이니 지금 갑술(甲戌)년으로부터 어언 50년이 흘러 풍우가 스며들어 틈새로 보수할 곳이 생기니 제족(諸族)이 각자 형편대로 출재(出財)하여 드문 혹서(酷暑)를 불구하고 드디어 역사(役事)를 마치니 이것이 바로 선령(先靈)의 음덕이며 후손들 모두의 정성에 따름이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이 역사는 족대부(族大父) 金仁(金龍)씨 六仁(六燮)氏 族叔 炳鎭(龍鎭)氏와 再從弟 燾基(炳燾) 族弟 龍基(炳龍) 烈基(炳烈) 振基(炳振) 族孫 栽源(吉善) 등이 시종 힘써 주셨으니 생각건대 오는 후손들은 이를 이어 훼손되면 바로 보수하고 지붕을 보수하는데 게으르지 않아 정성으로 선조를 추모하면 백세에 바꾸어지지 않고 새로 이어질 것이니 이를 바라는 바다. 단기4327(1994)년 갑술 소설절 문성공 20대손 현기(現基) 삼가 적고, 도기(燾基)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