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계사(靈溪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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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계사영계사 명덕문
마령면 원강정1길 42 강정마을 북서쪽에 있는 서원 겸 사당. 강정마을 북쪽 구릉지대에 영산사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만육 최양(崔瀁), 쌍첨 이인현(李仁賢), 충경공 이정란(李廷鸞), 규암 전계종(全繼宗)을 배향한 사당으로 인조 27년(1649)에 창건되었으나 고종 6년(1867) 서원훼철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그 뒤 1870년 유허비가 세워졌고, 1900년에 다시 설단되었으며, 1948년 복설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사우(祠宇)는 사당, 정문,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며, 정문인 명덕문(明德門) 1동과 관리사 1동이 있다.정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 맞배지붕으로 입구 명덕문 좌측에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음력 2월 중정일(中丁日)에 제향한다.

【배향위(配享位)】
최양(崔瀁, 1351[충정왕 3]~1424[세종 6]) :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백함(伯函), 호는 만육(晩六) 또는 장륙당(藏六堂). 아버지는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지(贄)이며, 어머니는 영일 정씨(迎日鄭氏)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운관(云瓘)의 딸이다. 외삼촌 정몽주(鄭夢周)에게 수학하였으며,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상서·대제학 등을 지냈다. 1384년 예문관직제학에 재임할 때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서북면 정벌에 참여하였고, 그 뒤 대사간 문하찬성사에 이르렀다.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백운면 반송리 팔공산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태조가 친구로 대우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과 전록(田祿)을 하사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후에 전주의 대승동으로 옮겨 말년을 보냈다. 전주 서산원(西山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익공(忠翼公)이다. 백운면 반송리에 그를 기리는 구남각이 있고, 안에 비를 세웠다. 비에는 기정진(奇正鎭)이 찬한 둔적유허비명이 새겨져 있다.
이인현(李仁賢, 1497~1570)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안으로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교(校)의 5대손이다. 임오년(壬午年 : 중종17, 1522)에 사마 양시(司馬兩試 :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3년 뒤인 을유년(乙酉年)에는 문과(文科)에 급제하니 그때 나이 29세였다. 성균관(成均館)에 분속(分屬)되어 얼마 후에는 전적(典籍)에 승배(陞拜)되고 예조정랑(禮曹正郞)이 되었다. 종부시정(宗簿寺正)을 거쳐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에 제배(除拜)되었다가 김제군수(金提郡守)로 나갔었고 임기가 다하자 금마군수(金馬郡守)로 이수(移授) 되었다가 담양부사(潭陽府使)에 제수(除授)되었다가 영해부사(寧海府使), 공주목사(公州牧使)에 제배되었으나 임기가 다하기 전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유월촌(幽月村)에 터를 잡고 살았다. 마을 남쪽에는 산이 있어 마이(馬耳)인데 두 봉우리가 우뚝 반공(半空)에 속아있다. 거기에서 뜻을 취하여 당호(堂號)를 쌍첨(雙尖)이라 하니 대체로 그 유연(悠然)한 뜻을 취한 것이다. 그리하여 옛 사람의 서책을 좌우에 쌓아놓고 빠짐없이 훑어보면서 저술에 주력하였다.
이정란(李廷鸞, 1529~1600)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다. 본관은 전의, 자는 문보, 시호는 충경으로 전북 전주 출신이다.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서정자, 저작박사를 거쳐 성균관전적을 지냈으나 사이가 안 좋은 정여립의 배척으로 해미 현감, 양재찰방, 개성부도사 등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왜군이 웅치 전투에서 관군과 의병을 무찌르고 전라도에 침입하자 64세의 노구로 부민을 거느리고 전주성을 지켰고 이 공으로 태상시첨정에 올랐고 군기시정을 거쳐 수원 부사와 공주 목사가 되었으나 진휼과 농정이 허술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왜군이 전주성을 포위하여 큰 혼란이 일어나자 수성부장이 되어 전주성을 지키다가 전주부윤이 죽자 전주부윤 겸 삼도소모사로 제수되었다. 사후 전주의 한계서원에 배향되었고, 진안군 마령면 영계사에 사우가 있다.
전계종(全繼宗, 1516[중종 11]~1592[선조 25]) : 자는 백윤(伯胤). 호는 규암(葵菴). 본관은 천안으로 문평공(文平公) 문식(文軾)의 후손이며, 자온(自溫)의 증손이다. 중종 31년에 문과하여 시강원(侍講院) 습독(習讀)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적의 위협을 받자 분연(憤然)히 크게 꾸짖고 시종 굴하지 않으니, 마침내 적의 해침을 당하였다. 인조조에 공조참의에 증직되고 사림(士林)이 서원(書院)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묘는 거사곡의 자좌원(子坐原)에 있으며, 민여로(閔汝老)가 찬하고, 신응삼(申應三)이 글씨를 쓴 묘갈명이 있다. 또 조중목(趙重穆)이 글을 짓고, 유진찬(兪鎭贊)이 전액(篆額)을 쓰고, 이선호(李璇鎬)가 글씨를 쓴 묘갈명 병서(墓碣銘幷序)가 있다.

【상향축문(尙饗祝文)】
忠翼公 晩六 崔先生 伏以 義炳春秋 節爭日月 天經以立 百世風烈
충익공 만육 최(양)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의로움은 춘추에 전하고, 절의는 일월과 다투며, 백세에 풍렬은 백세에 변치 않을 것입니다.
雙尖 李先生 伏以 白首山廬 執喪過禮 賢孝之範 不肖者礪
쌍첨 이(인현)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백수산 여막의 삼년상은 예를 넘어선 극진한 효성으로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忠景公 李先生 伏以 行篤孝友 忠著捍衛 風聲百代 崇報無替
충경공 이(정란)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효우에 독실하고, 충성을 다해 적을 막아 명성은 백대에 전해질 것이며, 우러름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葵菴 全先生 伏以 乾剛之氣 永貞之節 忠孝兼備 百世風烈
규암 전(계종)선생은 삼가 고하건대 건강(乾剛)한 기개와 곧은 절의에 충효를 겸비하여 그 명성은 백세에 전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