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령면 운계로 295-78[계서리 313]에 있는 창원(昌原) 정씨(丁氏) 집안의 재각.

    【敬慕齋記】 鎭安之萊東山下白馬川上有溪南里直其後麓 封之崇四尺者 故丁公諱載元曁其孫諱坤衣履之藏 而二公俱以配位祔焉窆於玆世代已遠 而尙無齋宿處 於是齊闔門之議 作爲齋舍 八代孫浩鉉 九代宗孫魯洙氏 問記於余 余惟觀世之人 能知本者鮮矣 先代之苦心設施 爲榭爲閣 傳之累世 翼然者壞 而或莫爲之文 煥然者渝 而或莫爲之修矣 今丁氏之於先邱 封植以固之 儀物以賁之 蘋藻以薦之 齋舍以守之 子孫之所可以致其誠者 宜無所不備矣 亦可謂知追遠報本之歸厚矣 竊念公以游軒先生之五世孫 必有忠孝詩禮傳授之貽謨 則安得不景而慕之於于羹于墻也 況起居於斯 望丘墳之上下 瞻松柏而鬱蒼 精靈之陟降 洋洋在玆 其不油然惕然而興感者乎 詩曰 不念爾祖 聿修厥德 願其雲仍盍相勉哉 光復後三十三年丁巳八月初言 駕洛 金亨在 記.
    【풀이】 진안(鎭安)의 내동산(萊東山) 아래 백마천(白馬川) 가에 계남리(溪南里)가 있는데 바로 그 후록(後麓)에 4척(尺)의 봉분이 있으니 고(故) 정공(丁公) 휘 재원(載元)과 그의 손자 휘 곤(坤)의 묘소이고 두 공(公)이 모두 그 배위(配位)와 합부(合祔)되어 있다. 여기에다 묘를 쓴 지 세대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아직까지 재숙(齋宿)할 곳이 없었다. 이에 온 문중의 논의가 합치되어 재사(齋舍)를 짓고 8대손 호현(浩鉉)과 9대 종손 노수(魯洙)가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내가 보기에는 세상 사람이 능히 근본을 아는 자가 드물었다. 선대(先代)에 애써 경영하여 정자(亭子)를 짓고 재각(齋閣)을 지었으나 몇 대를 내려오면 우뚝 솟은 것이 무너졌어도 더러는 중수하지 않고 선명하던 것이 투색하였어도 더러는 수리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정씨(丁氏)는 그 선영(先塋)에 봉축을 다시 하여 공고히 하고 석의(石儀)를 세워 보기 좋게 꾸미고 제품을 장만하여 제를 올리고 재사를 지어 수호하는 등 자손으로서 바칠 수 있는 정성은 이미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역시 추원(追遠)과 보본(報本)이 민속(民俗)을 돈후(敦厚)하게 함을 알았다 하겠다. 적이 생각건대 공은 유헌선생(游軒先生: 이름은 황<熿>임)의 5세손이므로 틀림없이 충효(忠孝)와 시례(詩禮)로 전수(傳授)한 유모(遺謨)가 있었을 것이니 어찌 갱장(羹墻)*에 우모(寓慕)한 바가 없었겠는가 하물며 이곳에서 기거(起居)하면서 묘소의 위와 아래를 바라보고 송백(松栢)의 울창함을 쳐다보면 정령(精靈)이 척강(陟降)하여 양양(洋洋)하게 곁에 있는듯 하였을 터이니 어찌 성하게 애절하게 감회가 이는 바가 없었겠는가 ‘시(詩)’에 이르기를 너의 조상을 생각지 말고 너의 덕을 닦으라[不念爾祖, 聿修厥德] 하였으니 바라건대 자손들은 어찌 서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갱장(羹墻): 사모함이 지극함을 말함. 옛날 요(堯)가 죽자 순(舜)이 요를 어찌나 사모했던지 담장을 바라보면 거기에 요의 얼굴이 비치고 국그릇을 보면 거기에도 요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함.
  • 성수면 산주길 111-6[도통리 산 101-1] 도통리 산주 마을에서 북북동쪽으로 0.7km 지점 거사곡에 있는 천안 전씨(天安全氏) 집안의 재각. 1933년에 건립되었으며, 1946년에 중수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기와 팔작지붕이며 문은 솟을대문이다. 문앞 오른쪽으로 낭헌 전극례 신도비(浪軒全克禮神道碑)가 있다.

    【敬慕齋記】 鎭安郡西聖壽坊居士谷麓 延安宋氏世藏之地也 故迪順副尉公諱裕景 當燕山昏朝 絶意榮途 挈家入鎭 隱居行義 訓誨後進 暇日逍遙泉石而終 壽藏在斯 年久無誌 未能的知其墳取古有望墓爲壇而祭之禮 築壇于塋域之下 歲薦一祀 齋宿無所 雲仍以是憂之 合謀諸族 辛丑春 乃構一齋 顔以敬慕 盖慕先之所 至非敬則易慢 特表敬字 可謂知要務也 相漢基善## 尸其役 極殫誠 而相元周煥俊煥升煥順煥 來請余記 世好難辭 斂襟而應曰 夫人之上墓也 履霜悽愴 情之常也 臨祭致敬 禮之常也 不有其常 則誠之慢也 其敬與慢 在自勵而已 奚關記之有無哉 然無已則有一可諗者 根之厚者 枝必蕃 源之深者 流必遠 延安氏 世趾其美 根旣厚而源旣深矣 噫 祖先雖有盛德 可及於百世 而由子孫頑率奢傲 以墜其祀者多矣 今延安氏 克殫追遠之誠 吾知其家行 率皆善繼先德也 凡入斯齋者 盡其敬慕之道 世世不替 方可謂齋之名得矣 豈不惕然加勉哉 竊聞公之孫月溪諱琳 以一齋李先生高弟 學行名世 立祠俎豆玄孫雲圃諱大弘 行義著聞 六世孫四昆季諱眞儒明儒哲儒瑞儒壎篪迭唱 睡仙別業 遺韻不沫 至十二世孫黙軒諱希濂 嘗師事吾王考淵齋先生 邃學德行 表準鄕邦 推以其子姓之昌大 可知公燾後垂裕之厚矣 繼自今 公洋洋之靈 陟降于是 永垂庇騭之無窮矣 爲公後承者 益可念念 聿修厥德哉. 檀紀四千二百九十六年癸卯肇. 恩津宋在晟記. 【경모재기】 진안(鎭安)의 군서(郡西) 성수방(聖壽坊) 거사곡(居士谷)의 산록(山麓)은 연안송씨(延安宋氏)의 세천(世阡)이다. 고(故) 적순부위공(迪順副尉公) 휘 유경(裕景)이 연산(燕山)의 암울한 때를 당하여 벼슬길에 마음을 접고 가권을 거느리고 진안으로 들어와 숨어 지내면서 의(義)를 행하고 후진들을 가리키면서 여가에는 천석(泉石)을 소요(逍遙)하다가 세상을 마쳐 그 수장(壽藏:묘소)이 여기에 있었으나 해가 오래되고 기록한 것이 없어 그 무덤을 적실히 알지 못하게 되자 옛사람이 무덤을 바라보고 단(壇)을 묻고 제사를 올리던 예(禮)를 취하여 묘역의 아래에다 단을 쌓고 해마다 제사를 올리고 있으나 재숙(齋宿) 향 처소가 없기 때문에 후손들이 이를 걱정하여 온 집안이 합의를 하여 신축년(辛丑年) 봄에 재사(齋舍) 한 채를 지어 경모(敬慕)라고 현판을 걸었다 대체로 조상을 추모하는 처소는 지극히 공경스럽지 아니하면 태만하기 쉬우므로 특별히 경(敬)자로 표하였으니 가위 요무(要務)를 알았다고 하겠다. 이 일에는 상한(相漢), 기선(基善)이 도맡아 정성을 극히 다하였다. 상원(相元), 주환(周煥), 준환(俊煥), 승환(升煥), 순환(順煥)이 나를 찾아와 기(記)를 부탁하였는데 세호(世好)가 있으므로 사양하기 어려워 옷깃을 여미면서 승낙을 하였다. 대저 사람이 묘소에 올라 상로(霜露)를 밟으면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은 정(情)의 떳떳함이오 제사에 임하여 공경을 다하는 것은 예(禮)의 떳떳함이니 그 떳떳함이 있지 아니하면 이는 정성이 해이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 공경과 태만은 스스로 면려(勉勵)하기 여하에 달려있을 따름이니 기(記)가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미덥지 못하다면 한 가지 증빙(證憑)이 있나니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가지가 반드시 무성하고 근원이 깊은 물은 흐름이 반드시 장원(長遠)한 법인데 연안송씨는 대대로 선대의 훌륭함을 잘 이어왔으니 뿌리가 이미 튼튼하고 근원이 이미 깊은 것이다. 아, 선대(先代)에 비록 성덕(盛德)이 있어 백세(百世)토록 내려갈 것 같다가도 자손이 어리석고 경솔하고 호사스럽고 방만하면 그 이어옴을 실추시킨 경우가 많이 있다. 지금 송씨는 추원(追遠)하는 정성을 능히 다하고 있으니 그 가풍(家風)이 거의 모두 선대의 성덕을 잘 계술(繼述)하고 있음을 나는 알겠다. 이 재실(齋室)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은 경모(敬慕)의 도리를 다하여 대대로 침체함이 없어야만 비로소 재사의 명칭이 그 뜻을 얻었다 할 것이니 어찌 마음을 가다듬고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들으니 공의 손자 월계(月溪) 휘 림(琳)은 일재(一齋) 이선생(李先生: 이름은 항<恒>임)의 고제(高弟)로서 학행(學行)으로 이름을 떨쳐 사당을 지어 제(祭)를 올리고 있고 현손 운포(雲圃) 휘 대홍(大弘)은 행의(行義)로 드러났으며 6세손 4형제인 휘 진유(眞儒), 명유(明儒), 철유(哲儒), 서유(瑞儒)는 훈지(壎篪: 둘 다 악기인데 우애함을 뜻함)을 번갈아 불면서 수선(睡仙:신선의듯)의 별업(別業: 은사<隱士>의 사업)의 유운(遺韻)이 식지 않았으며 12세손 묵헌(默軒) 휘 희렴(希濂)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우리 조부 연재선생(淵齋先生)을 스승으로 모셔 깊은 학문과 덕스런 행실로 한 고장의 표준(表準)이 되었었는데 자손이 창대(昌大)함으로 미루어보면 공이 후손을 끔찍이 돌봐주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후로도 공의 양양(洋洋)한 정령(精靈)이 여기에 척강(陟降)하여 무궁토록 음복(蔭福)을 끼쳐줄 것이니 공의 후손이 된 사람은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덕을 닦을 지어다. 단기4296(1963)년 은진(恩津) 송재성(宋在晟) 기.

    【경모재 상량문】 선조의 적덕(積德)이 많으면 풍운(風韻)이 천추토록 길이 남고 후예의 여경(餘慶)이 시들지 않으니 산재(山齋)가 하루아침에 지어졌도다. 근간하게 경영하니 마침내는 이루어지는구려. 생각건대 우리 선조 적순부위부군(迪順副尉府君)께서는 연안(延安)의 화벌(華閥)이오 고려(高麗)의 명가(名家)였도다 효(孝)로써 어버이를 섬겨 온정(溫情: 동온<冬溫> 하정<夏情>) 고면(告面: 출필고<出必告> 반필면<反必面>)에 때때로 살폈고 신(信)으로써 벗과 사귀어 절차(切磋)탁마(琢磨: 학문을 닦는 모양)하여 날로 조예가 더해갔다. 행의(行義)는 단정하여 오상(五常: 오륜<五倫>)의 도리 잘 준행(遵行)했고 재주는 뛰어나 육예(六藝: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의 분야에서 노닐었다 어찌 한 시대의 명류(名流)라고만 할건가 가히 백세(百世)의 사표(師表)라고 할 만하다 일찍 과거 공부 일삼아 용문(龍門)에 올라 휘날렸으나 잠자기 암울한 세상 만나 임천(林泉)으로 물러나 두류(逗遛)하였다. 풍월(風月) 읊어가며 세상의 염량(炎凉) 아랑곳 않고 영재(英才)가르치며 문밖에 척설(尺雪)*이 쌓인 줄도 몰랐었다. 이곳 성수방(聖壽坊) 거사곡(居士谷)은 수장(壽葬)으로 의리(衣履)가 묻힌 곳이다. 동쪽 사자 남으로 고개 두르니 계봉(鷄峯)의 깃발 늘어서고 서쪽 삽살개 북으로 꼬리 두르니 응치(鷹峙)의 휘장 둘러쳐졌다. 병화(兵火)가 누차 침범하니 분명한 묘소 분별치 못하나 우로(雨露)가 때로 적시니 망극한 통한(痛恨)이 더하였다. 이에 단을 받들고 경모(敬慕)하니 양위(兩位)의 혼령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매번 제사를 올릴 때에는 목욕재계할 처소 없음이 한스러웠는데 통문(通文)을 보내 효유(曉諭)하던 날 원근에서 모두 정성을 다하였다. 그 당시 선인(先人)들이 못했던 것은 사체(事體)가 중난(重難)해서였는데 오늘날 후손들이 떠맡으니 난만(爛漫)한 합의를 보았다. 돌아보면 이 우면(牛眠), 귀식(龜食: 둘 다 좋은 묘자리의 뜻)의 언덕에 새가 날 듯 꿩이 펄럭이는 듯한 집 보게 되었는데 진씨(甄氏)*가 정자 짓는 제도 여기에 근사하고 한천(寒泉)*에 재사 짓는 규모 거의가 방불(彷佛)하다. 이는 대체로 선대의 사적 사모하고 일가간에 친목하여 후세에 전하려는 것이지 어찌 거처 편히 하고 외모 보기 좋게 하여 남에게 자랑하려는 것이던가 초수(草樹)에 꽃을 더하니 산천(山川)도 광채가 더한다. 여러대의 묘소가 흩어져 있으니 『주례(周禮)』 족분(族墳: 가족 묘지)의 제도를 따르고 일천 가지의 화수(花樹) 연면(延綿: 길게 이어옴) 하니 위가(韋家: 당<唐>나라의 위씨<韋氏>)의 단란(團欒)했던 즐거움이 있도다. 불일내(不日內)에 이뤄지니 신명(神明)의 묵우(黙佑) 있음을 알겠고 영년(永年)을 기약하니 자손들의 게으르지 않은 보수(補修)를 바란다. 이에 단인(短引: 짧은 시. 인은 시체<詩體>의 하나임)을 가지고 상량 올림을 돕노라
    아랑위(兒郞偉)*, 동쪽 들보 올리니
    부상(扶桑)*의 새 해가 난간에 붉구려
    이 마음도 어찌하면 저와 같이 밝을고
    효사(孝思)는 길이 경모(敬慕)에 있다네
    아랑위, 서쪽 들보 올리니
    큰 들판 망망하여 눈앞에 아스라하네
    격양가(擊壤歌) 가운데 이 해도 풍년이 들어
    집집마다 높은 노적가리 가즈런하네
    아랑위, 남쪽 들보 올리니
    -2자 결- 산세(山勢) 하늘에 닿았네.
    지령(地靈) 인걸(人傑) 길이 침체하지 않나니
    나라와 집안 일으킬 사람 몇이나 나오려는가
    아랑위, 북쪽 들보 올리니
    -4자 결- 천극(天極)*을 지탱하네.
    사람들은 높아서 올라가지 못하다 말하지 말게나
    걸음 걸음 오르고 또 오르면 오를 수 있다오
    아랑위, 위쪽 들보 올리니
    -2자 결- 일월(日月) 항상 명랑하네.
    영허(盈虛) 소장(消長) 누가 능히 알건가
    묘리(妙理)는 돌고 돌아 만상(萬像)을 주네
    아랑위, 아래쪽 들보 올리니
    관개(冠蓋)*로 너울 너울 지나가는 길손들
    분분(紛紛)히 찾아와 시(詩)를 던져주니
    훈훈(薰薰)한 술로 서로 술잔을 주고 받네.
    엎드려 바라옵건대 상량을 올린 뒤에는 천신(天神)은 음으로 돕고 지령(地靈)은 양으로 보호하여 문채나는 책상과 선명한 창살은 해와 달의 비침 넉넉히 받고 위의 기와와 아래의 주춧돌은 영원히 비바람의 재앙없어 들보와 석가래 길이 새롭고 향화(香火)는 침체됨이 없게 하소서.
    *척설(尺雪) : 한 자(尺)가 쌓인 눈. 송(宋)의 유학자인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방안에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는데 그 제자인 양시(楊時)와 유작(游酌)이 밖에 와서 인기척을 하니 안에서 응대가 있었으나 들어오라는 말이 없어 그대로 섰는데 얼마가 지났는지 눈이 자로 쌓여 무릎에 닿았다. 그제서야 이천이 깨닫고 문을 열어보니 두 사람이 눈 속에 서 있었다 함.
    *진씨(甄氏): 송대(宋代) 사람으로 진군(甄君) 이라고만 나오고 이름은 전해지지 않음. 그가 집이 가난하여 부모의 장례를 모시지 못하고 있다가 이웃의 도움을 받아 부모형제를 한 곳에 장사를 지내고 묘막(墓幕) 한 채를 지으니 진사도(陣師道)가 그의 청을 받고 사정(思亭)이라 명명(命名)하고 기(記)까지 지어 주었다. 참고로 甄은 견과 진의 양음(兩音)이 있으나 성으로 호칭할 때에는 진으로 발음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甄萱을 견훤이라 발음하는 것은 사실(史實)을 상고하지 않은 소치라 여겨진다.
    *한천(寒泉): 중국 복건성(福建省) 건양부(建陽府)에 있는 지명. 이곳에 주자(朱子)가 정사(精舍)를 지었는데 주자의 맏아들이 죽자 여기에다 빈소(殯所)를 설치하고 재사(齋舍)로 삼았음.
    *아랑위(兒郞偉): 전해지는 말로는 힘을 합치게 하기 위한 구령(口令)으로서‘어기영차’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음.
    *부상(扶桑): 동쪽 바다에 있는 전설상의 나무. 해가 그곳에서 뉘었다가 매일 아침에 떠오른다고 함.
    *천극(天極): 極은 극점(極點), 즉 정점(頂點)을 말하니 하늘의 정점이라는 뜻임.
    *관개(冠盖): 의관(衣冠)과 거개(車盖). 녹녹(碌碌)치 않은 행객(行客)의 뜻이 있음.
  • 성수면 내곡길 69-4[신기리 산 47-1], 내곡마을 어귀 산기슭에 위치한 천안 전씨 재각. 가재(嘉齋) 전동흘(全東屹)을 제향(祭享)한다. 재각은 전면 3칸 축면 2칸이며 솟을대문으로 좌우에는 행낭채가 2개씩 달려 있고, 대지가 경사가 있어 옹벽을 치고 그 위에 재각을 지었다. 1968년에 중창하였다. 김재석(金載石)의 중건기에 의하면 기존에도 전동흘의 사당이 있었는데 당시(1968) 100여 년 전에 퇴락하였다고 적고 있다. 재각에는 김재석(金載石)이 찬한 광국재중건기, 김종가(金種嘉)가 찬한 광국재상량문 등의 판액(板額)이 걸려있다. 재각 옆(동)에는 전동흘신도비가 있다.

    【배향위(配享位)】
    전동흘(全東屹.1610[광해군 2]∼1705[숙종 31]). 조선 후기 무신.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사탁(士卓), 호는 가재(佳齋). 고조는 전이충(全以忠), 증조는 전규, 조는 전수감, 부는 전대승으로 정묘호란 때 순절하여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644년(인조 22) 심기원의 역모에 창의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 공이 있어 효종 대에 장사랑이 되었고, 바로 선전관을 거쳐 흥덕 현감이 되었다. 1650년(효종 1) 봉림대군이 등극한 후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우암 송시열이 전동흘과 이상진, 소두산 세 사람을 동시에 추천하니 이들을 ‘호남삼걸’이라 하였다. 강원 병사, 충청 병사, 황해 병사, 경상 좌수사 등 4수사(水使) 7병사를 역임하였고 훈련대장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다. 조정에서 청나라 몰래 창덕궁 옆에 대보단을 설치하여 임진왜란에 원군을 보내준 명의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냈다. 청국 사신이 이를 문제 삼아 조정에 압력을 가하자 전동흘에게 훈련대장과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내려 해결토록 하니 전동흘이 해결하였다. 또한 철산 부사로 있을 때 장화 홍련의 원혼 사건을 해결한 것으로 유명하여 많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묘는 진안군 진안읍 가림리 들판 임정 뒷산에 있다. 그 후 성수면 좌산리 가수 마을 뒷산으로 이장하고 신도비를 세웠다.

    【光國齋重建記】 齋是故元戎嘉齋全公諱東屹虔香之所, 而風雨傾頹, 荒址殘礎, 使人興嗟於百餘載矣. 幸兹今仲春, 公後孫泰成, 發議重建, 庸甲俊根甲錫泰珍成根宗根炳年諸彦, 樂而従之, 告竣於三朔, 相與議曰, 雖無齋號所傳, 今亦闕之, 於義不可也. 或以著存, 或以光國, 甲乙持論, 未得歸一. 炯順就正於余, 余逡巡然曰, 孰有加於王言光國之重, 而相詰乎曰雄. 又起而請曰, 子旣断號, 無記可乎? 願卒惠焉. 余固辤以老衰, 今泰成又來懇要, 乃重感其誠孝, 強爲之言曰, 齋成而享祀, 以致其如在, 在於諸公誠不誠如何矣. 有不必論, 而窃惟公孝養習武, 及官堦履歴, 至誠勤王, 與夫朝家之前後異数, 詳於誌狀, 無足復贅, 而撮其大者而言之, 一則曰, 於鐵山時, 快雪薔紅姉妹之寃魂, 使民安過. 一則曰, 淸使來脅, 以皇廟建築曰, 爾更有背淸之心乎? 上下震懾莫措, 公請受以訓將, 登壇結陣, 拿致淸使, 督示其誥勅曰, 若否則當斬之. 使畏伏其矯制之罪, 放而使歸, 舉朝恐必有後患, 公以爲, 彼以大國之上使, 見辱小邦, 耻不敢言. 後果然, 肅廟嘉之以光國將軍褒之, 則以是定額, 不亦其取重者乎? 噫! 公之論將料敵, 皆如所策. 其智可以奪鬼神, 其勇可以等雷電, 使天下知有我國之堂堂, 此不欲傳之後世, 得乎? 實不容不可傳者也. 嗚呼! 安得以公於九原, 執鞭以從之, 使宇內廓淸耶? 可願而不可望. 遂太息而書之. 歲夏正戊申七月丁亥, 鶴城金載石識.
    【광국재 중건기】 군대의 우두머리)인 가재(嘉齋) 전공(全公) 휘(諱) 동흘(東屹)을 제향(祭享)하는 곳인데, 비와 바람에 기울고 쓰러져서 터가 황폐해지고 주춧돌이 쇠잔하여 이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을 자아내게 한 세월이 1백여 년이나 되었다. 다행히 올해 중춘(仲春)에 공의 후손 태성(泰成)이 중건(重建)하자고 발의(發議)하자 용갑(庸甲)·준근(俊根)·갑석(甲錫)·태진(泰珍)·성근(成根)·종근(宗根)·병년(炳年)을 비롯한 여러 선비들이 기꺼이 따라주어 3개월 만에 공사를 마치니, 서로 더불어 논의하기를, “비록 재실의 칭호가 전해지는 것은 없으나 이번에도 빠뜨리면 의리상 안 될 일이다.”고 하였는데, 혹은 ‘저존(著存)’으로 하자고 하고 혹은 ‘광국(光國)’으로 하자고 하여 갑론을박(甲論乙駁)하면서 각자 논지를 주장하여 하나로 결정되지 않자 형순(炯順)이 나에게 와서 바로잡아 달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머뭇거리다가 말하기를, “임금께서 나라를 빛낸 중신(重臣)이라고 말씀하신 사람*보다 훌륭한 자가 누가 있겠으며, 적국의 사신과 서로 따진 것*은 영웅다운 행동이었다.”고 하니, 형순이 다시 또 일어나서 요청하기를, “그대가 이미 재실의 호칭(호칭)을 결정하였으니 기문(記文)이 없으면 되겠는가? 바라건대 끝까지 은혜를 베풀었으면 좋겠소.”하였다. 이에 내가 나이가 늙고 기운이 없다는 핑계로 고사(固辭)하였는데 이번에 후손 태성이 또 나에게 와서 간절하게 요청하니 이에 그 성의와 효심에 감동하여 애써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재실을 건축하여 제사를 올림으로써 마치 살아계신 것처럼 모시는 것은 제공(諸公)의 성의와 정성이 어떤가에 달려 있으니 굳이 논하지 않아도 된다. 가만히 생각건대, 공은 효심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무예를 익혔고 벼슬길에 오르게 되자 지극한 정성으로 임금을 호위(護衛)한 것이 조정에서 전후로 공에게 내려준 특별한 은전(恩典)과 더불어 지장(誌狀)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다시 덧붙여 말할 필요가 없으나, 그 중요한 것을 추려서 말하자면, 하나는 철산(鐵山)에 재직할 때 장화(薔花)와 홍련(紅蓮) 자매의 원통함을 후련하게 씻어주어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히 지나가게 하였고, 하나는 청(淸)나라 사신이 와서 황묘(皇廟, 명(明)나라 황제를 제사하는 사당)를 건축한 것을 두고 협박하기를, “너희가 다시 청나라를 배신하려는 마음이 있구나?”라고 하자,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두려워 떨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자, 공이 훈련대장이 되기를 청하여 단상(壇上)에 올라서 군진(軍陣)을 설치하고는 청나라 사신을 잡아오게 하여 그가 가져온 황제의 고칙(誥勅)을 보여달라고 독촉하면서 말하기를, “만약 네 말과 같지 않으면 목을 베어 죽이겠다.”고 하니, 사신이 공을 두려워하여 황제의 조칙을 위조한 죄를 털어놓았다. 이에 그를 풀어주어 돌아가게 하니 온 조정이 반드시 후환(後患)이 있을 것이라고 겁에 질렸으나 공은 “저 사람은 대국(大國)의 상사(上使)인데 작은 나라에 와서 치욕을 당했으니 부끄러워서 감히 말을 못할 것이다.”고 하였는데 뒤에 과연 그러하였다. 그러자 숙묘(肅廟)께서 공을 가상히 여기시고 광국 장군(光國將軍)에 임명하여 포상하였으니 이로써 판액(板額)(扁額)을 정하면 또한 그 중요한 점을 취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공은 장수(將帥)에 대하여 논하고 적군의 형세를 헤아린 것이 모두 세운 계책과 똑같이 되었으니 그 지혜는 귀신조차 넋이 나가게 할 수 있고 그 용기는 우레나 번개와 동등하였다.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당당(堂堂)하게 있음을 알게 하였으니, 이를 후세에 전하려고 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참으로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 내가 어떻게 구원(九原. 저승)에서 말채찍을 쥐고 공을 따르면서 이 세상을 후련하게 청소할 수 있으리오? 바랄 수는 있어도 기대할 수 없는 일이므로 마침내 한숨을 쉬면서 쓰노라. 세 하정(歲夏正) 무신년(戊申年, 1968) 7월 정해(丁亥)에 학성(鶴城) 김재석(金載石)이 쓰다.
    *임금께서.…사람 : 숙종(肅宗)이 전동흘(全東屹)에게 “경(卿)은 나의 광국 장군(光國將軍)이다”고 말한 것을 이른다. 광국은 나라를 빛낸다는 뜻이다. 또 훈련원(訓鍊院)에 하교하며 이르기를, “옛날에 강태공(姜太公)은 80세까지 궁하게 지내다가 80년간 영화를 누렸다고 하는데, 나의 전동흘은 40세까지 궁하게 지내다가 40년간 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적국의 사신과 서로 따진 것 : 여기서 적국은 청(淸)나라를 말함. 당시 청나라에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이 대보단(大報壇)에서 명(明)나라 황제를 위하여 제사를 지낸 일을 힐문(詰問)하자, 공이 훈련대장(訓鍊大將) 겸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으로서 청나라의 사신을 잡아오게 하여 조정에 꿇어 앉히고 엄하게 묻기를, “네가 황제의 명령을 띠고 왔다고 하지만 우리 임금에게 그 글을 고하지 않았으니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하니, 사신이 죄를 자복(自服)하였다. 이에 공이 다시 꾸짖어 말하기를, “교지(敎旨)를 속이고 희롱한 죄는 죽여야 마땅하나 우리 임금께서 관대하고 인자하시어 특별히 사면하니 이후로 다시는 우리 나라에 오지 말거라.”고 하고는 나라 밖으로 내쫓았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이 다들 후환(後患)을 걱정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제가 뒷일을 감당하겠습니다.”고 말하였다.
    *철산(鐵山)에 …하였고 : 당시 철산부(鐵山府)가 깊은 원한(怨恨) 사건의 부작용으로 인하여 장차 폐읍(廢邑)이 될 상태에 놓이자 공이 철산의 도호부사(都護府使)로 임명되어 장화(薔花)와 홍련(紅蓮) 두 여자애의 원수를 갚아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光國齋上樑文】 山益髙, 水益淸, 蔚啓葱葱之佳氣, 美㦲盛儀. 上以宇, 下以棟, 如在洋洋之明靈, 猗歟孝思. 竊念月浪古郡, 列園林而相望, 聿覩衿珮濟濟. 實維湖左名區, 聞絃誦而不絶, 仍成禮譲休休. 故養生送死之盡情文, 睠兹丙舍之經始. 乃尊祖敬宗之循本末, 寔由雲仍之作興. 伏惟嘉齋全公, 鍾駬山之靈, 遭値 寜陵寤寐之日, 時㦲不可違. 生嘉林之第, 統率轅門貔貅之軍, 職耳豈敢怠. 大老之拔擢眷眷, 有湖南三傑之稱. 黎庶之讃頌喧喧, 救水操二舡之溺. 北虜猾夏, 欲折逆天之凶圖, 將伸大義於天下. 南漢下城, 不忍在心之至痛, 已懷雄略於胸中. 餘蔭滿庭, 作逺裔之帲幪. 丹心爲國, 被聖主之嘉褒. 事或有未遑, 二百年齊宿無所. 廼度廼營, 匪道謀之是聼. 志孰云不伸, 千萬人議論仝歸, 其攻其亟, 寔子來之有成. 南山之松栢丸丸, 其䋲則直, 神明如或扶. 匠石之礱斵矻矻, 有奐且輪, 君子所肯搆. 之眼中忽見突兀, 風月無盡藏, 匪直為游觀之美. 也心上早起經綸, 蘋蘩欲其潔, 抑亦致著存之誠. 載舉修樑, 聊陳善頌.
    抛樑東, 一簾光射初旭紅, 欲知化化生生妙, 盡在太和元氣中
    抛樑西, 山陽橋梓或髙低, 父子祖孫一氣貫, 莫言逺近有親踈
    抛樑南, 冠山碧聳欲天參, 嘉翁當日稱三傑, 聖主恩命降玉凾
    抛樑北, 含忍難忘城下辱, 參及寜陵訏謀宻, 中原戎虜驅欲逐
    抛樑上, 浩氣元従集義養,氵 號 氵 號 有泉鳴不停, 至今猶似續餘響
    抛樑下, 何人唫咏此堂者, 寄言除却風兼花, 秖管人心繫立懦
    伏願上樑後, 山益抱, 風月無邊, 盖曰念祖而. 水益, 松栢長翠, 亦云裕後而. 修德, 春則怵, 秋則悽, 出秉彜之良性, 莫言叔季之頹靡. 貽謨, 入而孝, 出而悌, 守傳家之美規, 庶觀門闌之昌大
    歲著雍涒灘葽夏上澣, 月城金種嘉書
    【광국재 상량문】 산은 더욱 높다랗고 물은 더욱 맑아서 총총(蔥蔥)한 가기(佳氣)를 성하게 열었으니 아름답도다, 훌륭한 의범(儀範)이여. 위에는 지붕이 있고 아래는 기둥이 있어서 마치 양양(洋洋)하게 밝으신 영령(英靈)께서 살아 계신 듯하니 훌륭하도다, 효성스러운 생각이여. 가만히 생각건대, 월랑(月浪)의 옛 군(郡)은 원림(園林)이 늘어서 서로 바라보여서 언뜻 보더라도 금패(衿珮)*들이 수없이 많도다. 참으로 호남 좌도(左道)의 명승지여서 글 읽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이어 아름답게 예의와 양보를 이루었네. 그러므로 살아서는 봉양하고 죽으면 장례를 치룰 때 슬픔과 형식을 다하였으니 이곳을 돌아보고 병사(丙舍)*를 경영(經營)하였으며, 이에 조상을 존숭하고 종족(宗族)을 공경함에 본말(本末)을 따랐으니 실로 후손들이 이를 말미암아 흥기(興起)하였노라. 삼가 생각건대, 가재(嘉齋) 전공(全公)은 마이산(馬耳山)의 영기(靈氣)를 모아 영릉(寧陵, 효종(孝宗))이 자나 깨나 나라 걱정을 잊지 못하던 때를 만났는데 때가 그러하여 어길 수가 없었노라. 가림(嘉林, 지금의 진안읍 가림리)의 집에서 태어나서 군대의 용감한 병사들을 통솔하였는데 맡은 직책이니 어찌 감히 태만하였으랴. 대로(大老)를 정성들여 발탁하니 호남의 3걸(傑)이라는 칭찬이 있었고 많은 백성들이 왁자하게 찬송(讚頌)하니 수조(水操, 군사들의 해상 훈련)할 때 배 두 척이 물에 빠지는 것을 구하였네. 북쪽 오랑캐가 중국 땅을 어지럽히니 하늘을 거스르는 흉악한 꾀를 부러뜨리고 싶어서 장차 천하에 대의(大義)를 신장(伸張)하려고 하였네.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가슴 속의 지극한 슬픔을 참아내지 못하고 이미 뼈 속에다 영웅다운 책략(策略)을 품었노라. 남은 자손들이 집안에 가득하니 먼 후손들의 가리개가 되었고, 단심(丹心)으로 나라를 위하니 성주(聖主)께서 가상히 여기고 포상하였노라. 일은 간혹 겨를이 없어서 2백년간 재숙(齊宿)할 곳이 없었다가 이에 설계하고 이에 경영하니 도(道)의 계획만을 따른 것이 아니었네. 뜻을 누가 펴지 못하였다고 말하는가? 천만 사람의 의론이 똑같이 귀결되었으니 그 일을 서둘러 해낸 것은 참으로 자식들이 이룬 것이었네. 남산(南山)의 송백(松柏)이 구불구불 자랐으나 먹줄로 곧게 잘라내니 신명(神明)이 도와준 듯하고, 장석(匠石)이 돌을 자르고 다듬어 멋들어진 집을 지었으니 군자(君子)가 이어받은 일이로다. 눈 앞에 문득 우뚝 솟은 건물이 보이니 풍월(風月)이 무진장(無盡藏)한데 단지 경치를 구경하려고 세운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 일찌감치 경륜(經綸)을 일으켰으니 정갈한 제수를 장만하였는데 또한 살아계신 것처럼 모시려는 정성을 들였으리라. 이에 긴 대들보를 들어 올려 애오라지 선송(善頌)을 말하노라.
    들보를 동쪽에 던지면, 주렴 하나에 처음 돋는 붉은 해가 광채를 내뿜으니 화화생생(化化生生)하는 묘리(妙理)를 알고 싶거든 태화(太和)의 원기(元氣) 속에 모조리 들어 있노라.
    들보 서쪽에 던지면, 산의 남쪽 나무들이 들쭉날쭉한데 부자(父子)와 조손(祖孫)이 똑같은 기운으로 관통하였으니 원근(遠近)에 친밀함과 소원함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들보 남쪽에 던지면, 관산(冠山)이 푸르게 솟아 하늘까지 닿으려 하니 가옹(嘉翁)을 당일에 3걸(傑)로 칭하여 성주(聖主)의 은명(恩命)이 옥함(玉函)에 내렸노라.
    들보 북쪽에 던지면, 참고 견딘 남한 산성 아래의 치욕을 잊기 어려우니 영릉(寧陵)께서 도모하시는 북벌 계획에 참여하여 중원의 오랑캐를 몰아내려고 하였노라.
    들보 위쪽으로 던지면, 호기(浩氣)로 임금을 따라 의로움을 길렀으니 졸졸 흐르는 샘물이 쉬지 않고 울어대는데 지금도 오히려 남은 메아리가 이어지는 듯 하노라.
    들보 아래쪽으로 던지면, 이 집에서 시를 읊을 자가 누구인가? 바람과 꽃은 빼달라고 부탁하노라. 단지 인심이 나태해지는 것만을 붙들어 맬지어다.
    삼가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뒤로는 산이 더욱 포용하여 바람과 달이 가없으리니 대체로 조선(祖先)을 생각하고, 물은 더욱 돌아 흘러서 송백(松柏)이 길이 푸를 것이니 후손을 넉넉하게 해주리라. 덕을 닦는 일은 봄에도 움찔하고 여름에도 서글프게 여기어 타고난 천성이 발로(發露)한 것이니 세상이 나빠져서 쇠퇴하였다고 말하지 말라. 후손에게 물려줄 계책은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문밖을 나가서는 공경하여 집안에 전해오는 아름다운 규약(規約)을 지키면 거의 가문(家門)이 창대(昌大)함을 구경하게 되리라. 무신년(戊申年, 1968) 여름 상한(上澣)에 월성(月城) 김종가(金種嘉)가 쓰다.
    *금패(衿珮) : 유생(儒生) 또는 젊은 선비를 말한다. 『시경』 〈정풍(鄭風) 자금(子衿)〉에 “푸르디푸른 그대의 옷깃이여, 길이 생각하는 내 마음이로다. 비록 나는 가지 못하나, 그대는 왜 소식을 계속 전하지 않는가? 푸르디푸른 그대의 패옥이여, 길이 생각하는 내 마음이로다. 비록 나는 가지 못하나, 그대는 어이하여 오지 않는가?〔靑靑子衿, 悠悠我心. 縱我不往, 子寧不嗣音? 靑靑子佩, 悠悠我思. 縱我不往, 子寧不來?〕”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병사(丙舍): 묘지 근처에 있는 방으로, 여막(廬幕)을 가리킨다.
  • 성수면 조실길 56-5[도통리 424-1] 지동마을 위쪽에 있는 탐진 최씨 재각. 송사 최만성(崔萬成)의 재각으로 본시 중길리 마치에 있었는데, 저수지가 건설되면서 수몰되자 이곳으로 옮겨왔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 팔작지붕이다. 전면에 3칸 문이 있고 둘레는 담장을 둘렀다. 본채에는 10세손 최충근(崔忠根)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문은 3칸으로 10세손 최영근(崔永根)이 쓴 ‘도리문(道理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재각의 입구에서 우측으로 ‘가선대부 호조 참판 송사 최 선생 신도비(嘉善大夫戶曹參判松史崔先生神道碑)’와 ‘연담 거사 탐진 최공 치환 효행 기적비(蓮譚居士耽津崔公致煥孝行紀蹟碑)’가 있다. 탐진 최씨가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3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제를 지낸다.

    【배향위(配享位)】
    최만성(崔萬成) : 자는 사추(士樞), 호는 송사(松史), 탐진인(耽津人)이다. 장경공(莊景公) 사전(思全)의 후예로 증참의(贈參議) 세원(世遠)의 아들이다. 향시(鄕試)에 이르러 문명(文名)을 온 고을에 떨치게 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생전에 봉양은 물론 상제(喪祭)의 정성도 시종 여일(始終如一)하여 누구나 하늘이 낸 효자(孝子)라고 칭송하였다. 공은 평거(平居)에 간중 과묵(簡重寡黙)하여 바깥 사물에 중심을 잃지 않고, 항상 정좌(靜坐)하여 손에서 책을 떼지 않는 태도로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익혔다. 특히 퇴계(退溪)와 율곡(栗谷) 두 선생의 뜻을 두텁게 믿어 언제나 좌우에 그 글을 모시고 매일 읽고 힘써 행하며, 깊은 뜻은 뒷사람들에게까지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任務)로 여겼다. 공은 지극한 효행과 깊은 학문으로 인하여 침랑(寢郞) 벼슬이 내려 졌으나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정조 갑진(甲辰, 1784)에 사림(士林)의 상언(上言)으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이조참의(吏曹參議) 완산(完山) 이인구(李寅龜)가 지은 묘표(墓表)가 전해져 오고 있다.
  • 주천면 성암2길 22-1[신양리 283-1], 상성암마을 동쪽 안에 있는 동래 정씨의 재각. 1969년에 세웠다. 사당은 담장안에 서향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의 함석 팔작지붕으로 처마넓이 73㎡이다. 후손 덕진(德溱)이 쓴 기문이 있다. 명덕재 앞에는 1938년에 세운 하은 정상호(荷隱鄭尙鎬)의 유허비가 있다.

    【明德齋記】 齋舍創建 古有今有之事 而或以追慕先之誠 或以道德尊賢之意 其趣不同 追慕之心一也 揚先裕後之慕 不可無之 而惟明德齋 由先代之墓下 數年創建之誠 事力未及 今於己酉之歲 後孫德溱及諸孫 發記注力之誠 創建告落 豈非盛哉 道峰淸秀 曷勝霜露之感 華山明淑 常切塋之誠 富貴功名之家 得龜卜之吉地 文章道德之士 慕鹿洞之舊規 後塢花開 瑞日暢暢前簾 燕賀新語喃喃 此豈非明德齋永慕之所哉 恭祝後仍之繼繼承承 德溱敬爲之記 辛亥年月日
    【명덕재기】 재사(齋舍)를 창건하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는 일인데 혹은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으로 하고 혹은 도덕존현의 뜻으로 하니 그 취지는 같지 않으나, 추모하는 마음은 같다. 선조를 드날리고 후손을 풍요롭게 하는 정성이 없을 수 없는데, 오직 명덕재는 선대의 묘소에 수년 동안 창건하려는 정성이 있었으나 추진할 능력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기유년에 후손 덕진 및 여러 자손들이 발의하여 정성을 기울여 창건하고 낙성을 고하니 어찌 창성하지 아니하겠는가! 명도봉의 청수함이 어찌 상로지감(霜露之感)*보다 낫겠으며, 화산의 명숙함이 항상 선조의 묘소를 살피는 정성보다 간절하겠는가! 부귀공명하는 집안은 풍수상 길지에 자리하고, 문장도덕을 겸비한 선비는 백록동의 옛규약*을 사모한다. 뒤란에는 꽃이 만개하고 상서로운 햇빛이 앞 주렴에 창창하며 제비도 완공을 축하하는 듯 지지배배 노래하누나. 이 어찌 명덕재가 길이 기억되는 바 아니겠는가. 삼가 후손 대대로 이어지기를 축원하노라. 덕진이 공경히 명덕재를 위해 기문하다. 신해(1969)년 월 일
    *상로지감(霜露之感) : 한 해가 거의 다 되어 찬 서리가 내리게 되면 더욱 더 돌아가신 부모가 생각나서 슬퍼하며 그리워함.
    *주희(朱熹)가 만든 백록동서원의 규약으로, 그 내용은 첫째는 부자유친 등 오륜의 조목, 둘째는 널리 배운다는 ‘박학지(博學之)’ 등 학문하는 순서, 셋째는 말을 충직하고 진실되게 하라는 ‘언충신(言忠信)’ 등 수신(修身)의 요결, 넷째는 의리를 지키고 이익을 꾀하지 말라는 ‘정기의 불모기리(正其義 不謀其利)’ 등 사무 처리의 요결, 다섯째는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등 대인 관계의 요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백운면 백장로 83-31(동창리 산 111) 석무안뜸 북쪽 산기슭에 있는 밀양 박씨 집안의 제각이다. 1972년 음력 2월 20일에 건립하였다. 양력 4월 5일 낮 11시에 향사를 지낸다. 임자 壬子 제각안에 매산바위정 현판과 함께 들어서는 문엔 반석문(盤石門) 현판이 있다. 제각 뒤에 토지지신(土地之神)비가 있다. 재각에는 김형관(金炯觀)의 ‘백운재 기’가 액자로 걸려있다.

    【白雲齋記】 忠貞公淸齋朴先生以道學文章立節於 莊陵遜位之日 朝家贈崇秩 命不祧典而褒之士林享七邑祠宇俎豆而尊之何其盛也是以風韻愈久益彰后承多以䋲武趾美不墜先德爲能事而無愧於鄕邦之望族矣其十一代孫學生諱思良之墓在鎭安郡白雲面盤松石田里歲近二百尙未有齊宿之所故六代孫憲旭以是爲恨壬子春獨費己財建五架四楹且衛之以門墻築之以階砌美輪焉美奐焉行路聳瞻溪山增彩遂顔其齋曰白雲題其門曰盤石遽經十年矣今其弟憲奎奉譜委顧請記其事演其義余曰此係一門衆共之役而不吝財專擔固難矣罕矣至若齋與門之命名則似因地而行所無事然究而言之不無深意存焉昔有人望太行之雲猶想其親之舍其下者况今直扁齋以雲而獨不思先祖乎尢焉有不鞏固門事完如盤石者乎於是乎憲旭氏非徒有築齋之偉功亦可云永垂門規之遠慮也凡爲朴氏之族者其尙鑑兹而知戒期不負雲石二字之至義也不亦宐乎 壬戌 三月 上巳節 扶安 金炯觀 記
    【백운재 기】 충정공(忠貞公) 청재(淸齋) 박 선생(朴先生)은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뛰어난 사람으로서 장릉(莊陵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던 날에 절개를 지켰기 때문에, 조정에서 높은 작질(爵秩)을 추증(追贈)하고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명하여 포장(襃獎)하고 사림(士林)에서 7개 고을로 향사(享祀)하여 사우( 祠宇)에서 조두(俎豆)를 올려 존중하였으니 그 얼마나 훌륭한가. 이 때문에 풍치가 오래될수록 더욱 빛나게 되고 후손들이 그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선조의 덕을 실추하지 않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아 나라의 덕망 있는 가문들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 11대손 학생(學生) 휘(諱) 사량(思良)의 묘가 진안군(鎭安郡) 백운면(白雲面) 반송 석전리(盤松石田里)에 있는데 200년 가까이 재숙(齊宿)하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 6대손 헌욱(憲旭)이 이것을 한스럽게 여겨 임자년 봄에 홀로 자신의 재산을 써서 오가 사영(五架四楹)의 재실(齋室)을 세우고 문과 담장으로 주위를 두르고 계단을 만들었다. 매우 아름답고 장엄하여 행로(行路)에 우뚝 서 있고 시내와 산이 광채를 더하였다. 드디어 재실에는 편액을 걸어 백운(白雲)라 하고 문에는 편액을 걸어 반석(盤石)이라 하여 십 년이 지났다. 지금 그 동생 헌규(憲奎)가 족보를 받들고 찾아와 이 일을 기록하고 편액의 뜻을 풀이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일은 온 가문이 공동으로 해야 할 일인데도 재산을 아끼지 않고 전담하였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드문 일이다. 집과 문의 이름을 단 것으로 말하자면 아마도 지명으로 인한 것이고 행적이나 사연은 없는 듯하다. 그러나 깊이 연구하여 말하자면 깊은 뜻이 없지 않다. 옛날 어떤 사람이 태항산(太行山)에서 구름을 바라보고도 그 아래에 어버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지금 직접 재실의 편액에 구름이라고 붙이고도 선조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나아가서 어찌 가문의 일을 공고히 하여 반석(盤石)처럼 완벽하게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헌욱씨(憲旭氏)에게 재실을 세우는 위대한 공적을 있을 뿐만 아니라 가문의 규범을 길이 드리우는 원대한 생각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박씨의 족속인 모든 사람은 부디 이것을 보고 경계를 알기를 바라니, 운석(雲石)이라는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을 기약하는 것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임술(1982)년 3월 (음)3월 3일 부안(扶安) 김형관(金炯觀) 기(記)하다.
  • 정천면 월평리 산 47-1에 있는 나주 임씨(羅州林氏)의 재각. 본디 오동마을의 뒤편이었는데 마을은 용담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지금은 월평리 하초 마을로 진입하다가 좌측 샛길로 들어가 용담호 호반을 따라 개설된 도로를 따라 약 3㎞ 지점 우측 산기슭에 있다. 재각은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대문과 블록으로 된 담장이 있는데 몇군데 허물어져 있다. 임타(林㙐)의 8대손 임학상(林學相)의 발의로 1960년에 건축하였다. 1970년과 2000년에 보수를 하였다.
    봉서재(鳳棲齋)는 임타의 두 번째 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 1621~1667)의 재각이다. 임진왜란 때 임타는 상주 목사였는데, 부인이 왜군에 사로잡히자 순결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였다. 이 일을 알고서 선조가 봉림군(鳳林君) 이언선(李彦瑄)의 딸을 임타의 두 번째 부인으로 맞게 하였다. 완산 이씨는 임타와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두었다. 임타는 정천면 평은촌 만화정(萬花亭)에서 만년을 보내며 완산 이씨와 자녀들을 이곳으로 불러 함께 살았다. 임타의 무덤은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에 있으며 완산 이씨의 무덤은 재각 뒤쪽에 있다.
  • 백운면 정송길 15[평장리 488] 양지 오른편 마을에 있는 전주 최씨 집안의 재각. 1970년에 만육 최양의 차남 봉강 최진형(崔進亨)과 그 후손들의 무덤을 관리하기 위해 전주 최씨 문중에서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이다. 본채 지붕에는 돌너와를 얹었다. 본래 대문 위 지붕에도 돌너와를 얹었으나 무거워서 지금은 없앴다. 돌너와는 진안군 노촌리 비사랑에 있는 수리봉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문은 3칸이며, 관리사가 옆에 있다. 재실 내에는 ‘현판기’와 ‘봉강선생기적비 수립실기(鳳岡先生紀蹟碑竪立實記)’가 걸려있다.
  • 백운면 정송길 27-4[평장리 393] 평장리 양지뜸에 있는 함양 오씨(咸陽吳氏) 재각. 오성복(吳成福)을 배향한다.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 있던 것을 갑술(1934)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이다.
    ‘수승재(修承齋)’는 오성복(吳成福)의 호이기도 하다. 수승재의 전말에 관하여는 『진안지(鎭安誌, 1925)』에 기재되어 있는 후산 이도복의 ‘수승재기’와 진사 김혁장의 ‘오씨 수승재기’에 기록되어 있다.

    【修承齋記】 錦谷宋先生 承述同春之學 設皐比於湖中 四方學者多歸之 時太學生玉隱吳公 慨然有志於斯學 來自月浪 束脩踵門 先生愛其氣宇之軒昻 賜坐款誨 又嘉賞其先尊府之純孝 手書修承二字 俾歸刻于其堂 孝子公旣沒 朝廷命旌其閭 子孫就梨洞世藏 結構墳菴 移揭修承之額於是齋 盖追慕其先德 而修承之意也 嗚呼 吳氏之先 有若正字公 當穆陵龍蛇之燹 大駕西巡之日 與金健齋諸公 倡義討賊 同殉于晉陽 孝子公又能承述其先德 篤孝其親 至誠感神 其揄揚一文 儘出於錦谷肚裡來 其榮耀 豈止華袞而已哉 然向非玉隱公修承之志 吳氏兩世忠孝之實 可謂泯而無傳矣 登斯齋者 苟能深軆夫玉隱公之志 修承先世忠孝之傳 世世相承 夙夜無忝 庶不墜先生當日命名之義矣玉隱公亦肯曰余有後昆也 公之嗣子前員外郞相吉 謬認不侫爲玄晏脚下人 托以記德之文 玄晏吾豈敢 故述吳氏忠孝相傳之美法 以侈齋壁 屠維恊洽南呂月初吉 雙明山人李道復記
    【수승재기】 금곡(錦谷) 송 선생(宋先生)이 동춘(同春)의 학문을 이어 호중(湖中)에서 고비(皐比, 호피[虎皮] 사석[師席]을 뜻함)를 베푸니, 사방에서 많은 학자가 찾아들었다. 그 때 태학생(太學生) 옥은(玉隱) 오공(吳公)이 개연히 사학(斯學)에 뜻을 두고 월랑(月浪)에서 속수(束脩, 예물)를 들고 찾아왔다. 선생께서는 그 기상이 드높음을 사랑하여 자리를 내주어 관대(款待)하였고, 또 그 선존장(先尊丈)의 순효(純孝)를 가상(嘉賞)하며 손수 수승(修承) 두 글자를 써주어 돌아가서 그 당(堂)에 각하여 걸게 하였다. 효자공이 몰(歿)한 뒤에 조정에서는 문려(門閭)를 정표(旌表)하라고 명하였다. 자손이 이동(梨洞)의 세장(世藏)에 재실을 짓고 수승(修承)의 액자(額字)를 그 집에 옮겨 걸었는데, 대체로 선덕(先德)을 추모하고 수승(修承)하자는 뜻이었다. 오호라! 오씨의 선대에는 정자공(正字公) 같은 분이 있어 선조조 임진 계사의 난을 당하여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하던 날, 김건재(金健齋) 등 제공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토적(討賊)하다가 진양성 아래에서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효자공이 또 능히 선덕(先德)을 이어받아 어버이에게 독실하게 효도를 다 하니, 지극한 정성은 귀신까지 감동시켰다. 또 유양(揄陽, 치켜세우다)하는 글이 모두 금곡(錦谷)의 의중(意中)에서 나왔으니, 그 영광이 어찌 화곤(華袞, 관복 즉 벼슬을 뜻함)에 그칠 따름이겠는가? 그러나 전자에 옥은공의 수승할 뜻이 없었다면, 오씨 양대의 충효로운 실적은 아마 민몰하고 전해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재(齋)에 오른 사람이 진정으로 옥은공의 뜻을 깊이 본받아 선세의 충효로 전해짐을 닦고 받들어 대대로 이어와서 낮이나 밤이나 욕되게 함이 없다면, 아마도 선생께서 당일 명명하신 의의를 실추함이 없을 것이며, 옥은공도 기꺼이 나도 후손이 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공의 사자(嗣子) 전 원외랑(前員外郞) 상길(相吉)이 부령(不伶, 필자의 겸칭)을 현안(玄晏)*의 문하인(門下人)이라는 것만 잘못 알고 덕을 기술하는 글을 부탁하였는데, 현안(玄晏)을 내가 어찌 감히 감당하겠는가? 우선 오씨가 충효로 전해 내려오는 훌륭한 가법(家法)만을 기술하여 재벽(齋壁)에 붙이게 하는 바이다. 도유(屠維, 고갑자로 기(己)에 해당) 협흡(協洽, 고갑자로 미(未)에 해당) 남려월(南呂月, 음력 8월의 이칭) 초길(初吉, 초하루)에 쌍명산인(雙明山人) 이도복(李道復)이 기술하다.
    * 진[晋]나라 황보밀[皇甫謐]의 자는 사안[士安]인데, 자칭하여 현안 선생[玄晏先生]이라 하였다. 그가 삼도부서[三都賦序]를 지으면서 서두(序頭)에 玄晏先生曰로 시작하였기에 후세에 서문을 현안지문[玄晏之文]이라 부르게 되었다


    【吳氏修承齋記】 愚於書 嘗讀愼厥身修 其承厥志者久 而猶未知身以何爲修志 以何爲承矣 槩見同縣敎官吳公之家法 篤以孝悌之行 爲修於一身 推以孝悌之道 爲訓於子孫 而爲子弟者 蹈承敎官之志 以爲傳家之法 則公亦上承先志 以修其身矣 越在旌閭之後 齋號以修承 則豈公之自號哉 卽錦谷宋先生 深知公之在身以是修之 在後者以是承之而錫之也 愚於是 始知身修以孝悌 志承而孝悌 然而以愚蔑學 何敢有言 適遇人統歲 陽復之辰 興善乎吳公之實行 起敬乎錦老之錫號 自不覺僭越而發於 言 歲戊寅至之日 後學錦溪人 進士金赫璋 謹書
    【오씨 수승재기】 나는 일찍이 서경(書經)에서 “몸을 조심스레 닦아 그 뜻을 받들지어다.”라는 대목을 읽은 지 오래이나, 아직도 몸은 무엇으로 닦고 뜻은 무엇으로 받드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대체로 보건대, 같은 고을의 교관(敎官) 오공(吳公)의 가법(家法)은 효제(孝悌)의 행실을 독실히 하여 자기 일신을 닦고, 효제의 도리를 미루어 자손에게 훈계하며, 자제(子弟)는 교관의 뜻을 답습하여 전가(傳家)하는 법으로 삼고 있는 것이니, 공 역시 위로 선지(先志)를 받들어 그의 몸을 닦은 것이다. 지난 날 정려(旌閭)가 내린 뒤에 재호(齋號)를 수승(修承)이라 한 것은, 어찌 공이 스스로 호를 그렇게 하였겠는가? 바로 금곡(禽谷) 송 선생(宋先生)이 공의 일신에 있어서는 이것으로 닦고, 후손도 이것을 잇고 있다는 것을 깊이 알고 지어준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비로소 몸은 효제로 닦고, 뜻도 효제로 받드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같이 학문 없는 사람이 어찌 감히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마침 인통세(人統歲, 하력[夏曆]의 뜻. 지금 쓰고 있는 음력은 하력에 속함)의 양복(陽復, 일양시복[一陽始復] 동짓달을 말함)할 때를 만나 오공의 실행에 좋은 인상을 받았고, 금로(錦老, 금곡을 높여서 부른 말)의 사호(賜號)에 공경심이 일어 참월한지도 깨닫지 못하고 말을 하게 된 것이다. 무인년(戊寅年, 1878) 동지일(冬至日) 후학 금계인(錦溪人) 진사(進士) 김혁장(金赫瘴)이 삼가 서하다.
  • 부귀면 삼봉길 2[두남리 525] 원두남마을 어귀에 있는 김해 김씨 재각. 김현응(金顯應)과 그 자(子) 재황(再璜)을 제향한다. 두 분의 효자비는 재각의 앞에 있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매남문과 충효문이 있다. 1960년에 건립하였다.
  • 동향면 천동로 564-93[자산리 686]에 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 독곡공파[예천공]의 재각이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가 재호(齋號)를 붙여 주었다. 승유재는 창녕 성씨 진안 입향조인 성세필(成世弼)을 제향하기 위하여 1941년 5월 9일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초가 건물이었다. 1985년에 기와로 지붕을 개량하였고, 1995년 4월에 다시 지붕을 개량하였다. 2006년 7월에는 지붕 개량과 담장, 대지 일체에 대한 재정비를 하였다. 정면 5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다.
  • 부귀면 오산길 62-2[오룡리 499] 오산마을 뒤쪽에 있는 사천 김씨 재각. 오매당 김만서(金晩緖)를 배향하였다. 1958년 건립되고, 1996년 중건되었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콘크리트 구보물 팔작지붕이다.
  • 상전면 금지1길 18-34[월포리 1005]에 있는 죽산 안씨(竹山安氏) 집안의 재각. 안수홍(安守洪)과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를 모시는 재각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내금위장 안수홍의 부인 안동 권씨가 전란을 피하여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상전면에 정착한 이후 자손이 번성하였다. 건물은 1876년에 건립되었으나 근래 대폭 중창되었다.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금속기와의 팔작지붕이다. 문은 3칸 솟을대문이며 쪽문이 있고 관리사와 연결된다. ‘영모재’라는 현판 글씨는 석재(石齋) 황현(黃玹)이 썼다. 재각의 안쪽에는 ‘통훈대부 행내금위장 죽산 안공지묘 배숙인 안동 권씨 묘 재진안 골안동 신좌(通訓大夫行內禁衛將竹山安公之墓配淑人安東權氏墓 在鎭安骨安洞 辛坐)’라 쓰인 비석과 헌성비 외 1개의 비석이 더 있고, 담장 ­­바깥쪽에 ‘유담 안공 재연 기적비(柳潭安公在淵紀行碑)’, ‘경남 안공 재성 기적비(耕南安公在聖紀績碑)’, ‘우당 안공 창옥 기적비(愚堂安公昌玉紀績碑)’ 등이 있다.

    【永慕齋記】 嗚呼此我先祖妣墓閣, 先祖考墓在永同郡, 葬鎭安, 自我先祖妣始, 我安氏, 東國大姓, 名於麗及我朝盖久, 自宣祖朝, 迄今三百祀, 在鎭安, 不墜家聲, 亶由我先祖妣也, 先祖妣貞節烈行, 足以光前裕後, 至其箴鑑, 雖明經君子, 不能過焉, 口碑千載, 固有不朽者存, 然墓無顯刻, 世系莫徵, 豈非後嗣之遺感, 乃相議立閭, 以記終始, 已有年所而末就, 謹詳權氏譜, 貫安東, 自太師幸佐麗朝平甄萱, 以功名顯, 子孫世趾其美, 本朝有諱仲和, 恭愍前朝文贊成, 太宗丁亥大拜至領, 封醴泉伯, 諡文節, 高祖諱忱, 成均館生員, 曾祖諱緝, 司諫院司諫陞戶曹判書, 祖諱繼達, 兵曹正郞, 考諱壽剛, 司憲府監察, 先祖妣生名門, 年若干, 歸于我先祖考, 先祖考諱守洪, 內禁衛將, 貫竹山, 竹城君諱元衡後裔, 卽通訓大夫固城縣令諱珪嗣子, 祖曰克終, 梁山軍需, 曾祖曰哲孫, 正統辛酉生員, 至檢閱忠淸監司吏曹參判, 高祖曰復初, 通政大夫淮陽府使, 贈議政府左贊成, 當壬辰搶攘, 先祖考陪親於固城, 與賊督戰, 矢盡無可爲, 父子殉節, 葬于永同, 先祖妣携孤負幼, 八于龍潭, 占居於新碩, 以遺子孫百世之鴻基, 占阡於骨安洞, 以安身後萬年之幽宅, 其性度閨範, 今不可一二摭, 因其大者可測也已, 噫, 顚木尙有甹孼, 況我先祖妣, 積德礪行度越乎, 盖此閣建設, 果非偶然, 吾宗有昌玉, 以孤露餘生, 孝友兼篤, 奉慈極敬, 凡於宗事, 有難勇奮, 乃發言宗會之座曰, 夫我先祖妣裔孫, 戶餘數百, 人過一千, 未立一棟於墓下, 自愧亦愧于人矣, 立衆議而開工, 同我僉族, 亦出義出力, 始於正月上旬, 終於二月上旬, 嗚呼昌玉之善始, 孝也, 僉族之善終, 孝也, 吾門其庶幾乎哉, 於是焉錦月江之瑞日, 九龍洞之祥雲, 相暎於棟宇, 富貴峯之石廩, 福頭峯之德蔭, 交萃於房櫳, 使我子孫, 厚餉福祿, 若桴鼓影響, 福善之理, 不可不識, 畧具其顚末焉, 丙子年春, 十世孫 昌謨 謹記.
    【영모재기】 오호라! 이것은 우리 선조비(先祖妣)의 묘각(墓閣)이다. 선조고(先祖考)의 묘소는 영동군(永同郡)에 있으니, 진안(鎭安)에 입장(入葬)한 것은 우리 선조비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안씨(安氏)는 동방의 대성(大姓)으로 고려조와 아조(我朝)에 이름이 드러난 지 오래이다. 선조조(宣祖朝)에서 지금까지 3백 년 동안 진안에서 가성(家聲)을 실추함이 없었던 것은 분명히 선조비 때문이다. 선조비의 정절(貞節)과 열행(烈行)은 족히 전대(前代)를 빛나게 하고 후대에게 복록을 내리게 하였으며, 그 잠계(箴戒)와 귀감(龜鑑)은 비록 학문에 밝은 군자라 할 지라도 그보다 더할 수 없고, 구비(口碑, 입으로 전해진 말)는 천재(千載)를 내려와 사실 불후(不朽)할 바가 있으나 묘소에는 비각(碑刻)이 없어 세계(世系)를 고증할 수 없으니 어찌 후손들의 유감이 아닐 수 있겠는가? 이에 묘각을 세우고 그 전말을 기재하기로 상의한 지는 여러 해가 되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삼가 권씨(權氏)의 족보를 상고해 보건대,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태사(太師) 행(幸)이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甄萱)을 평정한 뒤로 공명이 드러났고, 자손이 대대로 명성을 계승하였다. 본조(本朝)에 휘 중화(仲和)가 있는데, 고려의 공민왕 때 문과하여 찬성을 지냈고, 태종 정해년(丁亥年)에 대배(大拜, 정승이 됨)하여 영상에 이르러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지고, 시호로 문절(文節)이 내렸다. 고조의 휘는 침(忱)이니 성균관 생원이요, 증조 휘 즙(緝)은 사간원 사간에서 호조판서에 올랐으며, 조부 휘 계달(繼達)은 병조정랑이요, 고(考) 휘 수강(壽剛)은 사헌부 감찰이다. 선조비는 명문에서 태어나 나이 약간세(若干歲)에 우리 선조고에게 시집왔다. 선조고의 휘는 수홍(守洪)으로 내금위장(內禁衛將)이며, 본관은 죽산(竹山), 죽성군(竹城君) 휘 원형(元衡)의 후예이니, 바로 통훈대부 고성현령(固城縣令) 휘 규(珪)의 아들이다. 조부는 극종(克終)이니 양산군수(梁山郡守)요, 증조는 철손(哲孫)이니 정통(正統) 신유년(辛酉年, 세종 23. 1441) 생원에 합격하여 검열 충청감사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고조는 복초(復初)이니 통정대부 회양부사(淮陽府使)로 증 의정부 좌찬성이다. 임진년의 병란을 당하여 선조고께서는 고성(固城)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적과 싸우다가 화살이 다하여 어찌할 수 없게 되자, 부자가 함께 순절하여 영동에 장사지냈다. 선조비께서는 어린 자녀들을 업고 이끌고 용담(龍潭)으로 들어와 신연(新硯)에 터를 잡고 살면서 자손에게 백세의 큰 기반을 세워주었고, 골안동(骨安洞)에 묘소를 잡아 사후(死後) 만년의 유택(幽宅)으로 삼았다. 성품과 규범은 지금에 와서 몇 가지로 간추릴 수는 없고, 굵직한 것만 가지고 추측할 뿐이다. 희라! 전복된 나무에서도 오히려 새싹이 나거늘, 하물며 선조비의 적덕(積德)과 여행(勵行)의 탁월함에 있어서랴? 대체로 묘각이 지어진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 종인 중에 창옥(昌玉)이 있으니, 일찍 아버지를 여읜 몸으로 효우가 아울러 독실하고 어머니를 모심에 극히 정성스러웠다. 모든 종사에 어려움이 있으면 발벗고 나섰는데, 그가 종회석에서 발의하기를 “우리 선조비의 자손이 호수로는 수백호가 되고 사람으로는 1천인이 넘는데, 묘소 아래에 집 한 채를 못 세운 것은 스스로 부끄럽고 남이 보기에도 부끄러운 일이다.”하였다. 이에 결의를 거쳐 일을 시작하니, 우리 모든 일가들도 돈을 내고 노력을 제공하여 정월 상순에 시작하여 2월 상순에 일을 마쳤다. 오호라! 창옥이 시작을 잘 한 것도 효심(孝心)이고, 여러 일가들이 끝을 잘 맺은 것도 효심이니 우리 집안은 아마도 희망이 있으려나 보다. 이에 금월강(錦月江)의 서일(瑞日)과 구룡동(九龍洞)의 상운(祥雲)이 어울려 집에 비치고, 부귀봉(富貴峰)의 석름(石廩, 창고 모양의 돌을 말함인 듯)과 복두봉(福頭峰)의 덕음(德蔭)이 대청에 보이니, 우리 자손들로 하여금 후한 복을 누리게 함이 북을 치듯 그림자가 비치 듯할 것인즉,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이치를 몰라서는 안될 줄 안다. 이상 간략히 그 전말을 기록하는 바이다. 병자년(丙子年) 봄 10세손 창모(昌謨)가 삼가 기술하다.
  • 진안읍 군하리 356에 있는 진안 이씨 재각. 솟을대문 담장 안에 전면 5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이다. 1886년에 세워졌으나 신설도로로 편입되어 지금의 자리로 이건되었다. 『진안지』에 정종엽(鄭鍾燁)의 기문과 유진찬(兪鎭贊)의 상량문 영사재중건기(永思齋重建記)가 실려 있다. 재각 앞에는 진안 이씨인 이재명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永思齋記】 李氏鼻祖直提學諱校 當麗末 遭貶于鎭安 仍居仍籍 而但衣履之藏 逸不傳焉 後孫每相聚而言 馬醫夏畦之魂 無不受子孫追養 况我祖遺德厚蔭 肇開永世無疆之體 而倘闕歲一之祭 豈可免豺獺之猶不知哉 就馬耳之陰蒜峴 封壇植碑 以代佳城之阡 乃公喪之近 而亦後世葬之側也 修歲事 旣又相議 不可無齊潔灌獻之所 一區棟宇 經始克成 顔其扁永思 命記於余 余惟後承之奉祖先 莫如孝思 孝思之善 莫如永永無替也 故詩之永言孝思 寔由是已 况李氏之爲齋 則自公以來 郡守公諱達孫之德業 副正公諱英俊之氣節 己照耀於人 若夫雙尖堂諱仁賢之孝友文章 出處道義 爲世推重 俎豆於儒院 而郡守與雙尖 幽隧俱在玆 思尤在玆矣 晩菴李忠貞公 以彌甥 惓惓于外氏 述以文竪以碑 遺澤餘馨 迨今尙新 余亦外裔中人 欲思晩菴之思 而思不能及 思將爲李氏勉之 念祖修德 孝思永爲維則 而齋與之相終始 思存則齋存 齋存則思存 錫類堂搆 永必俱全哉 東萊鄭鍾燁謹撰
    【영사재기】 이씨(李氏)의 시조 직제학 휘 교(校)는 고려 말 진안(鎭安)으로 좌천되었다. 그 후 그대로 눌러 살면서 본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묘소는 잃어버리고 전해지지 않는다. 후손이 모일 때마다 말하기를 “마의(馬醫, 말의 병을 고치는 사람) 하휴(夏畦, 농사짓는 사람. 모두 천역에 종사함을 뜻함)의 귀신도 모두 자손의 추모와 제사를 받는다고 하였다(당대[唐代]의 문장가 유자후[柳子厚]의 글에 있는 말임). 하물며 우리 조상의 두터운 음덕은 영세토록 끝이 없는 체통(體統)을 열어주었는데도 세일제(歲一祭)마저 궐한다면, 어떻게 시랑(豺狼)이나 수달피만도 못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는가?(시랑이나 수달피도 제 조상에 제사를 지낸다는 전설이 있음)”하고, 마이산의 응달쪽인 산현(蒜峴)에 단을 묻고 비를 세워 묘소를 대신하니, 은거지(隱居地)와도 가깝고, 후대의 세장(世葬) 곁이기도 하다. 이윽고 세일제를 지내고 또 상의하기를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재계하고 제사를 올릴 처소가 없을 수 없다.”하고, 한 채의 집을 짓기 시작하여 낙성하고 편액(扁額) 걸기를 영사재(永思齋)라 하면서 나더러 기(記)를 지어달라 부탁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후손이 조선을 받드는 데에는 효사(孝思)만한 것이 없고, 효사를 잘하는 데에는 길이길이 침체가 없게 하는 것 만한 일이 없다고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시경(詩經)」의 “길이 효사한다(永言孝思)”는 말도 이를 말한 것이다. 더구나 이씨가 이 곳에 재실을 짓는다면, 공 이후로 군수공(郡守公) 휘 달손(達孫)의 덕업(德業)과 부정공(副正公) 휘 영준(英俊)의 기절은 이미 사람들의 귀에 익숙하고, 또 쌍첨당(雙尖堂) 휘 인현(仁賢)의 효우(孝友) 문장(文章)과 출처(出處, 벼슬길에 나섬과 물러남) 도의(道義)는 세상의 추중한 바 되어 서원에 모셔지기까지 하였는데, 군수공과 쌍첨당의 묘소 역시 모두 이 곳에 있고, 효사 역시 이 곳에 있기 마련이니 겸하여 모실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암(晩菴, 이상진[李尙眞]의 호) 이충정공(李忠貞公)은 외손으로, 외가의 일에 정성이 대단하여 글로 기술하고 비를 세워 그 끼친 덕택과 남긴 칭송은 아직도 새롭다. 나 역시 외손되는 사람으로 만암이 생각했던 바를 생각하고자 하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니, 이씨를 위하여 권면하는 도리를 생각하고자 한다. 조상을 생각하고 덕을 닦으며 효사(孝思)로 길이 법도를 삼는다면, 재실과 함께 시종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며, 또 효사가 있으면 재실도 존재하고 재실이 존재하면 효사도 따라서 있게 되는 것이므로 그와 같은 자손이 태어나 계승하여 반드시 길이 보존하게 될 것이다. 동래(東萊) 정종엽(鄭鍾燁)이 삼가 찬하다.

    【永思齋上樑文】 述夫 祼薦益勤於霜露時 子姓追慕 齋宿無窘於風雨際 丙舍重成 禮所當然 事有待也 伏惟浪軒先生全公 歡城華閥 莊陵節臣 冠冕繼蟬聯 不墜忠孝之軌範 謨猷貽鷰翼 克紹詩書之箕表 尙忍言哉 泣血淚於癸酉甲戌之禍 惠相好者 許道契於秋江漁溪之流 肆卷志於榮途 爰筮遯于月浪 斷斷葵藿義 暗銷魂於子規詩蜂蛾忱 嘐嘐木石居 自結盟於麋鹿友猿鶴伴 惟玆居士之谷 乃是君子之藏 窀穸占牛眠 地謹避於五患 堂斧若馬鬣 誠尤切於三周 松栢翳陰岡 洋洋乎如見其位 花樹接封域 油油者皆由其心 眷此數晦蜜邇之區 經始百世瞻拜之閣 堂廂聽位 階圯分級 升降周旋之均宜 庫廒依方 廚湢如儀 置藏熟藻之各便 幾運經綸於心上 遽然突兀於眼前 肯構肯堂 善繼述於久久增飾之志 爰居爰處 胥勉勗於煌煌永思之扁 歐公記瀧岡之阡 葬父其里 張老頌獻文之室 聚族於斯 雙虹高擧吉日 六兒齊唱偉歌 兒郞偉抱樑東 莊陵松栢蔚葱葱 子規啼罷人何在 千古丹心一浪翁 抛樑南 江亭春水碧成潭 萬鍾脫屣一身去 生六當年義共參 抛樑西 西山白日影隧低 此心已向葵花側 不厭相看手自携 抛樑北 五雲起處迷消息 兩男雙婦同日殉 碧血化爲紅淚拭 抛樑上 萬笏群山列錦嶂 競秀爭高相揖立 兒孫世世麗無量 抛樑下 芳稌香秬連平野 秋霜旣降供明薦 祖考假思孫受嘏 伏願上樑之後 禎祥漸臻 基礎益鞏 蕭其炳茅其灌 優優禮儀三千芝 之馥蘭之馨 侁侁子孫萬億 所望此耳 勿替引之 丙戌夏下浣 嘉善大夫奎章閣檢校直閣 杞溪兪鎭贊撰
    【영사재 상량문】 기술하건대, 관천(祼薦, 강신[降神]과 헌작[獻爵])은 상로(霜露)가 내릴 때 더욱 근간하게 하니, 자손이 추모하고 비바람 불 때 재숙(齋宿)의 군색함이 없게 하려고 병사(丙舍, 묘막[墓幕])를 중수하였다. 이것은 예로는 당연하고, 일은 때를 기다린 듯하다. 생각건대, 낭헌 선생(浪軒先生) 전공(全公)은 환성(歡城, 천안[天安]의 고호)의 화벌(華閥)이요, 장릉(莊陵, 단종 릉소)의 절신(節臣)이다. 관면(冠冕)이 대대로 이어지니 충효의 궤범(軌範)을 실추하지 않았고, 모유(謨猷, 큰 계책)를 연익(鷰翼, 감싸준다는 뜻인데 자손의 뜻으로 쓰였음)에 끼쳐주니 능히 시서(詩書)의 가업(家業)을 이었다. 차마 말하겠는가? 혈루(血淚)는 계유(癸酉) 갑술(甲戌, 단종이 찬탈당한 연대)의 화에 뿌렸고 좋아하는 이 도왔으니, 도교를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호) 어계(漁溪의, 조려[趙旅]의 호)의 부류와 맺었다. 이에 영도(榮途)에서 뜻을 거두고 월랑(月浪)으로 은둔하였는데, 정일(貞一)한 규곽(葵藿)*의 충의는 은연중 자규시(子規詩, 단종의 자규시가 있음) 봉아침(蜂蛾忱, 벌과 개미의 지성스러움)에 넋이 녹아났고, 자대(自大)한 듯 목석(木石)처럼 살면서 스스로 미록우(麋鹿友) 원학반(猿鶴伴)과 결맹(結盟)을 하였다. 이곳 거사곡(居士谷)은 군자의 무덤인데, 묘소는 우면(牛眠,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의 자리)을 점하여 땅은 오환(五患)에 더욱 간절하다. 송백(松栢)은 산등성이를 가려 양양(洋洋)하게 운감하는 영위(靈位)를 보는 듯하고 화수(花樹, 자손)는 묘역을 대함에 유유(油油, 성하게 일어나는 모양)함이 모두 마음에서부터 일어난다. 이 몇 발자국 아주 가까운 곳에 백세토록 첨배(瞻拜)할 묘각을 지었는데, 당랑(堂廊)은 자리에 맞고 섬돌은 계단으로 나누어 승강(升降)하고 주선(周旋)하기에 적당하게 하였고, 창고는 방위에 맞고 주방은 법식대로 하여 생숙(生熟)을 저장하는데 편리하게 하였다. 몇 번이나 마음 속으로 계획을 세웠는지 갑자기 눈앞에 높다랗게 다가섰다. 긍구 긍당(肯構肯堂)*은 오래오래 증수(增修)하는 뜻을 잘 계술하였고, 원거 원처(爰居爰處)*하니 빛나는 영사(永思)의 편액(扁額)을 보며 서로 면려한다. 구공(歐公)은 용강천표(瀧岡阡表)*를 짓고 그 마을에 아버지를 장사하였고, 장로(張老, 미상)는 헌문실(獻文室)을 칭송하고 그 일가를 이 곳에 모았다. 쌍홍(雙虹)이 높이 길일(吉日)을 아뢰니 육아(六兒)*는 일제히 위가(偉歌)를 노래한다. “아랑위(兒郞偉) 동쪽 들보 올리니 / 장릉(莊陵)의 송백(松栢)이 울창하고 푸르네. / 자귀(子規)는 울음 그쳤는데 사람은 어디 있는가 / 천고(千古)의 단심(丹心)은 낭옹(浪翁) 하나일세. / 아랑위 남쪽 들보 올리니 / 강담(江潭)의 봄, 물은 푸르러 못을 이뤘네. / 만종록(萬鍾祿) 헌 신짝처럼 버리고 떠나가니 / 당년의 절의 생육신(生六臣)과 다를 바 없다네. / 아랑위 서쪽 들보 올리니 / 서산(西山)의 해는 그림자 따라서 낮아지네. / 이 마음 벌써 해바라기 곁에 가 있나니 / 보기에도 싫지 않아 손으로 당겨보네. / 아랑위 북쪽 들보 올리니 / 오운(五雲)*이 일어난 곳에 소식이 끊겼구려. / 두 아들 두 며느리 같은 날 순절하니 / 검푸른 피 변화하여 붉은 눈물 되었네. / 아랑위 위쪽 들보 올리니 / 만홀(萬笏)의 뭇 산들 금장(錦嶂)을 펼쳤네. / 빼어남 다투고 높이 겨루며 마주보고 섰으니 / 자손들 대대로 그 수가 한량없겠구려. / 아랑위 아랫쪽 들보 올리니 / 꽃다운 메벼 향긋한 기장 들판에 연했네. / 상로(霜露) 내리자 조촐한 제사 올리니 / 조상의 원대한 배려로 자손들 복을 받네.” 엎드려 바라옵건대, 들보를 올린 뒤에는 경상(慶祥)은 점차 이르고 기초는 더욱 공고해지며 폐백(幣帛)은 빛나고, 모사(茅沙) 적셔져 넉넉한 예의는 두루 갖추어지고, 지초 향기롭고 난초 향긋하여 너절한 자손 한없이 많게 하소서. 소망은 이것뿐이오니 침체 없이 이어지게 하소서. 병술(丙戌, 1886) 하월(夏月) 하완(下浣, 하순) 가선대부(嘉善大夫) 규장각검교직각(奎章閣檢校直閣) 기계(杞溪) 유진찬(兪鎭贊)이 찬하다.
    *규곽(葵藿) : 해바라기는 언제나 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기에 향일규[向日葵]라고 하며,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는 일편단심에 비유되어 왔다.
    *오환(五患) : 묘자리에 해를 끼치는 다섯 가지. 즉 풍[風]․수[水]․습[濕]․조[燥]․우양[牛羊])을 피하였고, 봉축은 마렵(馬鬣, 말의 갈기)과 같아서 정성은 삼주(三周, 봉축의 주위를 세 번 두른다는 뜻.
    *긍구 긍당(肯構肯堂) : 아버지가 일으킨 일을 아들이 계승하여 마저 이룬다는 뜻. 若考作室 旣底法 厥子 乃弗肯堂 矧肯構. [書經, 大誥])
    *원거 원처(爰居爰處) : 여기에서 기거(起居)하고 여기에서 거처(居處)하다
    *용강천표(瀧岡阡表) : 송나라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구양수(歐陽修)가 자기 아버지를 용강(瀧江)에다 장사지내고 세운 묘표(墓表)의 글을 말함.
    *육아(六兒) : 들보를 올릴 때 힘을 함께 쓰기 위하여 내는 구령(口令). 아랑위(兒郞偉)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우리의 어영차와 비슷한 사례이다 동서남북 상하(東西南北上下)로 올리기 때문에 육위가(六偉歌)라고도 한다.
    *오운(五雲) : 오색의 구름. 자미성(紫微星)이 있는 곳은 오색의 구름이 감싸고 있기 때문에 생긴 말인데 임금은 자미성에 비유하여 쓰여지고 있다.
  • 상전면 진무로 1883[수동리 1079-1] 국도변에 있는 사천 김씨(泗川金氏) 몽정공파(夢鼎公波)의 재각으로 김만서(金晩緖)의 셋째 아들 김기(金機)와 김기의 아들 김호석(金浩錫) 등을 배향하고 있다. 1856년 상전면 수동리 터일 마을에 세웠는데 용담댐 건설로 인해 2000년 현 위치로 옮겼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기와 팔작지붕이며, 영성문(永誠門)은 3칸이다. 재각의 왼쪽에 관리사가 있다. 음력 10월 13일에 제를 지낸다. 영성재에는 함풍 9년[1859년] 교지 6장, 광서 10년[1884년] 교지 2장, 광서 17년[1891년] 교지 1장, 광서 19년[1893년] 교지 3장, 그리고 갑오년[1894년]의 호구 단자 1장이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