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운면 정송길 15[평장리 488] 양지 오른편 마을에 있는 전주 최씨 집안의 재각. 1970년에 만육 최양의 차남 봉강 최진형(崔進亨)과 그 후손들의 무덤을 관리하기 위해 전주 최씨 문중에서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이다. 본채 지붕에는 돌너와를 얹었다. 본래 대문 위 지붕에도 돌너와를 얹었으나 무거워서 지금은 없앴다. 돌너와는 진안군 노촌리 비사랑에 있는 수리봉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문은 3칸이며, 관리사가 옆에 있다. 재실 내에는 ‘현판기’와 ‘봉강선생기적비 수립실기(鳳岡先生紀蹟碑竪立實記)’가 걸려있다.
  • 백운면 정송길 27-4[평장리 393] 평장리 양지뜸에 있는 함양 오씨(咸陽吳氏) 재각. 오성복(吳成福)을 배향한다.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 있던 것을 갑술(1934)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이다.
    ‘수승재(修承齋)’는 오성복(吳成福)의 호이기도 하다. 수승재의 전말에 관하여는 『진안지(鎭安誌, 1925)』에 기재되어 있는 후산 이도복의 ‘수승재기’와 진사 김혁장의 ‘오씨 수승재기’에 기록되어 있다.

    【修承齋記】 錦谷宋先生 承述同春之學 設皐比於湖中 四方學者多歸之 時太學生玉隱吳公 慨然有志於斯學 來自月浪 束脩踵門 先生愛其氣宇之軒昻 賜坐款誨 又嘉賞其先尊府之純孝 手書修承二字 俾歸刻于其堂 孝子公旣沒 朝廷命旌其閭 子孫就梨洞世藏 結構墳菴 移揭修承之額於是齋 盖追慕其先德 而修承之意也 嗚呼 吳氏之先 有若正字公 當穆陵龍蛇之燹 大駕西巡之日 與金健齋諸公 倡義討賊 同殉于晉陽 孝子公又能承述其先德 篤孝其親 至誠感神 其揄揚一文 儘出於錦谷肚裡來 其榮耀 豈止華袞而已哉 然向非玉隱公修承之志 吳氏兩世忠孝之實 可謂泯而無傳矣 登斯齋者 苟能深軆夫玉隱公之志 修承先世忠孝之傳 世世相承 夙夜無忝 庶不墜先生當日命名之義矣玉隱公亦肯曰余有後昆也 公之嗣子前員外郞相吉 謬認不侫爲玄晏脚下人 托以記德之文 玄晏吾豈敢 故述吳氏忠孝相傳之美法 以侈齋壁 屠維恊洽南呂月初吉 雙明山人李道復記
    【수승재기】 금곡(錦谷) 송 선생(宋先生)이 동춘(同春)의 학문을 이어 호중(湖中)에서 고비(皐比, 호피[虎皮] 사석[師席]을 뜻함)를 베푸니, 사방에서 많은 학자가 찾아들었다. 그 때 태학생(太學生) 옥은(玉隱) 오공(吳公)이 개연히 사학(斯學)에 뜻을 두고 월랑(月浪)에서 속수(束脩, 예물)를 들고 찾아왔다. 선생께서는 그 기상이 드높음을 사랑하여 자리를 내주어 관대(款待)하였고, 또 그 선존장(先尊丈)의 순효(純孝)를 가상(嘉賞)하며 손수 수승(修承) 두 글자를 써주어 돌아가서 그 당(堂)에 각하여 걸게 하였다. 효자공이 몰(歿)한 뒤에 조정에서는 문려(門閭)를 정표(旌表)하라고 명하였다. 자손이 이동(梨洞)의 세장(世藏)에 재실을 짓고 수승(修承)의 액자(額字)를 그 집에 옮겨 걸었는데, 대체로 선덕(先德)을 추모하고 수승(修承)하자는 뜻이었다. 오호라! 오씨의 선대에는 정자공(正字公) 같은 분이 있어 선조조 임진 계사의 난을 당하여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하던 날, 김건재(金健齋) 등 제공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토적(討賊)하다가 진양성 아래에서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효자공이 또 능히 선덕(先德)을 이어받아 어버이에게 독실하게 효도를 다 하니, 지극한 정성은 귀신까지 감동시켰다. 또 유양(揄陽, 치켜세우다)하는 글이 모두 금곡(錦谷)의 의중(意中)에서 나왔으니, 그 영광이 어찌 화곤(華袞, 관복 즉 벼슬을 뜻함)에 그칠 따름이겠는가? 그러나 전자에 옥은공의 수승할 뜻이 없었다면, 오씨 양대의 충효로운 실적은 아마 민몰하고 전해지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 재(齋)에 오른 사람이 진정으로 옥은공의 뜻을 깊이 본받아 선세의 충효로 전해짐을 닦고 받들어 대대로 이어와서 낮이나 밤이나 욕되게 함이 없다면, 아마도 선생께서 당일 명명하신 의의를 실추함이 없을 것이며, 옥은공도 기꺼이 나도 후손이 있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공의 사자(嗣子) 전 원외랑(前員外郞) 상길(相吉)이 부령(不伶, 필자의 겸칭)을 현안(玄晏)*의 문하인(門下人)이라는 것만 잘못 알고 덕을 기술하는 글을 부탁하였는데, 현안(玄晏)을 내가 어찌 감히 감당하겠는가? 우선 오씨가 충효로 전해 내려오는 훌륭한 가법(家法)만을 기술하여 재벽(齋壁)에 붙이게 하는 바이다. 도유(屠維, 고갑자로 기(己)에 해당) 협흡(協洽, 고갑자로 미(未)에 해당) 남려월(南呂月, 음력 8월의 이칭) 초길(初吉, 초하루)에 쌍명산인(雙明山人) 이도복(李道復)이 기술하다.
    * 진[晋]나라 황보밀[皇甫謐]의 자는 사안[士安]인데, 자칭하여 현안 선생[玄晏先生]이라 하였다. 그가 삼도부서[三都賦序]를 지으면서 서두(序頭)에 玄晏先生曰로 시작하였기에 후세에 서문을 현안지문[玄晏之文]이라 부르게 되었다


    【吳氏修承齋記】 愚於書 嘗讀愼厥身修 其承厥志者久 而猶未知身以何爲修志 以何爲承矣 槩見同縣敎官吳公之家法 篤以孝悌之行 爲修於一身 推以孝悌之道 爲訓於子孫 而爲子弟者 蹈承敎官之志 以爲傳家之法 則公亦上承先志 以修其身矣 越在旌閭之後 齋號以修承 則豈公之自號哉 卽錦谷宋先生 深知公之在身以是修之 在後者以是承之而錫之也 愚於是 始知身修以孝悌 志承而孝悌 然而以愚蔑學 何敢有言 適遇人統歲 陽復之辰 興善乎吳公之實行 起敬乎錦老之錫號 自不覺僭越而發於 言 歲戊寅至之日 後學錦溪人 進士金赫璋 謹書
    【오씨 수승재기】 나는 일찍이 서경(書經)에서 “몸을 조심스레 닦아 그 뜻을 받들지어다.”라는 대목을 읽은 지 오래이나, 아직도 몸은 무엇으로 닦고 뜻은 무엇으로 받드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대체로 보건대, 같은 고을의 교관(敎官) 오공(吳公)의 가법(家法)은 효제(孝悌)의 행실을 독실히 하여 자기 일신을 닦고, 효제의 도리를 미루어 자손에게 훈계하며, 자제(子弟)는 교관의 뜻을 답습하여 전가(傳家)하는 법으로 삼고 있는 것이니, 공 역시 위로 선지(先志)를 받들어 그의 몸을 닦은 것이다. 지난 날 정려(旌閭)가 내린 뒤에 재호(齋號)를 수승(修承)이라 한 것은, 어찌 공이 스스로 호를 그렇게 하였겠는가? 바로 금곡(禽谷) 송 선생(宋先生)이 공의 일신에 있어서는 이것으로 닦고, 후손도 이것을 잇고 있다는 것을 깊이 알고 지어준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비로소 몸은 효제로 닦고, 뜻도 효제로 받드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같이 학문 없는 사람이 어찌 감히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마침 인통세(人統歲, 하력[夏曆]의 뜻. 지금 쓰고 있는 음력은 하력에 속함)의 양복(陽復, 일양시복[一陽始復] 동짓달을 말함)할 때를 만나 오공의 실행에 좋은 인상을 받았고, 금로(錦老, 금곡을 높여서 부른 말)의 사호(賜號)에 공경심이 일어 참월한지도 깨닫지 못하고 말을 하게 된 것이다. 무인년(戊寅年, 1878) 동지일(冬至日) 후학 금계인(錦溪人) 진사(進士) 김혁장(金赫瘴)이 삼가 서하다.
  • 부귀면 삼봉길 2[두남리 525] 원두남마을 어귀에 있는 김해 김씨 재각. 김현응(金顯應)과 그 자(子) 재황(再璜)을 제향한다. 두 분의 효자비는 재각의 앞에 있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매남문과 충효문이 있다. 1960년에 건립하였다.
  • 동향면 천동로 564-93[자산리 686]에 있는 창녕 성씨(昌寧成氏) 독곡공파[예천공]의 재각이다.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가 재호(齋號)를 붙여 주었다. 승유재는 창녕 성씨 진안 입향조인 성세필(成世弼)을 제향하기 위하여 1941년 5월 9일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초가 건물이었다. 1985년에 기와로 지붕을 개량하였고, 1995년 4월에 다시 지붕을 개량하였다. 2006년 7월에는 지붕 개량과 담장, 대지 일체에 대한 재정비를 하였다. 정면 5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