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귀면 오산길 62-2[오룡리 499] 오산마을 뒤쪽에 있는 사천 김씨 재각. 오매당 김만서(金晩緖)를 배향하였다. 1958년 건립되고, 1996년 중건되었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콘크리트 구보물 팔작지붕이다.
  • 상전면 금지1길 18-34[월포리 1005]에 있는 죽산 안씨(竹山安氏) 집안의 재각. 안수홍(安守洪)과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를 모시는 재각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내금위장 안수홍의 부인 안동 권씨가 전란을 피하여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상전면에 정착한 이후 자손이 번성하였다. 건물은 1876년에 건립되었으나 근래 대폭 중창되었다.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금속기와의 팔작지붕이다. 문은 3칸 솟을대문이며 쪽문이 있고 관리사와 연결된다. ‘영모재’라는 현판 글씨는 석재(石齋) 황현(黃玹)이 썼다. 재각의 안쪽에는 ‘통훈대부 행내금위장 죽산 안공지묘 배숙인 안동 권씨 묘 재진안 골안동 신좌(通訓大夫行內禁衛將竹山安公之墓配淑人安東權氏墓 在鎭安骨安洞 辛坐)’라 쓰인 비석과 헌성비 외 1개의 비석이 더 있고, 담장 ­­바깥쪽에 ‘유담 안공 재연 기적비(柳潭安公在淵紀行碑)’, ‘경남 안공 재성 기적비(耕南安公在聖紀績碑)’, ‘우당 안공 창옥 기적비(愚堂安公昌玉紀績碑)’ 등이 있다.

    【永慕齋記】 嗚呼此我先祖妣墓閣, 先祖考墓在永同郡, 葬鎭安, 自我先祖妣始, 我安氏, 東國大姓, 名於麗及我朝盖久, 自宣祖朝, 迄今三百祀, 在鎭安, 不墜家聲, 亶由我先祖妣也, 先祖妣貞節烈行, 足以光前裕後, 至其箴鑑, 雖明經君子, 不能過焉, 口碑千載, 固有不朽者存, 然墓無顯刻, 世系莫徵, 豈非後嗣之遺感, 乃相議立閭, 以記終始, 已有年所而末就, 謹詳權氏譜, 貫安東, 自太師幸佐麗朝平甄萱, 以功名顯, 子孫世趾其美, 本朝有諱仲和, 恭愍前朝文贊成, 太宗丁亥大拜至領, 封醴泉伯, 諡文節, 高祖諱忱, 成均館生員, 曾祖諱緝, 司諫院司諫陞戶曹判書, 祖諱繼達, 兵曹正郞, 考諱壽剛, 司憲府監察, 先祖妣生名門, 年若干, 歸于我先祖考, 先祖考諱守洪, 內禁衛將, 貫竹山, 竹城君諱元衡後裔, 卽通訓大夫固城縣令諱珪嗣子, 祖曰克終, 梁山軍需, 曾祖曰哲孫, 正統辛酉生員, 至檢閱忠淸監司吏曹參判, 高祖曰復初, 通政大夫淮陽府使, 贈議政府左贊成, 當壬辰搶攘, 先祖考陪親於固城, 與賊督戰, 矢盡無可爲, 父子殉節, 葬于永同, 先祖妣携孤負幼, 八于龍潭, 占居於新碩, 以遺子孫百世之鴻基, 占阡於骨安洞, 以安身後萬年之幽宅, 其性度閨範, 今不可一二摭, 因其大者可測也已, 噫, 顚木尙有甹孼, 況我先祖妣, 積德礪行度越乎, 盖此閣建設, 果非偶然, 吾宗有昌玉, 以孤露餘生, 孝友兼篤, 奉慈極敬, 凡於宗事, 有難勇奮, 乃發言宗會之座曰, 夫我先祖妣裔孫, 戶餘數百, 人過一千, 未立一棟於墓下, 自愧亦愧于人矣, 立衆議而開工, 同我僉族, 亦出義出力, 始於正月上旬, 終於二月上旬, 嗚呼昌玉之善始, 孝也, 僉族之善終, 孝也, 吾門其庶幾乎哉, 於是焉錦月江之瑞日, 九龍洞之祥雲, 相暎於棟宇, 富貴峯之石廩, 福頭峯之德蔭, 交萃於房櫳, 使我子孫, 厚餉福祿, 若桴鼓影響, 福善之理, 不可不識, 畧具其顚末焉, 丙子年春, 十世孫 昌謨 謹記.
    【영모재기】 오호라! 이것은 우리 선조비(先祖妣)의 묘각(墓閣)이다. 선조고(先祖考)의 묘소는 영동군(永同郡)에 있으니, 진안(鎭安)에 입장(入葬)한 것은 우리 선조비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안씨(安氏)는 동방의 대성(大姓)으로 고려조와 아조(我朝)에 이름이 드러난 지 오래이다. 선조조(宣祖朝)에서 지금까지 3백 년 동안 진안에서 가성(家聲)을 실추함이 없었던 것은 분명히 선조비 때문이다. 선조비의 정절(貞節)과 열행(烈行)은 족히 전대(前代)를 빛나게 하고 후대에게 복록을 내리게 하였으며, 그 잠계(箴戒)와 귀감(龜鑑)은 비록 학문에 밝은 군자라 할 지라도 그보다 더할 수 없고, 구비(口碑, 입으로 전해진 말)는 천재(千載)를 내려와 사실 불후(不朽)할 바가 있으나 묘소에는 비각(碑刻)이 없어 세계(世系)를 고증할 수 없으니 어찌 후손들의 유감이 아닐 수 있겠는가? 이에 묘각을 세우고 그 전말을 기재하기로 상의한 지는 여러 해가 되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삼가 권씨(權氏)의 족보를 상고해 보건대,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태사(太師) 행(幸)이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甄萱)을 평정한 뒤로 공명이 드러났고, 자손이 대대로 명성을 계승하였다. 본조(本朝)에 휘 중화(仲和)가 있는데, 고려의 공민왕 때 문과하여 찬성을 지냈고, 태종 정해년(丁亥年)에 대배(大拜, 정승이 됨)하여 영상에 이르러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지고, 시호로 문절(文節)이 내렸다. 고조의 휘는 침(忱)이니 성균관 생원이요, 증조 휘 즙(緝)은 사간원 사간에서 호조판서에 올랐으며, 조부 휘 계달(繼達)은 병조정랑이요, 고(考) 휘 수강(壽剛)은 사헌부 감찰이다. 선조비는 명문에서 태어나 나이 약간세(若干歲)에 우리 선조고에게 시집왔다. 선조고의 휘는 수홍(守洪)으로 내금위장(內禁衛將)이며, 본관은 죽산(竹山), 죽성군(竹城君) 휘 원형(元衡)의 후예이니, 바로 통훈대부 고성현령(固城縣令) 휘 규(珪)의 아들이다. 조부는 극종(克終)이니 양산군수(梁山郡守)요, 증조는 철손(哲孫)이니 정통(正統) 신유년(辛酉年, 세종 23. 1441) 생원에 합격하여 검열 충청감사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고조는 복초(復初)이니 통정대부 회양부사(淮陽府使)로 증 의정부 좌찬성이다. 임진년의 병란을 당하여 선조고께서는 고성(固城)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적과 싸우다가 화살이 다하여 어찌할 수 없게 되자, 부자가 함께 순절하여 영동에 장사지냈다. 선조비께서는 어린 자녀들을 업고 이끌고 용담(龍潭)으로 들어와 신연(新硯)에 터를 잡고 살면서 자손에게 백세의 큰 기반을 세워주었고, 골안동(骨安洞)에 묘소를 잡아 사후(死後) 만년의 유택(幽宅)으로 삼았다. 성품과 규범은 지금에 와서 몇 가지로 간추릴 수는 없고, 굵직한 것만 가지고 추측할 뿐이다. 희라! 전복된 나무에서도 오히려 새싹이 나거늘, 하물며 선조비의 적덕(積德)과 여행(勵行)의 탁월함에 있어서랴? 대체로 묘각이 지어진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 종인 중에 창옥(昌玉)이 있으니, 일찍 아버지를 여읜 몸으로 효우가 아울러 독실하고 어머니를 모심에 극히 정성스러웠다. 모든 종사에 어려움이 있으면 발벗고 나섰는데, 그가 종회석에서 발의하기를 “우리 선조비의 자손이 호수로는 수백호가 되고 사람으로는 1천인이 넘는데, 묘소 아래에 집 한 채를 못 세운 것은 스스로 부끄럽고 남이 보기에도 부끄러운 일이다.”하였다. 이에 결의를 거쳐 일을 시작하니, 우리 모든 일가들도 돈을 내고 노력을 제공하여 정월 상순에 시작하여 2월 상순에 일을 마쳤다. 오호라! 창옥이 시작을 잘 한 것도 효심(孝心)이고, 여러 일가들이 끝을 잘 맺은 것도 효심이니 우리 집안은 아마도 희망이 있으려나 보다. 이에 금월강(錦月江)의 서일(瑞日)과 구룡동(九龍洞)의 상운(祥雲)이 어울려 집에 비치고, 부귀봉(富貴峰)의 석름(石廩, 창고 모양의 돌을 말함인 듯)과 복두봉(福頭峰)의 덕음(德蔭)이 대청에 보이니, 우리 자손들로 하여금 후한 복을 누리게 함이 북을 치듯 그림자가 비치 듯할 것인즉,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이치를 몰라서는 안될 줄 안다. 이상 간략히 그 전말을 기록하는 바이다. 병자년(丙子年) 봄 10세손 창모(昌謨)가 삼가 기술하다.
  • 진안읍 군하리 356에 있는 진안 이씨 재각. 솟을대문 담장 안에 전면 5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이다. 1886년에 세워졌으나 신설도로로 편입되어 지금의 자리로 이건되었다. 『진안지』에 정종엽(鄭鍾燁)의 기문과 유진찬(兪鎭贊)의 상량문 영사재중건기(永思齋重建記)가 실려 있다. 재각 앞에는 진안 이씨인 이재명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永思齋記】 李氏鼻祖直提學諱校 當麗末 遭貶于鎭安 仍居仍籍 而但衣履之藏 逸不傳焉 後孫每相聚而言 馬醫夏畦之魂 無不受子孫追養 况我祖遺德厚蔭 肇開永世無疆之體 而倘闕歲一之祭 豈可免豺獺之猶不知哉 就馬耳之陰蒜峴 封壇植碑 以代佳城之阡 乃公喪之近 而亦後世葬之側也 修歲事 旣又相議 不可無齊潔灌獻之所 一區棟宇 經始克成 顔其扁永思 命記於余 余惟後承之奉祖先 莫如孝思 孝思之善 莫如永永無替也 故詩之永言孝思 寔由是已 况李氏之爲齋 則自公以來 郡守公諱達孫之德業 副正公諱英俊之氣節 己照耀於人 若夫雙尖堂諱仁賢之孝友文章 出處道義 爲世推重 俎豆於儒院 而郡守與雙尖 幽隧俱在玆 思尤在玆矣 晩菴李忠貞公 以彌甥 惓惓于外氏 述以文竪以碑 遺澤餘馨 迨今尙新 余亦外裔中人 欲思晩菴之思 而思不能及 思將爲李氏勉之 念祖修德 孝思永爲維則 而齋與之相終始 思存則齋存 齋存則思存 錫類堂搆 永必俱全哉 東萊鄭鍾燁謹撰
    【영사재기】 이씨(李氏)의 시조 직제학 휘 교(校)는 고려 말 진안(鎭安)으로 좌천되었다. 그 후 그대로 눌러 살면서 본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묘소는 잃어버리고 전해지지 않는다. 후손이 모일 때마다 말하기를 “마의(馬醫, 말의 병을 고치는 사람) 하휴(夏畦, 농사짓는 사람. 모두 천역에 종사함을 뜻함)의 귀신도 모두 자손의 추모와 제사를 받는다고 하였다(당대[唐代]의 문장가 유자후[柳子厚]의 글에 있는 말임). 하물며 우리 조상의 두터운 음덕은 영세토록 끝이 없는 체통(體統)을 열어주었는데도 세일제(歲一祭)마저 궐한다면, 어떻게 시랑(豺狼)이나 수달피만도 못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는가?(시랑이나 수달피도 제 조상에 제사를 지낸다는 전설이 있음)”하고, 마이산의 응달쪽인 산현(蒜峴)에 단을 묻고 비를 세워 묘소를 대신하니, 은거지(隱居地)와도 가깝고, 후대의 세장(世葬) 곁이기도 하다. 이윽고 세일제를 지내고 또 상의하기를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재계하고 제사를 올릴 처소가 없을 수 없다.”하고, 한 채의 집을 짓기 시작하여 낙성하고 편액(扁額) 걸기를 영사재(永思齋)라 하면서 나더러 기(記)를 지어달라 부탁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후손이 조선을 받드는 데에는 효사(孝思)만한 것이 없고, 효사를 잘하는 데에는 길이길이 침체가 없게 하는 것 만한 일이 없다고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시경(詩經)」의 “길이 효사한다(永言孝思)”는 말도 이를 말한 것이다. 더구나 이씨가 이 곳에 재실을 짓는다면, 공 이후로 군수공(郡守公) 휘 달손(達孫)의 덕업(德業)과 부정공(副正公) 휘 영준(英俊)의 기절은 이미 사람들의 귀에 익숙하고, 또 쌍첨당(雙尖堂) 휘 인현(仁賢)의 효우(孝友) 문장(文章)과 출처(出處, 벼슬길에 나섬과 물러남) 도의(道義)는 세상의 추중한 바 되어 서원에 모셔지기까지 하였는데, 군수공과 쌍첨당의 묘소 역시 모두 이 곳에 있고, 효사 역시 이 곳에 있기 마련이니 겸하여 모실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암(晩菴, 이상진[李尙眞]의 호) 이충정공(李忠貞公)은 외손으로, 외가의 일에 정성이 대단하여 글로 기술하고 비를 세워 그 끼친 덕택과 남긴 칭송은 아직도 새롭다. 나 역시 외손되는 사람으로 만암이 생각했던 바를 생각하고자 하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니, 이씨를 위하여 권면하는 도리를 생각하고자 한다. 조상을 생각하고 덕을 닦으며 효사(孝思)로 길이 법도를 삼는다면, 재실과 함께 시종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며, 또 효사가 있으면 재실도 존재하고 재실이 존재하면 효사도 따라서 있게 되는 것이므로 그와 같은 자손이 태어나 계승하여 반드시 길이 보존하게 될 것이다. 동래(東萊) 정종엽(鄭鍾燁)이 삼가 찬하다.

    【永思齋上樑文】 述夫 祼薦益勤於霜露時 子姓追慕 齋宿無窘於風雨際 丙舍重成 禮所當然 事有待也 伏惟浪軒先生全公 歡城華閥 莊陵節臣 冠冕繼蟬聯 不墜忠孝之軌範 謨猷貽鷰翼 克紹詩書之箕表 尙忍言哉 泣血淚於癸酉甲戌之禍 惠相好者 許道契於秋江漁溪之流 肆卷志於榮途 爰筮遯于月浪 斷斷葵藿義 暗銷魂於子規詩蜂蛾忱 嘐嘐木石居 自結盟於麋鹿友猿鶴伴 惟玆居士之谷 乃是君子之藏 窀穸占牛眠 地謹避於五患 堂斧若馬鬣 誠尤切於三周 松栢翳陰岡 洋洋乎如見其位 花樹接封域 油油者皆由其心 眷此數晦蜜邇之區 經始百世瞻拜之閣 堂廂聽位 階圯分級 升降周旋之均宜 庫廒依方 廚湢如儀 置藏熟藻之各便 幾運經綸於心上 遽然突兀於眼前 肯構肯堂 善繼述於久久增飾之志 爰居爰處 胥勉勗於煌煌永思之扁 歐公記瀧岡之阡 葬父其里 張老頌獻文之室 聚族於斯 雙虹高擧吉日 六兒齊唱偉歌 兒郞偉抱樑東 莊陵松栢蔚葱葱 子規啼罷人何在 千古丹心一浪翁 抛樑南 江亭春水碧成潭 萬鍾脫屣一身去 生六當年義共參 抛樑西 西山白日影隧低 此心已向葵花側 不厭相看手自携 抛樑北 五雲起處迷消息 兩男雙婦同日殉 碧血化爲紅淚拭 抛樑上 萬笏群山列錦嶂 競秀爭高相揖立 兒孫世世麗無量 抛樑下 芳稌香秬連平野 秋霜旣降供明薦 祖考假思孫受嘏 伏願上樑之後 禎祥漸臻 基礎益鞏 蕭其炳茅其灌 優優禮儀三千芝 之馥蘭之馨 侁侁子孫萬億 所望此耳 勿替引之 丙戌夏下浣 嘉善大夫奎章閣檢校直閣 杞溪兪鎭贊撰
    【영사재 상량문】 기술하건대, 관천(祼薦, 강신[降神]과 헌작[獻爵])은 상로(霜露)가 내릴 때 더욱 근간하게 하니, 자손이 추모하고 비바람 불 때 재숙(齋宿)의 군색함이 없게 하려고 병사(丙舍, 묘막[墓幕])를 중수하였다. 이것은 예로는 당연하고, 일은 때를 기다린 듯하다. 생각건대, 낭헌 선생(浪軒先生) 전공(全公)은 환성(歡城, 천안[天安]의 고호)의 화벌(華閥)이요, 장릉(莊陵, 단종 릉소)의 절신(節臣)이다. 관면(冠冕)이 대대로 이어지니 충효의 궤범(軌範)을 실추하지 않았고, 모유(謨猷, 큰 계책)를 연익(鷰翼, 감싸준다는 뜻인데 자손의 뜻으로 쓰였음)에 끼쳐주니 능히 시서(詩書)의 가업(家業)을 이었다. 차마 말하겠는가? 혈루(血淚)는 계유(癸酉) 갑술(甲戌, 단종이 찬탈당한 연대)의 화에 뿌렸고 좋아하는 이 도왔으니, 도교를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호) 어계(漁溪의, 조려[趙旅]의 호)의 부류와 맺었다. 이에 영도(榮途)에서 뜻을 거두고 월랑(月浪)으로 은둔하였는데, 정일(貞一)한 규곽(葵藿)*의 충의는 은연중 자규시(子規詩, 단종의 자규시가 있음) 봉아침(蜂蛾忱, 벌과 개미의 지성스러움)에 넋이 녹아났고, 자대(自大)한 듯 목석(木石)처럼 살면서 스스로 미록우(麋鹿友) 원학반(猿鶴伴)과 결맹(結盟)을 하였다. 이곳 거사곡(居士谷)은 군자의 무덤인데, 묘소는 우면(牛眠,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의 자리)을 점하여 땅은 오환(五患)에 더욱 간절하다. 송백(松栢)은 산등성이를 가려 양양(洋洋)하게 운감하는 영위(靈位)를 보는 듯하고 화수(花樹, 자손)는 묘역을 대함에 유유(油油, 성하게 일어나는 모양)함이 모두 마음에서부터 일어난다. 이 몇 발자국 아주 가까운 곳에 백세토록 첨배(瞻拜)할 묘각을 지었는데, 당랑(堂廊)은 자리에 맞고 섬돌은 계단으로 나누어 승강(升降)하고 주선(周旋)하기에 적당하게 하였고, 창고는 방위에 맞고 주방은 법식대로 하여 생숙(生熟)을 저장하는데 편리하게 하였다. 몇 번이나 마음 속으로 계획을 세웠는지 갑자기 눈앞에 높다랗게 다가섰다. 긍구 긍당(肯構肯堂)*은 오래오래 증수(增修)하는 뜻을 잘 계술하였고, 원거 원처(爰居爰處)*하니 빛나는 영사(永思)의 편액(扁額)을 보며 서로 면려한다. 구공(歐公)은 용강천표(瀧岡阡表)*를 짓고 그 마을에 아버지를 장사하였고, 장로(張老, 미상)는 헌문실(獻文室)을 칭송하고 그 일가를 이 곳에 모았다. 쌍홍(雙虹)이 높이 길일(吉日)을 아뢰니 육아(六兒)*는 일제히 위가(偉歌)를 노래한다. “아랑위(兒郞偉) 동쪽 들보 올리니 / 장릉(莊陵)의 송백(松栢)이 울창하고 푸르네. / 자귀(子規)는 울음 그쳤는데 사람은 어디 있는가 / 천고(千古)의 단심(丹心)은 낭옹(浪翁) 하나일세. / 아랑위 남쪽 들보 올리니 / 강담(江潭)의 봄, 물은 푸르러 못을 이뤘네. / 만종록(萬鍾祿) 헌 신짝처럼 버리고 떠나가니 / 당년의 절의 생육신(生六臣)과 다를 바 없다네. / 아랑위 서쪽 들보 올리니 / 서산(西山)의 해는 그림자 따라서 낮아지네. / 이 마음 벌써 해바라기 곁에 가 있나니 / 보기에도 싫지 않아 손으로 당겨보네. / 아랑위 북쪽 들보 올리니 / 오운(五雲)*이 일어난 곳에 소식이 끊겼구려. / 두 아들 두 며느리 같은 날 순절하니 / 검푸른 피 변화하여 붉은 눈물 되었네. / 아랑위 위쪽 들보 올리니 / 만홀(萬笏)의 뭇 산들 금장(錦嶂)을 펼쳤네. / 빼어남 다투고 높이 겨루며 마주보고 섰으니 / 자손들 대대로 그 수가 한량없겠구려. / 아랑위 아랫쪽 들보 올리니 / 꽃다운 메벼 향긋한 기장 들판에 연했네. / 상로(霜露) 내리자 조촐한 제사 올리니 / 조상의 원대한 배려로 자손들 복을 받네.” 엎드려 바라옵건대, 들보를 올린 뒤에는 경상(慶祥)은 점차 이르고 기초는 더욱 공고해지며 폐백(幣帛)은 빛나고, 모사(茅沙) 적셔져 넉넉한 예의는 두루 갖추어지고, 지초 향기롭고 난초 향긋하여 너절한 자손 한없이 많게 하소서. 소망은 이것뿐이오니 침체 없이 이어지게 하소서. 병술(丙戌, 1886) 하월(夏月) 하완(下浣, 하순) 가선대부(嘉善大夫) 규장각검교직각(奎章閣檢校直閣) 기계(杞溪) 유진찬(兪鎭贊)이 찬하다.
    *규곽(葵藿) : 해바라기는 언제나 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기에 향일규[向日葵]라고 하며,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는 일편단심에 비유되어 왔다.
    *오환(五患) : 묘자리에 해를 끼치는 다섯 가지. 즉 풍[風]․수[水]․습[濕]․조[燥]․우양[牛羊])을 피하였고, 봉축은 마렵(馬鬣, 말의 갈기)과 같아서 정성은 삼주(三周, 봉축의 주위를 세 번 두른다는 뜻.
    *긍구 긍당(肯構肯堂) : 아버지가 일으킨 일을 아들이 계승하여 마저 이룬다는 뜻. 若考作室 旣底法 厥子 乃弗肯堂 矧肯構. [書經, 大誥])
    *원거 원처(爰居爰處) : 여기에서 기거(起居)하고 여기에서 거처(居處)하다
    *용강천표(瀧岡阡表) : 송나라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구양수(歐陽修)가 자기 아버지를 용강(瀧江)에다 장사지내고 세운 묘표(墓表)의 글을 말함.
    *육아(六兒) : 들보를 올릴 때 힘을 함께 쓰기 위하여 내는 구령(口令). 아랑위(兒郞偉)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우리의 어영차와 비슷한 사례이다 동서남북 상하(東西南北上下)로 올리기 때문에 육위가(六偉歌)라고도 한다.
    *오운(五雲) : 오색의 구름. 자미성(紫微星)이 있는 곳은 오색의 구름이 감싸고 있기 때문에 생긴 말인데 임금은 자미성에 비유하여 쓰여지고 있다.
  • 상전면 진무로 1883[수동리 1079-1] 국도변에 있는 사천 김씨(泗川金氏) 몽정공파(夢鼎公波)의 재각으로 김만서(金晩緖)의 셋째 아들 김기(金機)와 김기의 아들 김호석(金浩錫) 등을 배향하고 있다. 1856년 상전면 수동리 터일 마을에 세웠는데 용담댐 건설로 인해 2000년 현 위치로 옮겼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기와 팔작지붕이며, 영성문(永誠門)은 3칸이다. 재각의 왼쪽에 관리사가 있다. 음력 10월 13일에 제를 지낸다. 영성재에는 함풍 9년[1859년] 교지 6장, 광서 10년[1884년] 교지 2장, 광서 17년[1891년] 교지 1장, 광서 19년[1893년] 교지 3장, 그리고 갑오년[1894년]의 호구 단자 1장이 보관되어 있다.
  • 부귀면 오산길 62 [오룡리 502] 오산마을 북쪽 기슭에 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 집안의 재각으로 회안대군(懷安大君)의 넷째 아들 금산군의 후손 이륜을 비롯하여 이태복·이규영(李奎永)·이동준(李東俊)을 배향한다. 1895년 창건되었고 1976년에 중건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기와 팔작지붕이며, 문은 3칸인데 슬레이트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