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모재1(敬慕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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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령면 운계로 295-78[계서리 313]에 있는 창원(昌原) 정씨(丁氏) 집안의 재각.

【敬慕齋記】 鎭安之萊東山下白馬川上有溪南里直其後麓 封之崇四尺者 故丁公諱載元曁其孫諱坤衣履之藏 而二公俱以配位祔焉窆於玆世代已遠 而尙無齋宿處 於是齊闔門之議 作爲齋舍 八代孫浩鉉 九代宗孫魯洙氏 問記於余 余惟觀世之人 能知本者鮮矣 先代之苦心設施 爲榭爲閣 傳之累世 翼然者壞 而或莫爲之文 煥然者渝 而或莫爲之修矣 今丁氏之於先邱 封植以固之 儀物以賁之 蘋藻以薦之 齋舍以守之 子孫之所可以致其誠者 宜無所不備矣 亦可謂知追遠報本之歸厚矣 竊念公以游軒先生之五世孫 必有忠孝詩禮傳授之貽謨 則安得不景而慕之於于羹于墻也 況起居於斯 望丘墳之上下 瞻松柏而鬱蒼 精靈之陟降 洋洋在玆 其不油然惕然而興感者乎 詩曰 不念爾祖 聿修厥德 願其雲仍盍相勉哉 光復後三十三年丁巳八月初言 駕洛 金亨在 記.
【풀이】 진안(鎭安)의 내동산(萊東山) 아래 백마천(白馬川) 가에 계남리(溪南里)가 있는데 바로 그 후록(後麓)에 4척(尺)의 봉분이 있으니 고(故) 정공(丁公) 휘 재원(載元)과 그의 손자 휘 곤(坤)의 묘소이고 두 공(公)이 모두 그 배위(配位)와 합부(合祔)되어 있다. 여기에다 묘를 쓴 지 세대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아직까지 재숙(齋宿)할 곳이 없었다. 이에 온 문중의 논의가 합치되어 재사(齋舍)를 짓고 8대손 호현(浩鉉)과 9대 종손 노수(魯洙)가 나에게 기문(記文)을 부탁하였다. 내가 보기에는 세상 사람이 능히 근본을 아는 자가 드물었다. 선대(先代)에 애써 경영하여 정자(亭子)를 짓고 재각(齋閣)을 지었으나 몇 대를 내려오면 우뚝 솟은 것이 무너졌어도 더러는 중수하지 않고 선명하던 것이 투색하였어도 더러는 수리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정씨(丁氏)는 그 선영(先塋)에 봉축을 다시 하여 공고히 하고 석의(石儀)를 세워 보기 좋게 꾸미고 제품을 장만하여 제를 올리고 재사를 지어 수호하는 등 자손으로서 바칠 수 있는 정성은 이미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역시 추원(追遠)과 보본(報本)이 민속(民俗)을 돈후(敦厚)하게 함을 알았다 하겠다. 적이 생각건대 공은 유헌선생(游軒先生: 이름은 황<熿>임)의 5세손이므로 틀림없이 충효(忠孝)와 시례(詩禮)로 전수(傳授)한 유모(遺謨)가 있었을 것이니 어찌 갱장(羹墻)*에 우모(寓慕)한 바가 없었겠는가 하물며 이곳에서 기거(起居)하면서 묘소의 위와 아래를 바라보고 송백(松栢)의 울창함을 쳐다보면 정령(精靈)이 척강(陟降)하여 양양(洋洋)하게 곁에 있는듯 하였을 터이니 어찌 성하게 애절하게 감회가 이는 바가 없었겠는가 ‘시(詩)’에 이르기를 너의 조상을 생각지 말고 너의 덕을 닦으라[不念爾祖, 聿修厥德] 하였으니 바라건대 자손들은 어찌 서로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갱장(羹墻): 사모함이 지극함을 말함. 옛날 요(堯)가 죽자 순(舜)이 요를 어찌나 사모했던지 담장을 바라보면 거기에 요의 얼굴이 비치고 국그릇을 보면 거기에도 요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