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모재2(敬慕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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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면 산주길 111-6[도통리 산 101-1] 도통리 산주 마을에서 북북동쪽으로 0.7km 지점 거사곡에 있는 천안 전씨(天安全氏) 집안의 재각. 1933년에 건립되었으며, 1946년에 중수하였다.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기와 팔작지붕이며 문은 솟을대문이다. 문앞 오른쪽으로 낭헌 전극례 신도비(浪軒全克禮神道碑)가 있다.

【敬慕齋記】 鎭安郡西聖壽坊居士谷麓 延安宋氏世藏之地也 故迪順副尉公諱裕景 當燕山昏朝 絶意榮途 挈家入鎭 隱居行義 訓誨後進 暇日逍遙泉石而終 壽藏在斯 年久無誌 未能的知其墳取古有望墓爲壇而祭之禮 築壇于塋域之下 歲薦一祀 齋宿無所 雲仍以是憂之 合謀諸族 辛丑春 乃構一齋 顔以敬慕 盖慕先之所 至非敬則易慢 特表敬字 可謂知要務也 相漢基善## 尸其役 極殫誠 而相元周煥俊煥升煥順煥 來請余記 世好難辭 斂襟而應曰 夫人之上墓也 履霜悽愴 情之常也 臨祭致敬 禮之常也 不有其常 則誠之慢也 其敬與慢 在自勵而已 奚關記之有無哉 然無已則有一可諗者 根之厚者 枝必蕃 源之深者 流必遠 延安氏 世趾其美 根旣厚而源旣深矣 噫 祖先雖有盛德 可及於百世 而由子孫頑率奢傲 以墜其祀者多矣 今延安氏 克殫追遠之誠 吾知其家行 率皆善繼先德也 凡入斯齋者 盡其敬慕之道 世世不替 方可謂齋之名得矣 豈不惕然加勉哉 竊聞公之孫月溪諱琳 以一齋李先生高弟 學行名世 立祠俎豆玄孫雲圃諱大弘 行義著聞 六世孫四昆季諱眞儒明儒哲儒瑞儒壎篪迭唱 睡仙別業 遺韻不沫 至十二世孫黙軒諱希濂 嘗師事吾王考淵齋先生 邃學德行 表準鄕邦 推以其子姓之昌大 可知公燾後垂裕之厚矣 繼自今 公洋洋之靈 陟降于是 永垂庇騭之無窮矣 爲公後承者 益可念念 聿修厥德哉. 檀紀四千二百九十六年癸卯肇. 恩津宋在晟記. 【경모재기】 진안(鎭安)의 군서(郡西) 성수방(聖壽坊) 거사곡(居士谷)의 산록(山麓)은 연안송씨(延安宋氏)의 세천(世阡)이다. 고(故) 적순부위공(迪順副尉公) 휘 유경(裕景)이 연산(燕山)의 암울한 때를 당하여 벼슬길에 마음을 접고 가권을 거느리고 진안으로 들어와 숨어 지내면서 의(義)를 행하고 후진들을 가리키면서 여가에는 천석(泉石)을 소요(逍遙)하다가 세상을 마쳐 그 수장(壽藏:묘소)이 여기에 있었으나 해가 오래되고 기록한 것이 없어 그 무덤을 적실히 알지 못하게 되자 옛사람이 무덤을 바라보고 단(壇)을 묻고 제사를 올리던 예(禮)를 취하여 묘역의 아래에다 단을 쌓고 해마다 제사를 올리고 있으나 재숙(齋宿) 향 처소가 없기 때문에 후손들이 이를 걱정하여 온 집안이 합의를 하여 신축년(辛丑年) 봄에 재사(齋舍) 한 채를 지어 경모(敬慕)라고 현판을 걸었다 대체로 조상을 추모하는 처소는 지극히 공경스럽지 아니하면 태만하기 쉬우므로 특별히 경(敬)자로 표하였으니 가위 요무(要務)를 알았다고 하겠다. 이 일에는 상한(相漢), 기선(基善)이 도맡아 정성을 극히 다하였다. 상원(相元), 주환(周煥), 준환(俊煥), 승환(升煥), 순환(順煥)이 나를 찾아와 기(記)를 부탁하였는데 세호(世好)가 있으므로 사양하기 어려워 옷깃을 여미면서 승낙을 하였다. 대저 사람이 묘소에 올라 상로(霜露)를 밟으면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은 정(情)의 떳떳함이오 제사에 임하여 공경을 다하는 것은 예(禮)의 떳떳함이니 그 떳떳함이 있지 아니하면 이는 정성이 해이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 공경과 태만은 스스로 면려(勉勵)하기 여하에 달려있을 따름이니 기(記)가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미덥지 못하다면 한 가지 증빙(證憑)이 있나니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가지가 반드시 무성하고 근원이 깊은 물은 흐름이 반드시 장원(長遠)한 법인데 연안송씨는 대대로 선대의 훌륭함을 잘 이어왔으니 뿌리가 이미 튼튼하고 근원이 이미 깊은 것이다. 아, 선대(先代)에 비록 성덕(盛德)이 있어 백세(百世)토록 내려갈 것 같다가도 자손이 어리석고 경솔하고 호사스럽고 방만하면 그 이어옴을 실추시킨 경우가 많이 있다. 지금 송씨는 추원(追遠)하는 정성을 능히 다하고 있으니 그 가풍(家風)이 거의 모두 선대의 성덕을 잘 계술(繼述)하고 있음을 나는 알겠다. 이 재실(齋室)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은 경모(敬慕)의 도리를 다하여 대대로 침체함이 없어야만 비로소 재사의 명칭이 그 뜻을 얻었다 할 것이니 어찌 마음을 가다듬고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들으니 공의 손자 월계(月溪) 휘 림(琳)은 일재(一齋) 이선생(李先生: 이름은 항<恒>임)의 고제(高弟)로서 학행(學行)으로 이름을 떨쳐 사당을 지어 제(祭)를 올리고 있고 현손 운포(雲圃) 휘 대홍(大弘)은 행의(行義)로 드러났으며 6세손 4형제인 휘 진유(眞儒), 명유(明儒), 철유(哲儒), 서유(瑞儒)는 훈지(壎篪: 둘 다 악기인데 우애함을 뜻함)을 번갈아 불면서 수선(睡仙:신선의듯)의 별업(別業: 은사<隱士>의 사업)의 유운(遺韻)이 식지 않았으며 12세손 묵헌(默軒) 휘 희렴(希濂)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우리 조부 연재선생(淵齋先生)을 스승으로 모셔 깊은 학문과 덕스런 행실로 한 고장의 표준(表準)이 되었었는데 자손이 창대(昌大)함으로 미루어보면 공이 후손을 끔찍이 돌봐주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후로도 공의 양양(洋洋)한 정령(精靈)이 여기에 척강(陟降)하여 무궁토록 음복(蔭福)을 끼쳐줄 것이니 공의 후손이 된 사람은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덕을 닦을 지어다. 단기4296(1963)년 은진(恩津) 송재성(宋在晟) 기.

【경모재 상량문】 선조의 적덕(積德)이 많으면 풍운(風韻)이 천추토록 길이 남고 후예의 여경(餘慶)이 시들지 않으니 산재(山齋)가 하루아침에 지어졌도다. 근간하게 경영하니 마침내는 이루어지는구려. 생각건대 우리 선조 적순부위부군(迪順副尉府君)께서는 연안(延安)의 화벌(華閥)이오 고려(高麗)의 명가(名家)였도다 효(孝)로써 어버이를 섬겨 온정(溫情: 동온<冬溫> 하정<夏情>) 고면(告面: 출필고<出必告> 반필면<反必面>)에 때때로 살폈고 신(信)으로써 벗과 사귀어 절차(切磋)탁마(琢磨: 학문을 닦는 모양)하여 날로 조예가 더해갔다. 행의(行義)는 단정하여 오상(五常: 오륜<五倫>)의 도리 잘 준행(遵行)했고 재주는 뛰어나 육예(六藝: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의 분야에서 노닐었다 어찌 한 시대의 명류(名流)라고만 할건가 가히 백세(百世)의 사표(師表)라고 할 만하다 일찍 과거 공부 일삼아 용문(龍門)에 올라 휘날렸으나 잠자기 암울한 세상 만나 임천(林泉)으로 물러나 두류(逗遛)하였다. 풍월(風月) 읊어가며 세상의 염량(炎凉) 아랑곳 않고 영재(英才)가르치며 문밖에 척설(尺雪)*이 쌓인 줄도 몰랐었다. 이곳 성수방(聖壽坊) 거사곡(居士谷)은 수장(壽葬)으로 의리(衣履)가 묻힌 곳이다. 동쪽 사자 남으로 고개 두르니 계봉(鷄峯)의 깃발 늘어서고 서쪽 삽살개 북으로 꼬리 두르니 응치(鷹峙)의 휘장 둘러쳐졌다. 병화(兵火)가 누차 침범하니 분명한 묘소 분별치 못하나 우로(雨露)가 때로 적시니 망극한 통한(痛恨)이 더하였다. 이에 단을 받들고 경모(敬慕)하니 양위(兩位)의 혼령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매번 제사를 올릴 때에는 목욕재계할 처소 없음이 한스러웠는데 통문(通文)을 보내 효유(曉諭)하던 날 원근에서 모두 정성을 다하였다. 그 당시 선인(先人)들이 못했던 것은 사체(事體)가 중난(重難)해서였는데 오늘날 후손들이 떠맡으니 난만(爛漫)한 합의를 보았다. 돌아보면 이 우면(牛眠), 귀식(龜食: 둘 다 좋은 묘자리의 뜻)의 언덕에 새가 날 듯 꿩이 펄럭이는 듯한 집 보게 되었는데 진씨(甄氏)*가 정자 짓는 제도 여기에 근사하고 한천(寒泉)*에 재사 짓는 규모 거의가 방불(彷佛)하다. 이는 대체로 선대의 사적 사모하고 일가간에 친목하여 후세에 전하려는 것이지 어찌 거처 편히 하고 외모 보기 좋게 하여 남에게 자랑하려는 것이던가 초수(草樹)에 꽃을 더하니 산천(山川)도 광채가 더한다. 여러대의 묘소가 흩어져 있으니 『주례(周禮)』 족분(族墳: 가족 묘지)의 제도를 따르고 일천 가지의 화수(花樹) 연면(延綿: 길게 이어옴) 하니 위가(韋家: 당<唐>나라의 위씨<韋氏>)의 단란(團欒)했던 즐거움이 있도다. 불일내(不日內)에 이뤄지니 신명(神明)의 묵우(黙佑) 있음을 알겠고 영년(永年)을 기약하니 자손들의 게으르지 않은 보수(補修)를 바란다. 이에 단인(短引: 짧은 시. 인은 시체<詩體>의 하나임)을 가지고 상량 올림을 돕노라
아랑위(兒郞偉)*, 동쪽 들보 올리니
부상(扶桑)*의 새 해가 난간에 붉구려
이 마음도 어찌하면 저와 같이 밝을고
효사(孝思)는 길이 경모(敬慕)에 있다네
아랑위, 서쪽 들보 올리니
큰 들판 망망하여 눈앞에 아스라하네
격양가(擊壤歌) 가운데 이 해도 풍년이 들어
집집마다 높은 노적가리 가즈런하네
아랑위, 남쪽 들보 올리니
-2자 결- 산세(山勢) 하늘에 닿았네.
지령(地靈) 인걸(人傑) 길이 침체하지 않나니
나라와 집안 일으킬 사람 몇이나 나오려는가
아랑위, 북쪽 들보 올리니
-4자 결- 천극(天極)*을 지탱하네.
사람들은 높아서 올라가지 못하다 말하지 말게나
걸음 걸음 오르고 또 오르면 오를 수 있다오
아랑위, 위쪽 들보 올리니
-2자 결- 일월(日月) 항상 명랑하네.
영허(盈虛) 소장(消長) 누가 능히 알건가
묘리(妙理)는 돌고 돌아 만상(萬像)을 주네
아랑위, 아래쪽 들보 올리니
관개(冠蓋)*로 너울 너울 지나가는 길손들
분분(紛紛)히 찾아와 시(詩)를 던져주니
훈훈(薰薰)한 술로 서로 술잔을 주고 받네.
엎드려 바라옵건대 상량을 올린 뒤에는 천신(天神)은 음으로 돕고 지령(地靈)은 양으로 보호하여 문채나는 책상과 선명한 창살은 해와 달의 비침 넉넉히 받고 위의 기와와 아래의 주춧돌은 영원히 비바람의 재앙없어 들보와 석가래 길이 새롭고 향화(香火)는 침체됨이 없게 하소서.
*척설(尺雪) : 한 자(尺)가 쌓인 눈. 송(宋)의 유학자인 이천(伊川) 정이(程頤)가 방안에서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는데 그 제자인 양시(楊時)와 유작(游酌)이 밖에 와서 인기척을 하니 안에서 응대가 있었으나 들어오라는 말이 없어 그대로 섰는데 얼마가 지났는지 눈이 자로 쌓여 무릎에 닿았다. 그제서야 이천이 깨닫고 문을 열어보니 두 사람이 눈 속에 서 있었다 함.
*진씨(甄氏): 송대(宋代) 사람으로 진군(甄君) 이라고만 나오고 이름은 전해지지 않음. 그가 집이 가난하여 부모의 장례를 모시지 못하고 있다가 이웃의 도움을 받아 부모형제를 한 곳에 장사를 지내고 묘막(墓幕) 한 채를 지으니 진사도(陣師道)가 그의 청을 받고 사정(思亭)이라 명명(命名)하고 기(記)까지 지어 주었다. 참고로 甄은 견과 진의 양음(兩音)이 있으나 성으로 호칭할 때에는 진으로 발음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甄萱을 견훤이라 발음하는 것은 사실(史實)을 상고하지 않은 소치라 여겨진다.
*한천(寒泉): 중국 복건성(福建省) 건양부(建陽府)에 있는 지명. 이곳에 주자(朱子)가 정사(精舍)를 지었는데 주자의 맏아들이 죽자 여기에다 빈소(殯所)를 설치하고 재사(齋舍)로 삼았음.
*아랑위(兒郞偉): 전해지는 말로는 힘을 합치게 하기 위한 구령(口令)으로서‘어기영차’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있음.
*부상(扶桑): 동쪽 바다에 있는 전설상의 나무. 해가 그곳에서 뉘었다가 매일 아침에 떠오른다고 함.
*천극(天極): 極은 극점(極點), 즉 정점(頂點)을 말하니 하늘의 정점이라는 뜻임.
*관개(冠盖): 의관(衣冠)과 거개(車盖). 녹녹(碌碌)치 않은 행객(行客)의 뜻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