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국재(光國齋)
운영자 23-12-26 18:25 78 hit
성수면 내곡길 69-4[신기리 산 47-1], 내곡마을 어귀 산기슭에 위치한 천안 전씨 재각. 가재(嘉齋) 전동흘(全東屹)을 제향(祭享)한다. 재각은 전면 3칸 축면 2칸이며 솟을대문으로 좌우에는 행낭채가 2개씩 달려 있고, 대지가 경사가 있어 옹벽을 치고 그 위에 재각을 지었다. 1968년에 중창하였다. 김재석(金載石)의 중건기에 의하면 기존에도 전동흘의 사당이 있었는데 당시(1968) 100여 년 전에 퇴락하였다고 적고 있다. 재각에는 김재석(金載石)이 찬한 광국재중건기, 김종가(金種嘉)가 찬한 광국재상량문 등의 판액(板額)이 걸려있다. 재각 옆(동)에는 전동흘신도비가 있다.

【배향위(配享位)】
전동흘(全東屹.1610[광해군 2]∼1705[숙종 31]). 조선 후기 무신.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사탁(士卓), 호는 가재(佳齋). 고조는 전이충(全以忠), 증조는 전규, 조는 전수감, 부는 전대승으로 정묘호란 때 순절하여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644년(인조 22) 심기원의 역모에 창의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 공이 있어 효종 대에 장사랑이 되었고, 바로 선전관을 거쳐 흥덕 현감이 되었다. 1650년(효종 1) 봉림대군이 등극한 후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우암 송시열이 전동흘과 이상진, 소두산 세 사람을 동시에 추천하니 이들을 ‘호남삼걸’이라 하였다. 강원 병사, 충청 병사, 황해 병사, 경상 좌수사 등 4수사(水使) 7병사를 역임하였고 훈련대장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되었다. 조정에서 청나라 몰래 창덕궁 옆에 대보단을 설치하여 임진왜란에 원군을 보내준 명의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냈다. 청국 사신이 이를 문제 삼아 조정에 압력을 가하자 전동흘에게 훈련대장과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내려 해결토록 하니 전동흘이 해결하였다. 또한 철산 부사로 있을 때 장화 홍련의 원혼 사건을 해결한 것으로 유명하여 많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묘는 진안군 진안읍 가림리 들판 임정 뒷산에 있다. 그 후 성수면 좌산리 가수 마을 뒷산으로 이장하고 신도비를 세웠다.

【光國齋重建記】 齋是故元戎嘉齋全公諱東屹虔香之所, 而風雨傾頹, 荒址殘礎, 使人興嗟於百餘載矣. 幸兹今仲春, 公後孫泰成, 發議重建, 庸甲俊根甲錫泰珍成根宗根炳年諸彦, 樂而従之, 告竣於三朔, 相與議曰, 雖無齋號所傳, 今亦闕之, 於義不可也. 或以著存, 或以光國, 甲乙持論, 未得歸一. 炯順就正於余, 余逡巡然曰, 孰有加於王言光國之重, 而相詰乎曰雄. 又起而請曰, 子旣断號, 無記可乎? 願卒惠焉. 余固辤以老衰, 今泰成又來懇要, 乃重感其誠孝, 強爲之言曰, 齋成而享祀, 以致其如在, 在於諸公誠不誠如何矣. 有不必論, 而窃惟公孝養習武, 及官堦履歴, 至誠勤王, 與夫朝家之前後異数, 詳於誌狀, 無足復贅, 而撮其大者而言之, 一則曰, 於鐵山時, 快雪薔紅姉妹之寃魂, 使民安過. 一則曰, 淸使來脅, 以皇廟建築曰, 爾更有背淸之心乎? 上下震懾莫措, 公請受以訓將, 登壇結陣, 拿致淸使, 督示其誥勅曰, 若否則當斬之. 使畏伏其矯制之罪, 放而使歸, 舉朝恐必有後患, 公以爲, 彼以大國之上使, 見辱小邦, 耻不敢言. 後果然, 肅廟嘉之以光國將軍褒之, 則以是定額, 不亦其取重者乎? 噫! 公之論將料敵, 皆如所策. 其智可以奪鬼神, 其勇可以等雷電, 使天下知有我國之堂堂, 此不欲傳之後世, 得乎? 實不容不可傳者也. 嗚呼! 安得以公於九原, 執鞭以從之, 使宇內廓淸耶? 可願而不可望. 遂太息而書之. 歲夏正戊申七月丁亥, 鶴城金載石識.
【광국재 중건기】 군대의 우두머리)인 가재(嘉齋) 전공(全公) 휘(諱) 동흘(東屹)을 제향(祭享)하는 곳인데, 비와 바람에 기울고 쓰러져서 터가 황폐해지고 주춧돌이 쇠잔하여 이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을 자아내게 한 세월이 1백여 년이나 되었다. 다행히 올해 중춘(仲春)에 공의 후손 태성(泰成)이 중건(重建)하자고 발의(發議)하자 용갑(庸甲)·준근(俊根)·갑석(甲錫)·태진(泰珍)·성근(成根)·종근(宗根)·병년(炳年)을 비롯한 여러 선비들이 기꺼이 따라주어 3개월 만에 공사를 마치니, 서로 더불어 논의하기를, “비록 재실의 칭호가 전해지는 것은 없으나 이번에도 빠뜨리면 의리상 안 될 일이다.”고 하였는데, 혹은 ‘저존(著存)’으로 하자고 하고 혹은 ‘광국(光國)’으로 하자고 하여 갑론을박(甲論乙駁)하면서 각자 논지를 주장하여 하나로 결정되지 않자 형순(炯順)이 나에게 와서 바로잡아 달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머뭇거리다가 말하기를, “임금께서 나라를 빛낸 중신(重臣)이라고 말씀하신 사람*보다 훌륭한 자가 누가 있겠으며, 적국의 사신과 서로 따진 것*은 영웅다운 행동이었다.”고 하니, 형순이 다시 또 일어나서 요청하기를, “그대가 이미 재실의 호칭(호칭)을 결정하였으니 기문(記文)이 없으면 되겠는가? 바라건대 끝까지 은혜를 베풀었으면 좋겠소.”하였다. 이에 내가 나이가 늙고 기운이 없다는 핑계로 고사(固辭)하였는데 이번에 후손 태성이 또 나에게 와서 간절하게 요청하니 이에 그 성의와 효심에 감동하여 애써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재실을 건축하여 제사를 올림으로써 마치 살아계신 것처럼 모시는 것은 제공(諸公)의 성의와 정성이 어떤가에 달려 있으니 굳이 논하지 않아도 된다. 가만히 생각건대, 공은 효심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무예를 익혔고 벼슬길에 오르게 되자 지극한 정성으로 임금을 호위(護衛)한 것이 조정에서 전후로 공에게 내려준 특별한 은전(恩典)과 더불어 지장(誌狀)에 상세히 실려 있으니 다시 덧붙여 말할 필요가 없으나, 그 중요한 것을 추려서 말하자면, 하나는 철산(鐵山)에 재직할 때 장화(薔花)와 홍련(紅蓮) 자매의 원통함을 후련하게 씻어주어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히 지나가게 하였고, 하나는 청(淸)나라 사신이 와서 황묘(皇廟, 명(明)나라 황제를 제사하는 사당)를 건축한 것을 두고 협박하기를, “너희가 다시 청나라를 배신하려는 마음이 있구나?”라고 하자,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두려워 떨면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자, 공이 훈련대장이 되기를 청하여 단상(壇上)에 올라서 군진(軍陣)을 설치하고는 청나라 사신을 잡아오게 하여 그가 가져온 황제의 고칙(誥勅)을 보여달라고 독촉하면서 말하기를, “만약 네 말과 같지 않으면 목을 베어 죽이겠다.”고 하니, 사신이 공을 두려워하여 황제의 조칙을 위조한 죄를 털어놓았다. 이에 그를 풀어주어 돌아가게 하니 온 조정이 반드시 후환(後患)이 있을 것이라고 겁에 질렸으나 공은 “저 사람은 대국(大國)의 상사(上使)인데 작은 나라에 와서 치욕을 당했으니 부끄러워서 감히 말을 못할 것이다.”고 하였는데 뒤에 과연 그러하였다. 그러자 숙묘(肅廟)께서 공을 가상히 여기시고 광국 장군(光國將軍)에 임명하여 포상하였으니 이로써 판액(板額)(扁額)을 정하면 또한 그 중요한 점을 취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공은 장수(將帥)에 대하여 논하고 적군의 형세를 헤아린 것이 모두 세운 계책과 똑같이 되었으니 그 지혜는 귀신조차 넋이 나가게 할 수 있고 그 용기는 우레나 번개와 동등하였다.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당당(堂堂)하게 있음을 알게 하였으니, 이를 후세에 전하려고 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참으로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 내가 어떻게 구원(九原. 저승)에서 말채찍을 쥐고 공을 따르면서 이 세상을 후련하게 청소할 수 있으리오? 바랄 수는 있어도 기대할 수 없는 일이므로 마침내 한숨을 쉬면서 쓰노라. 세 하정(歲夏正) 무신년(戊申年, 1968) 7월 정해(丁亥)에 학성(鶴城) 김재석(金載石)이 쓰다.
*임금께서.…사람 : 숙종(肅宗)이 전동흘(全東屹)에게 “경(卿)은 나의 광국 장군(光國將軍)이다”고 말한 것을 이른다. 광국은 나라를 빛낸다는 뜻이다. 또 훈련원(訓鍊院)에 하교하며 이르기를, “옛날에 강태공(姜太公)은 80세까지 궁하게 지내다가 80년간 영화를 누렸다고 하는데, 나의 전동흘은 40세까지 궁하게 지내다가 40년간 영화를 누리고 있으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적국의 사신과 서로 따진 것 : 여기서 적국은 청(淸)나라를 말함. 당시 청나라에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이 대보단(大報壇)에서 명(明)나라 황제를 위하여 제사를 지낸 일을 힐문(詰問)하자, 공이 훈련대장(訓鍊大將) 겸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으로서 청나라의 사신을 잡아오게 하여 조정에 꿇어 앉히고 엄하게 묻기를, “네가 황제의 명령을 띠고 왔다고 하지만 우리 임금에게 그 글을 고하지 않았으니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하니, 사신이 죄를 자복(自服)하였다. 이에 공이 다시 꾸짖어 말하기를, “교지(敎旨)를 속이고 희롱한 죄는 죽여야 마땅하나 우리 임금께서 관대하고 인자하시어 특별히 사면하니 이후로 다시는 우리 나라에 오지 말거라.”고 하고는 나라 밖으로 내쫓았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이 다들 후환(後患)을 걱정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제가 뒷일을 감당하겠습니다.”고 말하였다.
*철산(鐵山)에 …하였고 : 당시 철산부(鐵山府)가 깊은 원한(怨恨) 사건의 부작용으로 인하여 장차 폐읍(廢邑)이 될 상태에 놓이자 공이 철산의 도호부사(都護府使)로 임명되어 장화(薔花)와 홍련(紅蓮) 두 여자애의 원수를 갚아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光國齋上樑文】 山益髙, 水益淸, 蔚啓葱葱之佳氣, 美㦲盛儀. 上以宇, 下以棟, 如在洋洋之明靈, 猗歟孝思. 竊念月浪古郡, 列園林而相望, 聿覩衿珮濟濟. 實維湖左名區, 聞絃誦而不絶, 仍成禮譲休休. 故養生送死之盡情文, 睠兹丙舍之經始. 乃尊祖敬宗之循本末, 寔由雲仍之作興. 伏惟嘉齋全公, 鍾駬山之靈, 遭値 寜陵寤寐之日, 時㦲不可違. 生嘉林之第, 統率轅門貔貅之軍, 職耳豈敢怠. 大老之拔擢眷眷, 有湖南三傑之稱. 黎庶之讃頌喧喧, 救水操二舡之溺. 北虜猾夏, 欲折逆天之凶圖, 將伸大義於天下. 南漢下城, 不忍在心之至痛, 已懷雄略於胸中. 餘蔭滿庭, 作逺裔之帲幪. 丹心爲國, 被聖主之嘉褒. 事或有未遑, 二百年齊宿無所. 廼度廼營, 匪道謀之是聼. 志孰云不伸, 千萬人議論仝歸, 其攻其亟, 寔子來之有成. 南山之松栢丸丸, 其䋲則直, 神明如或扶. 匠石之礱斵矻矻, 有奐且輪, 君子所肯搆. 之眼中忽見突兀, 風月無盡藏, 匪直為游觀之美. 也心上早起經綸, 蘋蘩欲其潔, 抑亦致著存之誠. 載舉修樑, 聊陳善頌.
抛樑東, 一簾光射初旭紅, 欲知化化生生妙, 盡在太和元氣中
抛樑西, 山陽橋梓或髙低, 父子祖孫一氣貫, 莫言逺近有親踈
抛樑南, 冠山碧聳欲天參, 嘉翁當日稱三傑, 聖主恩命降玉凾
抛樑北, 含忍難忘城下辱, 參及寜陵訏謀宻, 中原戎虜驅欲逐
抛樑上, 浩氣元従集義養,氵 號 氵 號 有泉鳴不停, 至今猶似續餘響
抛樑下, 何人唫咏此堂者, 寄言除却風兼花, 秖管人心繫立懦
伏願上樑後, 山益抱, 風月無邊, 盖曰念祖而. 水益, 松栢長翠, 亦云裕後而. 修德, 春則怵, 秋則悽, 出秉彜之良性, 莫言叔季之頹靡. 貽謨, 入而孝, 出而悌, 守傳家之美規, 庶觀門闌之昌大
歲著雍涒灘葽夏上澣, 月城金種嘉書
【광국재 상량문】 산은 더욱 높다랗고 물은 더욱 맑아서 총총(蔥蔥)한 가기(佳氣)를 성하게 열었으니 아름답도다, 훌륭한 의범(儀範)이여. 위에는 지붕이 있고 아래는 기둥이 있어서 마치 양양(洋洋)하게 밝으신 영령(英靈)께서 살아 계신 듯하니 훌륭하도다, 효성스러운 생각이여. 가만히 생각건대, 월랑(月浪)의 옛 군(郡)은 원림(園林)이 늘어서 서로 바라보여서 언뜻 보더라도 금패(衿珮)*들이 수없이 많도다. 참으로 호남 좌도(左道)의 명승지여서 글 읽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리고 이어 아름답게 예의와 양보를 이루었네. 그러므로 살아서는 봉양하고 죽으면 장례를 치룰 때 슬픔과 형식을 다하였으니 이곳을 돌아보고 병사(丙舍)*를 경영(經營)하였으며, 이에 조상을 존숭하고 종족(宗族)을 공경함에 본말(本末)을 따랐으니 실로 후손들이 이를 말미암아 흥기(興起)하였노라. 삼가 생각건대, 가재(嘉齋) 전공(全公)은 마이산(馬耳山)의 영기(靈氣)를 모아 영릉(寧陵, 효종(孝宗))이 자나 깨나 나라 걱정을 잊지 못하던 때를 만났는데 때가 그러하여 어길 수가 없었노라. 가림(嘉林, 지금의 진안읍 가림리)의 집에서 태어나서 군대의 용감한 병사들을 통솔하였는데 맡은 직책이니 어찌 감히 태만하였으랴. 대로(大老)를 정성들여 발탁하니 호남의 3걸(傑)이라는 칭찬이 있었고 많은 백성들이 왁자하게 찬송(讚頌)하니 수조(水操, 군사들의 해상 훈련)할 때 배 두 척이 물에 빠지는 것을 구하였네. 북쪽 오랑캐가 중국 땅을 어지럽히니 하늘을 거스르는 흉악한 꾀를 부러뜨리고 싶어서 장차 천하에 대의(大義)를 신장(伸張)하려고 하였네.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가슴 속의 지극한 슬픔을 참아내지 못하고 이미 뼈 속에다 영웅다운 책략(策略)을 품었노라. 남은 자손들이 집안에 가득하니 먼 후손들의 가리개가 되었고, 단심(丹心)으로 나라를 위하니 성주(聖主)께서 가상히 여기고 포상하였노라. 일은 간혹 겨를이 없어서 2백년간 재숙(齊宿)할 곳이 없었다가 이에 설계하고 이에 경영하니 도(道)의 계획만을 따른 것이 아니었네. 뜻을 누가 펴지 못하였다고 말하는가? 천만 사람의 의론이 똑같이 귀결되었으니 그 일을 서둘러 해낸 것은 참으로 자식들이 이룬 것이었네. 남산(南山)의 송백(松柏)이 구불구불 자랐으나 먹줄로 곧게 잘라내니 신명(神明)이 도와준 듯하고, 장석(匠石)이 돌을 자르고 다듬어 멋들어진 집을 지었으니 군자(君子)가 이어받은 일이로다. 눈 앞에 문득 우뚝 솟은 건물이 보이니 풍월(風月)이 무진장(無盡藏)한데 단지 경치를 구경하려고 세운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 일찌감치 경륜(經綸)을 일으켰으니 정갈한 제수를 장만하였는데 또한 살아계신 것처럼 모시려는 정성을 들였으리라. 이에 긴 대들보를 들어 올려 애오라지 선송(善頌)을 말하노라.
들보를 동쪽에 던지면, 주렴 하나에 처음 돋는 붉은 해가 광채를 내뿜으니 화화생생(化化生生)하는 묘리(妙理)를 알고 싶거든 태화(太和)의 원기(元氣) 속에 모조리 들어 있노라.
들보 서쪽에 던지면, 산의 남쪽 나무들이 들쭉날쭉한데 부자(父子)와 조손(祖孫)이 똑같은 기운으로 관통하였으니 원근(遠近)에 친밀함과 소원함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들보 남쪽에 던지면, 관산(冠山)이 푸르게 솟아 하늘까지 닿으려 하니 가옹(嘉翁)을 당일에 3걸(傑)로 칭하여 성주(聖主)의 은명(恩命)이 옥함(玉函)에 내렸노라.
들보 북쪽에 던지면, 참고 견딘 남한 산성 아래의 치욕을 잊기 어려우니 영릉(寧陵)께서 도모하시는 북벌 계획에 참여하여 중원의 오랑캐를 몰아내려고 하였노라.
들보 위쪽으로 던지면, 호기(浩氣)로 임금을 따라 의로움을 길렀으니 졸졸 흐르는 샘물이 쉬지 않고 울어대는데 지금도 오히려 남은 메아리가 이어지는 듯 하노라.
들보 아래쪽으로 던지면, 이 집에서 시를 읊을 자가 누구인가? 바람과 꽃은 빼달라고 부탁하노라. 단지 인심이 나태해지는 것만을 붙들어 맬지어다.
삼가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뒤로는 산이 더욱 포용하여 바람과 달이 가없으리니 대체로 조선(祖先)을 생각하고, 물은 더욱 돌아 흘러서 송백(松柏)이 길이 푸를 것이니 후손을 넉넉하게 해주리라. 덕을 닦는 일은 봄에도 움찔하고 여름에도 서글프게 여기어 타고난 천성이 발로(發露)한 것이니 세상이 나빠져서 쇠퇴하였다고 말하지 말라. 후손에게 물려줄 계책은 집에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문밖을 나가서는 공경하여 집안에 전해오는 아름다운 규약(規約)을 지키면 거의 가문(家門)이 창대(昌大)함을 구경하게 되리라. 무신년(戊申年, 1968) 여름 상한(上澣)에 월성(月城) 김종가(金種嘉)가 쓰다.
*금패(衿珮) : 유생(儒生) 또는 젊은 선비를 말한다. 『시경』 〈정풍(鄭風) 자금(子衿)〉에 “푸르디푸른 그대의 옷깃이여, 길이 생각하는 내 마음이로다. 비록 나는 가지 못하나, 그대는 왜 소식을 계속 전하지 않는가? 푸르디푸른 그대의 패옥이여, 길이 생각하는 내 마음이로다. 비록 나는 가지 못하나, 그대는 어이하여 오지 않는가?〔靑靑子衿, 悠悠我心. 縱我不往, 子寧不嗣音? 靑靑子佩, 悠悠我思. 縱我不往, 子寧不來?〕”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병사(丙舍): 묘지 근처에 있는 방으로, 여막(廬幕)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