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산재(德山齋)
운영자 23-12-26 18:25 72 hit
성수면 조실길 56-5[도통리 424-1] 지동마을 위쪽에 있는 탐진 최씨 재각. 송사 최만성(崔萬成)의 재각으로 본시 중길리 마치에 있었는데, 저수지가 건설되면서 수몰되자 이곳으로 옮겨왔다. 전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 팔작지붕이다. 전면에 3칸 문이 있고 둘레는 담장을 둘렀다. 본채에는 10세손 최충근(崔忠根)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문은 3칸으로 10세손 최영근(崔永根)이 쓴 ‘도리문(道理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재각의 입구에서 우측으로 ‘가선대부 호조 참판 송사 최 선생 신도비(嘉善大夫戶曹參判松史崔先生神道碑)’와 ‘연담 거사 탐진 최공 치환 효행 기적비(蓮譚居士耽津崔公致煥孝行紀蹟碑)’가 있다. 탐진 최씨가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3월 마지막 주 일요일에 제를 지낸다.

【배향위(配享位)】
최만성(崔萬成) : 자는 사추(士樞), 호는 송사(松史), 탐진인(耽津人)이다. 장경공(莊景公) 사전(思全)의 후예로 증참의(贈參議) 세원(世遠)의 아들이다. 향시(鄕試)에 이르러 문명(文名)을 온 고을에 떨치게 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생전에 봉양은 물론 상제(喪祭)의 정성도 시종 여일(始終如一)하여 누구나 하늘이 낸 효자(孝子)라고 칭송하였다. 공은 평거(平居)에 간중 과묵(簡重寡黙)하여 바깥 사물에 중심을 잃지 않고, 항상 정좌(靜坐)하여 손에서 책을 떼지 않는 태도로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익혔다. 특히 퇴계(退溪)와 율곡(栗谷) 두 선생의 뜻을 두텁게 믿어 언제나 좌우에 그 글을 모시고 매일 읽고 힘써 행하며, 깊은 뜻은 뒷사람들에게까지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任務)로 여겼다. 공은 지극한 효행과 깊은 학문으로 인하여 침랑(寢郞) 벼슬이 내려 졌으나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정조 갑진(甲辰, 1784)에 사림(士林)의 상언(上言)으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이조참의(吏曹參議) 완산(完山) 이인구(李寅龜)가 지은 묘표(墓表)가 전해져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