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덕재(明德齋)
운영자 23-12-26 18:25 74 hit
주천면 성암2길 22-1[신양리 283-1], 상성암마을 동쪽 안에 있는 동래 정씨의 재각. 1969년에 세웠다. 사당은 담장안에 서향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의 함석 팔작지붕으로 처마넓이 73㎡이다. 후손 덕진(德溱)이 쓴 기문이 있다. 명덕재 앞에는 1938년에 세운 하은 정상호(荷隱鄭尙鎬)의 유허비가 있다.

【明德齋記】 齋舍創建 古有今有之事 而或以追慕先之誠 或以道德尊賢之意 其趣不同 追慕之心一也 揚先裕後之慕 不可無之 而惟明德齋 由先代之墓下 數年創建之誠 事力未及 今於己酉之歲 後孫德溱及諸孫 發記注力之誠 創建告落 豈非盛哉 道峰淸秀 曷勝霜露之感 華山明淑 常切塋之誠 富貴功名之家 得龜卜之吉地 文章道德之士 慕鹿洞之舊規 後塢花開 瑞日暢暢前簾 燕賀新語喃喃 此豈非明德齋永慕之所哉 恭祝後仍之繼繼承承 德溱敬爲之記 辛亥年月日
【명덕재기】 재사(齋舍)를 창건하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있는 일인데 혹은 선조를 추모하는 정성으로 하고 혹은 도덕존현의 뜻으로 하니 그 취지는 같지 않으나, 추모하는 마음은 같다. 선조를 드날리고 후손을 풍요롭게 하는 정성이 없을 수 없는데, 오직 명덕재는 선대의 묘소에 수년 동안 창건하려는 정성이 있었으나 추진할 능력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기유년에 후손 덕진 및 여러 자손들이 발의하여 정성을 기울여 창건하고 낙성을 고하니 어찌 창성하지 아니하겠는가! 명도봉의 청수함이 어찌 상로지감(霜露之感)*보다 낫겠으며, 화산의 명숙함이 항상 선조의 묘소를 살피는 정성보다 간절하겠는가! 부귀공명하는 집안은 풍수상 길지에 자리하고, 문장도덕을 겸비한 선비는 백록동의 옛규약*을 사모한다. 뒤란에는 꽃이 만개하고 상서로운 햇빛이 앞 주렴에 창창하며 제비도 완공을 축하하는 듯 지지배배 노래하누나. 이 어찌 명덕재가 길이 기억되는 바 아니겠는가. 삼가 후손 대대로 이어지기를 축원하노라. 덕진이 공경히 명덕재를 위해 기문하다. 신해(1969)년 월 일
*상로지감(霜露之感) : 한 해가 거의 다 되어 찬 서리가 내리게 되면 더욱 더 돌아가신 부모가 생각나서 슬퍼하며 그리워함.
*주희(朱熹)가 만든 백록동서원의 규약으로, 그 내용은 첫째는 부자유친 등 오륜의 조목, 둘째는 널리 배운다는 ‘박학지(博學之)’ 등 학문하는 순서, 셋째는 말을 충직하고 진실되게 하라는 ‘언충신(言忠信)’ 등 수신(修身)의 요결, 넷째는 의리를 지키고 이익을 꾀하지 말라는 ‘정기의 불모기리(正其義 不謀其利)’ 등 사무 처리의 요결, 다섯째는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등 대인 관계의 요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