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재(白雲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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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면 백장로 83-31(동창리 산 111) 석무안뜸 북쪽 산기슭에 있는 밀양 박씨 집안의 제각이다. 1972년 음력 2월 20일에 건립하였다. 양력 4월 5일 낮 11시에 향사를 지낸다. 임자 壬子 제각안에 매산바위정 현판과 함께 들어서는 문엔 반석문(盤石門) 현판이 있다. 제각 뒤에 토지지신(土地之神)비가 있다. 재각에는 김형관(金炯觀)의 ‘백운재 기’가 액자로 걸려있다.

【白雲齋記】 忠貞公淸齋朴先生以道學文章立節於 莊陵遜位之日 朝家贈崇秩 命不祧典而褒之士林享七邑祠宇俎豆而尊之何其盛也是以風韻愈久益彰后承多以䋲武趾美不墜先德爲能事而無愧於鄕邦之望族矣其十一代孫學生諱思良之墓在鎭安郡白雲面盤松石田里歲近二百尙未有齊宿之所故六代孫憲旭以是爲恨壬子春獨費己財建五架四楹且衛之以門墻築之以階砌美輪焉美奐焉行路聳瞻溪山增彩遂顔其齋曰白雲題其門曰盤石遽經十年矣今其弟憲奎奉譜委顧請記其事演其義余曰此係一門衆共之役而不吝財專擔固難矣罕矣至若齋與門之命名則似因地而行所無事然究而言之不無深意存焉昔有人望太行之雲猶想其親之舍其下者况今直扁齋以雲而獨不思先祖乎尢焉有不鞏固門事完如盤石者乎於是乎憲旭氏非徒有築齋之偉功亦可云永垂門規之遠慮也凡爲朴氏之族者其尙鑑兹而知戒期不負雲石二字之至義也不亦宐乎 壬戌 三月 上巳節 扶安 金炯觀 記
【백운재 기】 충정공(忠貞公) 청재(淸齋) 박 선생(朴先生)은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뛰어난 사람으로서 장릉(莊陵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던 날에 절개를 지켰기 때문에, 조정에서 높은 작질(爵秩)을 추증(追贈)하고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명하여 포장(襃獎)하고 사림(士林)에서 7개 고을로 향사(享祀)하여 사우( 祠宇)에서 조두(俎豆)를 올려 존중하였으니 그 얼마나 훌륭한가. 이 때문에 풍치가 오래될수록 더욱 빛나게 되고 후손들이 그 아름다움을 계승하여 선조의 덕을 실추하지 않는 것을 능사(能事)로 삼아 나라의 덕망 있는 가문들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 11대손 학생(學生) 휘(諱) 사량(思良)의 묘가 진안군(鎭安郡) 백운면(白雲面) 반송 석전리(盤松石田里)에 있는데 200년 가까이 재숙(齊宿)하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그 6대손 헌욱(憲旭)이 이것을 한스럽게 여겨 임자년 봄에 홀로 자신의 재산을 써서 오가 사영(五架四楹)의 재실(齋室)을 세우고 문과 담장으로 주위를 두르고 계단을 만들었다. 매우 아름답고 장엄하여 행로(行路)에 우뚝 서 있고 시내와 산이 광채를 더하였다. 드디어 재실에는 편액을 걸어 백운(白雲)라 하고 문에는 편액을 걸어 반석(盤石)이라 하여 십 년이 지났다. 지금 그 동생 헌규(憲奎)가 족보를 받들고 찾아와 이 일을 기록하고 편액의 뜻을 풀이해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일은 온 가문이 공동으로 해야 할 일인데도 재산을 아끼지 않고 전담하였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드문 일이다. 집과 문의 이름을 단 것으로 말하자면 아마도 지명으로 인한 것이고 행적이나 사연은 없는 듯하다. 그러나 깊이 연구하여 말하자면 깊은 뜻이 없지 않다. 옛날 어떤 사람이 태항산(太行山)에서 구름을 바라보고도 그 아래에 어버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하물며 지금 직접 재실의 편액에 구름이라고 붙이고도 선조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나아가서 어찌 가문의 일을 공고히 하여 반석(盤石)처럼 완벽하게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헌욱씨(憲旭氏)에게 재실을 세우는 위대한 공적을 있을 뿐만 아니라 가문의 규범을 길이 드리우는 원대한 생각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박씨의 족속인 모든 사람은 부디 이것을 보고 경계를 알기를 바라니, 운석(雲石)이라는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을 기약하는 것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임술(1982)년 3월 (음)3월 3일 부안(扶安) 김형관(金炯觀) 기(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