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모재2(永慕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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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면 금지1길 18-34[월포리 1005]에 있는 죽산 안씨(竹山安氏) 집안의 재각. 안수홍(安守洪)과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를 모시는 재각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내금위장 안수홍의 부인 안동 권씨가 전란을 피하여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상전면에 정착한 이후 자손이 번성하였다. 건물은 1876년에 건립되었으나 근래 대폭 중창되었다.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금속기와의 팔작지붕이다. 문은 3칸 솟을대문이며 쪽문이 있고 관리사와 연결된다. ‘영모재’라는 현판 글씨는 석재(石齋) 황현(黃玹)이 썼다. 재각의 안쪽에는 ‘통훈대부 행내금위장 죽산 안공지묘 배숙인 안동 권씨 묘 재진안 골안동 신좌(通訓大夫行內禁衛將竹山安公之墓配淑人安東權氏墓 在鎭安骨安洞 辛坐)’라 쓰인 비석과 헌성비 외 1개의 비석이 더 있고, 담장 ­­바깥쪽에 ‘유담 안공 재연 기적비(柳潭安公在淵紀行碑)’, ‘경남 안공 재성 기적비(耕南安公在聖紀績碑)’, ‘우당 안공 창옥 기적비(愚堂安公昌玉紀績碑)’ 등이 있다.

【永慕齋記】 嗚呼此我先祖妣墓閣, 先祖考墓在永同郡, 葬鎭安, 自我先祖妣始, 我安氏, 東國大姓, 名於麗及我朝盖久, 自宣祖朝, 迄今三百祀, 在鎭安, 不墜家聲, 亶由我先祖妣也, 先祖妣貞節烈行, 足以光前裕後, 至其箴鑑, 雖明經君子, 不能過焉, 口碑千載, 固有不朽者存, 然墓無顯刻, 世系莫徵, 豈非後嗣之遺感, 乃相議立閭, 以記終始, 已有年所而末就, 謹詳權氏譜, 貫安東, 自太師幸佐麗朝平甄萱, 以功名顯, 子孫世趾其美, 本朝有諱仲和, 恭愍前朝文贊成, 太宗丁亥大拜至領, 封醴泉伯, 諡文節, 高祖諱忱, 成均館生員, 曾祖諱緝, 司諫院司諫陞戶曹判書, 祖諱繼達, 兵曹正郞, 考諱壽剛, 司憲府監察, 先祖妣生名門, 年若干, 歸于我先祖考, 先祖考諱守洪, 內禁衛將, 貫竹山, 竹城君諱元衡後裔, 卽通訓大夫固城縣令諱珪嗣子, 祖曰克終, 梁山軍需, 曾祖曰哲孫, 正統辛酉生員, 至檢閱忠淸監司吏曹參判, 高祖曰復初, 通政大夫淮陽府使, 贈議政府左贊成, 當壬辰搶攘, 先祖考陪親於固城, 與賊督戰, 矢盡無可爲, 父子殉節, 葬于永同, 先祖妣携孤負幼, 八于龍潭, 占居於新碩, 以遺子孫百世之鴻基, 占阡於骨安洞, 以安身後萬年之幽宅, 其性度閨範, 今不可一二摭, 因其大者可測也已, 噫, 顚木尙有甹孼, 況我先祖妣, 積德礪行度越乎, 盖此閣建設, 果非偶然, 吾宗有昌玉, 以孤露餘生, 孝友兼篤, 奉慈極敬, 凡於宗事, 有難勇奮, 乃發言宗會之座曰, 夫我先祖妣裔孫, 戶餘數百, 人過一千, 未立一棟於墓下, 自愧亦愧于人矣, 立衆議而開工, 同我僉族, 亦出義出力, 始於正月上旬, 終於二月上旬, 嗚呼昌玉之善始, 孝也, 僉族之善終, 孝也, 吾門其庶幾乎哉, 於是焉錦月江之瑞日, 九龍洞之祥雲, 相暎於棟宇, 富貴峯之石廩, 福頭峯之德蔭, 交萃於房櫳, 使我子孫, 厚餉福祿, 若桴鼓影響, 福善之理, 不可不識, 畧具其顚末焉, 丙子年春, 十世孫 昌謨 謹記.
【영모재기】 오호라! 이것은 우리 선조비(先祖妣)의 묘각(墓閣)이다. 선조고(先祖考)의 묘소는 영동군(永同郡)에 있으니, 진안(鎭安)에 입장(入葬)한 것은 우리 선조비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안씨(安氏)는 동방의 대성(大姓)으로 고려조와 아조(我朝)에 이름이 드러난 지 오래이다. 선조조(宣祖朝)에서 지금까지 3백 년 동안 진안에서 가성(家聲)을 실추함이 없었던 것은 분명히 선조비 때문이다. 선조비의 정절(貞節)과 열행(烈行)은 족히 전대(前代)를 빛나게 하고 후대에게 복록을 내리게 하였으며, 그 잠계(箴戒)와 귀감(龜鑑)은 비록 학문에 밝은 군자라 할 지라도 그보다 더할 수 없고, 구비(口碑, 입으로 전해진 말)는 천재(千載)를 내려와 사실 불후(不朽)할 바가 있으나 묘소에는 비각(碑刻)이 없어 세계(世系)를 고증할 수 없으니 어찌 후손들의 유감이 아닐 수 있겠는가? 이에 묘각을 세우고 그 전말을 기재하기로 상의한 지는 여러 해가 되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삼가 권씨(權氏)의 족보를 상고해 보건대,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태사(太師) 행(幸)이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甄萱)을 평정한 뒤로 공명이 드러났고, 자손이 대대로 명성을 계승하였다. 본조(本朝)에 휘 중화(仲和)가 있는데, 고려의 공민왕 때 문과하여 찬성을 지냈고, 태종 정해년(丁亥年)에 대배(大拜, 정승이 됨)하여 영상에 이르러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지고, 시호로 문절(文節)이 내렸다. 고조의 휘는 침(忱)이니 성균관 생원이요, 증조 휘 즙(緝)은 사간원 사간에서 호조판서에 올랐으며, 조부 휘 계달(繼達)은 병조정랑이요, 고(考) 휘 수강(壽剛)은 사헌부 감찰이다. 선조비는 명문에서 태어나 나이 약간세(若干歲)에 우리 선조고에게 시집왔다. 선조고의 휘는 수홍(守洪)으로 내금위장(內禁衛將)이며, 본관은 죽산(竹山), 죽성군(竹城君) 휘 원형(元衡)의 후예이니, 바로 통훈대부 고성현령(固城縣令) 휘 규(珪)의 아들이다. 조부는 극종(克終)이니 양산군수(梁山郡守)요, 증조는 철손(哲孫)이니 정통(正統) 신유년(辛酉年, 세종 23. 1441) 생원에 합격하여 검열 충청감사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고조는 복초(復初)이니 통정대부 회양부사(淮陽府使)로 증 의정부 좌찬성이다. 임진년의 병란을 당하여 선조고께서는 고성(固城)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적과 싸우다가 화살이 다하여 어찌할 수 없게 되자, 부자가 함께 순절하여 영동에 장사지냈다. 선조비께서는 어린 자녀들을 업고 이끌고 용담(龍潭)으로 들어와 신연(新硯)에 터를 잡고 살면서 자손에게 백세의 큰 기반을 세워주었고, 골안동(骨安洞)에 묘소를 잡아 사후(死後) 만년의 유택(幽宅)으로 삼았다. 성품과 규범은 지금에 와서 몇 가지로 간추릴 수는 없고, 굵직한 것만 가지고 추측할 뿐이다. 희라! 전복된 나무에서도 오히려 새싹이 나거늘, 하물며 선조비의 적덕(積德)과 여행(勵行)의 탁월함에 있어서랴? 대체로 묘각이 지어진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 종인 중에 창옥(昌玉)이 있으니, 일찍 아버지를 여읜 몸으로 효우가 아울러 독실하고 어머니를 모심에 극히 정성스러웠다. 모든 종사에 어려움이 있으면 발벗고 나섰는데, 그가 종회석에서 발의하기를 “우리 선조비의 자손이 호수로는 수백호가 되고 사람으로는 1천인이 넘는데, 묘소 아래에 집 한 채를 못 세운 것은 스스로 부끄럽고 남이 보기에도 부끄러운 일이다.”하였다. 이에 결의를 거쳐 일을 시작하니, 우리 모든 일가들도 돈을 내고 노력을 제공하여 정월 상순에 시작하여 2월 상순에 일을 마쳤다. 오호라! 창옥이 시작을 잘 한 것도 효심(孝心)이고, 여러 일가들이 끝을 잘 맺은 것도 효심이니 우리 집안은 아마도 희망이 있으려나 보다. 이에 금월강(錦月江)의 서일(瑞日)과 구룡동(九龍洞)의 상운(祥雲)이 어울려 집에 비치고, 부귀봉(富貴峰)의 석름(石廩, 창고 모양의 돌을 말함인 듯)과 복두봉(福頭峰)의 덕음(德蔭)이 대청에 보이니, 우리 자손들로 하여금 후한 복을 누리게 함이 북을 치듯 그림자가 비치 듯할 것인즉,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이치를 몰라서는 안될 줄 안다. 이상 간략히 그 전말을 기록하는 바이다. 병자년(丙子年) 봄 10세손 창모(昌謨)가 삼가 기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