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재(永思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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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읍 군하리 356에 있는 진안 이씨 재각. 솟을대문 담장 안에 전면 5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이다. 1886년에 세워졌으나 신설도로로 편입되어 지금의 자리로 이건되었다. 『진안지』에 정종엽(鄭鍾燁)의 기문과 유진찬(兪鎭贊)의 상량문 영사재중건기(永思齋重建記)가 실려 있다. 재각 앞에는 진안 이씨인 이재명 의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永思齋記】 李氏鼻祖直提學諱校 當麗末 遭貶于鎭安 仍居仍籍 而但衣履之藏 逸不傳焉 後孫每相聚而言 馬醫夏畦之魂 無不受子孫追養 况我祖遺德厚蔭 肇開永世無疆之體 而倘闕歲一之祭 豈可免豺獺之猶不知哉 就馬耳之陰蒜峴 封壇植碑 以代佳城之阡 乃公喪之近 而亦後世葬之側也 修歲事 旣又相議 不可無齊潔灌獻之所 一區棟宇 經始克成 顔其扁永思 命記於余 余惟後承之奉祖先 莫如孝思 孝思之善 莫如永永無替也 故詩之永言孝思 寔由是已 况李氏之爲齋 則自公以來 郡守公諱達孫之德業 副正公諱英俊之氣節 己照耀於人 若夫雙尖堂諱仁賢之孝友文章 出處道義 爲世推重 俎豆於儒院 而郡守與雙尖 幽隧俱在玆 思尤在玆矣 晩菴李忠貞公 以彌甥 惓惓于外氏 述以文竪以碑 遺澤餘馨 迨今尙新 余亦外裔中人 欲思晩菴之思 而思不能及 思將爲李氏勉之 念祖修德 孝思永爲維則 而齋與之相終始 思存則齋存 齋存則思存 錫類堂搆 永必俱全哉 東萊鄭鍾燁謹撰
【영사재기】 이씨(李氏)의 시조 직제학 휘 교(校)는 고려 말 진안(鎭安)으로 좌천되었다. 그 후 그대로 눌러 살면서 본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묘소는 잃어버리고 전해지지 않는다. 후손이 모일 때마다 말하기를 “마의(馬醫, 말의 병을 고치는 사람) 하휴(夏畦, 농사짓는 사람. 모두 천역에 종사함을 뜻함)의 귀신도 모두 자손의 추모와 제사를 받는다고 하였다(당대[唐代]의 문장가 유자후[柳子厚]의 글에 있는 말임). 하물며 우리 조상의 두터운 음덕은 영세토록 끝이 없는 체통(體統)을 열어주었는데도 세일제(歲一祭)마저 궐한다면, 어떻게 시랑(豺狼)이나 수달피만도 못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는가?(시랑이나 수달피도 제 조상에 제사를 지낸다는 전설이 있음)”하고, 마이산의 응달쪽인 산현(蒜峴)에 단을 묻고 비를 세워 묘소를 대신하니, 은거지(隱居地)와도 가깝고, 후대의 세장(世葬) 곁이기도 하다. 이윽고 세일제를 지내고 또 상의하기를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재계하고 제사를 올릴 처소가 없을 수 없다.”하고, 한 채의 집을 짓기 시작하여 낙성하고 편액(扁額) 걸기를 영사재(永思齋)라 하면서 나더러 기(記)를 지어달라 부탁하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후손이 조선을 받드는 데에는 효사(孝思)만한 것이 없고, 효사를 잘하는 데에는 길이길이 침체가 없게 하는 것 만한 일이 없다고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시경(詩經)」의 “길이 효사한다(永言孝思)”는 말도 이를 말한 것이다. 더구나 이씨가 이 곳에 재실을 짓는다면, 공 이후로 군수공(郡守公) 휘 달손(達孫)의 덕업(德業)과 부정공(副正公) 휘 영준(英俊)의 기절은 이미 사람들의 귀에 익숙하고, 또 쌍첨당(雙尖堂) 휘 인현(仁賢)의 효우(孝友) 문장(文章)과 출처(出處, 벼슬길에 나섬과 물러남) 도의(道義)는 세상의 추중한 바 되어 서원에 모셔지기까지 하였는데, 군수공과 쌍첨당의 묘소 역시 모두 이 곳에 있고, 효사 역시 이 곳에 있기 마련이니 겸하여 모실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암(晩菴, 이상진[李尙眞]의 호) 이충정공(李忠貞公)은 외손으로, 외가의 일에 정성이 대단하여 글로 기술하고 비를 세워 그 끼친 덕택과 남긴 칭송은 아직도 새롭다. 나 역시 외손되는 사람으로 만암이 생각했던 바를 생각하고자 하나 생각이 미치지 못하니, 이씨를 위하여 권면하는 도리를 생각하고자 한다. 조상을 생각하고 덕을 닦으며 효사(孝思)로 길이 법도를 삼는다면, 재실과 함께 시종을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며, 또 효사가 있으면 재실도 존재하고 재실이 존재하면 효사도 따라서 있게 되는 것이므로 그와 같은 자손이 태어나 계승하여 반드시 길이 보존하게 될 것이다. 동래(東萊) 정종엽(鄭鍾燁)이 삼가 찬하다.

【永思齋上樑文】 述夫 祼薦益勤於霜露時 子姓追慕 齋宿無窘於風雨際 丙舍重成 禮所當然 事有待也 伏惟浪軒先生全公 歡城華閥 莊陵節臣 冠冕繼蟬聯 不墜忠孝之軌範 謨猷貽鷰翼 克紹詩書之箕表 尙忍言哉 泣血淚於癸酉甲戌之禍 惠相好者 許道契於秋江漁溪之流 肆卷志於榮途 爰筮遯于月浪 斷斷葵藿義 暗銷魂於子規詩蜂蛾忱 嘐嘐木石居 自結盟於麋鹿友猿鶴伴 惟玆居士之谷 乃是君子之藏 窀穸占牛眠 地謹避於五患 堂斧若馬鬣 誠尤切於三周 松栢翳陰岡 洋洋乎如見其位 花樹接封域 油油者皆由其心 眷此數晦蜜邇之區 經始百世瞻拜之閣 堂廂聽位 階圯分級 升降周旋之均宜 庫廒依方 廚湢如儀 置藏熟藻之各便 幾運經綸於心上 遽然突兀於眼前 肯構肯堂 善繼述於久久增飾之志 爰居爰處 胥勉勗於煌煌永思之扁 歐公記瀧岡之阡 葬父其里 張老頌獻文之室 聚族於斯 雙虹高擧吉日 六兒齊唱偉歌 兒郞偉抱樑東 莊陵松栢蔚葱葱 子規啼罷人何在 千古丹心一浪翁 抛樑南 江亭春水碧成潭 萬鍾脫屣一身去 生六當年義共參 抛樑西 西山白日影隧低 此心已向葵花側 不厭相看手自携 抛樑北 五雲起處迷消息 兩男雙婦同日殉 碧血化爲紅淚拭 抛樑上 萬笏群山列錦嶂 競秀爭高相揖立 兒孫世世麗無量 抛樑下 芳稌香秬連平野 秋霜旣降供明薦 祖考假思孫受嘏 伏願上樑之後 禎祥漸臻 基礎益鞏 蕭其炳茅其灌 優優禮儀三千芝 之馥蘭之馨 侁侁子孫萬億 所望此耳 勿替引之 丙戌夏下浣 嘉善大夫奎章閣檢校直閣 杞溪兪鎭贊撰
【영사재 상량문】 기술하건대, 관천(祼薦, 강신[降神]과 헌작[獻爵])은 상로(霜露)가 내릴 때 더욱 근간하게 하니, 자손이 추모하고 비바람 불 때 재숙(齋宿)의 군색함이 없게 하려고 병사(丙舍, 묘막[墓幕])를 중수하였다. 이것은 예로는 당연하고, 일은 때를 기다린 듯하다. 생각건대, 낭헌 선생(浪軒先生) 전공(全公)은 환성(歡城, 천안[天安]의 고호)의 화벌(華閥)이요, 장릉(莊陵, 단종 릉소)의 절신(節臣)이다. 관면(冠冕)이 대대로 이어지니 충효의 궤범(軌範)을 실추하지 않았고, 모유(謨猷, 큰 계책)를 연익(鷰翼, 감싸준다는 뜻인데 자손의 뜻으로 쓰였음)에 끼쳐주니 능히 시서(詩書)의 가업(家業)을 이었다. 차마 말하겠는가? 혈루(血淚)는 계유(癸酉) 갑술(甲戌, 단종이 찬탈당한 연대)의 화에 뿌렸고 좋아하는 이 도왔으니, 도교를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호) 어계(漁溪의, 조려[趙旅]의 호)의 부류와 맺었다. 이에 영도(榮途)에서 뜻을 거두고 월랑(月浪)으로 은둔하였는데, 정일(貞一)한 규곽(葵藿)*의 충의는 은연중 자규시(子規詩, 단종의 자규시가 있음) 봉아침(蜂蛾忱, 벌과 개미의 지성스러움)에 넋이 녹아났고, 자대(自大)한 듯 목석(木石)처럼 살면서 스스로 미록우(麋鹿友) 원학반(猿鶴伴)과 결맹(結盟)을 하였다. 이곳 거사곡(居士谷)은 군자의 무덤인데, 묘소는 우면(牛眠, 소가 누워 있는 모양의 자리)을 점하여 땅은 오환(五患)에 더욱 간절하다. 송백(松栢)은 산등성이를 가려 양양(洋洋)하게 운감하는 영위(靈位)를 보는 듯하고 화수(花樹, 자손)는 묘역을 대함에 유유(油油, 성하게 일어나는 모양)함이 모두 마음에서부터 일어난다. 이 몇 발자국 아주 가까운 곳에 백세토록 첨배(瞻拜)할 묘각을 지었는데, 당랑(堂廊)은 자리에 맞고 섬돌은 계단으로 나누어 승강(升降)하고 주선(周旋)하기에 적당하게 하였고, 창고는 방위에 맞고 주방은 법식대로 하여 생숙(生熟)을 저장하는데 편리하게 하였다. 몇 번이나 마음 속으로 계획을 세웠는지 갑자기 눈앞에 높다랗게 다가섰다. 긍구 긍당(肯構肯堂)*은 오래오래 증수(增修)하는 뜻을 잘 계술하였고, 원거 원처(爰居爰處)*하니 빛나는 영사(永思)의 편액(扁額)을 보며 서로 면려한다. 구공(歐公)은 용강천표(瀧岡阡表)*를 짓고 그 마을에 아버지를 장사하였고, 장로(張老, 미상)는 헌문실(獻文室)을 칭송하고 그 일가를 이 곳에 모았다. 쌍홍(雙虹)이 높이 길일(吉日)을 아뢰니 육아(六兒)*는 일제히 위가(偉歌)를 노래한다. “아랑위(兒郞偉) 동쪽 들보 올리니 / 장릉(莊陵)의 송백(松栢)이 울창하고 푸르네. / 자귀(子規)는 울음 그쳤는데 사람은 어디 있는가 / 천고(千古)의 단심(丹心)은 낭옹(浪翁) 하나일세. / 아랑위 남쪽 들보 올리니 / 강담(江潭)의 봄, 물은 푸르러 못을 이뤘네. / 만종록(萬鍾祿) 헌 신짝처럼 버리고 떠나가니 / 당년의 절의 생육신(生六臣)과 다를 바 없다네. / 아랑위 서쪽 들보 올리니 / 서산(西山)의 해는 그림자 따라서 낮아지네. / 이 마음 벌써 해바라기 곁에 가 있나니 / 보기에도 싫지 않아 손으로 당겨보네. / 아랑위 북쪽 들보 올리니 / 오운(五雲)*이 일어난 곳에 소식이 끊겼구려. / 두 아들 두 며느리 같은 날 순절하니 / 검푸른 피 변화하여 붉은 눈물 되었네. / 아랑위 위쪽 들보 올리니 / 만홀(萬笏)의 뭇 산들 금장(錦嶂)을 펼쳤네. / 빼어남 다투고 높이 겨루며 마주보고 섰으니 / 자손들 대대로 그 수가 한량없겠구려. / 아랑위 아랫쪽 들보 올리니 / 꽃다운 메벼 향긋한 기장 들판에 연했네. / 상로(霜露) 내리자 조촐한 제사 올리니 / 조상의 원대한 배려로 자손들 복을 받네.” 엎드려 바라옵건대, 들보를 올린 뒤에는 경상(慶祥)은 점차 이르고 기초는 더욱 공고해지며 폐백(幣帛)은 빛나고, 모사(茅沙) 적셔져 넉넉한 예의는 두루 갖추어지고, 지초 향기롭고 난초 향긋하여 너절한 자손 한없이 많게 하소서. 소망은 이것뿐이오니 침체 없이 이어지게 하소서. 병술(丙戌, 1886) 하월(夏月) 하완(下浣, 하순) 가선대부(嘉善大夫) 규장각검교직각(奎章閣檢校直閣) 기계(杞溪) 유진찬(兪鎭贊)이 찬하다.
*규곽(葵藿) : 해바라기는 언제나 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기에 향일규[向日葵]라고 하며,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는 일편단심에 비유되어 왔다.
*오환(五患) : 묘자리에 해를 끼치는 다섯 가지. 즉 풍[風]․수[水]․습[濕]․조[燥]․우양[牛羊])을 피하였고, 봉축은 마렵(馬鬣, 말의 갈기)과 같아서 정성은 삼주(三周, 봉축의 주위를 세 번 두른다는 뜻.
*긍구 긍당(肯構肯堂) : 아버지가 일으킨 일을 아들이 계승하여 마저 이룬다는 뜻. 若考作室 旣底法 厥子 乃弗肯堂 矧肯構. [書經, 大誥])
*원거 원처(爰居爰處) : 여기에서 기거(起居)하고 여기에서 거처(居處)하다
*용강천표(瀧岡阡表) : 송나라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구양수(歐陽修)가 자기 아버지를 용강(瀧江)에다 장사지내고 세운 묘표(墓表)의 글을 말함.
*육아(六兒) : 들보를 올릴 때 힘을 함께 쓰기 위하여 내는 구령(口令). 아랑위(兒郞偉)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우리의 어영차와 비슷한 사례이다 동서남북 상하(東西南北上下)로 올리기 때문에 육위가(六偉歌)라고도 한다.
*오운(五雲) : 오색의 구름. 자미성(紫微星)이 있는 곳은 오색의 구름이 감싸고 있기 때문에 생긴 말인데 임금은 자미성에 비유하여 쓰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