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안읍 향교길 13-6[군상리 527-1]에 있는 향교. 1414년(태종 14)에 지금의 진안읍 상조곡(上鳥谷)[웃새골]에 처음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1년(선조 34)에 중건되었다. 1636년(인조 14)에 이건하였는데 “향교가 관아와 인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불편했기 때문”이라 하기도 하고, “향교를 중건한 뒤 춘추향제(春秋享祭)가 끝나면 이상하게 그날 밤 호랑이가 교복(校僕, 향교의 하인)을 물어갔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나타난다. 1633년 11월 16일조에 전라감사의 치계에 의하면 “진안 고을의 향교가 관아와 멀고 관리하는 하인의 수가 적어 제대로 수호하지 못하고 있는데다 지대가 낮고 습하여 건물이 썩고 있으니 좀 더 인가에 가까우면서 넓고 트인 곳으로 옮겨 세우도록 허락하여 달라”는 기록이 있다. 향교를 이건하기로 결정하고 1636년에 향리의 유림들이 헌금을 모아 논 3,000평을 마련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1921년과 1969년에 중수하였다. 명륜당(明倫堂)의 구체적인 건립 시기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931년 11월 1일 군수 주시헌의 ‘명륜당 중수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중수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명륜당은 본디 지방의 관립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한때 현 진안초등학교의 전신인 ‘진안 사립 문명학교’(←)의 학당으로 사용된 바 있다.【형태】일반적으로 향교의 배치는 배향공간과 강학공간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크게 둘로 나누어지고, 이 밖에 일부 변형된 방법도 쓰이고 있다. 향교가 자리 잡은 대지가 평지인 경우는 전면에 배향공간이 오고 후면에 강학공간이 가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배치를 이룬다. 반면 대지가 구릉을 낀 경사진 터이면 높은 뒤쪽에 배향공간을 두고 전면 낮은 터에 강학공간을 두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이룬다. 진안향교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취하고 있다. 앞쪽에 학교의 역할을 하는 명륜당이 있고 중간에 동재와 서재가, 뒤쪽에 내삼문을 거쳐 제향공간인 대성전이 배치되었다. 전체 공간은 명륜당·동재·서재로 이루어진 교육공간과 대성전을 둘러싼 담장으로 이루어진 제향공간으로 나누어지며 동쪽에는 별채로 향안당이 있다.【대성전】⇒진안향교 대성전.【명륜당(明倫堂)】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위치하는데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구체적인 건립시기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1931년 11월 1일 군수 주시헌(朱時憲)의 명륜당 중수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중수를 거쳤음을 알 수 있다. 명륜당은 본디 지방의 관립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한 때는 현 진안초등학교 전신인 사립 진안문명학교의 학당으로 사용된 바 있다.【동재(東齋)·서재(西齋)】동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며, 서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향안당(鄕案堂, 사마재)】향안을 보관하던 곳인데, 사마재와 같은 건물에 있다. 사마재는 1757년(영조 33) 김중구(金重龜)가 성균관에 오른 뒤에 낙향하여 사재를 털어 이곳에 재(齋)를 짓고 연방안(蓮榜案,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의 명부)을 보관하였다. 진안현의 향안은 관아의 남쪽 가까이 향사당에 갈무리되어 있었으나, 향사당이 퇴락하여 보관할 처소가 없게 되자 1860년(철종11) 향교 경내의 사마재로 옮기게 되었고, 그 뒤 47년이 되는 1907년(순종 1) 사마재가 무너지자, 영계원(靈溪院. →영계서원)의 강사(講舍)로 옮기게 되었는데, 집강(執綱) 이근조(李根兆)와 장의(掌議) 전영창(全永昌)이 주관하였다. 그러다가 향안당을 창설하자는 논의와 사마재를 중건하자는 논의가 일어 1927년 가을에 고을의 연조(捐助)와 향교 재산의 보조를 얻어 착공, 사마재의 옛터에 집을 짓고 동쪽 방은 향안당이라 이름하고, 서쪽 방은 사마재라 하여 1928년 늦은 봄에 완공하였고, 1942년 중수하였다. 향안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제를 지낸다.《참고문헌》鎭安鄕校誌(진안문화원, 진안향교, 2009)
    진안향교 대성전(鎭安鄕校大成殿) : 진안읍 군상리 527-1번지에 있는 향교의 주 건물. 1984년 4월 1일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대성전은 내삼문 안에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전면 1칸을 개방한 전퇴·개방형 구조이다. 3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화강암의 자연석 덤벙 주초를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 다음 창방과 결구하고 있다. 기둥 상부는 일출목 이익공 양식으로 창방과 장혀 사이에는 화반을 끼워 장식하였다.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지붕 양식이고 측면은 풍판으로 장식되어 있다. 1632년에 건립되었으며, 이후 기단과 내부 마루를 보수한 것을 빼고는 본디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간단한 구조에 비해 규모가 상당히 크며 구조물의 조각 장식이 거의 없어 매우 단조로운 편이다. 대성전 안에는 1734(영조 10)년에 제작된 공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곳에는 공자를 비롯한 안회(顔回)·증삼(曾參)·자사(子思)·맹자(孟子) 등 오성(五聖),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주희(朱熹) 등 송대(宋代)의 사현(四賢),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안유(安裕), 정몽주(鄭夢周),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이이(李珥), 성혼(成渾), 김장생(金長生), 조헌(趙憲),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박세채(朴世采) 등 우리나라 18현(十八賢) 등 모두 27위를 배향하고 있다.《참고문헌》鎭安鄕校誌(진안문화원, 진안향교,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