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량리 하양지 마을 어귀에 있으며 성씨 부자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성석태(1799~1862)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친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며 부친을 보살폈으며 그 후 부친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성묘 할 때 무릎을 꿇었던 자리에는 지금도 풀이 나지 않고 그 형태가 남아있다고 한다. 1886년 (고종 23)조정에서 정려를 내렸으며 사헌부감찰에 추증되었다. 성필원(1830~1889)은 성석태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효행을 따라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부친이 병들자 손수 약을 달여 드렸다. 성필원은 부친이 돌아가심에 3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그때 개가 항상 그의 길을 인도하였다 한다. 1886년 아버지와 함께 조정에서 정려가 내렸으며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효자성공석태자필원양세정려기(孝子成公錫泰子弼源兩世旌閭記)이 『진안지』에 실려 있는데 <별책부록-1(기문·묘갈문·비문)>에 표제항목으로 실려 있다.《참고문헌》鎭安誌(진안문화원, 2000)
  • 정천면 갈룡리 갈거마을 어귀에 있는 효자 정려. 1884년 정려가 내려진 후 정려각이 건립되었으며 1990년경에 중수되었다. 여각은 전면 1칸(200㎝) 측면 1칸(170㎝) 맞배지붕의 콘크리트 기와집으로 페인트로 단청이 되어 있으며, 그 안의 허공 중간에 ‘孝子 贈 通訓大夫 司憲府監察 密陽孫東賢之閭’라 새겨진 편액이 걸려 있다. 손동현의 고조부는 손만화(孫萬和), 증조부는 손택도(孫宅道), 조부는 손석두(孫錫斗), 부친은 손용서(孫龍瑞)이다. 정천면 갈룡리에서 태어났다. 1884년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증직(贈職)되고 정려가 내려졌다.《참고문헌》鎭安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89)
  • 백운면 노촌리 671번지에 있는 효자각. 임진왜란 때 병든 아버지를 왜적의 손에서 지켜낸 신의련(愼義連, 1546~1606)의 효행을 포창하여 선조 때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증직하고 정려를 내렸다. 당시에 세워진 정려비는 현존하지는 않는다. 현재의 효자각은 1801년(순조 1)에 세워진 것이지만 중수의 내력은 전하지 않고 있다. 노촌리 평장초등학교(폐교)에서 천변길을 따라 동쪽으로 750m 거리의 길 왼쪽에 있다. 효자각 바로 옆에는 미계 신선생의련 유적비(→신의련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효자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담장을 둘러 보호하고 있다. 효자각의 사면에는 홍살을 둘렀다. 효자각 안에 비석은 없으며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의 상단에는 ‘증수의부위 효자 신의련지려(贈修義副尉孝子愼義連之閭)’라 쓴 아래에 신의련의 사적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1801년 4월 당시 좌의정 심환지(沈煥之)가 글을 지었으며, 전 사헌부 지평 황기천(黃基天)이 글을 썼다.《참고문헌》鎭安地方文化財地表調査報告書(전북대학교전라문화연구소, 1989)